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민현과 헤어진 건 비단 슬프지만도 않았으며 울고 싶은 만큼 서글픈 일도 아니었다. 괜찮은 듯했는데. 집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어느새 조금은 빨라진 걸 느꼈을 때 세게 깨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울음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와 헤어지고 나면 정말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면 시원섭섭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미루던 일을 마침내야 끝내고 나면 한시름 덜 거라 장담했었다.
'그래도 만약에 어딘가 가게 된다면 나중에라도 안부 문자 하나만 남겨줘.'
제 길을 걸어가던 민현이 갑자기 돌아서서 꺼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까 너 잘 살고 있다고 연락 한 번만 해줘. 머쓱하니 뒷머리를 매만지며 그러면 괜찮을 것 같아서, 라고 뇌까리는 그의 말을 다 듣고 있었으면서 ㅇㅇ는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뭐라 말을 하는 것도 벅찼다. 입을 떼려고 하면 울 것 같은데 그걸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 앞에서 울어서도 안되는 일이었으니까.
"다니엘은 더 늦게 있다가 오려나."
집에 가서 씻고 회사 나갈 준비도 하고 다니엘이 오면 먹을 밥도 내가 미리 해봐야지. 우리집에 맥주가 있나. 목욕 하고 난 다음에 맥주 먹어야 하는데. 애써 할 일들을 생각해내야 했다. 조금이라도 쉴 틈이 필요했다. 다니엘이 올 때 이런 얼굴로는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거울에 비친 ㅇㅇ의 얼굴이 전부 붉었다. 눈도, 코도, 볼도. 추위에 빨개진 얼굴과 함께 퉁퉁 부은 눈이 한 몫을 더해서 이보다도 못생긴 얼굴은 또 없을 것 같았더랬다. 진짜 나중에 구름이한테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지. 그러고 보면 딱 오늘 이렇게 다니엘을 불러준 성운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ㅇㅇ가 소매로 대충 얼굴을 문대며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했을까 번호키를 다 누르기도 전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왜 이제 왔…"
망했다.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는데. ㅇㅇ보다 먼저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직 옷도 다 벗지 못한 다니엘이 그대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왔다. ㅇㅇ야, 라며.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무슨 일이냐고 연달아 묻는 그의 말투가 들려왔고 그것보다 더 앞서서 ㅇㅇ가 울었다. 다니엘. 그에게 이런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던 게 불과 몇 초도 안된 일이었다. 근데 모순된 것처럼 그가 집에 없기를 바라면서도 또 있기를 바랐다. 이젠 민현의 앞에서도, 다른 사람 앞에서도 울 수가 없었던 그녀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다니엘 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가 깨달았던 것마냥.
"이리와."
ㅇㅇ가 고개를 숙이며 우는 소리가 점차 커졌을 무렵 다니엘의 팔이 그녀를 끌어 안았다. 왜 울고 있는지, 어디를 나갔다가 누구를 만나고 오는 길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민현을 만났을테고 또 헤어졌겠지. 다니엘은 제 눈에 아른거리는 모습에 부러 ㅇㅇ의 이름만 몇 번이고 불렀을 뿐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ㅇㅇ를 안은 손에 괜스레 힘을 준 그에 의해 복도에는 작은 소리만 맴돌고 있었다. 쾅.
-문이 닫혔습니다
What Does The Fox Say?
W.LIGHTER
"이제 진정 좀 됐어?"
다니엘의 말에 ㅇㅇ는 급히 제 얼굴을 가렸다. 미안해. 다니엘, 진짜 미안. 작게 신음소리를 내던 ㅇㅇ의 목소리가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봐도 자신이 싫었는데 다니엘은 오죽하려나 싶었다. 그녀는 무어라 변명할 새도 없이 울었다. 그것도 전남친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민현 때문에 울었다기 보단 민현과 함께 했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쉬웠다. 그렇게 표현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한 번에 가벼워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근데 그걸 하필이면 다니엘 앞에서 그럴게 뭐야. 울음이 다 그치고 나니 수치심이 밀려드는 듯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해."
