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선] 우리에게 끝은 없다 完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c/1/6/c164b0b09e0a5bff982aece6f914d0b5.jpg)
호텔의 특실은 넓고 가구들은 커다랗고 무거워 보였으며 카펫과 커튼은 두꺼웠고 비수기에 접어든 탓인지 칼칼한 먼지 냄새가 났다. 화장대 위에는 옅은 주홍색 글라디올러스가 세 줄기 꽂혀 있었다. 나의 상처 때문에 방 안에서 저녁을 시켜 먹었다. 글라디올러스와 텔레비전에서 보내주는 클래식 연주 프로그램이 위안이 되어주었다. 하이페츠가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끝내고 뒤이어 비탈리의 샤콘느를 연주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 같았다. 웨이터가 그릇들을 내간 뒤에 그가 잔뜩 웅크린 나의 몸을 만지며 씻겨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첫날 모텔에서 그가 내 몸을 보여달라고 했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방 안에서 옷을 하나씩 벗었다. 무릎의 상처와 온몸의 멍 자국들이 하나하나 드러났다. 마지막 옷을 벗었을 때 나는 팔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말했다.
“ 말해봐요.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
김창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내 몸을 바라보더니,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상처를 누르게 될까 봐 염려하며 어색하게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 이게 네 몸에 기록된 나인가… ”
죄책감에 가득 차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몰라 난처해하는 몸짓이었다. 그가 함부로 아픔을 함께 나누는 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가 진실하게 느껴졌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의 등을 반본적으로 쓸어주기만 했다. 상처는 나의 몫일 뿐이었다. 나도 그의 턱을 천천히 쓰아듬어주었다. 그는 내 몸에 이불을 감아 침대에 앉혔다.
“ 목욕하기엔 너무 아플 것 같다. 조금만 기다려. 약부터 구해와야겠어. ”
“ 어디 가려구요? ”
“ 마을에 가면 작은 약국이 있을 거야. ”
김창수는 나의 얼굴을 바로 잡아 정면으로 바라본 뒤 나갔다. 몹시 허전하고 담백한 동작이었다.
나는 이불을 둘둘 감은 채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텔레비전을 멍하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잠이 들어버렸다. 김창수가 돌아왔을 때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이상이나 지나 있었다.
“ 약국이 없었어. 시내 중심까지 가서야 겨우 찾았어. ”
그는 냉장고 속에 있던 물을 따라 신경안정제를 먹이고 이불을 펼쳤다. 잠시 잠든 사이에 멍과 상처들은 한결 옅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와 상처와 멍이 든 주변을 누른 뒤 조심스럽게 약을 발랐다. 약을 바르는 동안 김창수는 ‘괜찮아?’ 물으며 나의 입술과 멍과 상처 주변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약냄새와 김창수의 냄새가 뒤섞이고 까칠한 턱이 나의 턱과 상처와 멍에 닿고는 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도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보며 그렇게 물었었다. ‘괜찮아요?’ 무수한 발을 가진 기나긴 슬픔이 우리들의 부정한 궤적 위로 지나갔다. 이상하리만치 가볍고 나른하고 비현실적으로, 그렇게도 불행했던가. 괜찮아요라는 말 한마디가 그토록 따뜻했으니… 어느 사이 눈물이 솟도록 익숙해진 이마와 뺨, 눈동자와 입술, 피부와 살냄새… 나는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피가 끓는 듯이 마음이 뜨거워져서 그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넘쳐나는 흔하고 흔한 동정에 불과하지만, 그 남루하고 무상하고 일시적인 망상에 영혼을 다 던지는 그것이 우리들 존재의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나는 그에게 파고들었다. 이 순간보다 더 나은 순간이 있을까… 김창수의 중얼거림이 들린 듯했다. 그는 처음엔 나의 상처를 피하려고 조심했으나 그가 분별을 넘어서버리자 나 역시 결국은 어느 것이 통증이고 어느 것이 쾌락인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그의 것이 나의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쾌락의 끝에 보랏빛으로 회오리치는 내 죽음의 모습을 보였다. 사람은 그 자신이 빠져드는 욕망 속에서 동시에 자신의 죽음의 모습도 선택하는 것이다.
“ 사람이 가진 가장 깊숙한 무의식적 욕망은 노예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 그런데 지금 그 말을 이해하게 된 거 같아. ”
김창수가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목과 다리와 발을 닦아주며 말했다. 참을 수 없는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중얼거렸다.
