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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다정과 기데레 31~32화
W.쿠키가죠아
전부터 고향에서 뛰고 싶었던 나는 여러 입단 제의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제주 유나이티드를 선택했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첫 데뷔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데뷔전을 미뤄야했다.
그 때 옆에서 나를 챙겨줬던 사람이 바로 구자철이다.
사실 그 전에 몇번 A매치에서 만나 같이 뛰기도 했었지만, 그때는 그저 선배로써 깍듯이 대하며 간간히 한마디씩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빠른 89년생이라 형으로 대하고는 있지만, 어떨 때는 동생처럼 빈틈을 보이면서 웃게해준다거나 친구처럼 건드리면 바로바로 반응이 왔다.
그러다가 또 어떨 때는 누가 형 아니랄까봐, 진지하게 내 고민을 들어주며 상담을 해주고 그에 그럴싸한 답을 내놓는 모습을 보일때면 참 신기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내가 부상으로 인해 미뤘던 데뷔전으로 인해 마음 상했을 때는 가장 먼저 다가와 자신도 그랬다며, 그럴땐 이렇게해보고, 저렇게해봐라 하며 챙겨주었다.
밥도 같이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생활하다보니, 어느새 나와 자철은 구단에서 꽤 유명한 콤비가 되어있었다.
"형, 훈련 끝나고 뭐해?"
"글쎄, 딱히 할건 없는데?"
"그럼 나랑 영화보자"
"영화? 남자 둘이 영화를 보러 가야겠냐?"
"뭐 어때, 나 보고 싶은 영화 있는데 혼자 가길 싫단말야. 같이 가자"
"… 그래, 가자. 할 것도 없으니"
이런 식으로 자주 영화도 보러다녔고, 자주 같이 밥을 먹고, 자주 어울려 다녔다.
가끔씩 서로의 집에도 방문하면서 친분을 계속 두텁께 쌓아가면서 호흡을 점점 맞춰가는 우리 둘을
세간에서는 좋은 콤비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는 콤비라는 단어를 접할때마다 마음이 뭔가 꿈틀꿈틀거리는 듯 간지러웠다.
딱히 그 이유를 알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구단도 좋은 성적을 얻자 신이 났는지 이런저런 이적시장에 선수들을 내보냈다.
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자철도 분데스리가로 진출하기위한 발판에 올라서려 하고있었다.
신이나서 나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온 형의 모습에 웃어보였지만 헤어져야한다는 생각에 속은 씁쓸했다.
"야, 정호야. 나 진짜 분데스리가에 가나봐. 믿겨지지가 않아"
"… 축하해 형,"
"지금 꿈만 같아서 무지 떨린다. 정호야. 하하"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내 심장이 간지러운 것을 넘어서 찌릿찌릿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마주하고 저 신나하는 모습을 보니 아, 진짜 가버리는구나 새삼 느껴졌다.
그제서야 나는 그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좋아한다. 구자철을, 남자로서…
그 사실을 알고나니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미 내가 깨달았을 때 자철은 내 옆에 없었고, 형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항상 딴곳이었기에…
사실 내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난 죽었다 깨나도 자철의 마음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번 이런 마음을 알아버린 나는 알려 하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형의 마음이 저절로 알게되었다.
형의 눈에 항상 걸려있던 사람은 기성용, 바로 그였다.
***
올림픽 발탁에 세사람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 있음을 확인하고 기뻐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자철의 얼굴을 한동안 가까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만이 눈치채고 있는 이 삼각관계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내 입장에서는 불안하고, 긴장을 해야겠지만,
그보다는 아끼는 두 형과 같이 호흡하고 같은 그라운드에서 동시에 설 수 있다는 것에 두근거렸다.
훈련소에 집합하고서 만난 두사람의 표정도 나와 비슷했다. 사실 모두가 그랬다. 마치 소풍으로 들떠있는 아이들 같았다.
하지만 막상 훈련이 시작되고 자철을 쫒고있는 내눈과 성용을 쫒고있는 그의 눈에 우리 세사람의 앞날이 점점 더 보이지 않기 시작하면서 잡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던 순간 어느샌가 나는 또 깨달아버렸다. 성용, 그 또한 자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결국 자철을 향한 나의 작대기만 없어지면 해결되는 이상황을 혼자만 알아버린 나는 그저 뛰고 또 뛰고 훈련에 죽어라 임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꾸 커져 욕심으로 번질 듯한 이 마음을 멈출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무리한 훈련태도로 인해 나는 꿈과 사랑을 동시에 잃어버렸다는 것을 천천히 실감해야 했다.
