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x 뱀파이어 새로운 것이 가져오는, 새로운 일.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일, 그 새로운 누군가가 몰고 오는 것들을 명수는 늘상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 성격은 그가 큰 스타로 성장한 이후에 나타났기에, 이미 유명해진 그에게 다가서려는 주변인들만 잔뜩 애를 먹었다. 그들이 명수의 비위를 맞춰줄 때에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아부를 떨고, 영역을 넘어서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을 떠나, 말과 행동 자체를 일절 삼가했다. 가능하다면 차라리 명수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편이 주변인의 입장에서는 신변에 더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명수가 직접 그러한 것들을 지시하고 당부한 적은 없었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주변인의 머릿속은 이미 학습되어 있었다.
─명수에게서 한 번 박힌 미운털은 절대 빠질 일이 없으니 알아서 조심해야만 한다. 그러니 멀찍이 서 있자. 그도 그런것이, 김명수는 자존심과 집착, 뒷배경으로 알아주는 결코 만만치않은 스타니까, 잘못해서 걸려들면 공개적인 망신과 낭패를 피할 수가 없다. 얼마 전만 해도 이 바닥에서 잘 활동하던 조연출 한 명이 명수의 한마디로 모가지를 당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연출이 명수의 카메라를 함부로 만졌다나 뭐라나. 이 처럼 타인의 눈에는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명수의 화를 불러 일으켜 좋지 못한 끝을 맺곤 한다. 성열은 명수와 불과 오늘 아침에 만난 사이이기에 그러한 사실들을 알 턱이 없었다. 당사자인 명수 또한 제 성격과 영역에 관해서는 성열에게 언급하지 않았다. 깜빡한 것은 아니다. 적당히 휘둘리고 적당히 목소리를 높이는 성열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욕도 할 줄 안다. 비실비실하게 생긴 것이 꼭 약하지만은 않고, 뱀파이어지만 높은 자제력을 가졌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성열의 외모였다. 어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그런 비주얼이 첫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연구원이라는 사람들에게 수송되어 온 성열이 제 침대위에 뉘여진 모습은 생각 외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명수는 짧게 나마 생각했었다. ─이 아이를 잘 활용한다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길 수 있겠지…. 뱀파이어와 지내는 착한 연예인. 그런 이미지. Vampire City
어둑어둑해진 하늘 아래에는 매니저와 명수, 그리고 성열이 탑승한 차가 있다.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도로위를 미끄러지듯 달려나가는 좋은 승차감의 중형세단. 스케줄을 모두 마친 명수가 쇼핑을 위해 모처럼 백화점으로 향하는 것이다. 열어놓은 창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맞던 성열은 코를 마시면서도 창문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기분 좋았던 성열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명수가 만지작거리던 카메라를 성열쪽으로 향하도록 들었다. 앵글안에 원하는 것을 담고 천천히 초점을 맞춘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성열의 푸른 머리카락이 텁텁한 밤하늘과 아름답게 어우러지고 무자비하게 섞였다. 잠시 카메라에서 눈을 뗀 명수가 제 눈으로 직접 성열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지금까지 제가 카메라에 담아왔던 '예쁘고 순수한 것'에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나…. 실없는 생각에 살풋 웃던 명수는 다시금 카메라를 들고 셔터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처음엔 두어 장 정도만 찍어보자 시작했던 셔터질은 생각보다 더 길게 이어졌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에 묻힌 셔터음은 다행히도 성열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성열은 지금 명수가 저를 찍고 있는 줄도 모른다. 조용히 카메라를 내린 명수는 찍힌 사진을 확인차 훑어본다. 흔들린 사진을 지울까 하다가도 차마 삭제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아깝다. 그냥 둬야겠다.
“너 사진도 찍어?”
“아…….”
어느새 창가에서 떨어진 성열은 명수의 카메라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았다. 명수가 다급하게 전원버튼을 누르더니 카메라를 익숙한 손길로 정리해 버린다. 무슨 상관이야. 그의 냉담한 반응에 카메라를 구경조차 못한 성열은 아쉽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바깥 풍경에 눈을 두던 명수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나랑 같이 다니려면 뭐든 내 급에 맞춰.”
“…….”
“내 급에 맞춰 입고, 내 급에 맞춰 행동하고, 내 급에 맞ㅊ.”
