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너를 보면 맑은 하늘에도 무지개가 뜨고
사막에도 푸른 초원의 빛이 온다
너를 생각하면 한겨울에도 봄이 오고
영롱한 아침 이슬이 강물되어 흐른다
너를 보면 가슴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고
캄캄한 밤바다에 등대불이 반짝인다
너를 바라보면 광활한 우주가 다가오고
너는 커다란 지구를 굴렁쇠처럼 굴린다
1.
늘 그랬듯 모든 게 끝난 후엔 심장 한켠이 시리다.
그러면 나는 말없이 돌아누워서는 씻고 나오는 그를 본다. 우리 사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야, 난말야. 이런 생각을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너와의 관계에서 시작과 끝을, 그리고 의미를 찾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게 단단한 척 하는 내 마음을 얼마나 할퀴어댈지도.
쌍꺼풀이 없는 반쯤 감긴 눈, 그렇게나 이전부터 어필하던 잔근육, 눈만 마주쳤다 하면 사람 설레게 웃는 그 표정. 어느 날 너가 물었지. 나한테 너에 대해 어디까지 알려줄 거냐고.
나는, 너가 내게 알려주는 만큼. 그러니까 너가 네 맘을 말해준다면 나도 기꺼이 말해줄게. 언제부턴가 널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자주 오는 모텔은 항상 고요하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우리를 위해 티비 소리는 조그맣게. 그가 리모컨을 들고 바지만 입은 채 침대 위에 걸터 앉는다. 딱히 볼 방송도 없으면서 우리는 시간이 남으면 티비를 본다. 시선만 티비로 두고선 입으로는 말을 나눈다. 나는 요즘엔 그의 옆모습을 보지만.
"다음엔 언제 만날래."
대답없이 잠자코 누워만 있으니 그가 내게 슬쩍 시선을 돌린다. 나는 일부러 눈을 피하고선 천장으로 손바닥을 쭉 뻗어보인다. 손이 되게 부드럽네. 너가 내 손을 처음 만졌을 때 했던 말.
"왜 기분이 안좋아보일까."
요즘 드는 후회가 있다. 애인도 뭣도 아닌 사이에게 내 감정을 나누는 게 아니었는데. 분명 섹스 몇번으로 내게 사랑을 찾는 남자는 참 구질구질하다 말하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가 샐쭉 웃으며 누워있는 내 위로 다가왔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민트맛 치약 냄새가 폴폴 났다.
"넌 얼굴이 참 야해. 자꾸만 키스하고 싶게."
그의 맨살이 티셔츠 위로 닿았다. 그의 입술도 곧 닿았다. 눈을 조심스레 뜨니 가라앉은 속눈썹이 보였다. 오른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뭐야. 무슨 일 있지. 키스를 멈추고선 그가 묻는다. 우리는 대체 무슨 사이냐며 구차하게 묻지 말자던 그의 목소리도 불현듯 들려왔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애인같은 이 시간이 좋아서, 말도 안되는 욕심을 부리며 그를 두 팔로 꼭 안는다. 이건 좀 다른 질문인데, 안는 거 좋아해? 밤새 통화할 때 내게 물었던 말. 응. 좋아해. 그리고 이어졌던 내 대답.
쾌락의 역설이라고, 쾌락을 좇다보면 언젠가 고통이 더 커진다는 패러독스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너라는 쾌락을 향했기 때문에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걸까.
"진지한 얘기 해도 돼?"
"그래."
나는 씁쓸함을 웃음으로 뱉어내는 버릇이 있다. 가슴이 아릴 때마다 늘 그래왔다. 그래서 어김없이 입꼬리에 힘을 가득 실어 웃었다.
빈틈이라곤 전혀 없어보였던 내 완벽한 하루에 어느 날 너가 불쑥 찾아왔을 때, 나는 며칠만 지나면 가버릴 줄 알았어. 너가 뒤흔든 나의 모든 것도 곧 전부 제자리로 돌아올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게, 사실 내가 널 붙잡고 있었던 거야. 내 하루로부터 어디론가 떠나버리지 못하도록.
꼭 오늘만 같았던 언제적 밤에 혼잣말하듯 그에게 널 아직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던 때가 있었다. 흔히 내비추지 않았던 진심이라 내가 말을 꺼내놓고서도 당황했다. 그가 곧 내 말에 살풋 웃더니 답했다.
─ 비밀은 너가 더 많아 보이는데.
그리고 그가 지었던 그 웃음이 내게서 묻어나오는 쓴웃음과 같다는 걸 알았을 때.
비밀? 많지. 궁금하다면 지금 딱 한가지만 알려줄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너가 점점 더…
…점점 더…
…….
"오늘이 마지막이야."
저 먼 평행세계에서 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그가 내 위에서 내려와 나를 보며 턱을 괸 채 돌아누웠다. 놀랄 줄 알았는데. 아니, 적어도 슬픈 눈은 보여줄 줄 알았는데. 애석하게도 그는 너무나 차분했다. 이 상황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기라도 했던 것처럼.
"떠나려고."
오늘같은 폭염이 아닌 폭설이 내렸던 한겨울에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같이 밤을 보낸 날이기도 했다.