오버페이스로 훈련하던 도중 나는 인대파열 부상으로 인해 올림픽 대표팀에서 나와야했다.
걱정하는 동료들 앞에서 활짝 웃어보이며 인사를 한 뒤 훈련장을 벗어난 나는 집에 도착해서야 멍하니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점점 격해지는 감정에 펑펑 울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어째서 나한테만 이러는 걸까.
어째서 내 감정을 깨닫게하고, 하물며 자철과 성용의 마음까지 알아채버리게 했을까.
왜 하필 나일까
안그래도 힘든데,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어째서 나는 이런 부상까지 당해 나혼자 꿈에서 멀어져야만 하는걸까.
너무나도 이 현실이 원망스럽고 힘들다. 그래서 결심했다.
단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축구를 선택할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자마자 나는 마음을 추스렸고, 그때부터 재활 훈련에 집중했다.
시간이 흘러 올림픽 시즌이 찾아왔다. 간간히 연락하던 자철이었지만, 그뿐이었다. 통화만 할 뿐 만나자는 말에도 그러지 않았다.
혹시나 그 얼굴을 보고 모든 것이 또 무너져버릴 듯 해서, 사라져버릴 듯 해서 참았다.
기어코 병원까지 찾아온 자철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웃어보여야했지만, 그 마음만은 너무도 따뜻해 조금의 기대라도 생겨버릴까봐,
그래서 일부러 조별예선 경기가 시작할때부터 철저하게 티비를 멀리했다.
혹시라도 카메라에 형들의 얼굴이 잡히면 마음이 너무도 아플 것 같았기에… 경기가 끝난 다음 날 자철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로 결과를 확인하곤 했다.
-정호야, 축구 봤냐?! 설마 또 안본건 아니지? 무려 4강진출이라고! 영국을 이겨버렸어!! 열심히 잘 하고 있으니까 걱정말고 다리치료에 집중해~
선전하고 있는 국가대표팀과는 달리 내 다리의 결과는 처참했다.
열심히 재활에 힘쓰고는 있었지만, 시설이 문제인건지 방법이 문제인건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금기였던 술까지 입에 가져갔다. 오랜만에 마신 술에 몇잔을 비우자 취기가 금새 올랐다.
하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고, 금새 동나버린 술병에 비틀비틀 일어나 냉장고로 향하려 발을 떼는 순간 휘청거리며 떨어진 리모컨이 작동되며 티비가 켜졌다.
'네, 구자철선수. 후반을 몇분 남겨두고 정우영선수와 교체됩니다'
'아, 이건 일본전을 대비한 교체인건가요?'
젠장, 하필이면 티비에서는 한국과 브라질의 4강전이 중계되고 있었다.
경기까지 지고 있던 터라 더 기분이 안좋아져 리모컨을 주섬주섬 찾아 들어 전원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화면에 두사람이 크게 잡혔다.
자철이 교체되어 나가게 되자 성용에게 주장완장을 건네주는 모습, 하지만 그 짧은 화면에도 나는 많은것을 알게되었다.
항상 엇갈려 서로의 뒷모습만 쫒던 둘의 눈이 이제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희미하게 웃고 있던 둘은 분명 이제 서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사이가 되버린 것이다.
계속해서 진행되는 경기를 멍하게 보고 있던 나는 이내 두눈을 질끈 감으며 전원을 껐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손의 힘이 스르르 빠져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리의 힘도 빠져 스르르 주저 앉았다. 그리고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웃어댄 나는 마음이 뻥 뚫린 듯한 기분에 그제야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그동안 사람들 앞에서 억지로 짓고 있던 메마른 미소가 아닌 그야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제대로 지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갖고싶어하는 것을 남에게 빼앗기면 독기를 품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아무리 마음이 커지고 커져 갖고싶어했을지라도 그가 행복을 찾았다는 생각에 웃을 수 있었다.
순수하게 기뻤다. 그리고 그 상대가 역시 평소 좋아하고 잘 따르던 사람이였기에 그 기쁨 또한 컸다.
그렇기에 나는 내 사랑을 고이 접어 마음 한 켠에 집어넣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절대 구겨지지 않게, 절대 젖어버리지 않게 나는 웃고 또 웃었다.
***
올림픽이 끝나고 들어오자마자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가장 먼저 연락을 한 사람은 보경이었다.
