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me Day:: 14
(변백현X도경수)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백현을 반기는 건 쓸쓸하고 고요한 공기뿐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더 넓게 느껴지는 휑한 거실에 잠시 서있던 백현이 담배를 꺼냈다.
협탁에 굴러다니는 라이터를 집어 불을 켜는데 부싯바퀴가 두어 번 헛돌았다.
불꽃은 피어오르지 않고 옅은 가스냄새만 배어났다.
가스가 다 된 라이터라는 것을 확인한 백현이 담배를 도로 뱉어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백현은 하릴없이 침대에 누워 한쪽 팔을 이마에 올리고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경수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이토록 매 순간 경수를 그리는 제 자신에게 일말의 한심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방법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사랑을 좇는 꼴이.
한참을 누워 경수를 생각하던 백현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경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도경수. 단지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도경수, 도경수, 도경수…….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반복해 불렀다.
방 안을 채우는 시계 초침소리에 잔잔한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백현은 텅 빈집의 적막이 싫었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거대하게 백현을 짓눌렀다.
결국 백현이 교복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미 손에 익고 또 익어서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전화번호 열 한자리를 눌렀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음성 녹음은 1번…….
한참의 신호 끝에 돌아오는 건 경수의 목소리가 아닌 딱딱한 안내 멘트였다.
취소 버튼을 꾹 누른 백현이 연이어 통화버튼을 다시 눌렀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안내멘트가 연거푸 들려오면 다시 걸고, 또 걸었다.
어느새 발신 목록에는 경수의 이름이 열 개도 넘게 찍혀있었다.
이쯤 되면 그냥 전원을 꺼버릴 경수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백현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멈출 수 없었다.
열 세 번째 발신이었다. 무미건조한 신호음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 쯤, 반복되던 소리가 멈췄다.
-…….
오랜 기다림 끝에 연결된 전화 너머에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잘한 숨소리만이 작게 오고갔다.
긴 정적 끝에 그토록 고대하던 경수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왜.
"……."
-할 말 없으면 끊는다.
"경수야."
-…….
"보고 싶어."
-…끊을게.
경수의 피로한 목소리와 함께 전화는 허무하게 끊겨버렸다.
백현이 힘없이 손을 떨궜다. 모든 것이 익숙한 일이었다.
받지 않을 전화를 수십통 걸어대는 것도, 어쩌다 연결된 통화가 이렇게 짧게 끝나버리는 것도 모두 다.
그런데 백현은 유달리 오늘따라 가슴 한 구석이 참 많이도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진짜 보고 싶은데.
진심이었다. 미치도록 고독하고 쓸쓸한 사랑이었다.
작은 미소도 돌아오지 않는 아픈 짝사랑이었다.
전화가 끊기자 집 안은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죽어도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공허함에 백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느린 걸음은 거실 한 구석에 자리한 피아노를 향했다.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이 미치도록 싫어서 혼자 시작한 피아노였다.
일상의 군데군데 느닷없이 고개를 내미는 아버지의 기억을 비롯한 잡생각을 달래주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일종의 진통제와도 같은 음악이었지만 그마저도 언제부턴가는 찾지 않게 됐다.
어떻게든 괴로움을 이겨내려 발버둥 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로워서였다.
굳게 닫힌 피아노 위에 뽀얀 먼지가 두텁게 내려앉아 있었다.
참 오랜만이었다.
백현이 천천히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가 느리게 거실을 채웠다.
수도 없이 반복했던 곡이었다.
오랜만의 연주에 한두 번 손이 삐끗한 것도 잠시, 몸이 기억하는 만큼 손은 금세 제자리를 찾아들었다.
가는 손이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을 매끄럽게 오고가며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냈다.
슬픈 듯 하면서도 가을의 안개비처럼 아련한 음악소리는 그렇게 오래도록 거실에 울려 퍼졌다.
***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엄마를 찾을 수 있었다.
학생, 정말 고마워요. 거듭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경수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경수와의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하는 아이를 한번 꽉 안아준 경수가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활짝 웃어본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마지막으로 웃은 날은 언제였는지 도저히 가늠도 되지 않았다.
경수가 어색한 손길로 입 꼬리를 매만지며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했을 때쯤엔 많이 지쳐있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아 조금만 걸어도 금세 피로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날 백현의 친구들에게 당한 구타의 후유증인지, 쉽게 숨이 가빠지고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옥상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치가 떨렸다.
끈질기게 발목을 잡고 있는 나쁜 기억을 억지로 떨쳐내려 경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불편한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아까부터 자꾸만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따로 등록은 해놓지 않았지만 번호만 봐도 백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엔 그냥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쉬지 않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통에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배터리를 빼버릴 생각이었으나 경수는 그러지 못했다.
잠시 핸드폰을 붙잡고 있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저도 모르게 통화버튼을 눌렀던 것이다.
경수야, 보고싶어. 그 말에 마음이 미친 듯이 복잡해졌다.
