자정이 넘은 시간. 택운은 몸이 바닥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높아 보이는 천장과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한 가슴. 공연 전 먹은 점심 뒤로 아무것도 입에 댄 음식이 없는데 체한 마냥 토기가 밀려온다. 이 세상의 모든 시계가 제 귓가에서 시침을 똑딱이는 기분. 이보다도 깊은 수렁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고통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자신은 편안히 누워있건만, 어째서 고통을 느끼는지 택운은 오랜 시간 고민해야했다.
어린 마음에 학연이 불행하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자신과 같이 평생 불행하도록.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얹은 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택운은 학연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만큼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그러나 10년 만에 재회한 학연의 옆에 택운이 아닌 누군가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더 이상 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택운은 후회했다. 어떻게든 학연에게 자신이 학연을 완벽하게 잊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결국 마음은 끝까지 숨기지 못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사랑을 주는 학연은 감히 멋대로 머릿속에 그릴 수 없었고 제대로 표현은 하지 못하면서 이기적인 욕심만 앞세우는 제 자신이 한심했다.
사랑 앞에 있어 자존심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그를 완전히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택운은 학연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의 표현은 차마 꺼낼 수 없었고 둘을 둘러싼 1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단단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택운은 더 이상 물불가리지 않던 10년 전의 소년이 아니었다. 사랑을 되찾기에 앞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재고, 따지고 있었다.
“형.”
“……”
“죽은 거 아님 일어나요. 깜짝 놀랐네.”
연습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갑자기 불이 환하게 켜진다. 익숙하게 들려오는 재환의 목소리. 먼저 퇴근하라고 말 해뒀는데 호텔로 돌아오지 않는 택운이 걱정되어 에이전시를 찾은 것임이 분명하였다. 밝아지는 시야에 택운이 손으로 눈을 가리자 재환의 땅이 꺼질 듯한 한숨소리와 함께 그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재환은 택운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택운은 유독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감정 변화가 심하고 무뚝뚝한 편이었다. 물론 섬세한 감성을 요구하는 예술가인 만큼 까다로운 그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인 면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재환이 보기에 그는 사랑에 있어서 얼간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얼마나 학연을 사랑하는지 곁에 있는 재환도 느낄 수 있는 정도인데, 그는 그것을 인정하는데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앞으로 이 남자가 학연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얼마나의 시간이 허비될 지 재환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앞으로 한국에 있어야 할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별 다른 공연 일정은 잡혀있지 않다. 스케줄이라고는 학연과 얼굴을 부딪쳐야 하는 인터뷰가 전부인데 저 남자는 남은 시간을 너무나도 흘러가는 물처럼 보내고 있다.
“인터뷰 한 거 아니죠?”
“……”
“형이 공연 끝나고 바로 저한테 상의도 없이 일정을 잡을 리가 없잖아요. 학연씨 쪽 회사랑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
“형 또 무슨 사고 쳤어요?”
별 다른 말없이 누워있는 택운의 모습에 재환은 혀를 끌끌 찼다. 이 남자는 자신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틀을 만든다. 그리고 그 틀 안으로 자신이 아닌 타인과는 일정량의 거리를 만들었다. 더 이상 자신의 속내는 보여주지 않을 정도로. 재환은 자주 그 틀을 깨고 택운의 안으로 들어섰다. 유일하게 택운의 틀을 깨려 노력하는 사람이자 택운이 받아들이는 사람. 하지만 그러한 재환 역시 도저히 택운의 사랑하는 방법만큼은 용인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학연에게 진심은 전해주지 못하고 출국하게 될 것임이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택운에게는 길면서도 굉장히 짧은 기간이 될 수 있었다.
“어. 사고 쳤어.”
“무슨 사고요.”
“말 못해. 쪽팔려서.”
“학연씨한테 안 좋은 소리 했어요?”
“……”
“답이 없네요, 형은.”