기대하던 전화는 오지 않자 시무룩해진 나는 폰화면을 다시 확인하고는 보경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홍정호, 다리는 어때?'
"열심히 재활하고는 있는데, 아직 모르겠다"
'야, 우리 경기 봤어? 우리 좀 멋지지?'
"피식, 염장질이냐? 그래, 너 좀 멋있더라"
'킥킥, 그리고… 들었어?'
"뭘?"
'아냐, 모르면 됐어.'
"…"
꽤나 조심스러운 녀석의 말에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눈치를 챘지만, 모른척했다.
아니, 그보다 조심스러운 녀석의 행동에 오히려 당황했다.
분명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 한가지 밖에 없는데, 그것이 맞다면… 이녀석이 이렇게 조심스러워할 이유가 뭐지?
설마… 에이, 아닐거야. 내 마음을 드러낸 적은 절대 없었다. 그런데 녀석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겠는가.
고개를 저으며 밀려오는 의구심을 지웠다. 절대 그럴리 없었다고 믿었다.
'재활 열심히 해, 너 없이도 이렇게까지 해놨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 고맙다, 열심히 할게"
새삼 녀석의 말에 마음이 짠했다. 녀석은 이미 내가 돌아갈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갈 자리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것이다. 진심어린 그 한마디에 꼭 얼른 나아야할 이유가 더해졌다.
***
정작 기다리던 전화는 새벽이 되어서야 왔다. 그러나 그 내용엔 메달 자랑질 뿐 둘의 사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다친 창수형의 병문안을 가자는 내용뿐이었다. 다음 날 되어 만나서도 그 언급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형은 딱히 행동을 숨기지는 않았다, 성용의 전화에 벌벌 떨며 달려갔으니…
티 낼건 다 내면서도 내겐 제대로 된 설명 없는 자철의 행동은 약간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아무리 쉽게 말할 수 없을 얘기라도 나에게는 친한 동생으로서, 한때 환상의 파트너로 불렸던 사이로서 망설임없이 말해주길 바랬는데, 이젠 그것조차 바라지말아야하나…
새삼 잊으려 잘 덮어두었던 그 마음이 꿈틀되며 되살아나는 듯 마음이 어지럽혀졌다. 그냥 평소처럼 담담하게 한마디만 해주길 바랬는데, 왜 그것조차 안해주는걸까.
예전과는 너무도 다른 거리감에 풀이 죽어있자 주영형이 그런 나를 보며 입을 연다.
"니는 왜그리 풀죽어있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신챙겨라, 다리는 어떻고?"
보경과 똑같이 걱정스럽게 다리에 대해 물어오는 형에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내려봤다.
그러자 형이 내 머리에 턱, 손을 올리더니 머리를 헝클인다.
괜찮다, 선수에게 부상은 어찌보면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거다. 집중하고 빨리 나아서 돌아온나. 역시나 진심어린 말에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다.
하여튼, 우리 팀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감동을 준다. 한마디로 이런 감동 주기 여간 어려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던 나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저도 가볼게요, 하고 병원을 빠져나온 나는 하염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속시원하게 털어놓으면 누가 잡아먹는대나? 얘기할 생각 없는 자철에게 또다시 서운함을 느끼다,
또 아프다던 성용이 생각나 괜찮은건가, 하며 걱정하던 나는 자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단 성용을 아직 안만난것을 확인한 나는 이어서 자철형을 떠보기 시작했다.
"큰일이네, 근데 형은 왜그랬어?"
'뭐가,'
"왜 그렇게 뛰어나갔냐고,"
'왜긴 왜야, 성용이 아프다니까 걱정되서 얼굴이라도 봐야하…'
"…"
'그런건 왜물어,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잖아.'
"중요해, 형. 나한테 뭐 숨기고 있지?"
'뭐? 무슨ㅅ…, 아'
오히려 화난 목소리로 나를 타박해오는 형에 인상을 구기며 뭐 숨기고 있지, 한마디를 꺼내니 그제야 알아차렸는지 말을 멈춘다.
드디어 말하려나 했지만, 이내 곧 자철은 나중에 말하자, 한마디를 남기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멍때리던 나는 순간 열이 받아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형은 이미 통화중이었다.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느낌에 다른 두 통의 전화를 걸었다.
한통은 자철의 매니저형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나 재활치료받으러 독일 갈테니 자철이 독일갈 때 함께 데려가달라고 말한 것이다.
