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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19 >
김석진, 전정국, 민윤기가 모인 것은 내가 봤던 그 악마를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름은 김태형이랬다. 김태형이 바로 우리 집으로 들이닥친 건 예상 밖이라더니 곧바로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내 말을 듣자 그건 또 무슨 일이나면서 의아해 했다.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후로는 김태형을 본 적도 없는데. 날짜는 점점 줄어드는 통에 사건이 생기니 불안감만 커져간다. 이대로 기억을 못하면 그는 사라진다. 의자에 몸을 푹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기억나라. 기억난다고 거짓말하면 다 들키려나. 당연히 들키겠지.
“자.”
옆으로 들리는 나른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윤기 선배였다. 선배가 주는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악마 놈들이랑 계약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
내 옆자리에 선배가 앉으며 말했다. 정국은 어제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거라고.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한 그의 눈가가 젖어있었다. 그도 줄어드는 숫자가 불안한 것이다. 나처럼.
“멍청한 선택이지.”
맞다. 멍청한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그냥 미친 정신병자라고 넘겼다면 이렇게 혼란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었던 건 이미 예정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확인하고.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거든. 멍청하다고.”
선배가 캔에 남은 음료수를 다 마시고는 쓰레기통에 캔을 던졌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도 못해. 그러면 내 동생이 멍청하다는 얘기라서.”
동생 이야기를 꺼내는 선배의 표정이 슬펐다. 선배한테 동생이 있었구나. 만나면 인사만 주고받는 사이였기에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동생이 악마 놈 때문에 세상을 떠났어.”
“......”
“처음엔 그 놈들한테 별 감정이 없었는데 이후로는 꼴도 보기 싫더라.”
선배가 전정국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둘 사이를 오고갔던 그 기류를 이제야 이해했다.
“너랑 동기였는데.”
“동기요?”
동기 중에 선배의 동생이 있었다는 말은 또 처음 듣는 얘기다. 요즘 처음 듣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지금은 학교 안 다녀.”
“자퇴했어요?”
“못 다니는 거지. 아팠거든.”
“아팠구나…….”
“평생을 아프다가 떠났어.”
선배 특유의 조곤조곤하고 담담한 말투에서 슬픔이 전해졌다. 아주 크게. 말은 이렇게 해도 속은 아파서 문드러져가고 있는 게 보였다. 선배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학교 다닐 때 여주 네 얘기도 꽤 했었어.”
“...저랑 친했어요?”
“그건 아닌 것 같고. 친한 친구가 별로 없었어.”
“아…….”
누구였을까. 민 씨 성을 가진 동기라면. 머리에 민세나라는 이름만 떠올랐다. 세나는 살아있으니까 당연히 아닐 테고. 기억이 나지 않아 미안했다. 그래도 동기 중에 누가 세상을 떴다면 얘기가 나왔을 텐데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저기 선배, 이름이 뭐예요?”
질문을 하기까지 고민을 했으나 결국 물었다. 누구인지는 알아야 진심을 다해 슬퍼할 수 있으니까.
“세나. 민세나.”
귀를 의심했다.
“누구요?”
“민세나.”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눈앞이 하얗다.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언젠가 받아서 가운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은 박지 민 실장의 명함을 닳도록 만졌다.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나는 제 3자이니까.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려니 마음에 걸렸다.
레스토랑에서 본 세나는 내가 알던 민세나였고 박지민 실장의 입양된 동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민세나는 민윤기 선배의 죽은 동생이다. 동명이인일 수는 없다. 선배의 동생인 세나도 박지민 실장의 동생인 세나도 나와 동기니까. 민세나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고 박세나가 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정국이 세나의 손을 잡은 장면이 스쳤다. 선배가 그랬다. 동생이 악마와 계약을 했다고. 악마인 정국이 세나를 데려간 건 우연이 아니다.
민세나를 만나야 한다. 꾸깃한 명함을 펼칠 때였다.
“여주야, 그 놈이다.”
선배가 빠르게 뛰어갔다.
***
선배는 무척이나 빨랐다. 열심히 뛰어도 선배와의 거리는 점점 늘어나더니 결국 완전히 선배를 놓쳤다. 정체 모를 악마가 병원에 온 이유는 뭘까. 선배가 사라진 쪽으로 가다보면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아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희미하게 남은 그 악마의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나도 찾던 중이었는데.”
몸을 돌리자 내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가 보였다. 그 날 새벽에 창문으로 들어온 남자. 김태형이라는 이름의 악마. 그 얼굴을 확인하자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아가씨.”
김태형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로 얼굴만 쭉 내밀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입에는 막대 사탕을 물고 있었다.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며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내가 물러서면 한 걸음 더 가까이 발을 내밀었다. 나를 찬찬히 살피는 모양새가 악마 같았다. 정국이 나를 관찰하던 모습과 비슷했다.
“진짜 닮았네.”
“저기요.”
“내가 웬만하면 다시 안 찾아올랬는데. 그 놈들이 나를 끈질기게 쫓아오는 것도 거슬리고.”
김태형이 물고 있던 사탕을 빼냈다. 인공적인 딸기향이 퍼졌다.
“아가씨 얼굴은 다시 봐야겠더라고.”
“내 얼굴은 왜요?”
“아직은 말해줄 수 없고. 민세나는 아직 만나지 말고.”
“민세나를 알아요?”
“오늘 나랑 만난 건 아가씨 친구들한테는 비밀. 볼 일 끝났으니까 이만 안녕.”
걸음을 옮기던 김태형은 못한 말이 있는 듯 사탕을 다시 입 안에 물다가 다시 빼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갈 테니까 아가씨 친구들한테 나 그만 찾아다니라고 전해. 숨어 다니는 거 귀찮아 죽겠어.”
내 친구들이라면 그 셋을 말하는 것이다. 떠나는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왜 찾아왔어요!”
“얼굴 보려고!”
“세나는 어떻게 알아요!”
“그건 비밀!”
“뭐가 비밀인데!”
“배려야. 알려고 하지 마.”
대체 뭐가 배려일까. 다시 입을 떼려고 하자 김태형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얼마간 서서 바라보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민세나를 만나지 말라고 했다. 분명 나쁜 의도로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김태형을 믿어도 될까.
감사합니당♥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