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범권] 구원 08 + 메일링 공지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1/a/f/1af5f74be65579f411a1c34d4fd54729.png)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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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발이 시린지, 아픈건지, 걷고있는지 조차 알기 힘들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온 가시덤불앞에 멈춰선 유권이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눈을 끌어모아 뺨을 묻었다. 푹신한 느낌에 눈을 감고, 그것을 음미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여린 발바닥에 상처가져 눈에 핏물이 짙게 배어나온다. 바싹 마른 가시덤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데자뷰같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안으로 가면갈수록 덤불은 오히려 울창해졌다. 꿈을 꾸는듯, 다시금 졸음이 밀려온다. 가장깊은곳, 그곳에 몸을 웅크린 유권이 눈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그 어느때보다 길고 평화로운 낮잠이 될것만 같다.
눈을 뜨니 아직 꿈속에 있는듯, 정신이 몽롱했다. 조금 더 자고싶은마음이 굴뚝같은데 따뜻한것이 자꾸만 뺨을 두드렸다. 잘 뜨여지지 않는 눈을 느리게 깜박거린다. 그러다 익숙한 향에 코를 파묻었다. 곳곳에난 상처를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얼음장같아, 곧 부서져 버릴것만 같았다.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아마 상처입은 나를 보며 울고있겠지, 그는 온화하고, 자상하며 세심하게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니까. 십여년전의 그날처럼 가시덤불을 그 고운손으로 헤치고, 아끼는 옷이 망가짐에도 게의치않고 나를 안아주었던 그가 꿈같이 다시 나의 앞에 있었다.
맘대로 가눠지지 않는 몸을 애써 일으켜 차가운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댄다.
나의 신...울지말아요...나는 이미 충분히 구원받은 몸입니다...이제 정말로 가시덤불이 되어도, 슬프지 않아요...
하는 말에 그가 유권을 끌어안았다. 젖은머리를 넘긴 민혁이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천천히 이마키스를 남겼다. 입꼬리를 올린 유권이 웃을듯 말듯한 표정을 짓는다. 단숨에 그를 안아올린 민혁이 가시덤불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발짝씩, 품안의 그가 상처입지 않도록. 목을 끌어안은 그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밖은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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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효씨, 이번에 맡은 작가랑 꽤나 죽이 잘 맞나보네? 이전보다 마감일에 맞춰 원고를내는 일이 잦아졌구만?"
"아..네. 자주 중간점검을 해드리거든요. 여자분이시라 그런지 이것저것 꼼꼼히 체크해드리는게 잘 먹혀들었나봐요."
"잘하고있군, 그나저나 이민혁작가는 연락이 없나? 벌써 2년째구먼... 보기드문 작가였는데...이렇게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리다니 꿈만 같네. 맡게된 작가 다음원고도 잘 처리해주게"
네. 하고 멋쩍게 웃으며 목례를 한 재효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꿈만 같다. 자리로 걸어와 의자에 깊숙히 몸을 뉘인다. 나도, 다음날 그자리에 남은 잿더미와, 그가 아끼던 식기며 타다만 노트북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정말인지 꿈이라고 믿어버릴 정도니까...
나중에서야 뛰쳐가 그의모습을 찾았던 걸로 기억한다. 젖은머리와 옷들이 추운날씨에 얼어 굳어졌을텐데, 새하얀 남자를 안아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쫓는것이 최선이었다. 딸랑, 딸랑. 하는소리가 들렸던것으로 보아 그가 바로 민혁이 아끼던 고양이였겠지. 이후에 구급대원들을 부르고 허망한 눈으로 앉아있는 그녀와 남자를 처리하는것은 나의 몫이었다. 소방차가 오고, 그 온화했던 집이 새카맣게 그을린 모습이 가감없이 드러낫을 땐...혼자 가슴뛰며 설렜던 기억들마저 다 타버려 사라지는것 같았다.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한 그날의 기억을 헤매이다 톡톡, 어깨를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재효씨 앞으로 온 등기에요. 발신지가 안적혀있네? 확인해볼래요?"
네, 감사합니다.
누구지? 하고 건네받은 노란서류봉투를 뜯자 글자가 빼곡히 타이핑 된 한뭉치의 종이가 들어있었다. 언뜻보아 아마추어 작가의 어필소설로 보였다. 뭐, 인재하나 발굴한다 치고 읽어보지, 했던 재효가 원고를 반쯤읽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란봉투를 다시금 뒤져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황급히 앞에 꽂혀있는 이민혁작가님의 소설을 빼들고 아무곳이나 펼쳤다. 빠르게 두 책을 훑어보는 재효가 오랜만에 뒷목이 서늘한 느낌에 휩싸였다.
흠잡을곳없는 표현과 간결한 문체, 오타하나조차 없는 출처모를 원고는 소름이 돋을만큼 그의 글과 닮아있었다.