전부터 독일에 가서 치료해보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왔던터라 내 갑작스런 발언에도 쉽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다른 한통은 왜 이녀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경에게 건 전화였다. 이미 걸려버린 전화에 귀를 가져다대니 금새 전화를 받은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뭐하냐"
'그냥 누워있는데, 왜?'
"나 근처인데 나와봐"
'뭐?'
"여기 xx니까 와줘, 기다린다"
내 할말만 하고 뚝 끊어버리고 곧장 xx안으로 들어섰다. Bar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도수 꽤 강한 양주 한병 시켜놓고 녀석이 올때까지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러다 탁, 손이 누군가에게 잡히며 멈추자 인상을 찡그렸지만, 보경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표정을 풀었다.
녀석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옆에 앉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재활운동은 어쩌고"
"재활… 피식, 하루 쉰다고 나빠지지는 않겠지"
"… 들었냐?"
녀석의 말에 고개를 휙 돌려 떨리는 눈으로 녀석을 보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이녀석의 조심스러운 이 행동이 계속 거슬린다.
그런 내 눈동자를 녀석이 진지하게 마주본다. 한치의 떨림도 없이 곧게 마주하는 녀석의 눈이 내 생각이 맞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너 혹시"
"알아, 너 자철형 좋아하잖아"
"…"
"…"
"티났어? 내가, 내가 그렇게 티를 냈어?"
녀석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며 묻는 말에 녀석은 인상을 썼다.
대체 어떻게… 설마, 이녀석말고도 다른 사람들 전부 알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에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 사시나무 떨 듯 몸이 떨려왔다.
녀석이 제 어깨를 잡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꽉 힘이 들어갔다.
"뭘 걱정하는건데?"
"…"
"뭐가 그리 무서운건데?"
"…"
"병신, 니 마음이 그렇다고 해서 누구 하나 뭐라할 사람 없는데, 뭐에 겁먹고 그렇게나 벌벌 떨고 있는건데"
여전히 떨리는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지만, 녀석의 그 진지한 눈에 서서히 떨림이 멈췄다.
그리고 녀석이 한 마지막 한마디에 눈동자의 떨림이 완전히 멈췄다.
그래, 결국 내마음인데 난 뭘 그리 겁먹고 있었을까. 새삼 문득 떠오르는 의문에 생각에 잠겼다.
내가 생각에 잠겨있자 녀석이 내 앞에 놓인 잔을 뺏어 가져가 몇 잔을 넘긴다.
"더 늦기전에 가서 전해, 그리고 다시 이리 와. 기다려줄게. 결과가 어떻든 같이 있어줄테니까 마음껏 털어놓고 와"
"…"
그말에 나는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쳐다보지도 않는 보경을 한번 슬쩍 보고는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던 걸음이 점점 빨라지며 어느샌가 뛰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도착한 자철의 집앞에서 초인종에 손을 갖다댔다.
잠시 망설였지만 곧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딩동- 들려오는 아버님 목소리에 웃으며 인사를 건넨 나는 무리없이 집안까지 들어설 수 있었다.
자철이 방에서 나와 눈을 마주쳤을 때는 덜컥 겁이났지만 보경의 말이 떠올라 다시 웃어보였다.
방으로 들어선 나는 일단 형에게서 그동안 듣고 싶어했던 말을 끄집어냈다.
나 성용이 좋아해, 성용이도 나를 좋아해. 그래서 둘이 사귀기로 했어. 라는 말을 들었을때는 심장이 확 쪼그라들었다.
이미 알고 있었고, 그저 저 입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막상 이렇게 들어보니 생각보다 너무 아프다.
"…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좀 아프네"
나도 모르게 나온 속마음에 얼른 형의 반응을 살폈지만, 작게 중얼거린 터라 듣지 못했나보다.
당황했던 나는 안심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들었지만 재빨리 말을 돌렸다.
사실 고백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저런 말을 들어버린 이상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괜히 투덜거리던 나는 황급히 자리를 뜨려 했지만, 문고리를 잡고나서야 생각을 바꿨다.
나중에 변명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순간 단 한번이라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형, 아니. 구자철. 나 너 좋아했는데"
그리고 자철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다시 몸을 돌려 그대로 빠져나왔다.
툭툭- 어느샌가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약하지도 세지도 않은 빗줄기가 몸에 닿을때마다 마치 바늘이 몸을 찌르 듯 찌릿찌릿 했지만 곧이 곧대로 맞으며 걸었다. 마냥 하염없이 걸었다.
잊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둘의 사이를 눈치챘을 때 접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접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내마음까지 꺼내보였다.
