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전
오메가 버스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거부감이 있으신분들은 피해주세요 *
일 학년 여름방학부터 학교 신관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었다.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완공된 신관으로 구관 건물에 있던 음악실은 옮겨졌고 2학년 반은 구관 4층에있었는데 신관 음악실까지 거리가 꽤 멀었다. 워낙 멀었던 거리였는데 오늘은 유독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질질 늘어지는듯했다. 실상은 경수의 걸음 속도가 늦어지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속도를 늦추면 백현이 앞질러 갈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백현은 끝까지 자신과의 거리를 가깝게 유지했다. 경수와 백현보다 늦게 나온 아이들이 둘을 앞질러 나갔다. 여간 불편하고 번거로운 거리를 지나는 아이들은 계속해서 불평을 투덜거렸다.
" 왜 2학년은 4층까지 올라가야 해."
" 짜증나. 나 다리에 알 생겼어."
" 야야. 그건 알이 아니라 살이겠지."
교실을 나온 아이들은 연신 복도에서 떠들어댔지만, 백현에게 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표정에서도 특유의 밝은 느낌을 주지 않고 어두웠다. 백현에게 잘 볼 수 없었던 진지함까지 얼굴에 비쳤다. 경수는 그나마 친구라고 할 수 있던 백현에게 반 아이들과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쿵쾅쿵쾅
넌 들킨 거야 도경수. 그렇게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거야. 약통을 숨겨도 네가 오메가라는 사실은 숨길 수 없어. 변백현이 다 알아버린 거야. 네가 오메가란 걸.
음악실을 알려주는 팻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음악실과 나란히 붙어있는 다른 교실이 하나 있었는데 팻말엔 상담실이라고 적혀있었다. 경수는 상담실 팻말을 보자마자 생각했다. 도움을 받고 싶다. 이 불편한 시간의 해결법을 알고 싶다. 하지만 이미 늦은 거 같다. 곧 내가 오메가라는 소문이 날 거고 다른 이들이 나를 보는 눈빛에 경멸과 혐오가 서릴 것이다. 모든 건 어쩔 수없이 흘러가게 되어있었다. 경수는 이유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정작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백현이 원망스러웠다. 경수는 백현에게 거리를 둔 것에 대해 그나마 안심했다. 많이 친한 사이가 아닌데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데 사이가 깊었으면 그만큼 감정의 골도 깊어졌을 테니까. 자신에게 친구라는 단어는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이상하게 목 안이 따가워지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음악실 문을 열자 먼저 와있는 아이들의 대화소리가 가득했다. 음악실은 총 세 줄로 된 책상들은 각 줄마다 4개의 책상이 있었고 한 책상마다 의자가 세 개씩 배치되어 있었다. 책상 앞엔 큰 스크린이 있었고, 그 옆엔 갈색 피 아노 한 대가 있었다. 아직 쉬는 시간이 끝나지 않아 아이들은 책상 위에 앉아있기도 했고 피아노 건반을 만지며 놀기도 했으며 친한 친구의 옆자리에 멋대로 앉아 떠뜨는 아이들도 있었다. 자리 배치는 번호순이었는데 이름순으로 번호를 매겼기 때문에 경수와 백현은 비교적 앞 번호였다. 둘째 줄 첫 번째 책상 첫 자 리엔 경수가 두 번째 책상 첫 자리는 백현이 앉았다. 경수 옆 두 자리는 둘 다 여자애가 앉았는데 둘은 꽤나 죽이 잘 맞는 친구인 듯 항상 시끄러웠다.
백현은 끝내 음악실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고 경수는 자신의 자리에 옆자리 아이의 친구가 앉아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비킬 때까지 한참을 서 서있어야 했다. 비켜달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입을 열었다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초조함이 몰려왔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누군가 숨을 쉬지 못하게 가슴팍을 내려누르는듯했다. 모든 것이 불편했다. 주변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 들렸다. 자살시도를 한 오메가. 그게 자신이 될 수도 있는 일이 된 것이다.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두렵다. 이젠 돌이킬 수 없겠지. 내가 왜 그 자리에서 약을 먹은 걸까. 먹지 않았다면.. 먹지 않았어도. 나는 변함없이 오메가 겠지. 주먹을 쥔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어둡지 않은 음악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속닥속닥
" 헐. 걔? 생긴 건 완전 멀쩡하게 생겼던데. 말도 안 돼."
"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른다니까? "
옆에 앉은 여학생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누구 이야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직 소문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듯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경수의 귀에 마치 피해자아이를 이야기하는듯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피해자가 미래의 자신이 될 것이다. 경수의 불안함이 눈물로 나올 듯 아슬아슬했다.
더러운 오메가새끼 도경수
꺄르르 그냥 죽어버리지
경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간신히 눈물을 넘겼다.
" 맞다. 걔 오빠가 둘이 있는데..."
