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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전체글ll조회 1015l 2


[축선] 우리에게 끝은 없다 1 1 | 인스티즈







소녀 시절의 우울






 소도시의 언덕 위 오래된 주택지에 파묻힌 낡은 단층지 대문을 들어설 때면 분명 평평한 마당인데도 언제나 아래로 갑자기 내려서는 느낌이 들었다. 좁다란 마당가 담을 따라 사루비아가 피어 있고 사루비아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색색가지 꽃이 핀 장미나무들과 아주 오래된 동백나무와 사철나무가 심어진 소박하고 그늘이 깊고 퀴퀴한 흙냄새가 나는 정원이 이어진다. 사철나무 가지엔 새장이 걸려 있었다. 개집에 묶인 덩치가 큰 누런 개는 후과 나를 멀뚱히 보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포도 넝쿨이 덮인 창고와 부엌 사이의 통로에서 푸른 알이 송송 맺힌 포도송이들을 조심스럽게 젖히며 엄마가 나왔다. 엄마는 보통의 할머니들처럼 희끗한 여름 셔츠와 추상적인 무늬의 값싼 치마를 입고 있었다.


 엄마를 확인하자 곧 나의 시선은 모호하게 흐려졌다. 엄마의 늙고 초췌하고 딱딱한 얼굴은 갑자기 바꾼 예기치 못한 가면처럼 늘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니마저 먼저 보내고 난 뒤 엄마가 빠르게 상하고 있는 탓도 있었지만 나에겐 열두 살 이후로 엄마의 얼굴에 대한 일종의 장애가 있었다.


 중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다른 도시의 사립 학교에 자리를 얻게되자 엄마는 할머니와 나를 이 집에 남겨두고 언니와 여동생과 남동생을 데리고 떠났었다. 엄마와 할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다 할머니는 노령에 낯선 곳으로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할머니께 맡기고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언니도 아니고 여동생도 아니고 하필이면 나였던 이유는 뚜렷하게 없었다. 물론 언니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여동생과 남동생은 너무 어렸다는 것이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쩌면 늘 고분고분했던 나의 성격 탓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나로선 너무 가혹한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떠나자마자 이내 해가 지고 깨어진 연탄처럼 캄캄한 어둠이 내릴 때까지 나는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울음을 터뜨려버릴 것만 같아서 대문을 등진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가족들이 떠나간 공동과, 텔레비전과 장롱 따위가 비어버린 자국과 정적은 열두 살의 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버거웠다. 몇 번인가 할머니가 데리러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대문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다. 할머니는 나를 업어다 방에 뉘었다. 나는 벽 쪽으로 돌아누워서 눈물을 조금 흘렸던 것 같다. 그렇게 늙은 할머니와 어린 손녀 단둘이 살아가는 고적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집을 떠난 엄마는 그후로 아버지가 다시 발령을 받아 돌아왔던 칠 년 동안 단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가 처음 부임한 여고의 학생이었다고 한다. 제자였던 엄마와의 미묘한 관계가 문제가 되어 아버지는 면직은 면했지만 시골 학교로 발령을 받는 고초를 겪었다. 엄마는 학교를 졸업한 지 삼 년 만에 아버지와 결혼식을 올렸다. 엄마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당시 엄마는 간호 전문대학을 이제 막 졸업하고 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한 간호사였다. 그 결혼은 양쪽 집에서 서로 질세라 길길이 반대롤 하고 나섰다. 그 과정에서 결혼을 먼저 승낙한 쪽은 할머니였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 이상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외가 쪽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아이를 지우라는 것이었다. 외가에서는 홀어머니에 외아들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집안도 마음에 들지 않았찌만 무엇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선생이 학생을 몇 년에 걸쳐 농락해오다가 급기야는 임신까지 시켜 간호사로 앞날이 창창한 딸을 망쳤다는 것을 분해했고 집안의 수치로 여겼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할머니는 외가로부터 끔찍한 수모를 겪어야 했다. 동짓날 외가의 잠긴 대문 앞에서 여섯 시간을 기다렸다가 몸이 꽁꽁 얼어서 돌아온 할머니는 다시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고 결국 배가 불러오던 엄마는 외가와 절연하는 조건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일종의 보복과도 같은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살아 계신 동안 한 번도 친정에 갈 수 없었다.  나는 칠 년 동안 꼬박 할머니와 살았다. 대학을 들어가면서야 자연스럽게 이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한 해 뒤에 온 가족이 돌아왔다. 처음엔 한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는 멀고 낯선 길을 토요일마다 어김없이 갔었다. 그러나 첫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할머니에게로 돌아온 후부터는 주말에 가지 않았고 심지어 방학 때에도 일 주일 정도 억지스럽게 머무르고는 서둘러 돌아와버렸다.


