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y and The Beast .1
w.오두막
커다란 성에 한 왕자가 살고있었다. 왕자는 수십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입고 싶은것을 모두 입을수 있었고, 먹고 싶은것을 모두 먹을수도 있었다. 그는 외모조차 출중하여 뭇여인들의 사랑을 온몸에 받았지만 다소 건방져 이 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면 만나지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느날 밤이었다. 허리가 굽은 한 노파가 그의 성문을 두드리곤 장미를 꺼내며 하룻밤만 묵게 해달라고 하였다.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한 노파를 본 왕자는 코웃음을 쳤다. 노파가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는 것이라 훈계했거늘 그는 하인들에게 노파를 내쫓으라 명했다. 그러자 노파가 빛을 내뿜으며 모습을 바꾸었다. 노파는 건방진 왕자를 벌하러온 아름다운 요정이었다. 뒤늦게 그는 요정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그녀의 노여움을 풀수없었다. 요정은 왕자를 흉물스러운 야수로 바꿔버리고 성에있는 모든것에 마법을 걸며 이렇게 말했다.
네 모습을 보고도 진정한 사랑을 줄수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마법이 풀릴것이나 나타나지않는다면 죽을때까지 야수의 모습을 하고 살거라
***
나무간판을 건 과일가게, 갓 구운 빵을 내놓은 빵집과 흙장난에 빠진 아이들. 흙길에 좌우로 길게 자리잡은 상인들이 북적이고 중앙의 분수에선 맑은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유독 눈이가는 한 사내가 책을편 채 익숙하게 장터를 빠져나가자 딴짓을하던 마을처녀들의 눈이 부리나케 그를 쫓았다.
곱슬거리는 금발, 곧고 얄쌍하게 선 코가 여느 여인네만큼이나 어여쁘지만 쌍커풀없이 긴 눈을가진 매력적인 사내였다. 사내가 장터의 한쪽에 자리잡은 낡은 책방의 문을 열고들어와 노인에게 가져온 책을 건넸다. 물론 예쁜 미소도 잊지않고.
"미모는 여전하구먼. 벌써 같은 책을 세번이나 빌려갔는데. 어때, 여전히 재미있던가?"
"왕자가 공주에게 청혼하는 장면은 언제 읽어도 황홀하던걸요. 오늘들어온 새 책이 있나요?"
"오늘은 없고 모레는 되야 들어와. 그 책이 그렇게 마음에 들면 하나 가지게."
괜찮아요. 손사례를 치던 사내가 두권이 더 있다며 책을 건네는 노인의 인자한 미소에 받은 책을 꼭 품에 안았다.
"그저께 빌렸던 책이랑, 저 책. 오늘은 이렇게 빌려갈게요. 주신책은 꼭 잘 간직할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는 사내를 노인이 물끄러미 쫓았다. 그는 어딘가 특별했다. 나이가 찼음에도 여인을 만나지 않는것도 그러했고, 책방에 있는 책은 거의다 읽었음만큼 독서를 좋아하는 것도 그랬다. 홀로 홀아비를 봉양하면서도 늘 밝고 영특해 마을의 딸가진 어른들은 모두 사내를 탐내지만 좀처럼 누군가를 마음에 두지않아 한쪽에선 그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돌기도했다.
어서 마음씨 고운 여인을 만나 함께 아비를 뫼시면 훨씬 좋을텐데...
사내가 반납한 책을 닦아 책꽂이에 꽂은 노인이 책방을 쓸었다. 노인의 장부엔 '유권', 사내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을 뿐이었다.
"책방 어르신께서 책을 선물로 주셨어요."
"정말 좋으신 분이구나. 다음에 잼을 만들면 꼭 가져다 드리거라."
좋아요. 다가가 꼭 안은 아버지에게서 알싸한 향이 일었다.
"제가 나간 사이에 감춰둔 술을 찾아 드셨나 보네요."
"들켜 버렸구나. 걱정말거라."
"..마을사람들이 모두 아버지가 술독에 빠져산데요. 건강이 걱정되니 이제 마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뚜껑을 열었으니 이번것만 마시고.."
껄껄 웃는모습에 어쩔수없다는듯 사내가 주방으로 걸어가 빵과 치즈를 잘랐다. 식탁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있는 그의 아버지는 젊었을적 촉망받던 과학자였다. 물론 이사오기 전까지의 이야기지만.
"맞다, 얼마전에 연락오셨던 친구분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래, 연락이 왔었지.."
