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같은 선배와의 전쟁
BY. 탄덕
17
" 좀 천천히."
끝까지 무시했다. 뒤로는 애처롭게도 지민의 덤덤하지 못한 목소리가 귓등 사이로 파릇 떨려왔다. 쉽게 뿌려칠 수 있음에도 그는 손에 잡힌 팔목을 애써 내치진 않았다. 학교 중앙으로 성큼 발걸음을 옮기던 여주가 그제서야 천천히 제자리에 멈춰섰다.
" 무슨 일이야. 학교까지."
" 형은 정해진대로 결혼할거야."
지민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여주의 입가에 허무함이 한 가득 묻은 헛웃음이 비춰졌다.
" 그거 말해줄려고 여기까지 온 거라면. "
" ........"
" 나 지금 수고했다고 칭찬해줘야 되는거지."
" 상처받지 마. 저 여자가 한 말들."
" 박지민. 넌 끝까지."
" 실망이라고."
실망. 여주가 지민의 마지막 단어를 혀 끝에 고스라히 담아냈다. 너에게 실망한 걸까. 아니면 내가 이 실망감의 근원지를 찾지 못한 걸까. 때가 타버린 흰 크로스백 끈을 세게 움켜쥐었다. 가벼운 그의 향수와는 달리 묵직한 분위기 속 지민이 시큰해진 입술을 다시금 달싹였다.
" 됐어."
" ........."
" 지난 새벽에 내가 했던 행동은 경솔했어."
"........."
" 사과하려고 온 거야."
" ........."
" 그리고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상관 없는데."
지민의 목울대가 아주 잠시 울렁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 최악이야. 실망이라는 말은."
도톰한 입술이 말라버린 채 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꾸만 제자리를 서성였다. 그러자 어쩐지 덤덤하리 못해 자그마한 목소리가 두 걸음 멀어지던 그를 붙잡았다.
" 아니."
" .........."
" 날 찾아온 지금도. 우리가 함께 했었던 그 옛날에도."
" ........."
" 혹여나 내가 비 맞을까 우산을 들고 오고."
".........."
" 그 어둠에서 먼저 구해줬던."
" ........"
" 너한테 단 한번도 실망한 적 없어."
"........."
" 그러니까 지민아- "
" 형한테 가 봐. 갈게."
푸르도록 청량한 셔츠를 걸친 지민의 어깨로 덤덤하게 시선을 보내던 여주의 길게 늘어진 독백을 가로챈 지민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긴 채 잠시 멈춰섰던 발걸음을 정문으로 돌려 학교를 벗어났다. 복잡해진 마음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던 손바닥 사이로 액정이 환하게 띄어졌고 그녀가 조용히 그것을 응시했다.
[ 우리 얘기 좀 해. ] - 17 :02
딱히 할 말은 없었다. 하고 싶은 말도.
그럼에도 찾아가야 했다. 수화기 너머 안아달라 속삭이던 그를.
지금 이 상태에서 흥얼거리는 노래라도 듣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부러 이어폰의 음향을 높이던 여주가 반쯤 넋을 놓은 채 아파트 공원을 지나 익숙해진 발걸음으로 아파트 로비를 들어서 엘리베이터 층수를 눌렀다. 정호석. 한예은. 정략결혼. 애써 틀어놓은 이어폰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여태 들리지도 않은지 그녀가 연관성이 없는 단어들을 몇 번이고 곱씹었고 그들 사이에 서 있던 자신을 떠올린 여주가 등 뒤로 봉에 기댄 채 그렇게 몇 십여분을 생각에 빠져있었다. 결국 단 1%의 생각 정리를 끝내지 못한 여주가 이윽고 정신을 차릴 때쯤은 이미 밑층에서 누른 사람으로 인해 또 다시 1층으로 돌아가는 중이었고 그냥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다. 꼭 이런 날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여주가 길어진 한숨을 내쉬었다.
" 김여주."
한창 생각에 빠져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놀라 고개를 위로 바짝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층수를 봤는지 자기 집 층수에서 내려온 여주를 유유히 보던 호석이 손에 든 비닐봉지를 들고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왜 내려와. 금방 갈텐데."
너무나 평범하고도 자연스러운 물음에 여주가 미묘하게 그의 옆 얼굴을 쳐다봤다.
" 선배는 덤덤하네. 난 안 괜찮은데."
" 한예은이 나타날 줄 몰랐어."
" 알아."
" 아버지한테서도 전해 듣지 못했고. 무엇보다 우리 그 전에 복잡한 일 많았었잖아."
" 그랬지."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호석의 어설픈 목소리와 상반된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정면을 향해 그 둘을 채운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히 채워갔고 그런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여주가 그를 대신해 엘리베이터 층수를 눌렀다. 층수는 눌러야지, 선배. 그녀의 간결한 음성에 호석이 그제서야 승강기 버튼에 시선을 두며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시간의 승강기 또한 도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집 안에 들어선 방금 장을 봐 온 봉지를 들어 홈바에 올려두던 호석이 잠시 여주에게서 눈길을 회유하고는 못내 못본 척 고개를 아래로 수그렸다. 그리고 이를 눈치 챈 여주가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은 채 운을 띄었다.