 엄마 집의 생활은, 적막하고 검소하고 결핍되고 물이 드는 천장처럼 자꾸만 습기가 차는 할머니와 나의 생활과는 너무나 달랐다. 엄마는 새 냉장고를 샀고 새 전축을 샀고 믹서기를 사들이면서도 우리에게 털레비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위해 도넛을 만들고 책을 보며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먹으면서도 할머니와 내가 무엇을 먹는지는 모르는 체하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나와 할머니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내버린 것이 분명했다.


 열두 살의 그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 차가운 비가 내리는 버스 차창에 기대고 울며 돌아왔던 그 날 이후 그곳은 내 집에 아니었다. 엄마도 아버지도 언니와 여동생과 남동생도 더이상 나의 가족이 아니었다. 나의 가족은 할머니뿐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가족 사이에 그렇게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단정의 기간이 가로놓여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스무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나는 정말로 천애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내 속에서 할머니보다 훨씬 더 빨리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나에게 엄마는 부풀린 단발에 머리띠를 하거나 화려한 색의 스카프로 머리를 묶고 환한 햇살을 받으며 가느다란 허리로 화단을 손질하거나 부엌일을 하거나 마루를 닥떤 열두 살 때 헤어진 그 모습에서 영원히 정지해버렸던 것이다. 마치 죽기라도 해버린 것처럼.






“ 오니. ”



 엄마는 후를 향해 팔을 벌리면서도 나의 화장한 얼굴과 옷차림새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나는 정성스럽게 화장을 했고 어두운 색의 립스틱을 발랐다. 시간을 들여 머리를 말았으며 최근에 새로 산 검정색 시폰 원피스에 새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장식이 제법 큰 귀걸이와 목걸이 세트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뭔가 예사롭지 않다는 눈빛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헝클어진 모습으로 왔을 때도 그저 쳐다만 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나 엄마의 눈이 나를 응시하자 나는 꼬챙이에 꿰뚫리는 것만 같았다. 원래 좀 차가운 성격에다 신경이 예민하고 날카로웠던 엄마는 언니가 사고로 죽은 뒤로 반쯤은 무당이 되어 사람을 통찰하는 것 같았다. 나는 몹시 불안정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는 기묘한 활기가 온몸을 긴장시켰다. 집 안은 낡았지만 꼼꼼하게 수리되고 정돈되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응접실 벽에는 아버지가 장식한 박제 사슴의 머리와 박제 새와 글자가 씌어진 액자들이 그대로 걸려 있고 은행나무 등걸을 잘라 만든 테이블 위엔 자개 담뱃갑과 검은색 유리 재떨이와 사진 액자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처녀 시절 언니가 썼던 방에 언니와 나의 여동생의 책과 이불과 장식 인형들, 그림 액자 같은 소녀 취향의 낡은 물건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어서 어느 땐 살림하는 집이라기보다는 마치 떠난 사람들의 기념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동생이 이미 와 있었다.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던 여동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이게 누구야? 언니? 다른 사람 같아. ”



 동생은 밝고 부지런하고 매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성격이었다. 아이를 키우느라 살이 제법 올랐고 남편이 공무원이라 검소하면서도 편안해 보였다.