잊고있었구나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다가 갑자기 식탁에서 일어서 머리를 쥔 사내의 아버지가 갑자기 모자와 망토를 챙기기 시작했다.
"저녁까지 그를 만나기로 했었다. 보여줄게 있다고 했어. 내 정신좀 봐라"
"말을 준비해 드릴게요."
미소지은 그가 문을열고 나와 마구간으로 향했다. 윤기가 흐르는 회색말을 꺼내어 갈기를 여러번 쓰다듬고 안장을 채우자 관리가 잘된 말이 눈을 깜박였다.
"아마 삼일정도 걸릴거란다. 뭔가 대단한걸 발견한 모양이야."
"좋은 소식이면 좋겠네요. 몸 조심히 잘다녀오세요."
"그래, 내 하나뿐인 아들."
뺨을 맞댄 사내의 아버지가 굽이친 길을 따라 작아져 갔다.
***
"이런..지금쯤 도착했어야 하는데...길을 잃은것 같구나. 산이라 해도 빨리 지고 슬슬 추워지는데...서두르자"
말을 알아듣는건지 그의 말발굽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날은 어두워지고 산은 깊어지는것을 사내의 아비는 눈치채지 못하였다. 한참을 더 들어가자 들고있는 랜턴불빛빼고는 그 어느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 어딘가에서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고 길을 알수없어 멈춰선 채 사내의 아버지는 지도를 물끄러미 보고있었다.
그때였다. 험해진 산세 사이로 돌연 늑대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한두마리가 아니었다. 족히 일곱, 사내의 아버지가 줄을 잡고 말을 재촉하기 시작하자 늑대들이 그를 쫓았다.
한치앞도 볼수없는 산길을 마구 달리던 중, 가지를 내린 나무를 미처보지못한 아버지가 말에게서 떨어져굴렀다. 말이 소리에 놀라 내달리는 바람에 떨어진 랜턴불도 꺼졌다. 설상가상이었다. 그가 떨어진것도 모른채 그는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안 돼."
눈에 불을 키고 쫓아오는 늑대들을 보곤 그저 미치광이인냥 달렸다. 모자가 벗겨지고 망토가 찢어졌다. 늙고 살찐 그는 늑대들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을때 눈앞에 높은 울타리를 발견했다. 낡고 녹슨 철창이었지만 필사적으로 흔들며 소리쳤다.
"사람살려!! 문좀 열어주겠소! 거기 누구 없소!!"
소리치는 사이 늑대들이 다섯걸음 차로 가까워져있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생각하던 아비가 눈을 질끔 감자 기대었던 울타리가 기적적으로 열렸다. 그는 허공에 연신 감사하다 소리친 후 울타리를 재빨리 닫아버렸다. 철창을 넘지못한 늑대들이 주둥이를 철창사이로 마구 밀어넣었다. 사내의 아버지는 불빛하나 없는 버려진듯한 성에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실례합니다..길을 잃었는데 날이 저물어 그런데 하룻밤만 묵어가도 될런지요..."
숨을 가다듬은 아비가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으며 허공에 말을 했다. 성은 거대했으나 촛불하나 없었으며 온기 역시 찾아볼 수 없어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흘렀다.
나무사이를 구르고 달려 흠뻑젖은 그가 몸을 떨었다.
그러자 아무도 손대지않은 수십개의 촛대에 불이 붙었다. 울리지않던 시계초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카펫이 서서히 움직여 그를 벽난로가 켜진 방앞으로 안내했다. 추위에 몸을 떨던 그가 불을쬐려 벽난로에 가까이 다가가자 의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모든것이 '살아있는듯' 했다. 구석에 서있던 옷걸이가 다가와 담요를 건넸다. 그는 따스한 벽난로를 쬐며 젖은 옷을 말리고 굴러서 생긴 상처들을 닦다가 밀려오는 피곤함에 까무룩, 잠이들었다.
"누가 감히 나의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느냐"
소리는 성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사내의 아비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서 커다란 야수가 거친숨을 내뱉었다. 족히 2m는 넘어보였고. 온몸에 털이 빼곡하며 밖으로 삐져나온 커다란 송곳니가 말그대로 '야수'였다.
