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이거 입고 나와라"
"네?이거..요?"
"어.이거.나 참 너 옷입는거 보니까 왜 차였는지 답이 나와. 그리고 옷사고 나서 미용실갈꺼다."
"하.."
비 온뒤 웅덩이에 고여있는 진흙이 섞여 더러운 물처럼 어지러웠던 내 머릿속을 홍정호는 하얗게 비워버렸다. 갑자기 옷, 머리라니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흥신소를 찾아간 이유는 동생을 죽여버리고 싶어서였다. 섣부른 판단도, 쓸데없는 오기도 아니였다. 23년을 내가 이렇게
불행하고 어둡게 살아온건 전부 그 애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아니, 단지 내 생각뿐만이아니라 사실인거다. 이건
부모님의 사랑도 친구도 애인까지도 그 앤 내 것이라면 뭐든지 단숨에, 쉽게 빼앗어버리곤 했다. 처음엔 되찾아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5살짜리 꼬맹이가 하늘로 날아가버린 풍선을 찾으려고 뛰어보는 격이었다.
"장난쳐요?내가 부탁한 건_"
"너 애인 찾고싶다며, 그 일은 그 뒤에 해도 되잖아.나도 그런일은 처음한다고, 내 입장도 좀."
"....."
멋들어지게 고개만 쓱 돌려서 웃는 홍정호. 그의 입가 끝에 걸친 웃음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 왠지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서_일단은 그가 하자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그는 옷 몇가지를 고르더니 계산하기에 이르렀다.
쇼핑백을 손에 몇 개씩 들고 나온 그는 차에 아무렇게나 대충 던져놓은 뒤 타라고 눈짓을 했다. 미동없는 웅덩이에 큰 돌을 던진듯 죄책감이 일렁인다.
"남자들은, 어느정도는 대충 비슷한 거에 환장하지"
"....."
"약간 풀린 긴 웨이브머리, 순수하면서도 섹시해보이는 분위기, 어느정도의 애교 그리고 제일 환장할 때가 있는데, 궁금해?"
"뭔데..요"
"전 여친이 조온나_에쁘게 바뀐 채로 다른 남자랑 미치도록 행복하게 웃고 있을 때_"
흠칫 놀란 눈으로 운전 중인 그를 돌아보자 그는 여전히 앞만 바라본채 능청스럽게 웃고 있다. 지금 내가 니 남친 환장해 돌아가시게 하려고 이러고 있는거야_라면서
-
"아까보단 훨씬 낫네, 이제 여자같다. 야, 빨리 타 시간없어"
"아직 3시밖에 안됐어요."
"니 동생 집에 4시에 기어들어온다며, 그러니까 빨리 타라고"
언젠가 기성용이 나를 품에 안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넌 가만히 있어도 예쁘고 귀엽고 섹시하니까... 변하지 말고 내 옆에만 있어' 라고, 바보같은 난 그 말을 철썩같이 믿었고
지금도 기성용의 그 달콤했던 한 마디 때문에 새로 바뀐 내 머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직도 그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란 증거일거다 이건.
헤어지고 난 뒤 나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기성용의 목소리가 따라다닌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중저음의 귀를 나즈막히 간지럽히는 그 목소리에 가슴 설레여했던게 어렴풋이 떠오른다.
사랑할 때 뜨겁게 나를 불태웠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쇠사슬이 되어 내 몸을 죄여오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게 있다면
난 니목소리만 들어도 쓰러질 듯 심장이 뛰어온단 거다.
기어이 홍정호는 우리집까지 들어오고야 말았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내 뒤를 따라 내 방까지 쫓아들어왔다.
"솔직히. 집까지 들어와서 이뤄낼게 없다고 보는데요"
"너 귀머거리냐. 남자들이 뭐에 환장한다고 했는지 귀에 정확히 안박았네"
"..그래서 지금 그 쪽 말은 내가 지금 그 쪽하고 애인인척 해야 된다.이런거에요?"
"상황파악 빠르네. 근데 한 개 빼먹었다. 그냥 애인이 아니라 찐한 애인"
이건 웬 미친놈일까 싶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참동안 방문 앞에 서서 그를 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정작 홍정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안 들어가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성용, 난 솔직히 모르겠어. 이렇게 해서 니가 돌아올까. 혹시 너도, 웨이브머리에, 순수하고 섹시한 분위기에, 애교, 그리고.
내가 다른남자와 찐한 사이인채로 있으면 흔들릴꺼니
"언니 없을껄?아침에 밖에 나갔어~"
"..진짜 없어?"
"있으면 뭐 어때. 지금은 나랑 니가 사랑한다는데"
"그건 그렇네 아_진작 너랑 사랑할껄 귀여워죽겠다 내 여친_"
"하...."
"아씨 뭐이렇게 빨리오냐 야.4시라며?"
진작...? 내가 그렇게 끔찍했니 기성용. 너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자그마치 3년 반이야. 꼭 그렇게 잔인하게 우리 추억마저 짓밟아야속이 편하니
난 정말, 정말로 주저앉아버릴것만 같아. 니 한마디 한마디가 내 온몸을 구석구석 두드려놓은것만 같은 느낌이야.
"야.야!너 무슨 생각해 뭐라도 해야 될거 아냐"
"아,어..언니.."
가증스러워. 넌 꼭 누구랑 있을 때 아니면 찔리는 거 있을 때만 날 언니라고 불러.
"하..씨..."
"아..미치겠네...야 나중에 때리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