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중궁궐 08
w. Cecilia
1
태형은 진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진이 왕실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도 하거니와, 남자가 봐도 혹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니 꼭 자신이 계집이 된 것 같아 볼 수가 없었다. 진은 이런 태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뒷짐을 진 채 태형 옆에 가만히 서있다. 태형은 그런 진을 곁눈질로 흘끔 흘끔 쳐다보았다. 앞서 간 나비를 따라 가야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자기 자리를 뜰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름이 무언가?"
"태..아니 운화라고 하옵니다."
하마터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할 뻔 하였다.
"운화라.. 구름꽃이라는 뜻이구나. 굉장히 아름다운 이름이야."
"감사하옵니다."
"혹 내가 지금 네 옆에 있는 것이 불편하느냐?"
속으로는 그렇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가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 이를 말할 수가 있을까. 더욱이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사람에게..
"아닙니다. 계속 지난번 일이 생각나 송구하여 그럽니다."
"정말 괜찮다 하지 않느냐. 아 그리고 이 비녀는 선물이다."
진은 태형에게 아까 그 금비녀를 내밀었다. 태형은 손을 뒤로 한 채 비녀를 받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진은 웃으며 태형의 한 쪽 손을 당기더니 손을 펴고는 그 위에 비녀를 살포시 올려놓았다.
"응원의 선물이다."
이 말만 던져놓고는 진은 유유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살다살다 사내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 있구나.. 태형은 손 안에 쥐어진 비녀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하는 것인가.. 잊고 있던 심부름이 생각나자 태형은 급히 비녀를 주머니에 넣고는 시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치마를 돌돌말아 허리춤에 쥐고는.. 진은 길을 걷다 뒤를 돌아 그런 태형의 모습을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는다.
2
태형은 기방으로 돌아와 아까 선물받은 비녀를 꺼내놓았다. 아까 시장에서 보던 것보다 더 반짝이고 아름다웠다.
"여인들이 좋아할만 하구나 너!"
태형은 비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감탄했다. 창가 사이로 비추는 달빛에 반사되는 모양새가 더욱이 고고하였다. 오늘은 기방 전체가 조용하다. 항상 큰 잔치가 있는 다음 날이면, 일하는 꼬마아이들부터 기생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에서 휴식을 갖는다. 오랫만의 평화다. 태형은 창호지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는다. 꼭 달의 노래가 들리는 듯 했다.
3
"정국님 이 밤에 어디를 나가시는겁니까?"
익숙한 지민의 닦달이다.
"바람! 바람 좀 쐬고싶다!"
"바로 요 앞에서 산책을 하셔도 될터인데.. 게다가 그 요상한 차림은 도대체..."
지민은 정국의 옷 차림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점점 정국님이 이상해진다. 어렸을 때는 그래도 착하고 얌전하셨는데, 이젠 순수한 정국의 표정마저 의뭉스러워보이는 지민이다.
"걱정말래도. 진 형과 함께할 것이니, 한시름 놓아도 된다. 너도 나는 못미더워하되 진형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믿지 않느냐?"
또다. 항상 정국은 자신이 불리할 때에는 진을 들먹이고는 했다. 그만큼 모두는 진을 신뢰했으니까. 정국은 지민의 손을 뿌리치고 무작정 궐 밖을 나섰다. 상쾌한 밤 공기가 어느덧 익숙해졌다. 낮에는 조용히 궐 안에서 숨죽이고 있는다. 이따금 어머니의 부름이 있기에 정국은 항상 최대한 안정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아까 높게 환하게 떠있던 달이 어느새 구름에 드리웠다. 정국은 주머니에서 기다란 검은 천을 꺼내었다. 그리고 얼굴을 한 바퀴 돌렸다. 곱상한 정국의 얼굴이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천에 가리웠지만 코 끝에 느껴지는 밤공기의 감촉은 살아있었다. 왠일로 오늘은 정국 혼자 밤길을 거닌다. 항상 옆을 지키던 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진을 따르는 무리들도 나오지 않았다. 정국은 조용히 밤길을 걷는다. 저벅저벅 들려오는 자신의 발소리에 귀기울인다.
얼만큼 걸었을까. 정국은 어떤 집 대문에 다다랐다. 제법 커다란 대문이다. 키가 큰 편이었지만 까치발을 들어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였다. 그러나 정국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저 빤히 대문 틈 사이 안의 동태를 살필 뿐이었다. 한참을 그러다 정국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4
"아 얼만큼 잔거야."
태형은 불편한 자세로 오랜 시간 잠에 들었는지 목이 뻐근하였다. 목을 홱 돌리니 뼈 소리가 우드득 났다. 그 때였다. 밖에서 태형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운화야! 아까부터 자는 것이냐? 어서 나와보거라."
"지금 나갑니다."
태형은 대충 옷을 챙겨입고는 방에서 나간다. 하마터면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뻔 하였으나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아직도 칠칠치 못하게... 쯧.."
기방 주인은 태형이 탐탁치 않은 듯 했다. 주인은 태형에게 보따리 하나를 건네었다.
