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W. 내 절대적 구원
0.
1917년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이후 120년 여가 지난 지금 대한제국은 여전히 건재하다. 대한제국은 황실이 존속하는 입헌군주국. 현재 5대 황제가 즉위하여 다스리고 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황실과 중추원이 공존하는 형태. 황실은 자신의 권위를 위해, 중추원은 국민의 주권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대립각을 이루고 있다. 물론 중추원 즉 국민의 힘이 살짝 앞서 있기는 하다. 당연하게도 황제의 탄핵은 국민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현 황제는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해 하였다. 황제는 입헌군주제 이전, 전제군주제 당시 황실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황태자도 마찬가지.
하지만 권위적인 황권은 오히려 황실의 존속을 흔들 뿐이다. 그 무구한 영광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빛을 잃었다. 왜 그 영광은 기억하면서 비참한 결과는 외면하나. 황녀는 누구보다 이를 기억하고 제 아비의 뜻에 거역했다. 사실 현 황제, 황녀의 아비는 이빨 빠진 호랑이일 뿐이다. 황태자인 황녀의 오라비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일선에서 대부분 물러나 있다. 황녀는 황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아닌 중추원, 즉 국민의 편에 서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황실의 뜻에 저항했다. 황실보다 중추원에 힘이 더 실리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결국 황녀는 황좌를 탐한다. 누가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누가 황제 위에 오르게 될까.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D-30
1-1.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황녀 전하를 모시게 된 민윤기입니다.”
잔뜩 벼린 칼 마냥 날카로운 눈매다.
“네, 반가워요.”
그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몸을 낮춘 민윤기를 내려다봤다.
“차로 모시겠습니다.”
나를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고한 선비가 제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듯, 기품 넘쳐보였다.
진득한 눈맞춤이 끝나고, 서로에 대한 경계로 얼어있던 방 분위기가 풀렸다.
민윤기가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민윤기와 차로 향하는 길은 숨막히는 정적이었다.
그 정적 속에서 또각 또각, 구두 굽이 돌바닥에 부딪쳐 내는 소리가 울린다.
내 머리가 쪼개지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타시죠.”
차문을 열어준 민윤기에게 까딱 고개로만 인사를 했다.
내 머리가 이렇게 복잡한데 구태여 대화까지 해서 더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앞에서 운전하는 민윤기를 보며 다시금 전 보좌관이 줬던 민윤기의 프로필을 되새겼다.
1-2.
민윤기
29세.
아이비리그의 A대학교 정치외교와 철학 전공
대림그룹 민형원 회장의 둘째 아들
이자, 궁내부 정의서 비서관의 조카
이자, 회계원 정호석 주사의 사촌형
마지막으로, 정의서 비서관의 천거.
그래, 바로 이게 문제다. 왜 정의서가 내 보좌관 자리에 민윤기를 앉혔나. 정의서 비서관은 친황제파 중의 친황제파다. 친황제파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이 말이다. 그건 그가 궁내부 비서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대림그룹. 황실에 지원하고 있는 대표 기업이다. 그리고 내 보좌관 민윤기. 아, 울고싶다. 왜 궁내부 비서관이 정의서인 것인가. 왜 내 신변은 궁내부 관할인건가. 오히려 위험하지 않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래, 민윤기를 내쫓자. 이보다 나은 방법이 없네.
1-3.
“보좌관님, 오늘 올라오는 서류는 보좌관님 거치지 않고 바로 올라오게 하세요. 건국기념일 연설문도 직접 쓰고 나중에 확인하시는 걸로 할게요. 디자이너와 의상 관련 얘기도 직접 하기로 했어요.”
민윤기를 내쫓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일명 할 일 안주기.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민윤기는 망설였지만, 내 뜻에 따랐다.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층에 도착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에 사무실을 거쳐 집무실에 도착하였다. 물론 큰 유리벽에 블라인드가 내려진 내 집무실 안에서는 민윤기가 보인다. 할 일 없이 앉아있느니 알아서 인사 이동하거나, 대림그룹으로 가겠지. 능력도 좋은 사람인걸.
1-4.
출근 후로 정신없이 일이 밀려닥쳤다. 정신을 차리니 점심시간일 정도로. 원래 내 보좌관들은 나와 점심을 먹지만 지금은 내가 점심을 먹지 않겠다고 한 상태다. 고로 민윤기는 혼자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신을 차리고 그의 자리를 봤을 때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뭐, 알아서 먹겠지.
다시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저 복도 끝에서부터 요란스러운 소리가 밀려왔다.
안 봐도 알만 하다. 정호석이겠지.