수업이 시작하는 종이 쳤고 선생님이 바로 음악실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수다를 멈춘 여학생들은 조용히 음악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음악실이 멀긴 해도 담임선생님 보면 올만한 거 같기도 해. "
" 아깐 알 생겼다고 칭얼거리더니 "
" 조용히 해 "
음악을 담당하는 선생님은 이번에 막 임용고시를 합격해 첫 발령받은 학교가 경수의 학교였다. 발령받자마자 첫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 그 반이 경수의 반이었다. 주름과 연륜이 가득한 남선생님들 사이의 유일한 젊은 피가 흘렀고 얼굴까지 준수했으며 사근사근하고 듣기 좋은 톤의 목소리를 가졌다. 그 때문인지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는데, 여학생들 말을 들어보면 성격이 좋다나 목소리가 좋다나 또, 점심시간이면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그 모습이 또 그렇게 멋있다나 뭐라나 하며 꺅꺅거리기 바빴다. 반에서 조금 논다 싶은 여학생들은 대놓고 선생님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소리 지르며 희롱했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넘기는 그였다. 유독 피아노에 애정이 쏠린 그는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며 수업이 끝나기 몇 분 전 그 피아니스트의 연주 동영상을 종종 틀어주곤 수업을 마무리했다. 물론 그 시간을 이용해 자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오늘도 수업은 시작되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음악이 나오다 끊기고,이어 선생님이 이야기를 하다가 반 아이들이 대답을 했다.수업 내내 경수는 아무것도 집중해서 들을 수 없었다.쓰리고 끓는 속도 속이지만 모든 소리가 자신의 이야기로 들려왔기때문에 초조했다.얼른 이시간이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수는 그 많은 소리중에도 시계소리만 들으며 그저 앉아서 간신히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
끝내 안 갈 것 같던 수업시간은 이제 15분 정도만 남기고 있었고, 선생님은 오늘도 어김없이 연주 동영상을 재생하려 컴퓨터를 만지작거리셨다. 음악실에 있는 조명을 다 끄자 큰 스크의 동영상 섬네일 피아노와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재생을 하기전 선생님이 질문을 했다.
" 소나타가 뭔지 아는 사람? "
" 자동차 이름요 "
누군가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순간 음악실이 웃음소리로 가득 차 누가 한말인지 알지 못하게 됐다. 웃음소리가 줄어들자 음악 선생님은 가볍게 웃어 보이곤 말을 이어갔다.
"소나타는 1600년 전후에 성립한 기악곡인데, 울려 퍼지다, 연주하다는 이탈리아어 수오나르가 어원이야. 음.. 일단 오늘 들어볼 월광소나타에 대해 얘기해줄게. 18세기 중반에 독일에서 새롭게 탄생한 건반악기 피아노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소나타형식이 발전하기 시작했어. 월광소나타는 베토벤이 기존 소나타형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배어있는 곡인데. 너희가 졸려 하는 거 같으니까 1,2악장은 넘기고 3악장을 들어보자."
동영상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듯 맹렬한 음이 시작됐다.어둡고 낮은 음역대와 호소하는 듯한 멜로디의 높은 음역대를 대조하는데, 때로는 점진적으로, 때로는 에너지가 폭발하듯 갑작스러워서 듣는 이로 하여금 매우 심란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져있게 했다.하지만 아이들은 음악을 듣기보단 아는체라도 하고싶었는지 어 나이거 알아.들어봤어라는 말을 하기 바빴고 그것도 잠깐이었고 이내 잠잠해졌다. 그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건 아마 경수 혼자일것이다.경수는 음악이 시작하자 간신히 참고있던 감정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초조한 눈동자는 빠르게 굴러다녔고,심장은 튀어나올듯 두근거렸다. 6분여간의 동영상이 끝이날때까지 경수는 안절부절 못했다.음악이 끝나고 약 10분의 수업시간이 남았다.주변의 아이들은 어두운 음악실에서 꾸벅꾸벅 졸고있거나 엎드려 자고있었다. 음악선생님은 짧게 한숨을 쉬곤 음악실의 불을 켰다.
"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자. "
경수는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일어났다.
" 도경수? 경수야 "
피하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경수는 허겁지겁 음악실문을 열고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앉아서 졸던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리번거렸고, 엎어져 자던 아이들은 고개를 살짝 들어 보이더니 이내 다시 자기 시작했다.
" 선생님 제가 가볼게요 "
경수가 나가자마자 백현이 말했다. 선생님은 말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고 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실을 나왔다.
경수는 허겁지겁 반으로 달려갔다. 그간 참았던 서러움이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음악실을 나오자마자 흐르던 눈물은 뛰는 통에 흩뿌려졌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쉼 없이 달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울었다. 급박해 보이는 모양새는 누군가 뒤를 쫓아오는 듯 보였다. 아직은 수업시간이었기에 조용한 복도에는 경수의 흐느끼는 소리만 울렸다.
음악수업과 체육수업이 연달아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음악실로 체육복을 챙겨 움직였다. 대부분이라 하면 아마 경수를 제외한 학생들일 거다. 수업이 마치자마자 탈의실로 바뀌는 음악실은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해졌다. 그 음의 범주는 소리를 넘어 소음에 이르는 지경이었고 견딜 수 없던 경수는 음악실을 빠져나왔다. 학기 초 처음 자리를 피해 도망친 경수를 반겨준 건 아이들이 몇 없는 조용한 교실이었다. 낯가림이 심해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한 여자애들과 학기 초의 작심삼일 성실함을 모토로 했던 몇 명의아이들 정도가 다였다. 시간이 지나고 자연스레 친구를 사귀고, 나태와 적응을 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아이들은 더 이상 교실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경수는 아직 교실에 남아있다. 음악실과 교실, 그리고 운동장 혹은 강당의 거리는 멀었기 때문에 특별 한 일 이 없는 한 교실은 두 시간 연달아 비어있을 것이다. 시끄러운 교실이 가장 길게 조용해지는 유일한 시간. 딱히 외롭다던가 소외감을 느끼진 않았다. 경수는 역겨운 웃음소리와 끝없는 가십이 흘러나오지 않는 조용한 교실. 일주일에 한번 오는 그 시간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계속 유지되길 바랄만큼.