평소 같았으면 그가 발끈하며 재환에게 한 소리를 했어야 하는데 오늘은 그저 가벼운 헛웃음뿐이다. 마음 같아서는 택운에게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을 온 몸에 부어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주고 싶다. 아무리 그가 10년 전 택운을 버리고 떠난 첫사랑이라 할지라도,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택운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여전히 학연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마 택운에게는 이번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연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이번에 출국하면 또 언제 한국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인데.
택운은 사실 재환이 얼마나 자신을 걱정해주고 진심으로 생각해주는지 알고 있었다. 택운을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 옆에서 지켜봐온 사람이고, 택운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택운 역시 재환의 말을 귀담아 듣는 편이기도 했고 어지간해선 재환을 따르기도 했지만 아마 이런 상황에서 재환이 제게 해줄 말들을 대충 알기에 택운은 그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형. 지금 되게 한심해 보이는 거 알아요?”
“내가 너한테까지 그런 말을 들어야 되냐.”
“네. 지금은 좀 들어야 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도 모르겠어.”
“아니, 대체 뭘 그렇게 고민해요? 그냥 가서 말해요. 난 아직도 너 사랑하고 있다,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뭐 그렇게..”
“난 너한테 아직도 차학연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재환은 택운을 따라 옆에 누웠다. 택운은 한심하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어쩌면 택운이 조금만 더 많은 사랑을 해봤더라면 이렇게까지 사랑에 있어 서툴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조금 해본다.
“말 안 해도 다 알아요. 꼭 말로 해야 사랑이에요?”
“네가 나보다 낫다.”
“당연한 소리를 해요. 누구든 형보단 나을 거 에요.”
“그래도 차학연이랑 나는 그런 단순한 관계가 아니야. 말 한 마디로 되돌아갈 수 있는 단계도 이미 지났고.”
“그럴수록 더 단순해져야한다 구요. 그럼 언제까지 복잡하게 대할 생각인데요.”
조금만 제게 용기가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조금만 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달랐더라면. 헛된 욕심은 늘어가고 시간은 흐른다. 택운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습관적으로 타이레놀을 찾았다.
“나는 형한테 이래라저래라 못 해요.”
“……”
“곧 인터뷰 날짜 잡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최대한 매정하게 말했지만 재환은 연습실을 나서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택운은 그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평소같이 진통제를 먹고 있었다. 사실 택운의 스케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팩스로 보낸 답변 지를 토대로 2주치 인터뷰 분량을 학연이 겨우 뽑아내었을 것이라는 것은 학연 측에서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재환이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Luve쪽에게 신세진 일이 많아 하루라도 빨리 일정을 잡아야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택운은 저렇게 학연과 부딪히기만 한다. 재환의 입장으로선 굉장히 답답한 일이었고 안타까웠지만 그가 어떤 분야에서건 프로페셔널하기를 원한다면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야 할 텐데. 물론 택운은 충분한 프로였다. 무엇보다도 프로페셔널 함을 앞세울 만큼 프라이드가 강했던. 학연이 개입됨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지만. 아마 택운은 오늘 호텔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재환은 에이전시의 문을 잠그지 않고 먼저 호텔로 향했다.
§
학연은 가벼운 몸살을 앓았다. 환절기마다 종종 아프기는 했지만 드러누웠던 적은 없었기에 전속을 맡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굉장히 자신의 일에 치명적일 수 있는 타격을 주었다. 다행인 점은 자신의 대타인 상혁이 있는 사무실에 굳이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간간히 걸려오는 홍빈의 안부전화에 학연은 아프다는 사실은 끝까지 내색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참 바쁠 시기에 아픈 손가락이 늘어봐야 팀장인 홍빈만 이래저래 골치가 썩을 뿐이다. 달력에 표시 된 마감일은 당장 모레였다. 학연은 자신의 집에 쌓여있는 질문지들과 몇 번이고 퇴고를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날려버린 칼럼 원고들을 떠올렸다. 10년만의 내한하여 한국에서의 리사이틀을 열게 된 피아니스트 정택운을 주로 다룬 칼럼은 학연의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다. 거기에 몸 상태까지 말이 아니라니. 진정한 프로라면 컨디션 조절쯤이야 신경 써 주는 사람 없이도 완벽하게 해내야한다. 여기서 끙끙거렸다간 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였다.