소파를 두고도 바닥에 앉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ㅇㅇ를 따라서 러그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다니엘이 작게 웃었다. 오늘 일찍 오길 잘했네. 나 없었으면 ㅇㅇ 또 혼자 울었을 거잖아, 그치? 그는 한쪽 팔은 소파에 얹고 또 나머지 팔로는 ㅇㅇ의 뒷머리를 쓸어주었다. 별 말을 하지 않는다고 다니엘이 아무렇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어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도, 그리고 그걸 제 옆에서 실없이 웃어주는 그가 제게 해주고 있다는 걸 모를 ㅇㅇ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래서 자신 또한 괜히 웃었다. 마른 눈물이 볼에 달라붙어 채 떨어지지가 않았는데 웃고 있자니 제 주인 속도 모르고 가슴이 가뿐히 뛰어댔다.
"ㅇㅇ야, 힘들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어?"
"지금처럼 굳이 나 때문에 억지로 힘든 일을 사서 하지 마."
갑작스레 떠난다는 여행도, 쉽지도 않은 것까지 다 정리할 필요 없어. 이젠 다니엘이 자신보다 어른스러운 태를 보이고 있었다. 나른한 눈길을 해서는 저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말을 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에 그게 참 뭐라고, 심장에 해로운 것만 같았다. 하다하다 사소한 그의 행동까지 전부 다. 천천히 해도 된다는 말을 이어가는 것이 제가 가끔씩 보는 다니엘의 늑대 모습이 아니었다면 오빠, 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한숨에 다 커버린 듯했다지. 너 혼자 자꾸 새치기 하고 멋있는 척 하지마, 다니엘.
"나 회사도 그만 둘거야."
"ㅇㅇ야."
"회사 그만 둔 김에 너랑 멀리 떠나고 싶어. 이왕이면 거기서 오래 살면 더 좋고."
그녀를 저지하기 위해서 몸을 반쯤 일으키는 다니엘의 손목을 좀 더 빨리 ㅇㅇ가 그러쥐었다. 너 때문은 아니라고 부정은 못하겠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야. 그의 손목을 애둘러 있는 그녀의 손과 함께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사뿐히 내려 앉았다. 너한테 해주고 싶은게 많은데 이 정도 선에서 해결보는 중이니까 나 말리지 마.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말을 하던 ㅇㅇ는 다니엘에게 한껏 제 고개를 묻은 상태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있으니까 살 것 같았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느껴지는 그의 체취가 새삼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사실이 퍽이나 우스웠다. ㅇㅇ는 더이상의 말을 하는 대신 그의 품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면 저를 단번에 안아줄 다니엘이 있을테니.
"ㅇㅇ는 어디로 가고 싶은데?"
"너는?"
이마 위로 금세 다니엘의 입술이 느껴졌다. 콧잔등을 간지럽히다가 문득, 스위스가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 난 눈이 많은 곳이 좋아. 겨울이 길고 길어서 또 밤이 깊은 곳이 좋아. 어느새 그에게 한껏 안겨 있었다. 꼭 이른 밤이 찾아온 것마냥 깜깜한 거실에 단 둘이 안고 있는 것이 좋았다. 팔을 뻗어서 그의 허리를 안으면 끊이지 않는 입맞춤을 받는 게 꽤 좋았다. 울다가 웃다가, 한참을 웃고 나면 저를 안아줄 다니엘이 있는 곳이면 그 어디든 좋지 않은 곳이 없겠지. 그럼 스위스로 가자.
"나는 어디로 가든 다 좋아."
"어디든?"