경수야, 하고 부르는 안온한 목소리가 진심처럼 다가와서.
그리고 그런 제 자신이 죽도록 싫어서. 한심해서.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싶은 생각에 경수는 방을 나섰다.
현관 앞 계단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피부에 닿자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데, 어둑해진 하늘 사이를 비행기 한대가 가로질렀다.
그 남자가 떠나던 날이 떠올랐다.
이렇게 집 앞 계단에 앉아 하늘을 지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울던 그 날이.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비행기를 눈으로 쫓던 경수가 홀로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잘 지내요?"
나는 잘 못 지내요.
당신이 떠난 뒤로 나는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됐어요.
다 망가지고 더럽혀졌어요.
그래서, 나중에 당신을 다시 만나도 웃을 자신이 없어요.
떳떳하게 당신을 바라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그래도 난, 아직도 염치없이 당신이 참 많이,
"보고싶다."
들리지도 않을 만큼 먼 곳에 있는 그 남자를 향해 중얼거린 경수가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그의 서글서글한 미소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렸다.
동시에 통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백현의 목소리가 함께 겹쳤다.
경수야, 보고싶어.
진중한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감겨오는 것만 같아 경수는 고개를 더 깊이 숙여버렸다.
"나쁜새끼……."
***
백현의 친구들 패거리가 단체로 전학을 가버렸다는 사실을 경수는 뒤늦게서야 알았다.
워낙에 결석이 잦은 놈들인지라 이번 역시 그런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어느새 출석부에서도 제외됐다.
경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얼굴만 보아도 구역질이 나는 상황에서 매일같이 같은 교실을 써야 한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큰 걱정이 줄어듦과 동시에 경수는 의아해했다.
자진해서 전학을 갔을 리는 없고…….
경수는 옆자리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백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날 자신에게 누구 짓이냐며 무섭게 다그치던 백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더 이상 그 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이미 모든 상황을 알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네가그런걸까. 나를 위해서? 경수의 시선이 백현의 감은 눈으로 가 박혔다.
잘 때만큼은 강아지처럼 순한 표정이 묻어났다.
조금은 사연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라고, 경수는 생각했다.
오늘 체육시간은 모처럼의 야외수업이었다.
수능이 가까워진 만큼 체육시간엔 으레 자습이 주어졌지만 가끔씩 선생님은 이렇게 운동장으로 학생들을 불러내곤 했다.
체육복을 입고 나와 팀을 꾸려 축구를 하거나 혹은 자유롭게 휴식을 갖는 시간이었다.
경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운동장 언저리를 향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앉자 녹녹한 나무 향이 코끝을 감쌌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구경하는데, 백현이 다가와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새 담배를 피우고 온 건지 알싸한 냄새가 나무 향에 섞여들었다.
자리를 피하려 몸을 일으키는 경수의 팔을 백현이 도로 잡아 내렸다.
"그렇게 싫어? 땅 꺼지겠네."
경수가 마지못해 자리에 다시 앉으며 한숨을 쉬자 백현이 핀잔을 줬다.
경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백현을 잠시 쳐다보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말이라도 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어폰을 연결해 귀에 꽂았다.
이어폰을 통해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졸음이 밀려들었다.
밤만 되면 잠이 통 오지 않는 바람에 매일이 피곤했다.
"아, 날씨 좋다."
백현이 천연덕스럽게 기지개를 펴며 경수를 슥 쳐다보았다.
경수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새 잠든 건가. 백현이 경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수도 없이 경수를 눈에 새기고 또 새겨도 지겹지 않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이 이런 거였구나, 하고 백현은 생각했다.
바람결에 조금씩 살랑이는 경수의 머리칼을 살짝 손으로 건드리던 백현은 문득 이어폰에서 잘게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신경이 닿았다.
잠시 망설이던 백현이 한쪽 이어폰을 조심스럽게 빼서 제 귀에 꽂았다.
혹시라도 깰까 싶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경수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어폰에서는 나지막이 차분한 발라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수의 옆에 나란히 기대앉은 백현은 눈을 감고 조용히 노랫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날 그대를 만나서 사랑의 기쁨을 깨닫고
나 같은 남자도 사랑을 알게 했다오
어느 날 그대를 만나서 사랑의 의미를 배우고
나라는 사람이 있단 걸 알게 했다오
어느 날 그대를 만나서 나는 사랑을 했다오
어느새 저도 모르게 집중해서 노래를 듣고 있던 백현은 왠지 조금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아래서 제 옆에 잠들어있는 사람이 경수라는 것이.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사랑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
백현이 반쯤 감긴 눈으로 멍하니 경수를 응시했다.
처음 경수를 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될 줄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너를 경멸했던 내가,
그로 인해 네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준 내가,
그런 내가 이토록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좋아하고 있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EXO/백도] Some Day 14 (집착남 변백현X철벽남 도경수)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a/0/0/a001d7b110970d0b195d1e2ed0601fa0.png)
결혼비용 아끼려다 싸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