어느 순간 경수가 생각하는 '먹'이라는 울타리 안에 반 아이들 포함되기 시작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 아무리 외로워도 너희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것이다. 가까운 적 없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반에 도착하자마자 경수는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그리곤 책상 걸이에 걸려있는 가방에 손을 넣어 약통을 꺼냈다. 일단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알파 앞에 다리나 벌리며 자신을 범해주길 원하는 위치였지만,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아이들 앞에서 먼저 다리를 벌리고 싶지 않았던 경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얼마 남지 않아 바닥이 보이는 약통을 쥐곤 입으로 털어 넣었다. 미워하며 숨기려 했던 약. 사실은 아끼며 지키고 싶어서 남용하지 않던 엄마의 마지막 선물이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사라지고 있었다. 그 약들은 건조한 입안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삼켜져 내리고 있었다.
드르륵.
그때 교실문이 열렸다. 놀란 경수는 약통을 놓쳤고, 약통이 바닥에 굴렀다. 미처 다 삼키지 못한 약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 도경수. 갑자기 뛰쳐나가면.... 야! 너.. 뭐 하는 거야"
물 없이 삼킨 약이 목에 걸렸는지 경수는 연신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백현이 서둘러 다가와 경수의 등을 토닥거리며 두드려줬다. 경수가 크게 기침을 하자 목에 걸렸던 알약이 입 밖으로 뱉어졌다.
" 내 몸에 손대지 마!"
입가를 닦은 경수는 백현의 손을 뿌리쳤다. 백현은 어정쩡한 자세로 경수에게서 떨어졌다.
" 아침에 눈치챈 거지?"
경수는 목이 따가운지 몇 번 더 기침을 뱉었다.
"응. 그 약 잘 알고 있거든."
백현의 반응은 매우 무덤덤했다. 마치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온한 말투는 경수를 더 불안하게 했다.
" 그래서 뭐. 그래.. 나 오메가야. 역겹지? 여태 아닌 척 주제넘게 거만했지.. 한낮 오메가 새끼가"
" 무슨 소리야 너"
" 그냥 가서 말해. 불안하게 하지 말고. 여기저기 소문.. 내버려!.... 가서 도경수 따.. 먹.... 으. 흐, 흑"
당당하게 나오는 경수는 말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한없이 떨렸다. 이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 그냥 내가 한번 해줄게. 응? 백현아.. 소문 내지 말아줘 부탁이야 제발.."
경수의 다리가 백현의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마지막까지 지키겠다던 자존심이 무너져내렸다. 무릎은 떨어진 약을 짓이겼고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려 교복 바지에 번지고 있었다.
" 내 얘기 좀 들어봐 도경수. 말 안 해. 내가 왜 말할 거라고 생각해? "
백현이 고개를 숙여 경수의 눈가의 눈물을 문질렀다.
" 거짓말하지 마. 흐윽.. 어차피 너도,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
" 그런 생각 안 해."
" 아깐 정색하고 아무 말도 안 했으면서 "
백현이 살짝 웃었다. 경수를 불안하게 했던 그 행동에서 어떤 부분이 웃겼는지 경수는 알 수 없었다.
" 듣는 귀가 많았잖아. 소문낼 생각 추호도 없어. 걱정하지 마."
" 못 믿어. 네 마음이 변할지 누가 알아."
"손 줘봐. 그럼 "
손을 달라는 백현의 말에도 경수의 손은 눈시울을 닦아내기 바쁘기만 했다. 소문 내지 않는다는 백현의 말을 듣고 나서야 경수는 눈물이 멈췄다. 눈 주변을 얼마나 문질렀는지 눈두덩이 그새 퉁퉁 부어 올라있었다.
끝내 머뭇거리는 경수의 손을 백현이 잡았다. 잡힌 손목에 있는 상처 때문에 찌르르 한 느낌이 났고 경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뭐 하는 거야"
"아 바보야. 가만히 있어봐"
백현이 경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곤 자신의 셔츠 안으로 끌어 경수의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게 했다. 경수의 손에 백현의 맨살이 닿았다.
".. 뭐야"
"아직은 티 안 나지?"
" 무슨 티가 안 나?"
" 경수야 놀라지 마 "
백현이 숨을 크게 들이쉬곤 헛기침을 했다. 경수는 백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차분히 백현의 말을 기다렸다.
" 너 설마 "
" 맞아. 설마! 이 안에~ 애 있다 "
백현이 파리의 연인 한 장면을 따라 하며 웃었다. 그제야 백현의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다소 무거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백현은 대수롭지 않은 듯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편안해 보이는 백현과는 다르게 경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백현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쳤어? 거짓말하지 마"
"내가 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해"
백현은 경수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일어난 경수의 무릎 부근엔 뭉게진 약의 가루가 하얗게 묻어있었다. 백현은 경수의 무릎에서 약 가루를 툭툭 털어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경수는 이미 백현의 말을 믿고 있었다.
