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의 향수 04
고개를 들어 허공에 숨을 크게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예쁘게 피어올랐다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몇 달 전까지 만해도 그렇게 누구하나 죽일 듯이 더운 날씨였는데 이토록 시리게 바뀔 줄 누가 알았겠어.
탄소는 붉어진 손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명중입니다 마…”
“일일이 말 안 해주셔도 압니다.”
탄소가 쏘아붙이자 송하댁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미소 짓곤 다시 ‘명중입니다’를 반복했다.
하긴 이집에서는 저렇게 아랑곳 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송하댁이 몇 십 년이고 이집에서 일하는 이유가 있지
남들에게는 늦잠도 자고 한없이 한가할 수 있는 주말이었다.
물론 나는 주말 모두를 빡빡한 수업들에 반납해야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요즘은 학교 가는 것 보단 낫다.
“주인마님이랑 왕자저하 두 분이서 걸어오십니다. 마님, 이번 것도 꼭 명중입니다 꼭이요”
“제가 언제 빗나가는 거 보셨습니까”
“많이 봤는데요. 마님 기분파지 않으십니까.”
송하댁은 날 너무 잘 안다. 그래도 가끔 틀린 말이라도 기분 좋게 해주지.
팡-
평소보다 멀리 있는 과녁을 노리다가 너무 적나라하게 빗나갔다. 탄소는 창피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아마 송하댁 때문이다. 차라리 말해주지 않았으면 좋을 걸, 괜히 신경 쓰느라 빗나간 거잖아.
뒤에서 힘없는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이걸로 박수치는건 사람 놀리는 게 아닌가.
탄소는 활을 내리곤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를 돌아봤다.
전정국이 누가 봐도 지루하고 감흥 없는 눈빛으로 내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보니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짜증나네 이거
“부부인이 활을 잘 쏩니다. 웬만한 사내보다 낫지요.”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어머니”
요즘 웬만한 남자들은, 아니 그냥 사람들은 활을 쥐어 본적도 잘 없을 텐데 말입니다.
“빗나갔는데 말이죠, 아쉽게도”
“왕자”
전정국이 팩트를 말하자 큰어머니가 그를 쏘아봤다.
둘 다 그만했으면 좋겠는데요 창피하니까,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고 다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큰어머니, 제 솜씨가 아직 모자란 탓이죠.”
“아니다 이렇게 찾아와서 미안하구나. 왕자의 무례도 다 내 탓이니 날 봐서 용서해주렴”
“아닙니다, 냉철한 면모까지 훌륭하십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려니 목에 가시가 돋치는 느낌이다.
퉤, 위를 올려다보니 전정국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고귀하고 훌륭하기도 하시지. 아마 세상은 전정국이 아무리 무례한 행동을 해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큰어머니가 피곤하신 듯 곧 자리를 피했고 기어이 나와 전정국 둘만 남게 됐다.
잘만 옆에 붙어있던 송하댁은 또 어디 있는 거야? 주위를 빠르게 둘러봤지만 코빼기도 찾을 수 없었다.
전정국이 활을 조심스레 들었다.
나는 내 활에 집중하자, 왕자가 뭘 하든 난 내 활에만 존나 게 집중 하는 거다.
힉,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았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자존심에 다시 속으로 때려 박았다.
그가 방금 쏜 화살은 엄청난 위력이었고 살기를 띄고 있었으며, 멀리 그리고 빠르게 정중앙에 꽂혔다.
분명 날 겨눈 화살은 아니었지만 꼭 내가 과녁이 된 기분이었다.
내 옆을 훅 가르고 지나가는 화살의 소리와 속도에 압도당해 나도 저 과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화살로 누굴 맞추고 싶으시기에 이리 살기를 띄우십니까?”
“무서운 소릴 하네, 그런 사람 없어”
“그럼 죽이고 싶은 사람이겠죠.”