" 얘기하자며. 저녁 만드는 거 보러 온 거 아냐."
" 밥은 먹으면서 하자."
" 선배."
" 선배가 아니라 오빠."
" 장난치지 마. 그럴 기분 아냐."
순간 짜증이 돋쳐 목소리를 낮추자 호석또한 그녀 못지 않게 음성을 한껏 내렸다. 보이지 않는 신경선이 그들을 자꾸만 긁어대며 간질였다.
" 장난치는 걸로 보여. 넌."
" 그럼 뭐하는 건데. 볼 자신 없다면서 몇 일전부터 피하려던 사람이 누구였는데. 그래놓고 대뜸 나타나서 얘기 좀 하자고 하면 끝이야."
" ............"
" 뭐가 그렇게 뻔뻔해."
자꾸만 올라오는 울화를 참지 못해 언성이 높아지는 여주의 질문에 영 손에 잡히지 않는 듯 음식 봉지를 뜯어내던 손길이 갈피를 잡지 못해 이내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 복잡해서 그랬어. 다 엉망이라서 죽을 것만 같았다고."
" 선배만 그랬던 거 아냐."
" 그 일로 네가 다쳐서 우린 몇 년을 헤어졌어. 지금까지 동생을 원망했는데 사실은 이 모든 일이 김남준이 꾸며낸 일이라 하고."
" ............"
" 네가 날 알아보지 못했을 때, 기억이 지워졌다 했을 때 무슨 생각까지 한 줄 알아."
" ............."
" 날 잊어버린 게 다행이다."
".............."
"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자."
" ............."
" 두 번 다시는 아프게 하지 말자."
"..........."
" 그게 내 다짐이었어."
거짓으로 뒤덮여진 옛 기억에 감정이 벅차게 올라오는 듯 참아오던 감정선이 무너진 호석의 눈길이 연신 그녀를 끊어내지 못했다. 근데 막상 너 만나니까 안 되더라. 그리고 그가 연이어 말했다.
" 보고 싶었다는 말도."
"........"
" 여전히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면 안되겠더라."
"........."
" 그래서 안아달랬잖아. 결국 너한테 안겼잖아."
" 어차피 결혼은 해야한다며."
" 지금 한예은이 중요한 게 아냐. 나한텐."
"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 네 감정."
마지막 그 대답에 계속해 마주쳐오던 그의 눈길이 낯설게 느껴졌는지 이내 여주의 표정이 점차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 무슨 소리야."
" 내 손을 잡았어야지. 왜 지민이 손을 잡았냐 묻는 거야."
결국 호석은 으스러지듯이 무너졌다.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물어봤고 그녀는 그 질문을 망설였다. 곧 그녀에게서 제일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자 나올 수 밖에 없는 변명의 여지가 입술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내 말은. 호석이 언젠가 들었던 노랫 가사 속 똑같은 그녀의 대답에 날카롭게 살짝 웃어댔다. 두 팔을 지탱하던 아래의 홈바를 내려보다 숨막히게 틀어져버린 시선을 올린 그가 그녀의 말에 응했다.
" 그래. 하고 싶은 네 말이 뭔데."
확신이 가득 찬 호석의 질문에 그녀가 얼이 나간 듯 표정을 여전히 굳힌 채 이미 정해진 대답을 기다리는 사냥감마냥 서 있는 호석을 지긋이 쳐다봤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아버린 듯 꼿꼿해진 손 끝을 애써 펴가던 내 기억 언저리에 문득 학교 정문을 나가던 지민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 그럼 피하려 하지마. 우리 모두의 관계를.'
끝까지 옳았다. 박지민 그는.
" 우린 피한거야. 선배."
덧없이 피어오르는 상념을 떨쳐낸 듯 차갑고도 서늘한 말투가 그들을 기어코 찾아냈고 자신이 생각했던 불보듯 뻔한 답변이 아니라 당황했는지 이내 날카로운 그의 눈길이 더욱 싸늘해짐을 그녀는 느꼈다. 피했던 거라고. 호석이 그녀의 말을 되짚으며 헛웃었다. 귀를 찌르는 그의 작지만 강렬한 헛웃음이 연이어 숨막히던 공간을 더욱 옭아맸다.
" 뭘 피했는데."
" 서로를 믿지 못하는 거."
" .........."
" 김남준 씨도 박지민도 한예은도 문제가 되지 않아."
".........."
" 정작 믿지는 못하면서, 사랑한다 좋아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말하고."
" 난 믿어."
" 날 믿는다면 왜 내가 박지민한테 흔들릴거라 생각해?"
" 그건 널 믿는 거랑 다른 문제야."
" 다른 건 없어."