"심부름이다. 나비는 지금 부엌일을 돕느라 바쁘니 네가 다녀와야할 것 같구나. 호랑 아비 집 건너편에 있는 효진 대감댁에 다녀오면 될 것이다. 이것만 전해주고 오면 된다. 내 너를 보낸다 하였으니 아마 거기서 알아서 할 것이야. 서둘러 다녀오느라."
더 쉬고 싶었는데, 심부름이라니.. 태형은 툴툴대며 보따리를 집어든다. 그냥 빨리 다녀오리라 마음 먹었다. 다행히 달밤이 어두운 탓인지 길거리에는 개미 한마리 없었다. 태형은 치마를 둘둘 말아 올려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휙휙 소리가 귀에 울리고 뺨에 스치는 따스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태형은 달리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환호를 지른다.
"참 기분 좋구나!!!"
효진 대감집 앞에 눈깜짝할 새에 도착하였다. 태형은 바람에 흩날린 머리를 다듬고 옷 매무새를 점검하였다. 그리고 얌전히 문을 두드렸다.
"전해드릴 물건이 있어 왔습니다."
문을 열어 준 자는 그 곳 머슴인 듯 했다. 거의 헐벗고 있다싶이 한 그 사내는 태형을 위 아래로 쳐다보더니 들어오라 손짓한다. 태형은 조심스레 집 안에 들어간다. 아직 늦은 밤은 아니었지만 집 안은 굉장히 조용했다. 태형은 마당 한 가운데에 조용히 보따리를 안은 채 서있었다. 머슴은 온데간데 없고 쥐죽은듯한 고요 안에 태형은 서있었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태형은 슬슬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는지 어디 걸터 앉고 싶었다.
"어디 앉아 있을 데가..."
마당 근처 창고 앞에 커다란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에 잠깐이라도 엉덩이를 붙여 앉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돌 위에 살짝 앉으려 하는 순간, 창고 안에서 쿠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태형은 화들짝 놀라서 보따리를 떨어뜨렸다. 고요한 집인지라 그 소리가 마당 전체를 울렸다. 태형은 살짝 열린 창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암흑이다.
그 때, 머슴이 돌아왔다.
"가져오신 물건 받으러.."
태형을 찾는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창고 안에서 손이 나오더니 태형을 끌어당겼다. 태형은 무방비 상태에서 너무나도 손쉽게 외마디 비명 없이 창고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쉿"
너무 컴컴한 창고 안이라 당췌 누구인지 윤곽조차 알 수 없었다. 도둑인가... 어차피 남의 일에는 그저 상관하지 않는 태형이라 딱히 도둑이 들었다고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자신을 놓아줬으면 하는 생각에 자신을 쥐고 있는 손을 힘으로 떼내었다. 그 도둑도 태형의 아귀힘에 놀란 듯 했다.
태형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보아 하니 집도둑이신듯 합니다. 그쵸? 걱정마십시오. 그 누구에게도 알릴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저는 이 곳에 물건을 전하러 온 일개 기생일 뿐이니 제가 이 창고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도둑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태형의 팔을 억세게 잡고 있을 뿐..
5
머슴은 한참 태형을 찾다 다시 들어간 듯 했다. 그 도둑은 창고 문에 귀를 대고 동태를 살피더니 머슴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 딱! 소리가 나면서 촛불 하나가 켜진다. 태형은 순간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종이 쪼가리로 가득차 있는 창고 안. 그리고 손가락만한 촛불 하나를 왼손에 든 채 무엇인가를 찾는 듯한 도둑. 그는 불을 키고는 태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이 마주쳤다. 그 모습은 한번에 알 수 있었다. 반짝이는 두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눈은 분명 정국님이었다. 태형은 다리가 풀리었다.
왜 당신을 나는 항상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보게 되는 것인가요.. 너무 보고싶었지만 아는 체를 할 수 없는 당신이 너무 밉습니다..
정국도 낯익은 기생의 등장에 좀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다시 서재를 뒤적였다. 태형은 그저 조용히 그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가가 정국 왼손에 든 촛불을 건네들었다. 정국은 태형을 흘핏 보더니 고맙다는 표시로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둑이 어디있을까.. 어느새 정국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 태형이었다.
그 때, 창고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촛불 빛이 새나간 것일까..혹 소리가 들렸나.. 정국은 재빨리 태형 손에 들려있던 촛불의 불을 끄고 태형을 자기 쪽으로 끌어 안았다. 가뿐 정국의 숨소리가 태형에게 전해졌다. 그렇게 정적이 흘렀다. 태형은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정국은 태형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하구나. 내 사정이 있어 지금의 무례를 용서해다오."
그 때, 창고의 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정국은 태형을 놓아 구석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이 창고 밖을 나서려는 듯 일어섰다. 품 안에 단도(短刀)를 꺼내들었다. 본능적으로 태형은 지금 정국이 밖에 나간다면 위험해질 것이라는 것을 감지한 듯 했다. 태형은 재빨리 일어나 정국을 끌어 안아 바닥에 밀어넣었다. 힘으로는 밀리지 않는 태형이었기에 정국은 가볍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넌 가만히 이곳에 있으라하였다!.."
정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형은 창고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으슷한 달빛이 창고 안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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