“그렇게 느껴졌어? 그냥 가르쳐 주고 싶었던 건데”
“뭘요”
“이렇게 쏘는 거라고, 화살은”
그의 모습은 여유로웠다. 그리고 무척 얄미웠지, 입 꼬리를 올리며 나를 보는데 그만 활로 한 대 칠 뻔했다.
날은 왜 이리 춥고 안개로 그득해서, 손이다 얼고 과녁도 잘 보이지 않게 만든담.
이런 찌질한 변명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내가 손에 입김을 넣는 와중에도 그는 화살을 집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과녁을 맞혔다.
그것도 정중앙만 골라서 그 주위로 둥글게, 처음엔 사람인가 싶었다.
그래서 과녁을 보는 걸 관두고 그를 바라봤다.
전정국의 옆모습은 꽤나 진지했다. 이게 엄마가 말한 자센가? 딱 교과서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그의 몸의 비율과 활의 각이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다.
비주얼은 아름답네. 솔직히 이건 인정해 주자.
“솜씨 좋으시네요.”
“칭찬받으니까 좋네.”
좋다는 사람이 저렇게 무표정으로 쳐다도 안볼 리가, 마음에 없는 소리도 잘한다.
“참, 그래도 제가 누구한테 가르침을 받기엔”
탄소가 심호흡을 하곤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곤 보기 좋게 그가 맞춘 과녁보다 멀리 있던 과녁을 노려 명중했고 그제야 얼굴에 웃음을 피웠다.
“너무 잘해서요.”
탄소가 유유히 말하며 그를 쳐다보자 그는 살짝 놀란 눈을 하곤 실소를 터뜨렸다.
그 반응에 기분이 더 좋아진다. 내가 다른 거 다 못해도 이거하나 잘하는데 그럼.
***
엄마 잘 지내고 있어? 이맘때쯤이면 집 앞에 낙엽 쓸 땐데 내가 못 도와줘서 아쉽네.
너무 무리 하지 마 매일 무릎 아프다고 하면서 왜 사서 고생을 해.
그리고 허리 아프거나 하면 물리치료 좀 제때 받고 다니고 그래 매일 여기 쑤시다 저기 쑤시다 하지 말고.
이제 내가 안마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저번에 보낸 편지 때문에 걱정할까봐 하는 소린데 나 이제 잘 지내
이집생활에도 적응이 돼간다고 해야돼나 하여튼 그래.
오늘은 남편이랑 수업 같이 받았어 꽃꽂이부터 시작해서 글 쓰는 거 까지,
그리고 여태 나 칭찬 받은 적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남편이랑 있으니까 칭찬 좀 해주더라.
아, 근데 문제는 왕자가 나보다 다 잘해.
못하는 게 있어야지 재수 없고 짜증나 꽃꽂이도 아무리 봐도 왕자께 더 예쁘고 조화롭더라고.
여기는 왜 왕자한테 이런 거 까지 가르치고 난린지 모르겠어.
그리고 같이 국궁을 했는데 그것마저 잘하더라.
나보단 아니지만 솔직히 그때만큼은 봐줄만 했어.
다른 사람의 활솜씨를 그렇게 오래 자세히 관찰한 적은 또 처음이야, 엄마가 보면 좋아 했을 텐데…
……
오늘 있었던 일을 주저리 쓰다 보니 편지지의 남은 여백이 없었다.
편지지를 하나 더 꺼내려 하다가, 왠지 오늘은 더 쓰면 더 이상한 말만 늘어놓게 될 것 같아
편지의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못하고 그저 아무렇게나 접어 서랍에 넣었다.
그리곤 주책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실 요즘은 밤마다 눈물이 나온다.
이제 이게 엄마가 그리워서 눈물이 나는 건지, 그저 심심해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이유도 없는 울적한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내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내 자신에게 쳤던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아채 매일이 괴로운 와중이다.
여느 때처럼 난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물을 닦았다.