택운과의 정식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 3주 차례 인터뷰 이니 만큼 본격적으로 택운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질문해야 했다. 질문지를 선별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싶어도 자신도 모르게 질문지를 만들다 보면 정신을 놓은 채 타자를 치고 있기 십상이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학연은 자신이 택운의 전속을 담당한 것을 후회했다. 사적인 사람과 공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애초부터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을지도. 인터뷰 전에 당장 칼럼 원고를 사무실로 보내야했다.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최대한 원고에만 집중해 타자를 두드리려 해도 학연은 문득 떠오르는 택운과의 키스에 이내 노트북 앞으로 엎어지고 만다.
그렇게 택운의 연습실을 나와 원식을 불러 원식이 운전하는 자신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었다. 원식은 별 다른 말없이 학연에게 딸기 주스를 만들어 주었고 학연 역시 그것을 받아 마셨다. 특별한 사과나 변명은 오가지 않았다. 원식과 학연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마음을 대강 읽어낼 수 있는 사이였다. 학연은 지금쯤 원식이 자신에게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을지 알았다. 그리고 원식이 택운에게 자신을 애인으로 소개한 것에 대해 원식을 탓하지 않았다. 원식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학연이 더 이상 택운에게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원식의 마음을 학연이 모를 리가 없었다. 원식보다는 택운에게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충분히 학연에게 무례했다.
“정신없나 봐요. 집을 왜 이렇게 안 치우고 있어.”
“이렇게 있음 누가 와서 나 대신 치워 줄 거라는 거 아니까.”
하도 아무런 생각 없이 엎드려 있어서 원식이 온 줄도 몰랐다. 원식은 학연이 아프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약봉지와 유명 체인점의 죽이 담긴 쇼핑백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학연의 집을 청소했다. 무엇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는 아마 집 주인인 학연보다도 원식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학연은 원식이 청소를 하는 내내 그 소란 속에서도 꿋꿋이 원고를 작성해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온점을 찍었을 때 저장 버튼을 누른 뒤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 사람은 형이 이러고 사는 거 알기나 해요?”
“왜? 내가 사는 게 뭐 어때서.”
“좀 둘러보고나 얘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학연은 그제야 깨닫는다. 자신이 원고를 마무리할 때 까지 원식이 내내 청소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학연이 멋쩍게 웃자 원식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뭘 제대로 해먹지도 않는 지 식재료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원식이 꼼꼼히 학연을 신경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학연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모습은 원식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끼니라도 좀 챙겨야 할 텐데. 학연은 살면서 두 가지 밖에 관심이 없다. 자신의 일과 택운. 하지만 일과 택운이 섞여버리자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그 관심을 학연 스스로에게 조금만 쏟아도 좋을 텐데.
원식은 죽을 데워 상을 차리고 학연을 불렀다. 원고를 드디어 마쳤다며 메일로 보냈다는 학연이 꽤나 홀가분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의미 없는 숟가락질을 하고 있다. 저렇게 먹으면 자신이 지금 무엇을 먹는지도 모를 것 같은데. 학연의 그릇 위에 반찬들을 올려주자 그가 작게 웃는다. 원식은 학연의 식사를 챙겨주고 금세 외투를 챙겨 입었다. 벌써 가게? 학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학연은 더 이상 원식을 잡지 않는다. 학연은 이렇게 자신의 집을 청소해주고 학연과 함께 식사를 한 뒤 나서는 원식이 익숙했다. 마치 그렇게 학연을 곁에서 챙겨주기 위해 처음부터 존재했던 사람처럼.
원식은 차를 몰고 어딘가로 향했다. 학연의 집과 그다지 멀지 않은 택운의 에이전시. 학연을 데리러 왔을 때 미리 봐두었던 장소. 홍빈에게 택운은 스케줄이 없을 때면 자신의 에이전시에 있는 연습실에 틀어박혀 연습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곳에 가면 택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 번쯤은 택운을 꼭 따로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원식은 택운의 본심이 가장 궁금했다. 학연이 지난 10년 간 줄곧 사랑해왔던 장본인. 어쩌면 원식은 은연중에 그를 내심 부러워했을 지도 몰랐다. 자신이 8년이나 짝사랑한 학연이 추억에 매달린 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니.
