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
“세나야.”
윤기의 낮은 음성이 병원 복도를 채웠다. 맑은 구두 소리가 멎었다. 원피스를 말아 쥐고 있는 작은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윤기는 알았다. 죽었다고 그렇게 믿었던 세나가 멀쩡하게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그 악마새끼를 탓하며 실종된 세나를 가슴에 묻었는데 이렇게 살아있을 줄이야. 윤기 자신을 덮친 거세게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민세나.”
꿈결 같은 그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는 윤기의 목소리는 마치 마약 같았다. 하마터면 윤기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눈물을 터뜨릴 뻔했다. 세나는 지금까지 자신이 거쳐 온 시간들을 회상했다. 그것들을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윤기였다. 무너질 바에는 윤기에게 평생 속죄하며 사는 게 나았다. 남들이 보면 동생이 어떻게 그 정도로 무정할 수 있냐고 질타하겠지만 상관없었다.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윤기에게 세나는 차갑게 말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일말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세나는 빠르게 윤기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윤기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확인했으면서도 또 확인하고 확인했다.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질 기미가 안보여서.
“민세나.”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세나를 보며 윤기는 또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잘못 보았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민세나가 민윤기에게 어떤 존재인데. 윤기에게 세나는 잘못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등을 보인 세나를 보며 윤기는 생각했다. 살아있어줘서 고맙다고.
***
여주를 안으로 들여보낸 정국은 여주가 보이지도 않는 병원 안을 계속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석진과 찾으러 온 그 악마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태풍이 몰아친 이후 지날 만큼이나 지났고 아무 일도 없는 걸 보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걱정이 쓸데없지 않았다는 건 금방 알게 되었다. 정국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태형으로 인해. 태형이 다가올수록 정국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뭘 그렇게 놀라. 무안하게.”
“뭐하다가 지금 나타나.”
“지금이라도 나타나서 다행이지. 안 그래?”
보이지 않는 위험한 기류가 둘 사이를 흘렀다. 정국은 태풍이 오던 날 등장할 놈이 태형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태형으로 인해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고 믿어 버렸을 뿐이다. 이왕 나타날 거면 빨리 오기나 하던가.
정국 앞에서 휘파람을 불며 태형은 속마음을 숨기고 머리를 굴렸다. 이걸 밝혀? 말아? 유리한 쪽은 어떤 쪽일까. 딱히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태형은 정국의 속을 살살 긁을 준비를 했다.
“내가 맞았더라.”
“무슨 소리야.”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짧은 몇 마디를 주고받은 둘은 자리를 옮겼다. 병원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유일하게 두 사람의 마음이 맞는 부분이었다. 서로의 옆을 지키며 걸어가는 둘은 겉으로 봐서는 오랜 친구 같았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정국이 세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병원을 완전히 빠져 나오는 동안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의도적인 침묵을 지키며 걸음을 재촉했다. 병원에서 많이 떨어지고 나자 태형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지. 그거 가짜라고.”
턱으로 정국의 가슴팍을 가리키는 태형이었다. 무심코 제 가슴을 바라본 정국이 실소를 흘렸다. 가짜. 몇 년 전 태형이 정국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대해 내린 간단하고도 명료한 정의였다. 정국이 태형을 향해 물었다.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날짜는 줄어가는 마당에 어떤 소식도 없길래 궁금해서 왔어.”
“참견하지 마.”
“미안한데 내기를 했거든.”
“내기?”
정국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느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감히 누굴 두고 내기를 해. 틈만 나면 판을 벌려 내기하는 것이 악마들의 특성이긴 했으나 태형은 그 중에서도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가 이길 것 같아.”
“안 궁금해.”
“나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러면.”
거의 말을 툭툭 내던지다시피 하는 정국이었다. 정국의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태형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진짜 말하고 싶은 건 서론도 꺼내지 않았는데 무슨. 이걸 알면 정국의 반응이 어떨까. 무척 볼만할 것이다. 친구였던 정국이 충격을 받는 건 미안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스운 건 우스운 거였다. 정국의 반응을 상상하며 태형이 숨죽여 웃었다. 그러게 내가 한 충고를 제 때 알아먹었어야지. 친구야.