그리곤 곧 우울에 삼켜질 것 같은 기분에 방안을 뛰쳐나왔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반기는 초코에 들어갔던 눈물이 한 번 더 왈칵 튀어나왔다.
내 마음을 아는 건지 쪼그려 앉은 나에게 덮치듯 안겨오는 초코는 내 눈물을 간지럽게 핥았다.
“자고 있는데 밤마다 찾아와서 미안해 초코야”
이거 먹어. 집 오는 길에 사온 강아지 간식을 좋아하며 먹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기분이 풀렸다.
초코의 털을 만지면 부드럽고 따뜻해서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날 보면 마냥 좋다는 듯 방실방실한 표정을 하며 꼬리치는 모습이 귀여워 없는 동생이라도 생긴 듯 온 마음을 쏟았다.
지금 여기서 너만큼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하긴, 나도 없는데 뭐
“이제 갈게 초코야 잘 자.”
내가 일어나자 동시에 초코도 일어섰다.
그리고 그 때문에 팽팽해진 체인이 내 발목에 걸렸고 나는 넘어져서는 안 될 사람에게 머리를 박은 채 몸을 지탱했다.
분명 일어날 때 까지만 해도 인기척은 없었는데, 밤이라 안보였던 건가?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지. 지금 문제는 그와 나의 자세에 있다.
엇, 하는 그 순간. 땅을 짚으려 허공에 뻗었던 손이 그에게 잡혔고 중심을 잃은 몸은 두말 할 것 없이 그에게 폴싹 안겼다.
겉옷의 감촉과 따뜻한 온기, 그리고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들었을 땐 아무리 봐도 익숙하지 않은 그의 두 눈을 마주해야했다.
“…다치는데 상습적이네”
“…송구합니다. 저하”
전정국도 당황한 눈치였기에 정신을 차리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날 더 단단히 잡아오는 손길에 당황해서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이, 이제 놔주셔도 됩니다.”
“조금만 이렇게 있지. 주변에 보는 사람 많으니까”
아무래도 그의 페이스에 휘말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 처음에는 몸짓과 눈빛뿐이었지만 이제는 말투와 향기 하나하나가 날 휘말리게 한다.
“주변에 보는 사람 많은 게 뭐가 문젭니까?”
“합방도 미뤘는데, 사이좋은 모습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어서”
“…저하 저한테 관심 있으십니까?”
내말을 끝으로 수 초간 정적이 일다가, 그가 드디어 슬그머니 나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혼자서 있는 나는, 정말 오롯이 혼자였다.
더 이상 아무색도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그런 어느 곳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알잖아요. 저희 둘 다 서로 좋아서 혼인 한 것도 아니고 원래였으면 남이나 다름없는 거,
그리고 전 그걸 원해요 남이랑 다름없이 대해주시는 거.
괜한 호기심에 관심가지시고 잘해주시고 그런 거 웬만하면 하지마세요”
이번 건 셌다. 이정도면 없는 정도 떨어질 만 했다. 나는 물론 그걸 원하는 거고.
여기서 가장 못된 건 나 자신이었다. 뼈저리게 알고 있으면서도 버릇처럼 그의 탓을 했다.
모든 걸 내치고 자유로워지고 싶은데 그게 안돼서. 착각이 아니라면 자꾸만 그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이렇게 하면 모두가 불편해질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차라리 도와달라고 해”
“……”
“볼 때 마다 우는데 어떻게 관심을 안 가져”
“지나쳐요”
지나치라고요 그냥.
당황스러움에 그런 건지, 그저 못되게 굴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난 서있는 그를 뒤로하고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또 도망쳤다.
내 마음이라도 꿰뚫는 듯한 그의 눈빛이 무서워 또 도망치고 말았다.