"너도 오메가.. 아니, 애, 애 아빠는? 얼마나 됐는데? "
"천천히 물어봐라 좀! 임신한지는 2개월째고 애 아빠.. 누구긴 매일 붙어 다니는 큰 강아지 있잖아. 눈 동그랗고 귀 모양 신기한 애. 오늘 아침에도 ....아!.. 아.. 맞다!
너한테 줄 거 있어"
백현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작은 통을 꺼냈다. 경수는 그 통을 본 적 있었다. 어디서 봤느냐 하면 하교 시간마다 여자애들이 눈에 렌즈를 집어넣을 때. 렌즈를 담아 두던 작은 통을 꺼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 이걸 왜 나한테 줘 "
"원래 걔가 나 준건데. 나는 임신해서 먹을 일이 없거든. 아침에 걔가 어디서 페로몬 냄새난다고 뭐라 하는데. 그 냄새의 근원지가 소문이라도 내는 듯이 달그락거리면서 걸어 다닌다고 하더라. 근데 그 주인공이 너였고. 내가 너한테 이거 준다니까 오메가인 거 소문내고 다니지 말고 조금씩만 챙겨서 다니라고 전해달래"
백현의 말을 들으며 경수는 렌즈 통을 열어봤다. 흔들어봐도 아무 소리 없는 통을 열어보자 그 안엔 휴지로 쌓인 억제제가 들어있었다. 휴지를 빼내자 안쪽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경수는 백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쪽지를 꺼냈다. 백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계속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안 나서, 아까 음악실 가면서 생각하느라고 심각했던 거야. 근데 네가 그런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쪽지를 열어보자 삐뚤빼뚤한 글씨로 '행운이랑 변백현은 내꺼 - 찬열'이라 적혀있었다. 경수가 쪽지를 백현에게 건네자 백현은 그게 뭐냐며 받았고 내용을 확인하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수, 수업 시작까지 몇 분 안 남았네, 얼른 옷 갈아입자! 하하하"
귀까지 빨갛게 변한 백현은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경수는 사랑받는 백현의 모습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교실에 있는 시계를 보니 2교시가 시작하기까지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시간 동안 반에 들르는 아이들이 없는 걸 보니 모두 운동장으로 미리 나가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고 있었는데 얼핏 봐도 경수네 반 학생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백현이 창문 너머로 운동장을 한번 둘러보곤 서두르자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백현은 교실에 들어올 때부터 체육복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굳이 오지 않아도 될 이곳까지 올라와 준 것이다. 경수가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체육복을 꺼내기 위해 몸을 숙였다. 백현은 자신의 몸보다 훨씬 커 보이는 체육복 상의에 머리를 넣고 있었다. 경수가 그 모습을 보고 작게 고마워라고 말했고 백현은 들은 건지 아닌 건지 경수를 보며 헤실헤실 웃어댔다. 체육복으로 다 갈아입은 경수와 백현은 각각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흘린 약들을 쓸어 담았다.
"아까 아침에 ..아무렇지도 않았어?"
비질을 하며 경수가 백현에게 물었다. 아직까지 미세하게 울음기가 남아있는 듯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침에? 뭐?"
"자살시도했다는 오메가 소문"
"아.. 슬퍼도 어쩌겠어. 나도 오메가다! 하고 당당하게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냥 뭐, 마음으로만. 응.."
남은 약을 담을 때까지 둘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청소에 몰두했다.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약이 담긴 쓰레받기 내용물을 버리는 백현이 무엇인가 웃긴지 갑자기 소리 내어 푸하하 웃었다.
" 그나저나 너 우는 모습 진짜 못생겼더라. 태교에 안 좋을 정도야."
못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경수가 창피한지 마른 세수질을 했다.
" 안 울었어."
코 끝이 아직도 붉은 경수가 백현에게 따져들었다.
"뉘예뉘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백현이 얄미운 표정으로 경수를 놀렸다. 깐족거리는 표정이 참 얄미웠다.
"너도 방금은 못생겼어"
그렇게 둘은 운동장까지 서로 못생겼다며 시시비비를 따지며 내려갔고 간신히 수업 종이 치기 전에 운동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살시도를 한 소문의 아이. 백현이. 그리고 도경수. 동갑 이외의 큰 연관성이 없는 셋을 묶은 오메가라는 사슬. 그리고 편을 가른 행복과 불행. 경수는 문득 자신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어느 쪽에 가까워질지. 불행할지 행복할지. 물론 경수도 행복해지고 싶었고 행복한 백현이 부러웠다. 그래서인지 행복해 보이는 백현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그리고 하나도 나오지 않은 백현의 배를 보는 시간도 많아졌다. 경수는 아까와 다른 이유로 백현과 거리를 둔 것에 대해 후회했다.
아이들이 뛰놀 때마다 흙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모래바람이 앉아있는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매섭게 불어오면 자리에 있던 아이들이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경수는 새삼 백현과 아기가 걱정됐다. 하지만 경수가 걱정을 하는지 모르는지 백현은 신 나게 뛰놀고 있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다가도 임산부가 저렇게 놀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조심성이 없어 보여 경수는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신 난 백현의 얼굴은 그마저도 행복해 보였고 밝은 햇살 아래에서 잘 어울렸다.
