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전엔 대체 왜 그랬어?" 방에 들어오자 마자 아까 전의 행동에 대해 묻는 백현의 표정이 그닥 밝진 않았다. 찬열 본인이 생각해도 휴대폰을 뺏어서 분리한것은 조금 과한 행동이긴 했지만, 그땐 그것 말곤 다른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만약 천천히 들어가 전화를 끊으라고 했으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찬열은 그제서야 입고 있던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박알찬 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왜?어차피 주치의 잖아." "...그냥 친하게 지내지 마." "그러니깐 왜?" 딱히 이렇다 하고 말할것이 없던터라 찬열은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다.차마 ' 걔가 내 동생인데 너를 죽이고 싶어하는 애야'라고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찬열의 속을 알리가 없는 백현은 고개만 갸웃거리면서 연신 왜냐고 묻고 있었다.결국 한참을 왜 친하게 지내지 말라 하냐는 물음으로 왈가왈부 하다가 지친 백현이 안물어보겠다고 말하면서 화장실에 가는것으로 기나긴 말다툼은 끝이 날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백현의 시야에 들어온것은 그 사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뒤 침대 끝에 대충 걸터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찬열의 모습이었다.백현이 자신이 나와도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찬열의 옆에 걸터앉자 옆자리가 푹 꺼지는 느낌에 그제야 찬열이 시선을 돌려 백현을 바라봤다. 서류를 내려놓고 잠시 사소한 대화 - 요즘 밥 먹는건 어떠냐, 뭐 특별히 먹고 싶은것은 없냐 등 - 를 나누다가 피곤했는지 백현이 두 눈을 꿈벅거리자 찬열은 백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뒤 잘자라는 말을 남긴채 바닥에 내려뒀던 서류를 집어들었다. "...요즘엔,밥먹는거 보다 자는게 더 많아진 기분이야." "원래 임신하면 다 그런다고 하더라. 그냥 푹 자." "그래도,뭐 하나 하는거 없이 자기만 해서." "됐어. 그런 생각 하지 말고 푹 자." "...근데 진짜 안 알려줄거야?" "...안돼." 입을 불퉁거리는 백현을 재우고난뒤 찬열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그러고보니 문득 이씽의 집에 갔다오겠다던 첸이 생각났다.이씽의 집에서 나올때 쯤에 연락주겠다더니,아직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아까 휴대폰을 박살내서 연락을 못 받은건가 생각한 찬열은 거실로 가 소파 옆에 있던 유선 전화의 수화기를 들어 첸의 번호를 눌렀다. 첸 의 취향에 정확히 들어맞는 노래가 잠시 흘러나오더니 곧이어 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어.찬열아." [지금 어디ㅇ,] "흐어어어어어엉-." "이씽,잠시만 조용히 좀 해봐!" "체에에엔씨이이이이-.체에에에엔씨이이이이-.흐어어어어어엉-." [뭐야,지금 장이씽 술 마셨어?] "마시긴 마셨는ㄷ,장이씽!조용히 좀 해봐!" 조용히 하라 그렇게 소리치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을 껴안은채 꿋꿋하게 '첸 씨' 를 목놓아 부르며 울고있는 이씽을 보며 첸은 처음으로 이씽을 한 대 치고싶다는 강한 욕구가 샘솟았다. 시간이 지나도 우울함이 가실줄 모르는 이씽을 보며 고민한 끝에 오늘만 마시고 내일부턴 절대 술 같은거 마시지 말라며 새끼 손가락 까지 거는 약속 아닌 약속 을 한뒤 이씽의 집에 있던 술들을 꺼내와 - 그렇게 많은 술병들이 거실에 굴러다녔음에도 냉장고 속에 여전히 수북하게 개봉 하지 않은 술병들이 존재함에 첸은 경악할수 밖에 없었다 - 한잔씩 주고 받으면서 분위기가 어느정도 풀리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첸은 홀짝거리면서 목만 축일 정도로 마시는 반면 이씽은 잔이 빌때마다 계속 채워가며 보는 사람이 말리고 싶을 정도로 마셔댄 덕에 결국 첸이 뭔가 아니다 싶어 말리려고 했을땐 이씽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게다가 평소엔 적정량 이상을 마시지 않던터라 몰랐는데 이씽에겐 꽤나 난감한 주사가 있었다. 바로 상대방을 부여잡고 쩌렁쩌렁 한 목소리로 울부짖다시피 하는 것. 덕분에 찬열이 전화하기 몇분전에는 이웃집에서 시끄럽다는 민원까지 들어왔었다. 죄송하다 인사를 드리고 이씽을 조용히 시키려 했지만 들은체도 안하고 계속 울어재끼고 거기에다 찬열까지 전화를 해오니 첸은 머리가 아파왔다. "흐어어엉-." "장이씽,제발-!" [그냥 내가 나중에 전화할까?] "어어.미안한데 그래야될거 같다." 결국 찬열은 전화를 끊어야 했다. 찬열이 전화를 끊은 뒤에도 계속 울고 있는 이씽을 일단 방으로 데려가기 위해 이씽을 일으키려는 순간,첸 은 이씽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이다가 결국 방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진 첸은 바닥과 직격으로 부딫힌 자신의 무릎과 발목을 부여잡았고 바로 옆에 대자로 엎어진 이씽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나선 그대로 뻗어버렸다. 어디를 잘못 다친건지 발목을 움직이려 할때마다 찢어질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자 첸은 술에 취한 이씽 이라도 깨워 보려고 했지만 한번 잠든 이씽은 잘 깨어나지 않았다. 