" 있어. 다른 남자 손 잡는 게 싫은 거야. 신뢰가 없는 게 아니라 내 손을 잡았어야 할 네가."
"..........."
" 왜 내 손을 잡지 않았냐는 거라고."
"..........."
" 난 지금 왜 내가 당연하게 한예은이랑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하냐고 묻는 거야."
" 그 뜻이 아니잖아."
그녀의 대답에 호석이 홈바를 벗어나 여주 앞으로 거침없이 다가섰고 멀뚱히 서 있는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거 봐. 호석의 잠긴 목소리에 여주가 다가온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뭐하는 거야. 그 부질없는 힘에 밀릴 호석이 아니랄 걸 알았지만 자꾸만 밀어내는 그녀였다.
" 대답해."
" 풀어."
" 싫다면 어떡할건데."
" 진짜 선배."
그러자 여태 무뚝뚝하게 표정이 없던 호석이 심드렁한 눈길로 그녀의 허리를 더욱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 말했지. 선배는 민윤기나 김태형한테나 붙이라고."
" ........."
" 난 그 호칭 적응 안 돼."
" 이거 놔."
" 질투가 났어."
"........."
" 항상 널 다정하게 챙겨주는 지민이도, 그걸 받아주는 너도."
"........"
"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지금도 못되게 굴었나봐."
다부지게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던 여주의 행동이 갈피를 잡지 못해 점차 느려졌고 조금은 어두운 거실 조명 아래로 빤히 내려다보는 눈길을 맞받아치던 여주가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 그래서 할 거야. 한예은이랑."
" 우린 싸울 시간도 아까운데."
말 돌리지 말고. 다른 주제로 말을 바꾸는 호석의 콧등을 여주가 검지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드렸다. 왜. 싸울 시간도 아까운 건 맞잖아. 호석이 맘에 들지 않는 듯 투덜거렸다. 방금 전의 으르렁거리던 언행들은 어디가고 은은한 조명 아래 두 개의 다정스런 목소리가 서로의 온기를 채워갔고 제 품에 힘겹게 안겨 밑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호석이 눈에 담아냈다. 오롯이 서로를 마주한 시선과 서로의 자그마한 숨결이 닿을만큼 가까워진 거리는 농염해진 분위기 속에 심리적으로 더한 아찔함을 불러일으켰다.
" 결혼은 너랑 해."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훅 들어와버린 호석의 프러포즈에 여주의 눈이 동그란 원형을 그려냈다. 이내 그 모습을 나즈막히 바라보던 호석이 뒤로 허리를 감싸안던 한 쪽 손을 살짝 풀어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 결혼하자. 우리."
"......뭐야."
" 뭐긴. 프러포즈하지."
" 우리 학생이잖아."
그녀다운 핀잔에 눈을 맞추고 있던 호석이 보조개를 그리며 입꼬리를 양쪽으로 올려댔다.
" 그게 문제가 된다면 졸업하고 하면 돼."
" 언제 졸업할 줄 알고."
" 그럼 미리 여기서 같이 살면 되지."
장난어린 그 말에 여주가 미쳤나며 가슴께를 팡팡 세게 두드렸고 자신의 가슴께를 치던 손을 끌어내려 깍지를 낀 호석이 그녀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 바닥으로 꺼질듯이 아름다웠다. 적어도 이 둘의 시선엔 그렇겠지.
" 할 거야. 말 거야."
" 반지는."
" 꿈이 크다, 너."
그리고 침침해져 밤이 드리운 거실 안으로 서로의 품에 안겨 깍지를 낀 손이 풀어지고 까치발을 든 여주가 호석의 목을 두 팔로 감싸안았다.
" 기억나요. 나 소파에서 재웠던 거."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냐는 듯 호석이 그녀의 물음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서 위 아래로 자그마한 고갯짓을 했다.
" 오늘은 어디서 재울 예정이에요."
" 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껏 묻어나온 호석의 음성이 도발적인 여주에 다시 되물었다.
" 저번처럼 소파에서 재울 거냐고요."
고요한 공간 사이로 목을 감싸안던 여주가 그의 되물음에 망설임 없이 대꾸했고 이의 본질적인 목적을 간파한 호석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 정말 넌 골 때려."
살짝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그녀의 모습에 호석이 뒷목을 긁적였다. 고민의 흔적이다. 그리고 지나지 않아 호석의 눈길이 왼쪽 통로를 향했고 여주의 눈길 또한 그 곳을 향해갔다. 같은 곳을 향한 눈길이 마주치자 웃음보를 먼저 터뜨린 여주에 호석이 따라 미소를 입가로 지어냈다.
후회 없지.
없어.
이윽고 호석은 그녀를 안아올렸고 곧이어 방문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넓은 집 안을 울렸다.
*
녀러분......♥ 제가 이제서야 왔어요ㅠㅠ 그동안 정말 보고 싶었고 찾아뵙지 못해 너무 죄송해요ㅠㅠㅠㅠㅠㅠ
잘 지내셨나요ㅠㅠㅠㅠ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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