정호석은 정의서 비서관의 아들이자 민윤기의 사촌동생이다. 그리고 내 친구다. 다른 사람들은 이게 무슨 조화인가 좀 의아해 하기도 한다. 호석이는 어렸을 때 내 예동으로 입궐하여 26이 된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다. 물론 호석이는 누구보다도 내 의견을 존중하고 지지해주는 좋은 친구다. 그것이 인격적으로든, 정치적인 것으로든. 내게 몹시 좋은 친구지만 단점이 있기야 하다.
“야, 네 점심.”
뭐, 이런거. 예의 따윈 밥 말아 먹은거 정도?
말투는 이렇지만 그 내용이 다정하니 봐주도록 하자.
“나 점심 안먹은거 어떻게 알고?”
“몰라, 몰라. 나 너 때문에 점심 급하게 먹었어. 체한 것 같아 지금.”
별안간 집무실에 쳐들어온 정호석이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딱 봐도 황녀궁의 것이 분명했다. 안을 열어보니 초밥이다. 정호석의 말따윈 가볍게 씹어넘기며 신나게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너 왜 윤기형이랑 밥 안먹어?”
배를 부여잡고 있던 정호석이 표정을 바꿔 진지하게 묻는다. 저걸 질문이라고 지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넌...진짜 사람이 문제가 있어.”
“나도 알아.”
호석이의 말을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며 밥을 먹자, 호석이는 오만해보일만큼 쇼파에 몸을 한껏 뉘인 채로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너, 그거 누가 가지고 온건지 알아?”
“누구긴. 너, 아...”
그 사람인가보다. 민윤기.
“거봐, 넌 사람이 좀 문제가 있다니까?”
“그래, 나도 안다니까? 밥상머리에서 잔소리 듣는거 취향 아니야. 나가.”
“넌 진짜, 내일이든, 오늘 저녁이든 보자. 분명 마음 바뀌어있을거다.”
“그러던지.”
1-5.
다 먹은 도시락을 책상 한켠에 두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는데 신경이 쓰였다. 그 도시락통이 내 마음 한 켠을 쿡쿡 찔러서. 이 사람은 괜찮지 않을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
창 밖의 민윤기는 뭔 서류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일도 안줬는데 뭐 그리 할 일이 많은지 열심이다. 일부러 쳐다본건 아니다. 집중도 안되는데 집중하려니 시간이 참 안가서 한 번 쳐다본 것 뿐이다.
그런데 자꾸 시선이 간다. 날카롭고도 둥근 얼굴이 심각한 표정을 짓느라 찌푸려지는 것도.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내려치는 것도. 딱 맞는 정장에 절로 시선이 향하는 넓은 어깨도. 다 자신을 한번 믿어보라는 것처럼 그렇게 믿음직해 보일 수가 없다. 아, 이건 정호석의 저주다. 저주일거야!
1-6.
뭐에 홀린 것 마냥 민윤기를 빤히 보고 있는데, 시계를 확인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 집무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 내 집무실? 내 집무실로 온다!
‘똑똑똑’
단정한 소리에 어떤 내용을 쓰고 있던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 연설문을 급하게 쓰는척을 해본다.
“들어오세요.”
“전하, 업무 보시는데 실례지만 벌써 5시가 넘었습니다. 황녀궁으로 돌아가셔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오늘 남은 업무가 있으십니까?”
벌써 퇴근시간인가보다. 민윤기를 쳐다보다가 시간을 다 보내버렸다. 이래서야 답이 없다, 답이 없어. 일단 남은 업무가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남은 업무 있어도 없는 거다 오늘은.
“그럼 황녀궁으로 모실까요?”
“아니, 그 전에 비서님과 할 얘기가 있는데요. 잠시 시간 괜찮아요?”
아 내가 생각하기에도 과한 친절이었다. 내 보좌한테 시간 있냐니.
“네, 물론입니다.”
손짓으로 그를 소파에 앉게 한 후 나도 그 앞 소파에 가 앉았다. 내가 발걸음을 옮겨도 구태여 따라붙지 않는 그 눈길이 괜히 궁금해진다.
“오늘 어떠셨어요?”
짧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다.
“... 오늘은 전 보좌관이 했던 업무를 점검하고, 그동안 황녀 전하께서 진행하셨던 업무를 모두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업무에 있어서...”
“그래요. 그것도 그런데, 제 말은...”
“실례지만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전하의 보좌관이지만 아직 신뢰하시지 못하는게 당연합니다. 전하의 신뢰를 얻는 건 제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시 민윤기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의 말에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민윤기 보좌관은 어떻게 제 신뢰를 얻을거죠?”
“앞으로 차차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제 능력도,”
민윤기는 내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 충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