에이전시 앞에 도착해 신원을 확인하는 재환에게 택운을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재환은 영 못미더운 시선을 보내왔다. 이내 원식이 학연의 지인임을 밝히자 재환은 원식을 택운이 있는 연습실로 안내했다. 연습실 안에서 택운이 연주하는 듯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원식은 이내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택운은 연주를 하고 있었고 길었던 곡이 끝나자 택운은 피아노 앞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실 생각을 다 하셨네요.”
“제가 안 오면 택운씨를 만나지 못 할 것 같아서요.”
“……”
“저는 택운씨를 알지만, 택운씨는 저를 알지 못하잖아요.”
잠시 뜸을 들이던 택운은 이내 원식을 학연과의 인터뷰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테이블로 안내했다. 어떠한 이유로 원식이 자신을 찾았는지 알지 못했기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류가 둘 사이에 흘렀고 택운은 습관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김원식이라고 합니다. 학연이 형이랑 알고 지낸지 8년 정도 됐구요.”
“우리가 서로 소개할 사이인가요?”
“제가 학연이 형 애인이 아니라는 걸 알려드리려면 필요하죠.”
순간 건반을 두드리듯 테이블 위를 두드리던 택운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리고 원식을 향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학연이 형이랑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제가 일방적으로 8년 동안 짝사랑하고 있거든요, 학연이 형.”
“……”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 때문에, 나는 8년 간 늘 학연이 형 뒤에 있었어요.”
“……”
“학연이 형이 그쪽을 사랑해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사람한테 흔들린 적 없이.”
택운은 잠시 눈앞의 원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식의 말투가 단호했다. 굳이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택운은 원식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학연이는 10년 전에 저를 버리고 떠났어요.”
“……”
“눈 떠보니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인데 학연이가 저를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돼요.”
“……”
“그쪽이 학연이 타입이 아니어서 안 만나줄 수도 있어요. 너무 내 탓으로 돌리지 말아요.”
어찌 되었든 원식은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니 차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에 택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트에 물을 올리고 잔 두 개를 꺼내 믹스커피를 뜯어 넣었다.
“택운씨는 눈에 보이는 면만 보려고 하시네요.”
“……”
“왜 학연이 형이 택운씨를 떠났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으셨나 봐요?”
“내가 그걸 꼭 알아야 합니까?”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이유였다. 학연이 자신을 떠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학연은 자신을 떠났고, 택운은 학연을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었다. 학연이 다니던 학교에 물어물어 학연의 고향을 찾아갔지만 학연의 부모님은 특별한 대답을 회피하셨고 학연이 이미 미국으로 출국해버렸다는 소식까지 접한 뒤에야 택운은 학연이 자신을 온전히 떠났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 학연에게 자신을 떠난 이유를 겨우 며칠 전 물었었다. 하지만 학연은 대답해주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을 떠났다.
“택운씨는 알 필요가 있어요.”
“……”
“왜 학연이 형이 택운씨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택운씨는 꼭 알아야 할 겁니다.”
‘떠났다’ 와 ‘떠날 수밖에’ 의 어감은 너무나 달랐다. 학연이 자신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솔직히 정택운씨가 원망스럽습니다. 그쪽만 아니었으면 제가 학연이 형 애인이 될 수도 있었겠죠.”
“잠시 만요. 차학연이 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곤란하죠. 전 오늘 제가 학연이 형과 아무 사이 아니라는 것만 알려드리려고 온 겁니다.”
“……”
“택운씨랑 오래 보고 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카페 하는 사람이라 믹스커피는 안 마셔요. 원식이 자리에서 일어서 연습실을 떠나고, 택운은 멍하니 끓고 있는 포트를 바라보았다.
*
이미 타 카페에서 완결 난 글을 가져다 쓰려니 민망하네요 ㅎㅅ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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