사랑, 그게 뭐라고. 그것도 남자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이렇게 나를 마구 흔들어놓았다.
손을 올려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았다. 손가락을 타고 금새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괜시리 야속해졌다.
비, 하필 고백하는 날 그것도 받아들여질 수 없을 내 고백을 겨우 털어놓은 날 오는건지.
처량해질만큼 처량해진 내 모습이 한 카페 유리창에 비춰졌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피식 웃었다.
이 비가, 무감각해질 정도로 나를 적셔오는 이 비가 사랑이라는 감정과 아픔이라는 감정을 점차 씻겨내려주었으면 좋겠다. 천천히,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분명하게… 지워지길 바란다.
창밖에 비가 내리면 감춰둔 기억이 내 맘을 적시고
잊은 줄 알았던 사람 오히려 선명히 또 다시 떠올라
내 사랑아 사랑아 그리운 나의 사랑아
목놓아 불러보지만 듣지도 못하는 사랑
내 사랑아 사랑아 보고픈 나의 사랑아
그대 이름만으로도 베인 듯 아픈 사랑아 내 사랑아
창가에 어둠이 오면 숨겨논 추억이 내 맘을 밝히네
내 사랑아 사랑아 그리운 나의 사랑아
목 놓아 불러보지만 듣지도 못하는 사랑
내 사랑아 사랑아 보고픈 나의 사랑아
그대 이름만으로도 베인 듯 아픈 사랑아 내 사랑아
우리 함께 웃음 지었던 순간
우리 함께 눈물 흘렸던 순간
이제 그만 보내지만
내 사랑아 사랑아 고마운 나의 사랑아
내 전부를 다 지운대도 가슴에 남겨질 사랑
내 사랑아 사랑아 소중한 나의 사랑아
내 숨이 다 할 때까지 간직할 나의 사랑아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추억으로 가버릴 나의 사랑아. 이젠 안녕
***
한참을 비를 맞으며 걷던 나는 기다리겠다던 보경이 떠올라 택시를 잡으려 길가로 갔다.
하지만 비를 맞고 있는 내앞에 택시는 서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버스를 탄 나는 돌아돌아 다시 녀석 앞에 섰다.
내가 다녀온 동안 꽤 늘어난 술병에 혀를 내둘렀다. 내가 마시던 것과 똑같은 병이 3병이나 늘어져있다.
"다녀왔어."
"… 비 그냥 맞고 온거야?"
"응,"
비에 홀딱 젖어 물 뚝뚝 흘리며 서있는 내모습을 잠시 보던 녀석은 앞에 있는 바텐더에게 뭐라뭐라 한다.
이내 어디선가 타월을 여러장가져온 바텐더에게서 그것을 받아 내앞에 섰다.
내 머리에 타월을 툭 올린 녀석은 손을 들어 내 머리의 물기를 닦아주며 물어왔다.
"어때?"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네, … 덮어야겠지?"
"… 할수 있겠어?"
"… 이것도 생각보다 별거 아니겠지"
어깨를 으쓱하며 하는 내 말에 녀석이 피식 웃는다.
그래, 별거 아니겠지.
어느정도 몸의 물기도 닦아낸 나는 녀석의 옆에 앉아 아까 마시던 술을 이어 마셨다. 문득 녀석의 얼굴을 힐끗보았다.
꽤나 마셨음에도 멀쩡해보이는 얼굴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녀석의 눈과 마주쳤다.
"뭘 봐."
"그냥, 이렇게 보니 잘생겼네 우리 보갱이"
"이제 알았냐? 크크"
"… 근데 진짜 넌 어떻게 알았냐?"
"뭘?"
"내가… 좋아한단거"
"… 궁금해?"
"응,"
정말 궁금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 마음을 완벽하게 속였다고 자부했는데,
이녀석에게 이렇게나 쉽게 들켰단 생각에 괜시리 분하고 억울했다.
정말 궁금했기에 녀석을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니 녀석이 그런 나를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숨을 쉰다.
"기억도 못할거면서"
"내가? 왜?"
"됐어,"
"뭔데, 어떻게 안건데. 나는 자신있었거든. 당연히 아무도 모를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안거야?"
"…"
"… ?"
"매일 보고 있었으니까"
"…"
"매일 보고 니 눈이 가는 곳을 나도 보게 됐고, 매일 그 생각을 하다 저절로 알게됐어"
우와, 너도 나랑 같았구나. 나도 그랬는데…
나도 자철을 보고 있으니까 저절로 자철이 보고있는 성용을 보았고,
그런 성용을 보다보니 성용 역시 자철을 보고있는 것을 알았다.