"응. 난 다니엘이랑 같이 있으면 다 좋…"
ㅇㅇ의 말이 멎었다. 다니엘이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그녀의 두 볼이 한순간에 뜨거워졌다. 말이 이어가지 못하는 이유에는 맞닿은 다니엘의 입술이 한 몫을 하고 있었을 뿐더러 뭐라 말을 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그에게 잠깐이나마 내쉬고 있는 숨마저 빼앗겼다. 잠깐만. 할 말은 좀 다하고 입을 맞추던지 말던지 해. 지금 이 말을 하는 게 맞는건가. 주체할 틈도 없이 달라붙어 오는 그를 잠시 떼어놓으며 꺼낸 말의 의미가 이상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ㅇㅇ는 제 입술을 앙다물기에 바빴다.
"내가 앞으로 너 행복하게 해줄게."
"그런 말은 내가 해야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나서 꺼내는 말이 그녀답지 않게 비장하고 단호했다.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선 하는 말이나 표정이 웃을 때가 아님에도 자꾸만 바보같이 웃음이 새어나오게 했다. ㅇㅇ야 말로 내가 할 말을 가로채면 어떡해. 자신의 말에 심오하게 고민을 하던 그녀는 그럼 같이 해, 같은 말을 했다. 내가 다니엘, 정말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줄거야. 그렇게 울고 있을 때는 언제고 눈을 크게 뜨며 저런 고백을 아무렇지 않게 할까. 그는 저 말에 수도 없이 하늘에서 땅으로 꼬꾸라지는 기분을 맛보는 것 같았거늘. 정작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감을 잡지 못하는 듯했다.
"근데 나 행복하게 하는 거 어려운 일 아닌데. 되게 쉬워."
"응?"
"아까 하던 거 계속하면 안될까?"
나 그러면 엄청 행복할 것 같은데. ㅇㅇ야.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너, 너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워왔어! 다니엘은 하루가 다르게 컸다. 이미 다 큰 아이한테 이런 말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하루, 하루 성장하는 건 틀림없었다. 능글거림에 도가 트고 있는 것이 그랬다. 제 입술을 삐쭉 들이밀며 채근하는 모습이 매우 당황스러웠다. 당황스럽고 또 당황스러운데 왜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ㅇㅇ는 저도 모르게 조금씩 말려 올라가는 제 볼을 손으로 눌렀다. 응? ㅇㅇ야. 안 해줄거야? 그렇다고 해서 다니엘에게 넘어가지 않을 ㅇㅇ는 아니었지만.
"근데, 우리 사귀는 사이야?"
"응?"
"다니엘. 나랑 사귀는 거야? 우리 애인이야? 아니면 그냥 썸타는 거야?"
아주 당연하게 뽀뽀에서 끝나지 않을 입맞춤을 하던 그녀는 냅다 고개를 뒤로 뺐다. 다니엘과 저는 보통의 연인 사이에서 할 법한 건 다 했다. 뽀뽀도 했고 안기도 했고 키스도 했고 그 이상의 것도 했다. 둘이서 안 해본 걸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그를 위해서 그와 단둘이 있고 싶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하겠다, 다짐도 했다. 그런데 정작 정확하게 그와 그녀가 무슨 사이인지 짚고 간 적이 없었다. 생각하고 보니 새삼 억울하네. 나 뽀뽀 안 할래.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도 모르는데 너무 앞서 나갔어.
"나 ㅇㅇ랑 같이 살거야. 너 아니면 나 평생 혼자 살다가 죽어야 돼."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래서 우리 사귀는 거야, 마는 거야."
ㅇㅇ의 말에 다니엘은 진지한 얼굴을 해왔다. 꼭 사귀어야 해? 물론 그와 동시에 꺼내진 말로 인해 ㅇㅇ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표정을 해왔지만서도. 뭐? 너, 진짜. 무슨 아메리칸 마인드야 뭐야. 염두해두었던 말들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는 다니엘은 가만히 고개를 갸우뚱해왔다. 나 너랑 결혼할거야. 결혼 먼저 하고 사귀어도 돼. 그렇게 시작하는 사람 많대. 어디서 또 저런 건 듣고 와서는. ㅇㅇ는 듣기에 썩 나쁘지 않은 말을 하는 다니엘에게 내심 안도를 했다. 화를 내기 위해 치켜 뜬 눈을 조용히 감았다가 떴다. 그녀가 눈동자를 도록도록, 움질일 때마다 그는 조그마한 빈틈이 생겨나길 바랬고.