결국 첸은 거의 기어가다시피 해서 소파에 올라가 누워있을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는 도중은 물론 소파위로 올라갈때와 몸을 뉘일때 느껴진 아픔은 말할것도 없었지만. 첸은 지금은 뻗어서 조용히 잠들어있는 이씽을 속으로 씹어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시간은 꽤나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우선 이씽의 집에 가서 무릎에 커다란 멍과 발목을 접질러 온 - 나중에 이씽이 깨어났을때 가까스로 집에 돌아온 첸이 전화기를 붙들고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일장연설을 토했지만 이씽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찬열은 개소리로 치부하고 코웃음을 쳤다.백현이라면 믿어줄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때 백현 은 식당에서 식사중이어서 첸의 말을 듣지 못했다 - 첸이 나이 지긋한 이씽이 아닌 또다른 주치의 에게 집에 꼼짝도 말고 있으라는 사형선고에 가까운 말을 듣고 일주일째 방문진료를 받고 있는 동시에,백현은 입덧이 많이 호전된 덕에 신 음식이 아니어도 고기류나 어패류 같은것도 어렵지 않게 먹을수 있게 되었다. 이에 찬열은 백현의 몸상태가 좋아질수 있다는 희망에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커갈수록 백현 몫의 영양분까지 빨아먹을거란 과거 이씽의 말이 계속 걸렸다. 또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백현의 태동이 시작될 주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자신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백현의 주치의를 맡았다는게 영 불안했다. 찬열은 애써 괜찮을거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식단 메뉴를 산모에게 좋은 것 위주로 조리하라며 쉐프에게 부탁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먹고 싶은거 생겨도 바로 전화하고. 김 기사 통해서 바로 보낼테니까." "알았어. 근데 오늘 따라 왜 그래?" 불안함을 감추려고 해도 결국 티가 났나보다. 하필 오늘같이 알찬 이 오는 날에 간부회의가 잡힌것은 생각도 못한 부분이었다.앞당기거나 미뤄보려 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한 찬열은 최대한 회의를 빨리 마무리 짓고 집에 오는 것으로 계획을 잡은뒤 서류를 챙겨 회사로 향했다. 알찬 과 전화상으로 대화를 나눴을땐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지만 결국 한쪽으로는 불안감이 증식하고 있었다. 찬열을 배웅한뒤 백현은 늘 그랬던것 처럼 배를 문지르며 자신과 찬열의 방으로 향했다.백현의 배는 같은 개월 수 의 산모들 보다 더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지금쯤이면 자신의 방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을 첸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놀다가 첸의 답장이 뜸해지자 찬열이 자주 보던 영자 신문 을 들춰보기를 몇번, 전자파가 아기에게 안좋다는 말에 휴대폰 게임도 못하고 발만 꼼지락 거리다가 거실에 나가서 잠깐 tv도 보고 요새들어 갑자기 줄어든 잠을 자보려 하기도 몇번. 첸의 방에 들어가 봤지만 첸은 자신의 노트북으로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던지라 별 말 없이 나와야 했다. 결국 레모네이드 한잔을 들고 털레털레 돌아와 찬열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회의가 끝나지 않았는지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수 없다는 여자의 목소리 만이 들려왔다. 결국 딱히 할것이 없다는걸 깨달은 백현은 마지막으로 아기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침대와 모빌 - 모빌은 출산예정일 이 가까워진 타오가 보고싶다며 보내온 선물이다 - 이 들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비어있는 방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은 백현은 몇십분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심심해짐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 생소한 고통이 배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다시 주저앉은 백현은 배를 부여잡고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과거 계단에서 넘어질 뻔 했을때 보단 덜 했지만 확실히 충격이 강했다. 무언가가 자신의 배를 걷어차는듯한 생소한 느낌에 백현이 도와 달라며 소리라도 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 다시 한번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찬열 에게라도 연락해보려 했지만 자신이 휴대폰을 방에 놓고 온것이 기억났다.눈 앞이 점점 흐릿해졌다. 백현의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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