너도 그랬구나… 피식피식 웃으며 입을 움직였다
입을 우물우물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대로 눈이 스르르 감기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
다음 날, 자철에게 고백을 하고 나와 비를 맞고 돌아다닌 순간부터 끊겨버린 기억에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만난 형은 나를 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씁쓸하게 웃었다. 말은 커녕 얼굴까지 돌려버리자 역시나 나는 어제의 결심을 다시 떠올렸다.
새삼 첫사랑은 안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내게도 해당될꺼란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나도 이렇게 첫사랑을 아프게 끝내는구나.
공항까지, 공항에서도 한마디없이 단둘이 남겨진 우리의 사이는 어색했다.
제주에서의 시절은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답답하다. 그 말로도 부족한 가슴 조여오는 분위기에,
결국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마음을 다잡고 몸을 들썩이며 나오지 않는 웃음을 죽어라 짜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건데? 내가 막 형을 남자로서 좋아하는 걸까봐 그래?"
"…"
"낄낄, 진짜 미치겠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 아니냐?"
"당연하지, 미쳤냐? 징그럽게. 남자는 무슨"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지만 다행히 무시히 뱉어내고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렇게 겨우 진심으로 꺼낸 내 한마디 고백을 한여름밤의 꿈으로 만들어버린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형과의 사이에 만족해야했다.
그래도 하룻동안만큼은 나를 생각하며 내 고백을 곱씹으며 고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이제는 성용과의 사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옆에서 둘의 사랑을 지켜보아야한다.
그래도 조금씩 방해하는 건 한동안 속버린 내 마음의 소심한 복수니까 말리지 말라고,
***
식객 노릇 한번 해볼까 했는데 어느새 가정부가 되버린 듯한 기분에 설거지는 꿋꿋하게 우겨 가위바위보를 해 자철에게 맡겨버렸다.
빈둥빈둥거리며 티비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형의 전화기가 울렸다.
대신 받으라는 말에 전화기를 들어보니 성용이다. 알릴까말릴까 고민하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성용형, 오랜만입니다. 하하"
'정호냐, 그래 오랜만이네. 근데 왜 니가 받아?'
"아아, 자봉형 지금 설거지해요."
'설거지?'
"네, 가위바위보에서 졌거든요."
'아, 그래?'
어이어이, 형님. 너무하네.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팍팍 느껴져와서 대신 받아준 내가 무안해지려 하잖아.
거기다 성용이라는 대답에 바로 달려와 전화기를 휙 낚아채는 자철에 더 기분 상해버린 나는 죽어라 쫓아다니며 귀찮게했다.
구글거리는 얘기를 할때마다 리액션을 보이며 딴지를 걸었지만, 더 늘어나는 알콩달콩한 사랑싸움에 내가 먼저 질려 떨어졌다.
벌써 한시간, 두시간을 넘어 세시간 가까이 통화하고 있는 둘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살게 있어 같이 나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통화중이었기에 가만히 있었는데, 이정도면 인내심 폭발이다.
결국 종이 한 장을 찾아와 슥슥 쓰고는 형 앞에 내밀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30분을 더 질질 끄는 모습에 눈을 흘기니 그제서야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하, 진짜 질린다."
"뭐가?"
"얼굴 못봐서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지만, 이것봐 전화기 터지겠다 터지겠어"
뜨거운 핸드폰을 살짝 집어 달랑달랑 흔들어대니 괜히 헛기침을 하며 핸드폰을 낚아 챈 자철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뭐야, 요기 근처 가는데 옷은 왜 갈아입는데? 괜히 한마디 더 쏘아주고는 뒤따라 나갔다.
나가자마자 키를 내게 휙 던져 얼떨결에 받아든 나는 벙찐 채 차앞에 서있었다.
그러자 냉큼 뒷자석에 올라타더니 안타고 뭐하냐며 핀잔을 준다.
"형 차인데 왜 내가 운전해?"
"내차니까 운전은 니가해야지."
"가정부에… 이제는 기사냐?"
"아쉬우면 혼자 가든가"
실실 웃으며 놀려대는 형에 아씨, 투덜거리며 운적석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휙휙 거칠게 차를 몰자 뒤에서 다리 쫙 펴서 올리고 사고내면 큰일난다, 여기 보험 믿으면 안되. 하는 소리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결국 초기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엑셀을 죽어라 밟은 나였다. 그러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어디지?