“ 머리를 감고 싶어요. ”
김창수는 손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만져보더니, 욕실로 데려갔다. 둥근 욕조의 가장자리가 넓어 바닥에 수건을 펼치고 머리를 욕조 속으로 향한 채 다리를 접고 반듯하게 누울 수 있었다. 김창수는 욕조 속으로 들어가 허리를 굽혔다. 샤워기의 물이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약간 차갑게 느껴지는 물줄기… 그리고 커다랗고 따뜻한 열개의 손가락… 그는 조심스럽게 물에 젖는 머리카락을 몇 번 인가 쓰다듬고 샴푸의 거품을 일으켰다. 두번째의 샴푸를 할 때 나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상처와 슬픔과 불안과 몸 안에 스민 부정한 섹스의 기억들까지도. 머리가 점점 가벼워졌다. 그가 손을 놓으면 깃털 씨앗처럼 날아오를 것 같이… 그가 나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 사랑해… ”
김창수가 말했다. 충분해, 이것으로 충분해…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자갈이 둥글게 닳은 해변을 걷다가 커피를 마시고 출발한 것은 정오였다. 나는 비장했고 건조했다. 옷이 스칠 때마다 상처들이 따갑고 쓰라려고 이따금 입술을 물고 얼굴을 찌푸렸다. 돌아오는 내내 김창수 역시 한마디 말도 없었다.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잔뜩 긴장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도 몸 속에 숨은 상처라도 있는 것처럼 이따금 입술을 물고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더이상 나 자신에게조차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정리도 하지 않기로 했다. 김창수에게는 더욱이 묻지 않기로 했다. 감정이란 때로 이상한 것이다. 약속할 수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기 때문일까. 그 동안 김창수에게 느꼈던 열정이란 그것으로 충분할 뿐 나의 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그날 밤을 지나고 아침이 되자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의 생과는 더욱이 무관해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헤어지면 우리 사이에 일어난 한때의 얽힘은 이 세상 아무도 모를 것이다. 먼 강변에 아무도 모르게 죽은 새 한 마리가 마르고 해지고 녹아 마침내 모래 속으로 스며들어버리듯이. 덧없이 영원 속으로 익사하는 것이다.
14번 국도였다. 휘어진 모퉁이를 돌자 내리막길이 직선으로 뻗어있었고 차들은 한결같이 고속 질주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백 미터 앞 삼거리 교차로의 신호등이 녹색 신호에서 이제 막 노란 신호로 바뀌었다. 김창수는 노란 신호를 빠르게 통과하기로 했는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속력을 올렸다. 그것은 노란 신호등에 대한 김창수의 습관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지그시 조였지만 나는 태연한 척했다. 앞서가는 차도 그대로 통과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시속 백삼십킬로미터쯤으로 달려가던 바로 앞의 흰색 승용차가 예비 신호도 없이 신호등 바로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갑자시 멈추어 섰다.
김창수는 급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차를 세우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서 있는 흰색 승용차 바로 뒤에서 핸들을 꺾어 이차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끔찍한 충격 뒤에 차가 공중으로 떠오른 듯했다. 차는 핑그르르 돌며 맞은편 도로에 이제 막 선 봉고차와 택시를 덮쳤고 트럭은 이십 미터쯤 밀려나간 뒤 논바닥으로 튀어나가 뒤집어져버렸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말짱했다. 차가 팽그르르 돌 때 김창수와 나는 마주 보았었다. 그는 이미 핸들을 놓아버린 상태였다.
그건 비디오테이프가 천천히 감기듯 느리고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그것을 몇 초의 순간이었다고 재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시간의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생은 마치 영사막 위에 흘러간 빛처럼 창백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마주 보았고 한순간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수긍했고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공감했고 일치했다. 충분했다.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눈을 아주 천천히 깜빡인 뒤 둘이 동시에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충돌… 이것이 내 욕망이 선택한 죽음의 모습이었는가. 사랑이 그렇듯 삶도 죽음도 참을 수 없도록 남루하고 무상하기만 했다. 나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보랏빛 회오리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마지막 순간엔 후의 웃는 얼굴이 보자기처럼 커다랗게 나를 덮었고 하나의 문장이 내 몸 속에서 울렸다. 그것은 그가 내 가슴에 심은 첫 문장이었다.
ㅡ 괜찮아요?
fin.
| 사담 |
우리에게 끝은 없다 完 둘에게 사랑은 끝이 없어도 생은 끝이 있기 마련이죠. 어처구니 없는 세드엔딩… 죄송합니다 T_T 지금까지 저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다음주에 개강으로 인해서 거의 찾아오지 못할 듯 싶어요. 그래도 이렇게나마 글을 쓰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우리는 희미해져가는 사랑속에서 사랑을 배우기도 한다.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영원히 내 곁에 남아 있을 수는 없다는 사랑의 진실을. _무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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