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식은 바깥에서 헤드폰을 사 들고 왔다. 며칠 새에 원식을 보며 수군거리는 무리들이 꽤 많아진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홍빈은 이 도시에서 꽤 큰 가십거리였고, 원식도 그와는 다른 의미로 꽤 큰 가십거리였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연합은 꽤 충격적이었으니까. 원식은 헤드폰을 낀 채, 곧장 홍빈의 벤치로 향했다. 그의 저택도 보는 눈이 많았고, 감히 저따위가 발을 들일 곳이 못됐기 때문에. 시끄러운 비트에 맞춰 조금은 빨리 걸은 덕분인지 원식의 눈에 금방 익숙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으며 홍빈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홍빈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원식을 올려다보았다. 원식은 홍빈의 목이 불편하지 않도록 벤치에 손을 집고, 몸을 숙여 홍빈과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그러나 원식의 시선은 홍빈의 눈이 아닌 그의 손을 향했다. "도련님께서 그림에 취미를 두고 계신 줄은 몰랐는데..." 원식이 손을 뻗어 홍빈의 손에 들린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그 노트에는 벤치와 마주 보고 있는 나무가 그려져있었다. 잘 그렸네... 원식의 중얼거림을 들은 홍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런 아이 같은 모습에 원식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홍빈은 그 웃음에 부끄러운 듯 손에 들린 노트를 탁 소리 나게 닫아버리고 제 옆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원식의 팔을 잡고 제 옆에 앉도록 끌어왔다. 그러나 원식은 홍빈의 뒤에 버텼다. 그러자 홍빈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원식을 흘겼다. "내가 무슨 병균이냐?" "더 이상 밉보이면 안 돼. 누군가의 후원을 받는 것만으로도 난 이미 이곳 사람들의 눈밖에 났는걸." 후원자가 너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난 다시 바깥 행이였어. 곤란하다는 원식의 표정을 보자, 그의 팔을 잡고 있던 홍빈의 손의 악력이 느슨해지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원식은 또다시 웃음이 났다. "점점 애가 돼가는 것 같아." "시끄러." 홍빈이 앙칼지게 노려보자, 어깨를 으슥해 보이는 원식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홍빈이 제 머리를 마구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원식은 잠시 당황하다, 흐트러진 홍빈의 머리를 정돈해주었다. 또 뭐가 그리 불만이실까요, 도련님? "그 호칭 좀 짜증 나려 해." "그래? 난 좋은데.." "전시회 준비는 잘 돼가고 있는 거야? 요즘 바깥에 자주 가는 것 같던데..." 홍빈이 원식의 손에 들린 헤드폰을 보며 말을 흐렸다. 원식은 능글맞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헤드폰을 목에 걸고는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것도 다 일이야, 일...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이냐고. 화가가 후원자 모르게 일을 꾸미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데." "이게 다 후원자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요." "말이나 못하면..." 홍빈이 원식을 한번 흘기고 노트 옆에 놓인 작은 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 책도 얼마 안 가 덮혀졌다. 홍빈이 책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넌 점점 이 도시와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원식이 무심하게 되받아쳤다. "난 원래 이 도시에 섞일 수 없는 존재야. 이런 꽉 막힌 곳은 딱 질색이라고." "그래서 요즘 그렇게 난동 부리는 거야?" 난동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냐.. 보이지는 않지만 입술을 비죽 내밀고 저 말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는 홍빈이었다. "근데 너 머리 좋더라? 빠르게 그리고 사라져서 그 벽화 못 지우게 하고 말이야." "일단 한번 그려놓으면 못 지우는 게 이곳 규칙이잖아. 나 욕하던 놈들 그거 보면서 부들부들 떨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 뒤에서 큭큭 거리며 웃는 원식에 홍빈도 개구지게 웃어 보였다. 원식을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 계기에는 홍빈의 후원뿐만 아니라 그동안 원식이 벌여놓은 도시 테러도 포함되었다. 원식이 바깥에서 사온 그 스프레이로 벽에 그림을 그리면 어디에선가 다른 화가들이 나타나 원식을 방해하곤 했다. 그것에 진절머리가 난 원식은 머리를 굴렸고, 스탠실 기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커다란 비닐 소재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 모양대로 잘라낸 뒤, 그것을 벽에 붙이고 스프레이만 뿌리면 원식의 벽화가 완성되었다. 원식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않는 깊은 새벽에 일을 벌였고, 아무도 원식을 말리지 못 했다. 그렇게 벌여놓은 벽화만 다섯 개. 게다가 그 벽화의 내용마저 이 도시의 화가들을 약 올리기에 딱 좋은 소재여서 원식은 이 도시에서 거의 배척되었다더라. 그 일로 원식의 별명에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원식은 이 별명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홍빈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박장대소하며 원식을 후원하게 된 것을 무척이나 다행으로 여겼다. 마찬가지로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를 호출했다는 것은 유감이지만 말이다. "처음에 보고는 네 그림인 줄 몰랐어. 그림 안 배운 애가 이렇게 잘 그릴 수 있는 건가-해서." "영감님 도움 좀 받았지. 우리 영감님이 이 도시에서 인물화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더라고." "베인 씨가 도우셨다고?" "나도 좀 놀랐어. 영감 안 그런 척해도 은근 내가 하는 일에 불만 가지더니, 이 일은 두 팔 벌려 환영하더라." "베인 씨가 그러셨단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홍빈아." 원식이 생각에 잠겨있는 홍빈의 어깨를 툭 치자, 홍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원식을 올려다보았다. "넌 우리 영감님에 대해 아는 게 있지? 넌 이곳에 나보다 더 오래 있었으니까." "뭐.. 그렇지? 근데 왜?" "나한테 알려줘. 그분은 내 아버지 같은 분이셔." 근데 난 그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잖아. 12년 동안 그렇게 붙어있었는데도 알려고 하지 않았어. 원식의 표정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홍빈 또한 그랬다. "나도 아버지랑 그리 친한 편은 아니라서..." 홍빈은 원식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 원식이 조금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안에 들어섰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노인은 탁자 앞에 앉아 액자를 닦는 데에 열중이였다. 원식은 처음 보는 그림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예요, 그건? 그제야 원식을 발견한 노인이 옅게 웃어 보였다. 이리 와보렴. 원식은 가까이 다가가 노인의 앞에 놓인 그림을 보았다. 물감을 섞어 부드럽게 만든 색채가 아닌 화려한 원색으로 구성된 화면이 원식의 눈을 사로잡았다. 처음 보는 구성에 원식의 입이 떡 벌어졌다. 노인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 그림이 내가 이 도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린 내 진짜 작품이란다." "진짜 작품요?" "그래, 이 그림을 제외한 내 그림은 모두 모작이다." 원식은 말을 잊은 채, 멍하니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그런 원식의 손을 꼭 잡은 채, 말을 덧붙였다. "나처럼 되지 말아라."
| 더보기 |
안녕하세요? 20일 만에 다시 쓰네요...ㅎ심지어 시험 망했어요ㅠㅠ슬픈 일도 있었구요... 혹시 기다리신 분 계신가요??/기대/ 열심히 쓰겠습니다○▼○ |
이 시리즈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현재글 [VIXX/랍콩] 인상 04 4
11년 전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이거 방탄 찐팬이 올린 위버스 글인데 읽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