─ 난 언젠가 떠날 거야. 멀리 외국으로. 사람 적은 곳만 찾아다니면서 맘껏 사진이나 찍어야지.
반응이 궁금해서 떠본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내 팔목을 잡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은 꼭 딴사람만 같았다. 그런 말 앞으로 안했으면 좋겠는데. 목소리가 차게 식어있었다. 그는 내가 반문하기도 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고쳐잡더니 나를 덥석 껴안았다. 놀라지 않았다면 그것은 필시 거짓이었다. 가벼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내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고, 어려웠다.
2.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오늘따라 버스가 참 빨랐고,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는 어찌 그리 작은지 잘 들리지가 않았다.
지하철 역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다. 그는 결코 무뚝뚝하지 않은데. 아니, 무뚝뚝한가? 사실 그간 그에 대해 아는 척을 조금 했었다. 무표정일 때가 제일 너다워 보인다는 말도 곧잘 내뱉곤 했었다. 그를, 그의 본래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한 나는 널 이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고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 경솔한 생각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잘 몰랐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만난 사이였잖아. 서로를 잘 모르기 위해서. 그저 욕망만 채우고 헤어져버리는, 잘 모르는 서로가 되기 위해서.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방송이 들려오자 그제서야 그가 나를 바로 보았다. 뭐, 할 말 같은 건? 나는 대답없이 그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었냐면,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져 그 속에서 피가 흘러나올 것 같다는 생각. 그만큼이나 그의 모습이 아팠다. 속에서 몽글몽글한 것이 올라오기 전에 잽싸게 눈을 떼내었다.
"후회할 거야."
듣지 말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들으라고 내뱉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매일 일기를 쓰는 습관 때문인지 나는 나를 잘 알았다. 그래서 머지않아 모든 것을 그리워할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의 눈이 계속해서 나를 좇아왔다.
"누가."
저 멀리서 지하철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발자국 스티커가 붙은 블럭 위로 한발짝 다가섰다. 내가?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커졌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시원해질 쯤, 책에 꽂혀 시립도서관에 한동안 박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바람이나 쐴 겸 해가 저무는 저녁에 건물 밖으로 나가 벤치에 앉았는데, 도서관 옆에 붙어있는 풋살장에서 남자 몇명이 팀을 나누어 조끼를 입고선 공을 차고 노는 게 보였다. 마침 심심했던 터라 음료수를 입에 털어 넣으며 구경하는데, 누군가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자판기 앞에 섰다. 남자는 한밤중에도 눈에 띌 것 같은 야광색 조끼 위를 손으로 잡고선 옷을 힘차게 펄럭였다. 그 모습이 우스워 나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웃냐 묻는 듯한 그의 얼굴에 순간 억지스러운 오기가 생겼던 건지 나는 꿋꿋이 샐샐 웃으며 그의 눈을 마주했다. 그게 첫 만남. 내 충동의 시작이었다.
"아니."
─ 저보고 웃으신 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수를 다시 한입 마셨다. 그리고나서 그에게 물었다. 번호를 알려줄 수 있느냐고. 남자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면."
"내가."
"……."
"내가 후회할 거야."
지하철이 바람 소리와 함께 들어왔다. 그가 내 팔목을 잡았다. 그날 밤보다 훨씬 아팠다.
나는 매사에 시원한 성격이었다. 살면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다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며 내 진심을 완벽히 준 적도 없었고, 줄 생각도 없었다. 그는 그런 내가 좋다고 했다. 쿨해서 좋다고.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바뀌어있었다. 그럴듯하게 흉내만 내고 있었다. 마치 그와의 관계를 언제든 쉽게 끝낼 수 있는 것처럼.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 사이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두 눈이 호수마냥 일렁이고 있었다. 사실 늘 궁금했었다. 사람들은 왜 어리석게 연애를 하는 건지. 언젠가 이별이라는 끝이 분명 찾아올 것인데도. 그런데 그 어리석은 순간이 결국엔 나에게도 찾아왔구나.
아니, 돌이켜보면 어리석었던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 늘 어른스러운 척 하곤 했어도 그 속내는 참 어렸으니까. 나는 오지도 않은 아픔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사랑이란 태생적으로 없는 감정인 마냥, 떠난다는 나의 말에 까딱 하지 않는 그를 보며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서운함을 몰래 감춘 거겠지.
"가지마."
그가 내 팔을 끌어당겨서는 그대로 나를 껴안았다. 인간의 혀란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가. 나는 그의 목청을 타고 나오는 단 세 글자에 무너짐을 느꼈다. 내 속을 매일같이 헤집고 다니던 몽글몽글한 것이 차츰 사라졌다. 조심스레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쌌다. 이유없이 웃음이 났다.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를 처음 봤었던 그 날도 분명 이런 느낌이었다. 내가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왜 웃었냐면. 그때부터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 어느 날 너가 물었지. 나한테 너에 대해 어디까지 알려줄 거냐고.
나는, 너가 내게 알려주는 만큼. 그러니까 너가 네 맘을 말해준다면 나도 기꺼이 말해줄게. 언제부턴가 널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예전에 혼자 썼던 글이에요 ~ '-^
불마크 달 정도의 수위는 아닌 것 같아서 올려보는데
혹시나 ! 불마크 달아야 될 것 같다 하시는 분 있으시면 댓글 달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