“네 말대로 네가 사랑했던 여자도 못 알아보면 그게 가짜지.”
“말 똑바로 해.”
정국의 목소리에서 금방이라도 태형의 멱살을 움켜잡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감정이 느껴졌다. 곁눈질로 정국을 바라본 태형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정여주가 그 정여주가 아니라고.”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거 봐. 누가 누군지 구분도 못하는데 너 그거 가짜야.”
태형의 말에 정국이 떠올린 사람은 세나였다. 여주와 꼭 닮은. 닮았지만 세나는 여주와 달랐다. 세나는 물질적으로 풍족한 지민의 동생이 아닌가. 이름도 다르고.
“너 기억하잖아. 널 홀렸던 그 약하고 가여운, 병과 싸우던 정여주.”
“......”
“변한 게 아니라 잘못 안 거야.”
태형의 말은 정국의 기억을 서서히 상기시켰다.
“네가 알고 있는 정여주랑 첫인상이 완전 딴판인데. 외모가 닮긴 했더라. 나도 대충보고 속을 뻔했어.”
“여주를 만났어?”
“너희 셋이 거길 지키고 있는 바람에 바로 갔지. 네가 김석진이랑 노닥거릴 줄이야.”
“여주한테 무슨 짓했어.”
“무슨 짓하려다가 말았지. 그 정여주가 아닌 걸 알았으니까.”
정국은 방금까지 느낀 태형에 대한 분노도 잊어버릴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여주는 단순히 변한 거였다. 그래야만 했다. 그 변화가 좋았기 때문에 정국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주였기에.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의심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형의 말을 터무니없다고 여길 수가 없었다. 며칠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태형은 정국이 애써 부정했던 사실들을 하나씩 꺼냈다. 여주의 얼굴 위로 세나가 자꾸 겹쳤다.
“정말 한 번도 못 느낀 거야?”
정국이 고개를 숙였다.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답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정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쪽 입 꼬리를 올린 태형이 걸음을 멈췄다. 정국에게 모든 걸 다 알려줘야 할까. 그러면 인간들에게 지칠 대로 지쳤으니 그만 포기하려나.
“그냥 인정해.”
“찾는 걸 그만둘까 하던 때에 그 애를 찾았어.”
“전정국,”
“찾았는데 기억을 못 하더라. 기억을 못하면서 걔는 날 사랑해. 예전과는 다르게.”
“......”
“나는 몰라도 그 애가 날 사랑하면 할 수 없다는 걸 알아. 멈춰야 한다는 것도 아는데.”
“......”
“사랑받는 느낌이 좋아서 오늘만 오늘만 오늘까지만 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어. 그런데.”
“......”
“내가 잘못 알았네. 기억을 못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기억이 없는 거였어.”
“정국아 제발.”
태형의 말투가 부드럽게 돌변했다. 고개를 숙여 정국의 얼굴을 가린 머리칼 사이에 비치는 정국의 눈동자에서 진심을 보았다. 전에 봤던 눈동자와는 조금 달랐다. 가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안 돼. 인간과의 사랑은 금기다. 금기를 어긴다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아 태형이 눈을 감았다. 민세나로 인해 그 선을 넘을 뻔한 정국을 힘들게 되돌려 놓은 건 태형이었다.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로는 절교를 하겠다느니 더 이상 보지 않겠다느니 하는 모진 말을 내뱉었지만 태형은 정국을 놓을 수 없었다.
정국도 태형의 마음은 잘 이해했다. 만약 태형이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면 정국도 태형처럼 온갖 짓을 다했을 것이다.
“네가 느끼는 거 전부 가짜야.”
정국의 머리에 세뇌라도 시켜버리겠다는 의지를 표하기라도 하듯 태형은 또 한 번 말했다.
“진짜였다면 네가 착각할 일도 없어.”
“......”
“금기를 어기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