"좋아해."
"뭐?"
"아니다. 좋아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
순간 당겨진 그녀의 몸이 엉거주춤하게 기울었다. 그가 대뜸 꺼낸 고백과 사귀자는 말, 그리고 결혼하자는 말까지 삼중추돌을 겪은 ㅇㅇ가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금세 생겨난 그 틈을 재빠르게 파고 들었다. 순식간에 겹쳐진 입술을 받아내기에 벅찼다. 눈을 감을 타이밍도 놓쳤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혀져 있었다. 숨 쉴 시간도 주지 않는 그를 달래기 위해 ㅇㅇ가 다니엘의 입술을 한 손으로 막았다.
"잠, 잠깐만."
"안돼."
"뭐?"
"이번엔 안돼."
이번엔 진짜 안돼. 안 봐줄거야. 제 입술을 막고 있는 ㅇㅇ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손바닥에 한 번, 손가락에 한 번. 이번엔 안 놔줄거야. 말을 하기가 무섭게 다시금 입술이 다가왔다. 먼저 놔주지 않겠다 했던 건 다니엘이었는데 입술을 다시 맞춘 건 ㅇㅇ였다. 뭐가 뭔지, 지극히 감정적으로 다가간 키스는 몇 번이고 서로의 입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술을 마신 것처럼 붕붕 떠있는 기분이 마냥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짙게 붙어있는 숨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미처 감지 못한 다니엘의 시선엔 파르르, 떨리고 있는 ㅇㅇ의 속눈썹이 보였다. 끝이 동그란 콧망울이 보였고 늦은 밤에도 상기 되어있는 볼이 보였다.
그에게 보이는 건 그녀가, 이게 전부였다.
*
어떻게 된 게 좀 쉴 틈을 안 주냐. 고작 며칠 사이에 제가 겪어야 할 산전수전을 다 겪는 것만 같았다. 익숙하지 않는 끝맺음을 하고 다니엘에게 위로를 받고 또 서로 함께할 미래를 약속했다. 그리고 짧은 휴가기간을 끝내고 돌아온 회사는 그녀가 들어오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래도 나름 괜찮네. 어제까지만 해도 정말 회사가는 게 그렇게나 두려울 수가 없었는데. 막상 몸소 겪는 것들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축에 속하고 있었다. 고작 며칠이 지났다고 사내에서 제 이야기는 여러 이야기들에 묻혀져 있었다. 같은 부서내에서 저를 보고 떠드는 수근거림 정도야 한 귀로 듣고 흘려들을 수 있을 정도었으니.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었다. 다른 것보다 회사를 관둔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자 무슨 일이든 그저, 그런 일들로 치부할 능력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너, 괜찮아?"
그러고보면 회사 내에서 유일하게 저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던 성우와도 곧 이별이겠구나. 괜찮아 이 정도면 견딜만 한데, 뭘. 좋은 인연은 없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곳에서 만난 사람이 그런가 성우는 유독 치고 박고 하는 횟수가 많았지만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슬퍼지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난 더 심할 줄 알았거든. 근데 막상 보니까 내 소문은 다른 사람들한테 밀린 것 같더라.
"황민현 대표가 우리 회사랑 했던 계약 취소했대."
"어?"
"그래서 우리 회사쪽에서 위약금 액수 정하고 있다는데."
솔직히 이 말을 너한테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엄청 고민했거든? 근데 나도 잘 모르겠다.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다니엘이었지만 그 안에는 온갖 소문들로 무장한 저를 외면하고 싶은 알량한 회피심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외로 많이 가라앉는 소문들이 우습다고 생각했었고 이 정도면 계속 회사를 다녀도 괜찮았을텐데, 하고 나름 아쉬운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익숙해지면 그런대로 면역력이 생긴다고 생각도 했으니. 근데 어떻게든 익숙해져도 괜찮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은 듯했다. 민현이 먼저 계약을 그만두겠다고 하는 말은 영 쉬이 넘길 수가 없었다.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 졌다고 했거늘 이게 뭐야, 이러면 자신은 또 민현에게 짐을 지우고 가는 꼴이 되어버리는 거 아닌가.