겁에 질린 아비가 허리를 숙여 사과했지만 야수는 그의목덜미를 채어 사정없이 지하로 끌고내려가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무어냐. 혹 나의 흉한꼴을 구경이라도 하러 온것이냐. 너는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죽을때까지 나와 함께 저주받은 성에서 갇힌채 살거라"
번쩍거리는 눈을 무릅쓰고 빌었지만 야수는 서쪽탑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비는 혼자남을 아들생각에 안간힘을다해 문을 흔들었지만 지하감옥을 벗어날수 없었다. 그는 그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
유권은 집앞 언덕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상쾌한 아침바람이 불어오고 눈앞의 벼들이 새파랗게 익어 이리저리 흔들렸다. 저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점차 가까워져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 혼자왔어....? 아버지는...?"
겁에 질린 말을 도닥이던 그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급히 집에서 망토를 챙긴 사내가 말을 달래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달라고 부탁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아버지를 잃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마음을 옥죄었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혹 무슨일이 생긴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맴돌아 고개를 저었다.
몇 시간을 헤메어 낡고 어두운 성앞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을 시간인데도 높고 짙은 나무들에 의해 햇빛이 가려져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떨리는 손으로 조금열린 철창을열고 들어와 말을 묶은 채 성안에 발을 들였다.
성안은 춥고, 어두웠다. 초는 모두 꺼져있었고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벽을 더듬으며 걸었다. 1층의 방을 모두 돌았는데도 털끝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사내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계속해서 성안을 헤집고 다니다가 초가 켜져 있는 계단을 발견해 아래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내의 턱에 땀이 흘렀다.
"아빠...아버지..."
초를 들고 아래로 내려가자 아비의 앓는소리가 들려왔다. 재빨리 뛰어내려간 사내가 철장사이로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그는 계속 마른기침을 해댔다.
"아버지를 가둔게 대체 누구에요...대체.."
"여기서 당장 도망치거라..여기를 들어오면 안됬어...어서 가...도망쳐.."
"아빠를 두고는 절대 못가요..기다려요.. 도끼를 찾아올게요."
뒤로 돌아 주변을 살피려던 사내가 멈춰섰다. 켜져있던 촛불이 어느새 모두 꺼지고 계단한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눈에 불을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것은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사내는 놀라 시선을 돌렸다가 조심스레 뒷걸음을 쳤다.
"아버지는 몸이 안 좋으세요...여긴 너무 추워요...아버지를 놓아주세요..."
사내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지만 야수는 그를 위협할 뿐이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너도 가둬버리겠어."
"..부탁할게요..."
"마차야, 소년을 태워 마을 어귀로 쫓아버리거라"
구석에 넝쿨진 채 놓여있던 마차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에게 다가갔다. 묘안을 생각해내라며 자신을 자책하던 사내가 야수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버지 대신 제가....제가 여기 남도록 할게요..아버지를 보내주세요."
***
성에 혼자남은 사내는 한나절이 넘도록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성안의 접시들이 뛰어와 음식을 날랐지만 아무것도 입에대지 않았다. 움직이는 성안의 물건들도 더는 신기하지 않았다.
아마 하루를 더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물조차 마시지 않아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무언가가 뛰어올라가더니 곧 야수가 내려왔다.
"이대로 죽을거면 마음대로해."
야수가 벽에 기대어 있는 사내의 얼굴을 그제야 제대로 보았다. 눈을 감고있는 그는 고운듯 선이 굵어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야수가 가져온 스프그릇을 들고 안으로 들어와 축늘어진 그를 들어올렸다. 사내는 1층으로 옮겨졌다.
"객실을 치워, 앞으로 그는 여기서 지낸다. 문 앞에서 교대로 서있고 스프를 다시 데워 먹여라."
그의 말에 가만히 있던 식기와 옷걸이. 빗자루들이 뛰어와 객실을 치우고 그를 눕혔다. 숟가락들이 뛰어와 데워온 스프를 벌어진 입술사이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사내는 갈아입혀진 옷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창밖엔 새들이 무리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테이블위에 올려진 꽃병이 처음으로 사내에게 말을걸었다.
"주인님이 오늘저녁을 함께하자고 하십니다."
"...먹고싶지 않아요.."
"7시쯤입니다."
"...."
"겉모습은 야수이고 까다롭지만 다정하신 분입니다."
"...왜 그는 저와 저녁을 함께 하려하죠..."
"우리는 5년이 넘도록 성 밖을 나가본적이 없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가 성 안에 들어왔을때. 정말 기뻣어요. 우리는 사람이 그리웠습니다. 아마 주인님도 저희와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네요."
"...5년이요?"
"꽤나 긴 시간이죠. 이야기가 길어질것 같군요. 차를 내오라 하겠습니다."