자신과는 다르게 밝은 곳이 퍽 잘 어울린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정신없이 오전 수업시간이 다 지나가고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4교시부터 식단 표를 확인하던 아이들은 종 치기 무섭게 뛰쳐나갔고 백현과 경수는 매점에서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경수는 워낙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빈속을 게워낸 후로 시도 때도 없이 꼬르륵거리며 소리 내는 제 위를 위해서라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점에서 빵 하나와 우유하나를 꺼낼 때 백현은 빵 세 봉지를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친 후 반으로 돌아온 둘은 나란히 앉아 빵 봉투를 뜯었다
" 빵 그렇게 먹어도 괜찮아?"
" 응? 빵은 괜찮은 거 같아 .헛구역질이 안 나오거든 "
" 그래도 밥이 몸에 더 좋을 텐데 "
말을 마친 경수는 자신이 쥐고 있는 빵을 크게 한입 물었다. 달큼한 크림이 입안에 감돌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조용히 각자의 빵을 먹고 있는데 교실문이 시끄럽게 열렸다. 열리자마자 고개를 내민 사람은 백현의 친구였다. 아까 쪽지에 적혀있는 이름, 찬 열이었다. 찬열은 도시락통을 흔들며 반에 들어왔고 경수가 있든 말든 백현의 앞에 앉아 도시락통을 내려놓았다.
"변백현! 또 빵 먹고 있네 그러지 말고 백현아~ 밥 먹자 밥"
" 싫어. 밥 보면 헛구역질 나"
" 그러지 말고 그럼 고기라도 먹자 응? 우리 엄마가 너 먹으라고 불고기 해주셨는데.. "
" 헐. 불고기? 빨리 열어봐 "
불고기라는 말에 백현이 먹고 있던 빵을 내려놓았다. 도시락을 열자마자 음식의 달큼한 내가 났다. 자연스레 경수의 고개가 돌아갔고 먹음직스러운 반찬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찬열이 경수를 째려봤다.
"뭘 봐. 네건 없어"
찬열이 경수를 보며 톡 쏘아댔다. 경수는 찬열의 말이 얄미웠다.
"누가 달래?"
얄미운 자식. 경수가 찬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불고기를 퍼먹고 있는 백현의 배에 손을 올려 대놓고 쓰다듬었다.
"야. 이게 어디 우리 행운이를 은근슬쩍 만져"
찬열은 경수의 손등을 찰싹 소리 나게 쳤고, 꽤 아팠는지 경수가 자신의 손등을 더듬었다.
백현은 그 상황이 웃긴지 그저 호탕하게 웃었다. 도시락을 경수와 찬열 그리고 자신의 가운데로 옮긴 백현은 밥을 크게 퍼 찬열의 입에 넣어주고 불고기를 집어 경수의 입에 넣어줬다. 왜 쟤한테 불고기를 주냐고 밥풀을 튀기며 노발대발하는 찬열이었지만 백현이 째려보자 묵묵히 입안의 밥을 씹어삼켰다.
급식을 다 먹고 반 아이들이 돌아오기는 이른 시간 교실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담임선생님이었다. 평소라면 점심시간에 음악실에 있어야 할 그였는데 교실에 들른 것은 아주 의외의 일이었다. 반을 쓱 둘러본 그는 세 아이를 발견하곤 웃어 보였다. 찬열과 백현은 선생님을 보자마자 인사를 하곤 다시 도시락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목적이 둘이 아니라는 듯 경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있을 줄 알았다고 확신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밥 먹고 있었어? 경수, 백현 이랑 찬열이도 같이 있었네? 경수는 잠깐만 선생님 좀 보자"
"다녀와 "
백현이 불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찬열은 밥 먹는데 집중하라며 백현의 볼을 잡아 돌렸고 경수는 자리에 일어나 담임선생님을 따라갔다.
요즘 들어 교무실을 찾는 일이 많아졌지만 교무실까지의 긴 복도를 흐르는 적막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며칠 전까지의 호출에선 잘못한 게 없었지만, 일단 오늘은 수업시간에 멋대로 뛰쳐나간 전적이 있기 때문에 걸음이 떳떳한 하지 못한 경수였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마주치는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을 보고 인사를 했고 선생님은 웃으며 받아줬다. 교무실 근처 복도로 오자 지나다니는 학생이 적었는데 선생님이 그제야 경수에게 말을 건넸다.
" 아까 왜 뛰쳐나갔어? "
약간 앞에서 걷던 선생님의 걸음이 경수와 나란히 맞춰졌다. 선생님의 눈엔 걱정이 담겨있었다. 발령 후 첫인사에서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던 그는 자신의 반 학생일 이라면 매사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물론 자신의 반의 학생인 경수에게도 힘이 되고 싶어 하던 그였다. 말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듯한 사람은 아닌듯했다.
"..."
경수는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듣고 있으면 혼란스럽고 심란한 감정이 생기긴 하지."
대답을 듣기 포기했는지 자신의 질문의 답변을 스스로 하는 그였다. 아마 아직도 자신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경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듯했다.
".. 죄송합니다"
경수는 작게 중얼거렸다. 작은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던 그는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교무실까지 향할 걸음이 예상외로 다른 곳을 향했다. 이쪽은 교무실 방향이 아니란 걸 아는 경수는 머뭇거리며 선생님을 따라갔다.
교직원 출입문으로 걷던 선생님은 기어코 학교 건물 밖으로 경수를 데리고 나갔다. 주변을 둘러본 그는 근처에 있는 작은 벤치에 앉았고 경수도 이내 옆자리에 앉았다. 서늘한 그늘에는 약하게 바람이 일렁였고 눈을 조금만 움직여도 보이는 햇빛에 눈이 시려왔다.
