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에게 12
13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를 마친 은주가 뚜껑이 닫히지 않을 만큼 가득 찬 상자를 들고 부엌으로 나왔다. 버리긴 버려야 하는데, 당장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은주가 상자를 식탁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한숨을 돌리고 정장 대신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 하는 찰나,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 없는데... 엄만가? 엄마! 내일 온다며 왜 벌써 왔,”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엄마일 거라 확신한 은주가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에게 왜 오늘 왔냐고 중얼대며 문을 연 은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어...요...?”
말끔히 차려입은 정장, 손질을 하다 말았는지 차분히 내려앉은 머리,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안쓰러울 정도로 핼쑥해진 얼굴. 은주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성우였다. 성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은주는 생각했다. 나 이 사람 못 잊었구나. 앞으로도 잊기는 글렀다, 하고.
“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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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많이 놀랐지?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거 알아. 그런데 안 오고는 버틸 수가 없었어. 2년을 함께 했으니 헤어지고 나서 힘든 게 당연한 거란 생각에 나도 견뎌보려고 나름 많이 노력했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점점 더 힘들더라.”
떨리는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말하는 성우의 모습에 은주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차마 성우의 눈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은주가 할 수 있는 건 성우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밖에는 없었다.
“처음엔 좋았던 순간들만 계속 떠오르더라고. 우리 처음 만난 날, 네가 나한테 했던 고백, 첫 데이트, 뭐 이런 행복했던 순간들이 자꾸 생각나서 미치겠는 거야. 그러다 시간이 지나니까 이젠 우리가 싸우던 순간들까지 그리워지더라. 내 일상에서 사람 한 명 사라진 것뿐인데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멀쩡히 남아있는 일상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어. 매일 후회하고, 그때 내가 너를 붙잡았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하고. 그게 내 하루의 전부였어. 오늘 회사 끝나고 차에 탔는데, 상상 속의 네가 자꾸만 나한테 말을 걸어서 도저히 네 집을 지나칠 수가 없더라.
많이 보고 싶었어 은주야.”
이별 후 힘들었던 건 은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은주는 성우의 말을 끝까지 들은 후에도 선뜻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다시 만난다 해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 뻔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또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식탁에 놓인 커피 잔만 만지작거리던 은주가 고민 끝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난 오빠 하나도 안 보고 싶었는데. 헤어지고 나서 나 되게 잘 지냈어. 이야기 끝났으면 그만 일어나요. 오늘 피곤해.”
성우가 끝까지 자신의 눈을 피한 채 의자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가려던 은주의 팔을 잡았다. 은주의 팔을 놓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성우가 은주의 눈높이를 맞추려 허리를 살짝 숙였다. 마지못해 성우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은주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은주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긴 성우가 은주의 눈을 맞추며 물었다.
“정말로 나 안 보고 싶었어?”
제자리에 서서 울먹이던 은주는 성우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제야 미소를 되찾은 성우가 자신의 품에 안겨 그칠 줄 모르고 우는 은주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너도 나 보고 싶었으면서.”
은주가 성우의 품에 안긴 채 흐느끼며 말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뭐하다 이제 와?”
왜 두 달이나 지난 후에야 찾아왔냐는 은주의 물음에 성우는 은주를 토닥이던 것을 멈추었다. 은주가 울다 말고 성우를 올려다보았다. 성우가 미소를 거두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무서웠어. 나는 너 없이 이렇게 힘든데, 넌 벌써 날 다 잊었을까 봐. 그동안 내가 못 해준 게 너무 많아서 네가 나한테 지칠 대로 지쳤을까 봐.”
성우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피식 웃었다. 다시 목을 가다듬은 성우가 은주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 들어와서 보니까 그런 걱정이 싹 사라지더라.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확인한 네 표정, 계속 내 눈을 피하며 울음을 참는 네 모습, 그리고 그런 네 뒤로 보이는 저 상자 때문에.”
은주가 뒤를 돌아봤다. 아직 버리지 못한 갖가지 물건들을 잔뜩 쌓아놓고는 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웃겨 보였을까 하는 마음에 은주의 얼굴이 빨개졌다.
“오늘 버리려고 했어. 진짜로. 다 버리고 오빠 잊으려고 했는데, 그 전에 와줘서 다행이야.”
은주가 웃으며 말했다. 말하고 나니 민망했는지 자신의 품에 다시 얼굴을 묻는 은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성우가 은주를 꼭 안아주었다. 간신히 울음을 멈춘 은주에게 성우가 물었다.
“왜 나 안 보고 싶었다고 거짓말했어?”
은주가 착잡한 표정을 하고선 대답했다.
“나도 무서웠단 말이야. 오빠가 이렇게 찾아올까 봐. 찾아와서 다시 시작하자고 할까 봐.”
예상치 못한 은주의 대답에 놀란 성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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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우리 손가락도 걸까?”
“좋아.”
“도장도 찍을래?”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김에 복사까지 하자.”
“짠. 이제 완벽하다.”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은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는 약속을 한 후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두 달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역시나 은주가 바랐던 회사에 합격하게 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신나서 한참을 떠들어대던 은주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성우에게 말했다.
“오빠, 이제 가요. 내일 출근해야지.”
“내일 토요일이거든요.”
“아 맞다.”
“그리고 우리 두 달 만에 만났는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음... 나도 막상 오빠 보내려니까 좀 아쉽네. 뭐 할래요? 영화 한 편 볼까?”
“영화 좋지! 뭐 보고 싶은 거 있어?”
“난 로맨스면 다 좋아. 아, 그거 볼까?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거?”
“노트북? 다운 받아 놓은 거 있어?”
“당연히 있지. 나도 노트북 여러 번 봤는데.”
“노트북은 또 언제 그렇게 봤대.”
“오빠의 취향이 곧 내 취향이 되어버렸으니까.”
컴퓨터를 가지러 방에 들어가려던 은주가 뒤돌아서서 성우를 보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성우가 그새 능청스러워진 은주를 보며 못 말린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웃었다.
+ 성우와 은주의 사전에 영원한 이별이란 없다!!
++ 독자님 한 분 한 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