꽃병이 꽃을 테이블위에 빼 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래서 주인님은 21세가 되기전에 본인의 온전한 모습을 사랑해주는 분을 찾아야합니다. 올해 주인님의 탄생일이 얼마남지 않았네요. 하지만 이곳에 오신분도 5년간 당신의 아버지가 처음 이셨는데 그를 사랑할 여자를 만날 수 있을리 없죠...저희모두 아마 평생을 이 성에서 살아야 할겁니다.
"그렇게 슬픈 이야기를..."
사내는 그의 눈동자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본래는 어떤 모습인걸까. 갈아입혀진 옷을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저녁시간이네요. 냅킨들이 테이블로 안내해 드릴겁니다. 모쪼록 즐거운 만찬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가지런히 접힌 냅킨들이 뛰어와 사내의 손을 당겼다. 사내는 그저 그를 따라갈 뿐이었다. 모퉁이를 돌아걷자 잘 구워진 빵 냄새, 오븐에 익힌 고기와 스프의 향이 복도까지 밀려나와있었다. 사내는 오랜만에 허기짐을 느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식당으로 들어서자 크고 낡은 의자에 앉은 야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몸을 잠시 떨었다.
"이리와 앉아.."
식당을 울리는 목소리에 사내가 조심스레 그의 옆자리로 다가가자 오븐영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식탁에 서있던 촛불들이 차례대로 불을 밝혀 준비된 음식을 비추었다. 사내는 덕분에 야수의 그늘진 얼굴을 누구보다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보기흉하니 어서 식기를 들어."
사내가 숟가락을 들어 스프를 떠 먹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빵을 자르고 잘 익은 훈제고기를 자를때까지 야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사내는 속도를 맞추기 위해 고기를 천천히 씹었지만 그는 그저 차려진 음식을 내려다 보기만 했다.
"분명 함께 식사를 하자 하여 내려왔는데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야수는 쥐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머리를 숙여 익힌 고기를 뜯어먹었다. 야수의 송곳니가 고기를 사정없이 물어뜯다가 고기를 내려놓았다.
"..혹 이런 내모습이 불편하진 않소..?"
그 기괴한 모습에 사내는 조금 놀랐지만 곧 미소를띄며 자른 고기를 찍어 그에게 내밀었다. 야수는 얼굴앞에 들이 밀어진 고기를 멍하니 바라보다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주방에서 후식을 만들던 오븐영감이 놀란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사내는 아름답고 어딘가 특별했다.
꽤 길었던 식사를 끝내고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수가 망토로 털난 손을 가리고 서쪽 탑으로 향하자 사내가 뒤를 따랐다. 그러자 천둥같은 야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서쪽 탑은 출입이 통제되어있소. 그 발을 딛지 마오."
깜짝놀란 사내의 손을잡은 옷걸이가 그의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원래 그렇게 화를 잘내나요."
창밖을보며 턱을 괸 사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옷장이 그를 달랬다.
"서쪽 탑에는 아주 소중한 것이 있어 혹시 당신이 방을 둘러보다 그것을 헤할까 두려워 그런것입니다. 괘념치 마세요."
그가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답답해. 사내는 물이 흐르는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그었다. 그러자 창밖정원으로 야수가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했다. 야수가 정원으로 들어서자 새들이 일제히 자리를 피했다. 그가 무언가를 꺼내어 정원 여기저기에 뿌리고 뒤로 물러서자 새들이 날아와 그것을 쪼았다. 야수는 새들에게 모이를 주고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한발짝다가서려 하면 새들은 지레 겁을먹고 날아서 달아났다. 야수는 처진 어깨로 먼발치에서 새들의 모이 먹는것을 바라 보고만있었다.
"..."
턱을 괴고 있던 사내가 빤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옷장에게 물었다.
"여기 읽을 책이 있을까요?"
"촛대에게 책을 가져오라 할까요."
"아니에요, 성에 적응도 할 겸 제가 둘러볼게요."
"복도에 선 갑옷들이 안내해 드릴겁니다."
복도로 걸어나오자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갑옷중 하나가 따라 붙었다. 그가 촛불을 들고있어 어두운 성안을 둘러보기가 수월했다. 군데군데 무너지고 훼손된 곳도 많았지만 본래구조는 정말 아름다운 성이었다.
"갑옷씨..조금 추워서 그런데 망토를 가져다 줄 수 있나요."
미안한듯 눈을접으며 묻자 초를 사내에게 건넨 갑옷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사내에 얼굴에는 호기심이 일렁거렸다.