“ 내가 그렇게 달라 보여? ”

“ 아냐. 몇 년 만에 다시 원래 언니가 된 거 같아. 언니, 그동안 사실 좀 이상했었잖아… ”

“ 은아… ”



 나는 엄마와 여동생의 시선에서 놓여나기 위해 서둘러 조카에게로 다가갔다. 언니가 남기고 간 딸이었다. 은이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엄마는 은이를 특수학교에 입학시키고 등하교 길에 따라다녔다. 은이는 점점 더 언니의 얼굴로 자라나고 있어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앞에서 보니 은이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나는 인형과 직접 구어 상자에 포장한 쿠키를 아이 앞에 놓았다.



“ 은이 곧 수술할 거야. 인공 고막을 장치하면 소리가 거의 정상인처럼 들린다는구나. 지 아빠가 수술시키겠다고 전화를 했더라. ”



 엄마가 좀 빠르게 소식을 전했다.



“ 잘됐네, 정말… ”



 엄마는 성장기 내내 눈에 띄게 언니에게 냉정했었다. 우울증이 심할 땐 공공연히 자신의 신세를 망치게 한 년이라며 언니에게 욕도 퍼부었다. 그러나 언니가 결혼을 해 집을 떠난 후로는 병적으로 언니에게 집착했었다. 언니의 문제라면 이성을 잃고 편을 들었고 직장 생활하는 언니를 위해 음식을 해 날랐고 아이를 키워주었다. 언니가 교통 사고로 죽은 직후에는 운전을 한 사위 탓을 하며 은이 문제와 보험금 문제 등으로 사위의 멱살을 쥐고 땅바닥을 뒹굴며 사납게 싸우기도 했던 엄마였다.



“ 은이 아빤 잘 산대요? ”

“ 새여자가 애를 가졌다더라. ”

“ …… ”



 재혼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 듣기 좋았는데 일 년 만에 재혼을 해 서운하게 했지만 막상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는 담담했다.



“ 언니 뭐 좋은 일 있어? 화장한 거 몇 년 만에 보는거 같아. ”



 동생이 다시 눈을 커다랗게 굴리며 나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고 애썼다. 어느 땐 심굴궂기도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표정은 없었다.



“ 그만 해. ”



 나는 여동생의 아기를 품에 안아 우유병을 물렸다.



“ 많이 컸네. ”



 구 개월인 아기는 젖살이 올라 뽀얗고 통통했다. 후는 조용하고 상냥한 은이 곁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 사실 걱정 많이 했었어. 언니 우울증 심했잖아. 눈엔 늘 눈물 고여 있었고… 말만 걸어도 울 거 같아서 실은 볼 때마다 조마조마 했어. ”



 나는 화재가 불편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어쨌거나 보기 좋아 언니. 오랜만에 화장한 모습 보니 정말 예뻐. ”



 나는 여동생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 넌 지금처럼 늘 밝고 착하게 살아. 삶이 뜻대로 안 되고 실망시켜도 겨루지 말고 고분고분 네 본성대로 살아… ”

“ 언닌 삶에 실망해서 겨루었어? ”

“ ……… ”



 나는 짧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두시 사십분이었다. 나는 우유를 먹다가 잠든 아기를 여동생에게 주었다. 그리고 살며시 일어서서 방문을 닫고 마루로 나가 여행 가방과 백을 들었다. 엄마는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엄마의 얼굴을 보면 사람이 가면에 덮여서 산다는 뜻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참담한 비의가 있었다. 나는 잠시 그 뻣뻣한 가죽 뒤편으로 사라진, 열두 살의 여름방학 때 마지막으로 본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눈 앞의 얼굴이 너무 완강했기 때문이었다.



“ 엄마, 나 좀 나갔다 올게. ”



 나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

“ 누구 좀 만나야 해. 친구, 혜윤이도 친정 왔대. 나중에 들어올게. 후 아빠 전화 오면… 잔다고 말해. 후한테는 뭐 좀 사러 나갔다고 말하고. ”



 나는 신발을 신으면서 단숨에 떠들었다.



“ 그 가방은 왜 들고 가니? ”

“ 그럴 일이 좀 있어요. 나중에 전화할게. ”

“ 너 좀 이상하다 ”



 나는 엄마를 돌아보았다. 엄마의 낯선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아야 한다는 것이 피곤했다.