“그래서, 니 급이 뭔데?”
“고급.”
“…….”
“아니, …최고급.”
“……지랄 나셨네.”
조금 전 맞은 바람으로 인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성열의 눈 주변을 드문드문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보였다. 기가 차고 한심하다는 듯한 이성열의 풀어진 눈빛 만큼은.
“백화점 도착해서도 그 따위로 말해봐라, 이성열.”
제 머리 위에 닿는 명수의 손길을 성열은 피하지 않았다. 듬직하고 굵은 선으로 팔뚝으로부터 이어진 큼직한 손바닥, 성열의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손가락이 섬세하고 정갈하게 그것을 빗어내렸다. 대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싫지만은 않았는지 성열도 앉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런 손길, 일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명수를 만나기 전 임에는 분명했으나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하다. 이런 손길을 자주 받아왔던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성열은 명수의 노골적인 시선이 저에게 닿아 있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시선이 멋쩍고 부담스러웠던 성열은 제 머리 위에 올려진 명수의 손을 털어버리곤 고개를 홱 하니 돌려버린다. 그냥, 제멋대로인 이 인간에게 정을 주기 싫었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서도 가슴은 요란하게 뛰어댄다. 그까짓 머리 빗겨준게 뭐 대수라고….
Vampire City
성열의 양 팔에 잔뜩 걸려 있는 갖가지 쇼핑백이 그 무게를 자랑하듯 아래로 추욱 늘어졌다. 왼쪽에 네 개, 오른쪽에 다섯 개. 그 안에 들은 것은 모두 성열의 새 옷들 이었다. 캐주얼과 세미정장 코너를 위주로 돌 적에는 명수의 손에 잡히는 어느 옷이라도 성열에게 잘 어울렸다. 명수의 취향인 블랙 컬러와 성열의 취향인 화이트 컬러, 직원이 조심스럽게 추천한 여러 컬러와 여러 디자인의 옷들… 그렇게 쓸어 담은 옷들이 지금 쇼핑백 안에 담긴 채 성열의 팔을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여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해서 결코 강인하지 않은 성열의 팔이 처음에는 잘 버텨주는가 싶더니 한계를 느끼는 듯 차츰 떨려왔다.
보다못한 매니저가 그 짐을 덜어주려 성열의 손 위로 쇼핑백 손잡이를 겹쳐 잡았을 때였다.
“만지지 마.”
무심한 듯 단호히 떨어진 명령조에 매니저의 손이 성열에게서 빠르게 떨어졌다. 화가 난 건지, 다소 심각한 얼굴로 매니저를 직시하는 명수의 모습이 꽤나 자극적이다. 빠르게 끌어내린 시선의 끝에는 쇼핑백 손잡이에 짓눌려 하얗게 질려버린 성열의 손이 있었다. 망설임 없이 성열이의 오른쪽 손에 들린 쇼핑백 뭉치를 빼앗아 든 명수가 앞장서서 걷자, 그제서야 매니저도 안도의 한숨을 내리쉬며 중얼거렸다. 깜짝 놀랐네….
앞서 걷던 명수가 쇼핑백을 반대쪽 손으로 옮겨 들었다. 방금 전 쇼핑백을 빼앗을 때 성열과 닿았던 손을 빤히 내려다 본다. 이성열의 손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단단하고 매끈했다. 뱀파이어이기에 차가울 줄 알았던 그 손은 의외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천천히 주먹 쥐어진 명수의 손이 이내 아래로 맥없이 떨어져 버린다. 체온이 저와 비슷해서 맞닿은 손의 촉감이 이질적이지 않아 거리낌이 없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뱀파이어지만 체온과 생각 따위는 인간의 것과 같다. …피를 마시는 인간, 피를 얻기 위해 공격을 하는 인간, 배고픔을 모르는 인간, 늙지 않는 인간, …인공 뱀파이어.
대체 그때의 사람들은 동족으로 대체 무엇을 만든걸까. 그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뭔가가, 일어나지는 않을까.
어쩌면 지금의 인간들에게 반감을 품었을지도 모를 새로운 종족이 몰고오는, 새로운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이 약이 될까, 독이 될까.
이번편은 조금 중요했었다고... 넋나간 또모씨가 전해달라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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