"어제 또래상담에 관한 거 생각해봤니?"
".. 선생님"
상담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을 할 때 경수의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선택의 기로 앞에 서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영향으로 갈팡질팡했고 지금도 확실한 선택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은 백현과의 거리가 좁아졌고 확실하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에 경수는 이 정도에서 만족할 생각이었다. 욕심이 과하면 항상 화를 부르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자신의 주제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필요 없을 거 같아요.
그 순간 손목의 상처가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말이 입 밖으로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백현은 분명 착한 아이고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친구일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자신의 어두운 부분까지 밝힐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엔 백현은 너무나 밝았고 사랑스러웠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다간 분명 전과같이 벽을 쌓게 될게 뻔했다. 경수는 선택해야 했다. 백현을 그저 잠시 동안 외로움을 달랠 상대로 남겨둬야 할지 더 나아가 마음을 놓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로 남겨둬야 할지 경수는 고민했다.
"응. 경수야."
경수의 머릿속은 본능과 이성이 전쟁 중이었다.
어차피 나는 벗어날 수 없어. 오메가는 원래 이렇게 살아야 해.
그 애는? 같은 오메가인데도 밝은 백현이는? 거기에 임신도 했는데? 진짜 못 벗어날 거라고 생각해? 여태 시도도 안 해봤잖아. 백현이 소문 안 낸다고 했는데 가망이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난 벗어날 수 없어. 백현이 말을 안 해도 숨길 수 없는 거야. 결국 들키고 말 거야. 근데 이렇게라도 살면 행복에 겹지 않아도 자살시도로 소문난 애보단 행복할 거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
마음으로 받는 상처가 두려워서 모든 걸 피하려고 했다. 아직 용기가 남았는데. 이렇게 고여있다간 분명 썩을게 분명했다. 지금 이 선택이 어쩌면 경수 자신을 바꿔줄 수 있는 전환점일 수 있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자신에게 쏟아지는 애정 어린 관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백현이 자신에게 배를 보여주기까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를 믿어 준 이유는 무엇일까? 매일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던 선생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지금 앉아있는 이 그늘의 몇 걸음 앞에는 해가 반짝이고 있다.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 없다고 해도 그렇게 믿고 싶어졌다.
" 저.. 상담받아볼게요."
선생님의 표정이 경수의 말 한마디에 밝아졌다. 그의 끈질긴 도전은 끝내 성공한 것이다.
" 그래 경수야 잘 생각했어. 언제부터 신청해둘까? 오늘은 좀 그런가? 내일부터 할래?."
어른인 그는 제자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준 사실이 그리도 좋았는지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경수에게 쫑알거렸다.
" 오늘부터 시작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 그래 그럼 오늘부터 신청해 둘 테니까 종례 끝나고 기다리고 있어 경수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디선가 다가온 여학생 무리가 경수와 선생님이 앉은 벤치로 가까이 다가왔다.
"준면쌤~ 오늘은 피아노 안치세요?"
"피아노~ 피아노~"
볼일이 끝난 경수는 반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체 않고 준면에게 팔짱을 끼던 여학생들 때문에 준면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수는 건물로 들어가기 전 뒤를 돌아 봤다. 멀어지는 준면을 뒤돌아 바라보니 여학생 무리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경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경수는 어른답지 않은 그의 행동에 살풋 웃음이 났다.
교실로 돌아오니 급식을 다 먹은 아이들은 컴퓨터로 웃긴 자료를 찾아보며 깔깔거리고 있었고 자리에 앉아있던 백현과 백현의 어깨를 안마하고 있는 찬열이 보였다. 경수가 자신의 자리에 앉자 백현이 몸을 돌렸다.
"왜? 무슨 일이야?"
"어제 말했던 상담 얘기."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
"상담받기로 했어. 오늘부터."
백현은 잘 생각했다며 연신 칭찬해주기 바빴고 경수보다 더 상담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자신이 상담할 때는 긴 생머리의 여고생이 들어오길 바랐는데 멀대같이 큰 남자애가 들어와서 처음에 싫었다는 둥 그 남자애는 상담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둥 신 나게 떠들어대는 백현을 보며 찬열이 칭얼거렸다. 언제는 행운이라며. 끝내는 삐친 찬열을 백현이 어화둥둥 달래기 바빴다.
*
오후의 수업이 시작되고 끝나면서 상담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백현이 말했던 긴 생머리의 뽀송한 여학생이 들어오는 생각부터 멀대같이 큰 남자애가 들어오는 상상까지, 누구든지 간에 모두 새로웠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설렘에 두근거리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처음 느껴보는 거였다. 아마 비슷한 느낌을 받은 거라고 떠오르는 건 잘못을 해서 손바닥을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것 정도라고 하면 되겠다. 일단 떨리는 건 맞으니까.
*
수업이 끝이 나고 어김없이 찬열은 백현과 같이 하교하기 위해 반으로 찾아왔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었는데 경수를 보면서 으르렁거린다는점.그게 어제와는 달랐다.물론 진지하게 경수가 싫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걸 경수도 알고있었다.
"오늘 방과 후에 상담받는 거야?"