“ 너, 남자 만나러 가는 거지? ”



 엄마는 무서운 일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엄마가 혹 눈치를 챘다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등을 돌리고 현관을 나갔다.



“ 오능중으로 돌아와. 알았어? 알았지? ”



 나는 엄마가 뒤쫓아오기라도 하듯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늙은 느티나무를 지나 언덕의 돌계단을 내려올 때는 네번째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 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바로 섰는데 그 순간 네번째 계단에 대한 날카로운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할머니는 가족들이 떠나고 집이 비자 현관 바로 앞방을 세를 놓았다. 처음으로 그 방에 서들었던 이는 큰길에 있던 보건소로 발령을 받아온 치과 의사였다. 키가 작았고 새하얀 얼굴에 작았던 노총각이였다. 할머니는 그 의사에게서 틀니를 해넣었는데 결과가 아주 좋아 우리 의사 선생님, 우리 의사 선생님 하며 와이셔츠도 다려주고 신발도 닦아주었다. 밥은 식당에서 대어 먹었지만 주인이 업는 것이나 마찬가지 집이라 그도 편안하게 응접실에서 신문도 보고 이른 아침이면 마당을 산책하기도 하고 치킨이나 만두를 사와 할머니와 나를 부르며 식탁에 펴고 앉기도 하고 신문의 낱말 게임을 함께 맞추기도 했다. 그리고 고향에 갔다 오면 배나 사과, 포도, 밀감 같은 것을 한 박스씩 사와서는 무조건 고향 특산품이라고 우겨 미안해하는 할머니를 웃게 만들었다. 할머니가 장가가셔야지 하면 농담처럼, 할머니랑 살다가 oo이 다 자라면 색시 삼으려고 마음먹었는데요, 했다. 그는 집 안에서 늘 밝고 서글서글하고 예의바르고 편안했다. 어쩌면 나는 가족이 없는 공백을 그로부터 채우고 의지했던 것도 같았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였다. 내가 열세 살 되던 해. 저녁 무렵에 그가 나를 데리고 외출을 하겠다고 할머니께 허락을 구했다. 책도 한 권 사주고 유원지의 레스토랑에 가서 양식을 사 먹이겠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크리스마스에도 하루 종일 혼자 보낸 내가 가여워서인지 선뜻 허락을 했다. 나는 엄마가 사서 보낸 짙은 청색의 벨벳 코트를 입었는데, 이상하게도 코트 가슴 부분에 다트가 강하게 들어 있어서 성숙한 처녀 같은 태가 났다. 나는 거울 앞에서 몇 번인가 빈 가슴 위에 솟은 다트를 눌러 편편하게 보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런데도 날씨는 춥고 입을 만한 코트는 그것밖에는 없었다. 결국 그 코트를 입었는데 몸은 불편했고 기분은 거의 수치스러웠다. 그런데도 크리스마스를 할머니와 단둘이 방 안에서 보내는 눅눅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시내 중심가의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유원지에 가서 양식을 먹는 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나는 주춤대며 따라 나섰다. 텅 빈 가슴으로 벌써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은 기묘한 구토증 같은 것을 느끼면서.


 나란히 계단을 내려오다가 나는 예의 네번째 계단에서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졌다. 의사 선생님은 재빠르게 나의 상체를 붙잡았고 나는 비툴거리며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네번째 계단은 유독 깊어서 내려올 때면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했던 계단이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계단 아래에 서 잇는 아버지와 맞닥뜨렸다. 아버지가 어떻게 갑자기 계단 아래에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와 나란히 골목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갔고 내내 앞으로 툭 튀어나온 코트의 가슴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계단아래 길에서 올라오는 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절대로 오지 않는 엄마와는 달리 아버지는 근처에 온 길이라며 불쑥불쑥 집으로 들이닥치고는 했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러 온 것 같았다. 내가 전날 방학을 한 것을 아셨고 그날은 마침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서두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노려보더니 완강한 어조로 나에게 따라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계단 위에 그대로 섰고 나는 뒤돌아서 도로 올라가야 했다. 아버지는 며칠 집에 머물렀고 그 사이에 의사 선생님은 방을 옮겨 나갔다. 나는 그 뒤로 다시 낡고 작은 코트를 입었고 다시는 새 코트를 입지 않았다.