"부장님 만나러 가봐야겠다. 아직 점심식사 하시러 안 가셨지?"
"야. 가서 뭐하게? 그냥 가만히 있어. 나중에 민현씨한테 전화로 말하면 되잖아."
못해. ㅇㅇ는 주먹을 굳세게 쥐었다. 아니, 안해. 너는 전남친한테 다시 연락하는 사람 봤냐? 웃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웃음이 나왔다. 기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울고 싶었음에도 성우를 곧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는 웃고 있었다. 나랑 계약한 일이야. 내가 책임져야지. 너 가서 뭐라고 하려고. 이러다가 너만 곤란해져, ㅇㅇㅇ. ㅇㅇ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목을 잡고선 어쩔 줄 몰라하는 성우의 표정이 정말 제 친구 같았다. 대학 때도 저를 위해서 걱정해주는 친구는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하필 이럴 때 진정한 우정을 찾은 듯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하지마. 어? 저를 위해서 점심 시간의 반절이 지난 지금까지 밥을 안 먹은 성우는 천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제 앞을 막아보겠다고 갖은 행동을 다 하는 것도, 굳이 그녀뿐만이 아니라 회사 내에서 잘 못 지내는 사람들을 챙기는 그의 성격이 쉽게 사라질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게 분명했다.
"괜찮아. 나 어차피 회사 그만 둘 생각이었어."
"뭐?"
"나 한국 떠날 거거든."
여행 겸 사랑의 도피로. 비행기표는 아직 구하지 못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하루 빨리 알아봐야 할 것만 같았다. 먼 훗날까지 생각하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ㅇㅇ는 여전히 셔츠 앞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성우의 사원증을 똑바로 매주었다. 넥타이도 좀 매고, 셔츠 깃도 제대로 세우고 다녀. 얼굴만 멀쩡하다고 내가 연애할 수 있는 거 아니랬지. 정작 웃으면서 말을 꺼내는 그녀도 제 앞 날을 장담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미래도, 다니엘과 무작정 떠나게 되면 그녀와 그의 앞에 놓일 날들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해야할 건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어야 한다. 민현에게 남은 짐을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꽤나 좋은 친구였던 성우에게도 말을 전해야 했다. 나 혼자 그만둔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미리 말을 해야 하는 게 도리라고 오늘 아침 다니엘이 그런 말을 해주었으니까.
"짤릴지, 내가 먼저 그만둔다고 얘기할 지 그건 모르겠는데 너무 내 걱정 하지마."
"야. 넌 무슨 애가…"
"오늘 아침에 올 때 엘리베이터에서 너 좋다는 사람들 많더라."
제 사원증을 목에서 빼내는 ㅇㅇ는 괜스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너도 얼른 연애해, 나도 요즘 다시 연애하니까 엄청 좋아 죽겠거든.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고 부장에게 뭐라 말을 해야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민현이 무슨 생각으로 저 스스로 계약금의 배가 될 돈들을 다 지불하면서까지 취소하자고 했던 건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따로 마련해둔 부장실 문 앞에서 바짓단에 손을 두어번 문지른 ㅇㅇ의 손에 자꾸만 땀이 묻어났다. 방금 전까지 성우 앞에서는 그렇게나 의연한 척이란 척은 다 해놓고 막상 말하기가 두려운 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았더랬지.