"응. 지금 가봐야 해"
"경수야 끝나고 반으로 와 기다려줄게. 들어가기 전에 약 꼭 먹어"
"굳이 안.... 아 알겠어"
경수는 이제 막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거리를 다시 멀리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찬열도 별 불만이 없는 듯 그저 멀뚱멀뚱 경수를 바라봤다.경수는 그 자리에서 렌즈통을 꺼내 약을 삼켰다.
"대신 올 때 과자 챙겨와"
종례 후 준면을 따라 상담실로 향했다. 구관과 문 여는 방식이 달라서 경수가 상담실 문을 열다 손을 부딪혔다. 하지만 그 외 상담실은 딱히 특별하게 다르거나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신식 건물답게 때타지 않은 상담실은 마주 보는 갈색 소파 두 개와 작은 탁상이 놓여있었다. 아이보리색을 띤 벽에는 시계조차 걸려있지 않았고 시간이라고 하면 소파 옆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으로만 알 수 있을 듯했다. 애초에 어두워질 때까지 있진 않을 테지만 말이다. 경수는 소파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참 상담실 구석구석을 구경하다 출입문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기다리면 곧 올 거야"
백현이 말한 것처럼 탁상에는 과자와 음료수가 놓여있었고, 경수는 그것들을 챙겨오라는 백현의 말을 떠올렸다. 과자를 먹으며 좋아할 친구의 얼굴을 생각하자 어떻게 챙겨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그 순간 상담실의 문이 열리고 내심 기대했던 긴 생머리의 여고생 대신 키 큰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경수는 백현이 왜 실망했는지 조금은 이해했다. 그 남자아이는 경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이쪽은 김종인 1학년이고, 이쪽은 도경수 2학년"
준면은 아주 간단한 소개를 했고 경수는 종인의 얼굴을 힐끔 거렸다. 짙은 쌍꺼풀에 다소 까만 피부는 답답한 교실에 앉아있는 것보다 밖에서 뛰노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 안녕하세요 경수형."
" 그럼 선생님은 이만 나가볼게. 이야기 잘 해봐.
준면은 그렇게 둘을 남겨두고 상담실에서 나갔고, 준면이 나가자마자 종인은 경수에게 상담 스케줄을 설명했다.
"상담 시간은 1시간. 기간은 1학기 기말고사 전까지고, 화 수 목 일주일에 세 번이에요. 시간은 방과 후"
경수는 종인의 말이 끝나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과 후에 시작되는 상담 시간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불편했지만 그 정도야 조금 더 서두르면 문제 될 건 없었다. 단지 지금 이상황의 문제는 상담 거리였다. 보통 상담이라 하면 이성이나 성적,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된다 했던 백현의 말이 떠올랐지만 경수에겐 그중 어느 하나 상담할 거리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일상 대화조차 하는 일이 드물었던 경수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종인이 대화를 이끌어 주길 바라기도 했지만 막상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할 거 같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시간만 지새웠다.
마음속에 있는 시계가 째깍째깍.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경수는 말을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아마 이야기의 시작을 해야 한다면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해도 모자랐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경수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엇을 믿고 이야기해야 할지 무조건적으로 앞의 아이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상담이 시작되고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이 없었다. 처음엔 그 침묵이 어색했지만 그것도 조금 지나니 익숙해지는듯했다. 경수가 신경 쓰이는 건 아까부터 자꾸 따끔거리는 손목 정도뿐이었다.
" 상담해준다면서 왜 내가 아무 말도 안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종인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경수의 눈이 종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 왜 아무 말도 안 하는데? "
경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종인의 가볍게 미소 지었다.
" 사람이랑 사람이 소통하면서 시작되는 비극은 말에 대한 오해보다 침묵을 이해 못 해 서래요. 기다려줄게요. "
"..."
적어도 이 아이는 말없이도 자신을 위해주고 있었다. 이르지만 조금은 편하게 생각해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경수는 이제 끝나가는 상담 분위기에 말없이 과자를 주섬주섬 챙겼다. 뜬금없이 과자를 챙기는 모습이 스스로도 웃겼지만 백현이 부탁했기 때문에 경수는 지켜야 했다. 물론 백현이 강압적으로 협박을 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 정도는 백현을 위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먹으라고 둔 건데 뭐 어때.
"형. 상처는 방치하면 곪아요"
경수는 종인의 말이 참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한참 과자를 챙기던 경수가 고개를 들어 종인을 바라봤다. 경수를 본 종인이 경수의 팔 쪽으로 작게 턱짓을 했다. 무슨 행동인지 의아해한 경수가 종인이 가리킨 소매를 바라보자 터진 상처에서 나온 피가 소매를 물들이고 있었다. 상담실에 들어오면서 문에 부딪힌 게 문제였다
과자를 주섬주섬 챙기던 경수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품에 끌어안아 챙겼던 과자가 후드득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과자들 순간 경수의 얼굴이 피만큼 붉게 달아올랐다. 몸을 일으키자 소매 안으로 피가 흘렀다.
아직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부끄러운 부분이 처음 보는 아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경수는 종인을 상담실에 남겨두고 허겁지겁 상담실에서 뛰어나왔다.