 열세 살 때의 일이었다. 세상에 대한 미미한 구토증과 수치심과 의심을 느낄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이었지만 나로서는 꽤 심각한 결벽증을 앓았다. 화장지와 손수건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었고 학교 화장실을 쓰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병원에 가서 관장을 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구토증 때문에 음식은 위의 오분의 일 정도만 채워야 했고 친구 집에도 가지 않앗고 남학생을 사귀는 일 같은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벅증은 거의 사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집단 생활을 해야 했던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시기 동안 공동생활과 타인과 부딪침에서 말 못 할 괴로움을 겪었다.






 대학에서 김주영을 만났을 때 그는 내 앞에서 몹시 수줍음을 탔었다. 5월의 어느 수요일 오후였다. 동아리 방에 어쩌단 단둘만 남게 되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수줍어하면서 어렵게 손을 내밀었었다. ‘ 나랑 같이 나갈래? ’ 일 년 이상이나 보아온 사이인데도 그는 마치 첫눈에 반한 여자애에게 말하듯 얼굴을 붉혔다. 달아오른 얼굴과 길고 새하얀 손, 그리고 희미한 체취…그 냄새가 좋았다. 그 냄새는 출생하기 이전부터 익혀서 나온 것처럼 깊고 친근하고 편안한 냄새였다.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열세 살 이후로 어떤 냄새를 향해서도 후각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안심할 만한 냄새는 단 한 가지도 없었던 시절이 계속되었꼬 불쾌한 냄새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코를 막지 않고도 뇌에 주의를 주어 냄새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방법을 터득한 차였다.


 그의 냄새가 좋았기 때문에 뇌에 긴장을 풀 수가 있었다. 나는 후각을 조금씩 열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날 그와 함께 나간 것은 순전히 그 냄새를 좀 더 가까이서, 좀 더 깊이 들이마시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뿐이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토록 가벼운 이유로, 동시에 전적인 이유로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그와 나란히 걷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가 내 손을 잡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어깨 위에 손을 올리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으며 신호등을 건널 때, 나의 뒷목을 가볍게 잡아 가야 할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등 뒤에서 안아주는 것도, 그의 옷깃에 얼굴이 닿는 것도 좋았다. 내가 어느 날 풀밭 위에서 갑자기 그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던 것도, 모든 것이 다 그의 냄새 때문이었다. 희미한 땀냄새와 머리카락 냄새와 손끝에서 나던 담배냄새까지 다 섞인 한 남자의 냄새.


 그는 그렇게 내 인생의 결정적인 남자가 되었다. 타인과 나 사이에 한점 이물감도 없었던 경험은 그가 처음이었다. 어떤 조건이나 이상형 같은 건 아무 소용도 없었다. 순수하게 내 속에서부터 솟아나온 삶과 사랑에 관한 명백한 직관으로서 나는 그를 받아들여버렸다. 그때부터 나의 꿈은 스물한 살에 만난 그 남자가 평생 동안 오직 나만을 사랑하고 나 또한 단 하나의 남자만을 사랑하며 평생 동안 같은 삶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라면 육십 도의 고열도, 뜨겁고 건조한 모래 바람도, 백이십 일간의 부재도 견딜 수 있다고 믿었다. 가난과 결핍과 일에 치여 사는 그의 외박까지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작은 시련이라고 믿었을 뿐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토록 소박하고 은밀하고 가난한 꿈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내 편협한 결벽증이 빚어낸 망상병이었을까…….






사담



사랑이란 영혼을 풍요롭게 해주는 신비로운 기쁨이다.

사랑은 무성한 풀숲에 가려진 작은 꽃처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 맑은 향기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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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작가님 워더...
11년 전
독자2
그렇게 생각했던 김주영이가 바람을 피다니...ㅠㅠ 충격이 그만큼 클만 해요...ㅠ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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