천천히 차를 도로 한쪽에 세우고 뒤를 돌아보니, 침까지 흘리며 자고 있는 자철에 한숨을 푹 쉬었다.
흔들어 깨우자 눈을 비비며 주위를 슥슥 둘러보더니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에 어깨를 들썩이며 휘파람을 불며 일단 차에서 내려 운전으로 인해 뻐근한 몸을 풀었다.
형도 역시 뒤따라 차에서 내리더니 새삼 다시 주위를 휙휙 둘러본다.
"어디냐 대체, 이쁘긴 하네"
"몰라 나도, 이쁘긴 하지?"
"휴, 어차피 여기까지 온거 좀 놀다 갈까"
아름다운 풍경에 현혹되버리고 결국 놀다가자는 결론에 마구 뛰놀며 즐기다 또 셀카를 찍어야겠다며 핸드폰을 꺼내던 자철이 순간 폰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하필 그 떨어뜨린 곳이 문제였다. 살짝 고인 물웅덩이에 풀썩 빠져버린 핸드폰에 형도 나도 잠시 눈을 깜빡깜빡이다 얼른 건져냈다.
그대로 절규하는 형과 폰을 집어들고 안절부절 못하던 나는 이내 정신을 잡고 차에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놓은 뒤 폰을 바람이 조금이라도 닿는 곳에 고이 모셔두었다.
대신 내 폰으로 여러장의 사진을 찍은 우리는 차안으로 돌아오자마자 형의 폰부터 확인했지만, 바로 켜지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서비스센터에 맡겨놓고 힘없이 돌아와야했다.
"아씨, 성용이한테 전화오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이참에 성용형 애간장 좀 태워봐"
"뭐?"
"옆에서 보니까 딱봐도 형이 더 좋아죽겠다는게 보이던데, 이참에 성용형 애간장 좀 태우면 달라지지 않을까?"
"…음,"
"이왕 이렇게 된거, 한번 두고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성용형의 마음도 궁금했던 터라 내본 제안이었다.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인 형은 내 폰을 빌려 전화해도 됐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 째에 접어 들었을 때, 처참해진 자철의 몰골에 먼저 제안한 내가 더 미안할 정도였다.
수리 맡긴 폰이 무사히 돌아왔길래 이제 전화해보라고 말해봤지만, 형은 그동안 참았던 것이 아깝다며 전화하지 않았다.
내심 먼저 전화오길 기다리는 눈치라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다음 날까지 뜬 눈으로 성용의 전화를 기다린 듯한 형이었다.
훈련은 없었지만 잡생각이 많이 났는지 먼저 같이 운동가자는 형의 말에 흔쾌히 따라 나섰다.
하지만 퀭한 눈으로 비틀비틀거리며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조마조마했다.
결국 운동 도중 쓰러져 잠이 들어버린 형으로 인해 집에 돌아온 것은 저녁이 다되어서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에도 아직도 피곤해보이는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말조차 쉽게 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침울해있던 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도 안왔어"
"그러지말고, 그냥 형이 해보지?"
"… 생각해봤는데, 역시 성용이는 표현력이 부족해."
"어쩌겠어, 성용형 성격이 원래 그런데"
"그래도, 어떻게 내가 이정도로 연락을 안하는데 전화 한 통도 없지? 걱정도 안되나?"
연락없는 성용에 꽤 화났는지 딱딱해진 말투로 말하며 먼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탄 형을 잠시 보다 따라 탔다.
이런이런, 금단현상인가. 꽤 위험한 상태에 나는 좀 더 나중에 밝히려했던 선물을 급히 꺼내들었다.
"형, 선물 줄테니까 받고 풀어"
"… 선물?"
그래도 선물이라는 소리에 귀를 쫑긋하며 기울인다. 그 모습에 킥킥, 웃다가 얼마전 매니저형과의 대화를 상기했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휴가에 늘어진 자철을 보다못한 매니저형이 내게 찾아와 한가지 제안을 했다.
한국에 갔다와도 좋으니 내가 같이 가서 어떻게든 자철에게 긴장감 좀 바짝 집어넣도록 해보라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 순간 바로 떠오르는 성용의 얼굴에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내일 한국 가자"
"뭐?"
"매니저형이 먼저 꺼낸 얘기야. 한국 잠시 다녀와도 좋대."
"…진짜? 그럼 성용이 볼 수 있는거야?!"