"부장님, 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ㅇㅇ가 부장실의 문을 열고 부장을 만나고 뜻대로 나오지 않은 말을 여러번 더듬기까지 고작 시간은 삼십분이 다였다. 그 삼십분 안에 모든 일이 다 일어났다. 민현과의 거래는 전적으로 그의 책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전했다. 애초에 그가 몇 배나 되는 위약금을 내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거래는 아직 초반 단계였고 우리 회사쪽에서 본 손해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그러나 그 말을 전해는 도중에 그녀가 말을 떨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회사에서 눈 밖에 난 건지 그녀는 부장 앞에 제 사원증을 반납해야 했다. 그것도 ㅇㅇㅇ, 제가 상상했던 것처럼 멋지게 그만둔다는 말을 하며 내놓은 것도 아닌 을의 입장에서 권고 사유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지만. 부장실의 문을 닫으며 있는대로 끌어올린 한숨을 내쉰 ㅇㅇ는 잠깐의 지친 기색도 없이 제 책상에서 짐을 쌌다.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말들과 함께 저를 보는 성우가 못내 거슬렸지만 이젠 준비 기간도 없이 바로 코 앞에 일이 닥쳤다. 당장에라도 다니엘과 떠날 수가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으니 더이상 미룰 이유도 없었다.
- ㅇㅇ야?
"다니엘."
-지금 점심 먹으러 갈 시간 아니야? 무슨 일 있어?
어느새 제 일상까지 훤히 꿰고 있는 다니엘의 목소리가 핸드폰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느닷없이 짤리는 경우는 태어나서 또 처음 겪는 거라 당황스러운 마음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15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울리는 ㅇㅇ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휴가가 끝난 바로 다음 날 본의 아니게 일자리가 없어진 그녀는 신기하리만치 멀쩡했다. 예전 같았으면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을 그녀가 조금은 더 어른스럽게 제 상황을 받아 들였을 때쯤 핸드폰 반대편에서 다니엘은 제가 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곧장 자신만 믿으라며 걱정마, ㅇㅇ야. 내가 먹여살릴 수 있어. 같은 소리나 덧붙이는 기색이 다니엘스러웠다. 그래, 아마도 그녀가 이만한 일들을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일 지도 모른다. 함께 할 사람이 있고 함께할 미래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웃을 이유는 많았으니까.
-얼른 와. 우리 간만에 점심 같이 먹자.
ㅇㅇ의 이름을 나지막히 부르는 목소리가 괜히 설탕에 저린 것마냥 달큰하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What Does The Fox Say?
Episode 16, fin
너무 오랜만에 찾아와서 죄송해요 라이터입니다!
늦게 여러분을 찾아와서 너무 죄송해요...그래도 나름 시험기간을 무릎쓰고 찾아왔으니까 쪼금만 이해해주세요휴ㅠ
솔직히 4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벚꽃이 막 지더라고요? 뭘 했다고 벚꽃이 끝났나 싶은데 티켓팅도 망하고 점수도 망하고 뭐 하나 되는게 없네욬ㅋㅋㅋㅋㅋㅋㅋ인생 뿌셔버리고 싶다.....ㅎ
우리 독자님들은 4월의 시험지옥을 잘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부디 잘 견디고 있다가 우리끼리 짧게 회포를 푸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당
아 맞다 알람이 오지 못해서 저번화 댓글을 못 봤다가 이번에 봤는데 그 '마지막 눈' 이라는 거에 우리 독자님들이 니엘이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구요
(본의 아니게 미안해지는;;) 사실 그건 한국, 지금 여기! 에서 보는 눈이 마지막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주와 떠날 걸 미리 염두하고 있는 다니엘이랄까요? 허헣 그러니 걱정 마셔요 저는 한 번 정한 엔딩은 바꾸지 않습니닿~*^^*
쓸 글도 많고 쓰고 싶은 글도 많은데 자주 찾아오지 못해서 너무나도 죄송하구 잠깐의 휴식이 남았을 때 좋은 글들로 다시 올게요
요즘 일교차가 심해요 우리 독자님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구 우리 또 다시 만나용
#암호닉 신청은 이번화까지만 받겠습니다! 추가로 받지 않아요!#
암호호호호호닉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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