경수가 뛰는 길. 그 흔적을 따라 피가 점선을 찍으며 쫓아왔다. 방치한 상처가 전보다 크게 벌어져 소매를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손목을 부여잡은 경수는 자신의 반으로 달렸다. 구관까지의 거리만큼 한 방울씩 자취를 남기는 핏방울을 바라보니 경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도와줘 도와줘 변백현 도와줘 박찬열 도와줘 백현아. 도와줘 찬열아. 점점 더 크게 번져가는 핏자국이 소매를 적실쯤 간신히 도착한 반 앞에 도착했다. 손목을 잡고 있느라 피가 묻은 손바닥으로 교실문을 열자 백현과 찬열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수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끝났어? 과자.. 너 팔이 왜 그래!!"
백현과 찬열이 경수를 보자마자 놀란 눈으로 달려왔다.
"피가 안 멈춰.. 배, 백현아.. 피가.. 이상해 안 멈춰.. 나, 나 이러다 죽으면 어떻게 해"
경수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덜덜 떨려왔다. 붉게 번진 피를 보며 백현이 울먹거렸다.
"무슨 소리야. 죽긴 왜죽어 바보야."
"진정하고, 팔 걷어봐"
찬열이 경수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하얀 속살이 보이는 손목에는 여러 줄이 그어져있었다. 그중 유독 길고 깊어 보이는 상처가 터져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둘은 상담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고 싶었지만 이미 희미하게 남은 여러 줄의 상처가 상담실과는 별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너 손목이 왜 이래!!"
"피.. 피가.."
"일단 병원부터, 병원. 빨리 병원부터 가자"
*
경수는 병원까지 어떻게 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몸에 땀이 나서 옷이 닿는 느낌이 찝찝했고 손목은 아파왔다. 옆에 있는 백현은 말없이 훌쩍거리고 있었고 찬열의 낯빛 또한 좋지 않았다. 피를 얼마나 흘린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편하게 누워 쉬고 싶은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경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마취 안 하고 꿰맬게요"
잠시 낯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경수의 팔을 잡았다. 손목에 느껴지는 아픔이 지나치게 따끔했다. 몽롱한 정신을 잡고 있던 경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생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바늘의 느낌이 너무 생생했다. 실이 몸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느낌 하나하나가 손목을 타고 흘러들었다. 마치 제 살가죽이 직물이 된 듯 한 땀씩 꿰매졌다. 몇 바늘을 참던 경수가 이내 끙끙 앓았다
" 아.. 아파요. 으.. 의사 선생님, 아파요.."
" 엄살은. 상처 내는 게 더 아팠겠어요. 조금만 참아요"
의사는 조용히 하라며 경수를 혼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수는 연신 아프다는 소리를 끙끙거렸다.
*
병원에서 나오자 해가 거의 떨어져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자신 때문에 고생한 백현과 찬열에게 미안했다. 병원에서 나올 때까지 둘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피에 젖은 교복은 가방에 넣었고 교복 안에 있던 흰 티만 입고 나왔다. 병원을 나오자 밤바람에 으슬으슬 팔이 시렸다. 백현은 울었는지 아직 코끝이 붉었다. 찬열이 외투를 벗어 백현의 어깨에 둘러줬다. 백현은 어때에 닿는 찬열의 손을 잡고 연신 눈치를 살피는 경수를 바라봤다.
"오늘 도 경수 덕에 좋은 거 많이 보네~"
"선생님이 임 아파요우우우.크크크큭"
찬열이 우스꽝스럽게 경수를 흉내 내자 답답한 분위기를 깨고 백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내가 더 잘 흉내 낼 수 있어. 서언 새애 앵 후애애앵~ 아파요 으애애앵~"
"아 놀리지 마"
경수는 자신이 무어라 할 상황이 아님을 알았지만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놀리지 마아 아 아~"
"크크크크크 잘한다 박찬열!"
놀리지 말라는 경수의 말에도 둘은 한참 동안 경수의 흉내를 내며 웃어댔다. 처음에는 놀리지 말라며 화를 내던 경수도 이내 백현과 찬열 사이에서 같이 웃어댔다.
병원 앞에 있는 사거리에서 백현, 찬열과 헤어졌다. 인사를 하며 과자를 챙겨오겠다는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는 경수의 말에 백현은 또 푸하하 웃었다. 백현은 그럼 다른 약속을 하자고 하며 경수를 다독였다. 잠시 생각을 한 백현이 경수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다신 몸에 상처를 않기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머뭇거리던 경수는 이내 그에 응해줬다. 백현은 착하다며 펜을 꺼내 경수의 손바닥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줬고 힘들 때마다 전화하라고 말했다. 집을 향해 걷는 경수는 몇 번씩 손바닥을 확인했다. 왠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집에 돌아온 경수는 아까 백현이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울을 때 자신이 못생겼다는 말. 진짜 그렇게 못생겼나? 경수는 깨진 거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려 울상을 지었다. 허튼짓을 하지 말라는 듯 꿰맨 부위가 콕콕 쑤시며 아려왔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경수는 머쓱했다. 문득 마취 없이 살을 꿰맬 때가 생각이 났다. 보는 눈이 있어서 그 정도로 한 거지 아마 아무도 없었다면 아프다며 악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꿰맨 부위는 부자연스럽게 접합되어 미관상 좋지 않았다. 아마 이 상처를 평생 봐야 한다고 생각하자 경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것을 후회했다. 백현과의 약속을 최대한 지켜보도록 노력할 것이다. 몇 시간 사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직 큰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면 잠시 잊고 있던. 이제 막 시작한 상담을 하루 만에 피하고 싶어졌단 것.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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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종인이 나왔네요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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