역시나 아까 일은 금새 잊고 바로 성용의 이름을 꺼내면서 펄쩍 뛰는 자철의 반응에 그저 웃었다.
어쩜 이리도 예상을 빗나가지 않냐. 하는 순간 나는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형이 신나라 좋아하다 나를 끌어안은 것이다.
헉, 순간 잠시 멈춘 듯 하다 쿵쾅쿵쾅 빠르게 뛰어오는 심장에 혹시나 이 소리가 자철에게 전해질까 전혀 상관없는 숨을 참았다.
그렇다고 미련하게 밀어내지도 못하던 나는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끼며 한계에 다다랐을 때 땡,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참았던 숨을 후, 내뱉었지만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숨이 멎었다.
"…구…자철…"
형도 나도 끌어안은 상태로 멈춰버렸다.
들리면 안되는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하게 들려오자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성용이 떡하니 보였다.
맙소사, 그제서야 떨어진 우리 둘은 성용의 모습에 눈만 꿈뻑였다.
자철을 힐끗 보니 너무도 놀라 말도 못하고 서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우리 둘을 보는 성용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그 눈빛을 읽은 나는 아차했다.
자철이 말까지 더듬는 바람에 나는 순간 말을 자르고 안으로 들어가자며 바닥에 주저앉은 성용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성용은 손을 무시한 채 일어나더니 자철만을 보며 입을 열었다.
민망해진 손을 바지자락에 문지르며 으쓱하면서 본 자철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큰일이다, 저런 표정의 자철은 오랜만인데, 문제는 저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성용을 향해서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제안했던 전화사건 때문에 성용에게 섭섭한 감정이 화까지 불렀었는데, 다짜고짜 우리 둘을 의심하는 성용의 말에 그 화가 더 커진 것이리라.
아니나다를까, 우리의 사이를 의심하는 성용의 문책에 자철의 대답은 곱지 않았다.
둘을 말리던 내손이 성용의 손에 의해 쳐내지자 자철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말을 하면 할수록 나서면 나설수록 악화되는 상황에 쉽게 입을 다시 열수 없었다.
결국 그 상태로 떠나버린 성용에 자철은 뒤따라갈 생각도 없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성용이 떠난 방향과 집안을 번갈아 바라보던 안에서 들리는 큰 소음에 한숨을 크게 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진열되있던 액자나 장식품들이 거실바닥에 떨어져 깨져있고, 씩씩거리던 자철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하아… 사방에 퍼진 조각들을 조심히 피해 부엌에서 물 한컵을 따라 자철에게 건넸지만 형은 그상태로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형은 한동안 보고 있다 부엌으로 돌아와 조용히 앉아있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보경아, 큰일이다"
'응?'
"말그대로 비상사태야."
나는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을 내가 전화를 참아보라고 한 것부터 시작해 자세히 설명했다.
내말을 듣고 있던 보경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유니까 너는 지금 바로 말고, 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성용에게 전화를 걸어보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거실로 나가보니 형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들어보니 동원인 것 같다. 동원이도 아는건가?
깨진 유리조각들을 정리하고 자철의 눈치를 살폈다. 좀처럼 표정이 풀릴 생각을 안한다.
그런 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왔다. 아파? 어째서?
사실 고이 접겠다고 결심하긴 했지만 일단 나는 자철을 아직 좋아하고 있으니 성용과 자철이 틀어진 지금 가장 좋아라 할 사람은 내가 아닌가?
근데 지끈지끈 아파오는 심장과 머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민 끝에 나온 결론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철을 막연히 갖고싶다는 그런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자철이 아픈 모습이 싫었다.
도와주고싶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혹 내가 지금 그를 위로하는척 다가가 잊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받을 행복은 분명 성용과 함께할 때 얻는 행복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미미할테니까…
내가 가지고 싶긴 하지만, 조금의 미련이 남아있긴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더 웃었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 행복을 방해한다면 나는 그 사랑을 한송이의 꽃으로 만들어 한폭의 그림으로 간직할게
내가 잊게해주고 싶긴 하지만, 조금의 욕심이 일렁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그가 더 웃었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 행복을 도와줄수 있다면 나는 그 욕망을 열병으로 만들어 내가 대신 앓아줄게.
그러니까 내 첫사랑의 희생을 반드시 둘은 그 둘만의 사랑으로 나에게 보답해야 한다.
절대 이대로 끝나서는 안된다. 빨리 화해해.
그래야 희생된 내 마음 빨리 아물고 새로운 꽃을 피우지.
이 상황에 보경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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