책을 치우고 원고에 집중해 다 읽었을때에는 오후 6시가 넘어있었다. 마지막문구를 읽은 재효가 마른세수를 한다. 원고를 덮으려다가 이어지는 빈페이지를 슥슥 넘긴다. 맨 마지막장, 오른쪽 아래에 작게 찍혀진 아이디가 보였다. 울컥, 하고 울음이 터져 나올뻔했다. 숫자가 바뀌긴 했지만, 알파벳은 그대로였다.
개인 피씨를 켠 재효가 떨리는 손으로 메신저에 로그인한다.
기지개를 켠 민혁이 뻐근한 목을돌렸다. 2년만의 신작, 그간 숨가쁘게 작품을 내왔던 그의 전적에서는 나름 공백기가 길었던 글이다. 의자에서 일어선 그가 까닥까닥, 규칙적으로 흔들리고있는 흔들의자에 다가섰다. 벽난로 앞, 따뜻한 기운을 맞으며 곤히 잠든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눈썹을 꿈틀대던 네가 이내 잠이덜깬눈을 비비며 일어나 안긴다. 그게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같아서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잠들 시간이야
속삭이는 말에 길게 하품을한다. 손을 잡고 침실로와 그를 조심스레 눕혔다. 주황빛 수면등에 목에걸린 방울이 반짝인다. 목을끌어안은채 놓지 않는 유권탓에 꼼짝없이 옆자리에 누울수밖에 없었다. 팔베개를 베고 가슴팍에 손을 얹은 그가 고른 숨소리를 내기까지는 많은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그날을 생각하던 민혁이 손을뻗어 수면등을 껐다.
"오세영씨 면회자 되세요?"
"네"
"이쪽입니다."
새하얀 문이 즐비한 복도를 걸어 멈춰선곳에 면회시간은 40분입니다, 하는말과함께 혼자남게되었다. 간호사에 의해서 열린문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커튼을 천천히 걷고, 침대옆으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투여중인 진정제탓에 침대위에 묶여 늘어져 있던 그녀가 그를 발견하곤 파르르, 손끝을 떨었다. 민혁이 떨리는 그녀의 손끝을 다정하게 잡는다.
"...내가...목닦고 기다리라고했지"
"흐....흑......"
"너무 오랜만이라서, 벌써 다잊은건 아니겠지? 미안. 새로 안식처를 마련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거든.."
그녀가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아래로 떨어지지못한 눈물들이 베개를 적셨다.
"...울지마...동물 안락사용 주사를 가져오긴 했지만...생각이 바뀌었거든"
가녀린 손끝을 바라보며 민혁이 눈을 감는다.
"죽을만큼 더 무서워하고, 죽을만큼 더 자책하면서 살아...니가 언제 어디에 있던...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전부 다 지켜보고있을거니까..."
롱코트를 정리하고, 손수건을 꺼낸 민혁이 느리게 손을 닦은 후, 그녀의 손에 고이 쥐어주었다.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간 그가 '잊지마' 하는말을 속삭이고 병실을 빠르게 벗어난다.
찰칵-.
잠금장치가 풀린 자동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아 그를빤히 보던 유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혼자서도 잘있네?
싱그러운 미소에 유권이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답답한 주차장을 빠져나가 다시 꼭꼭 숨은 둘의 안식처로 향한다. 정말 간만에 신경써서 올린 머리를 꼼질꼼질 그가 만지기 시작한다. 차도없는 도로를 한참 말없이 달리니 그 앙증맞은 목소리를 내는것이었다.
...무슨 생각해...?
오늘 저녁엔 와인한잔할까?
하는말에 유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렇게 겁줄 필요는 없었는데...그날의 그녀가 오버랩되면서 감정조절에 실패하고말았다. 2년째 병원이라니...가여운 사람. 사실 주머니엔 유권에게 줄 사탕만들어있을 뿐 주사같은건 없었다. 몰래 꽃이라도 보낼까? 하는 생각을하자 귀신같이 조수석에앉은 네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인지, 가끔은 생각을 읽히는것같은 착각이 든다. 이것은 필히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있는것을 눈치챈 눈치빠른 고양이의 재치겠지.
모른척 창밖을 바라보는 유권이 귀여워서 작게 웃는다.
굽이친 산길을 검은 아우디가 빠르게 나가아고 있었다.
둘만의 집를 향해서.
-THE END-
보름동안 함께했던 픽 '구원' 이 크리스마스에 마지막편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네요! 오늘은 구독료없이 모든글을 감상하실수 있다고하니 맘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또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네요! 암호닉 주시고 매번 찾아주신 해바라기님, 권력님, 우동님, 바게트님, 맥심님 모두 감사합니다. 전편 메일링은 이 글 아래 덧글로 이메일을 적어주시면 모아서 보내 드리도록하겠습니다. 언제 덧글 다시던 상관없이 1년이지나도 보내드릴테니 걱정마시구요 ! 후에 에필로그나 후속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메리크리스마스 ! 오두막이 독자님들께 + 메일링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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