"...서쪽 탑"
해가 뜨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향하자 모퉁이를 돌아 잘 보이지 않는 샛길이 보였다. 사내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걷자 낡고 큰 나무문이 나타나 조심스레 그것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넓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초로 옆을 비추자 길게 찢어진 초상화가 보였다. 사내는 초상화에 그려진 남자의 눈밖에 볼 수 없었지만 남자의 눈은 깊고 아름다웠다. 뒤를 돌자 테이블위에 빛나는 장미꽃 한송이가 올려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서너개의 잎이 떨어져 빛을 잃고있었다. 하지만 그 빛이 너무 아름다워 사내는 손을 뻗어 장미를 만지려했다.
"나가"
열린문으로 거친숨을 몰아쉬는 야수가 걸어오자 땅이 울렸다. 그는 매우 화가난 목소리였다. 사내는 차분히 상황을 설명하려했다.
"정말 죄송해요..너무 궁금해서...그래서.."
"나가, 당장"
야수가 커다란 앞발로 의자를 부수기 시작했다. 사내가 뒷걸음질 처 방을 벗어나자 야수가 장미꽃에게 다가와 잎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떨어진 잎의 수는 어제와 같았다. 가구를 부수는 것을 멈춘 야수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더이상 이곳에 못 있겠어요."
사내가 울먹이며 뛰쳐와 옷장에게서 망토를 꺼내 둘렀다.
"주인님이 아시면 크게 화를 내실거에요."
"다 필요없어요, 저는 저 난폭한 야수에게서 도망쳐야겠어요."
"날이 어두워 위험합니다. 산짐승들이.."
옷장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내가 정원으로 뛰쳐나가 묶어놓은 말을 풀었다.
"전속력으로 달려. 집으로 가자."
말이 정원을 빠져나와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랜턴이없어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사내는 말을 믿고 몸을 붙인 채 산길을 내달렸다.
얼마못가 뒤에 늑대들이 따라 붙었다. 그들은 여럿이었고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늑대가 뛰어오르는 바람에 말과 사내가 비탈을 굴렀다. 사내가 급히 나뭇가지를 꺾어 휘둘렀지만 늑대들은 그를 둘러싼 원을 서서히 좁여올 뿐이었다.
돌연 비탈 너머로 야수의 울음이 울려퍼지더니 그가 달려와 일곱마리의 늑대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야수의망토가 찢어지고 늑대들이 그의 팔과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야수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다리에 붙은 늑대의 입을 세로로 찢어버렸다. 그렇게 몇분을 더 싸우다가 늑대들이 도망가자 야수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거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내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 말을 세워 달리려했지만 죽어가는 야수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크고 무섭던 야수가 비탈에 웅크려 일어서지 못했다.
야수의 거친숨이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하자 사내가 뛰어와 야수를 바로 눕혔다. 그의 팔다리는 성한곳이 없었고 늑대들에게 찢긴 상처에선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내는 야수의 갈기를 쓸어넘겼다. 가까이서 본 야수의 눈은 깊고 아름다웠다. 야수는 손을 들어 사내의 굽이친 금발을 쓰다듬었다. 움직임이 많이 더뎠으나 사내는 그의 손길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야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금발이 너무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어떠한 문책도 하지않은 채 그가 피를 쏟아냈다. 맑은 눈빛이 흐려지고 움직임이 사그러들었다. 사내가 그의 손을 뺨에 가져다 대었다. 뜨겁던 야수의 손이 식어가고 있었다. 사내는 옷을 찢어 흐르는 피를 막아보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왜 도망치는 나를 구해줬나요.."
사내가 야수를 끌어안아 그가 식는것을 막으려했다.
"당신은 누구보다 강한 야수잖아요. 어서 눈을 떠요. 제게 호통을 치세요..나를 혼자두지 말아요.."
뺨에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야수의 찢어진 옷 사이로 둥근 금빛 목걸이가 보였다. 안에 끼워진 사진에는 서쪽탑에서 보았던 눈이 아름다운 사내와 그와 꼭닮은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서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가슴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이해할수 없었지만 숨이 완전히 멈춘 야수에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워요."
뺨을 타고 흐른눈물이 야수의 얼굴에 방울져 떨어졌다. 때맞춰 별똥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내의 눈이 쏟아지는 별똥별을 쫓았다. 그것은 슬픈 아름다움이었다. 사내는 그것을 보며 한참을 울다가 그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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