탄소는 방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내가 그를 볼 때 마다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면 전정국의 머릿속에서 난 그런 불쌍한 아이인걸까.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딴 거지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죄책감, 동정 그런 언어들마저 과분했다. 대체 내가 뭐라고?
집에서 매일 마주치고 매일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꼭 한마디씩은 주고받았다.
전정국 같은 사람을 내 울타리에 두고 싶지 않았다. 충분이 과분하고 힘들다.
차라리 내 상상 속처럼 못됐으면 좋으련만 또래 친구처럼 다가오는 그 때문에 괴로웠다.
모르고 싶은데, 모르는 사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마저 정할 수 없었다.
그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
“이제 아예 절 곤란하게 만들기로 작정을 하신 겁니까?”
“어제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해서, 아침에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둘이 아는 사이였어?”
김태형이 밥풀을 튀기며 소리쳤다.
많은 인파를 몰고 다니던 전정국은 홀로 김태형 옆에, 그러니까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곤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한사람을 향한 낯선 웅성거림이 급식실 전체에 퍼졌다.
내가 더 놀라운데, 김태형이랑 전정국이 친구사이고 게다가 같은 반이라는 게.
동아리 때 지각한일이 전정국의 귀에 들어간 건 다 이 재잘거리는 김태형 주둥이 탓이었나 보다.
“아는 사이긴 하지”
“말하지 마시죠, 부탁 드렸을 텐데요. 학교에선 아는 척 하지 말아 달라고”
“내가 동의하진 않았는데”
“이렇게 치사한 분 일 줄은 몰랐습니다.”
김태형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곤 마늘바게트를 뜯으며 나와 전정국을 번갈아보길 반복했다.
나 분명 전정국 하나 피해보자고 동아리까지 들었던 것 같은데.
꿈이었나? 이렇게 헛수고 일지 몰랐다. 그래, 이렇게 일방적으로 아는 척을 해오면 어쩔 도리가 없긴 하다.
“물어볼게 있어”
“보는 사람 많은데 집 가서 얘기 하시죠”
“왜 피하는 거야 전부터 그렇게 필사적으로”
“싫으니까요 지금 이런 상황이”
“이런 상황?”
“주위 좀 둘러보세요.절 모르던 전교생이 다 제 얼굴 한 번씩은 보고 가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씀드려야 합니까?”
그래도 왕자의 주변은 성스러운 영역인양 주위 테이블에 아무도 없다는 건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왜 그래 탄소야! 정국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
“시끄러”
눈치 없는 김태형의 입을 막았다. 전정국은 한숨을 쉬곤 팔짱을 꼈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진심인걸 아는데도 의심부터 드는 내가 싫었다.
그에게는 어쩜 이렇게 적대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지. 내가 생각해도 아이러니였다.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는데, 뭐하나 되는 게 없네.”
“저하께서 왜 저랑요?”
“난 이혼하기 싫으니까”
침을 삼키다가도 사례가 걸릴 수 있구나.
나는 한참을 기침을 해대다가 문득 든 끔찍한 생각에 김태형을 쏘아봤다.
나와 같은 생각인지 똑같이 사례에 걸려 쿨럭 거리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다.
“김태형 지금들은 거 머릿속에서 없애”
“크흠! 켁! 크흑!”
꽤 오랫동안 곧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해대는 김태형에게 내 물을 슬쩍 건넸다.
그러자 허겁지겁 물을 들이키곤 속을 가다듬는다.
시발 놀래라. 아니 놀랬다 진심으로.
근데 이 와중에도 방금 두 사람의 기도를 막고 사지로 몰아넣을 뻔한 왕자는 앞에서 태연하게 스프를 수저로 퍼먹고 있다.
“그 얘기를 왜 지금 여기서 꺼내십니까?”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말도 못 걸게 하잖아”
“아니 그렇다고…”
“다른 사람한테도 꾸준하구나 탄소야 약간 감동했어.”
전정국과 나 사이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김태형은 정말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기가 막히게 구렸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데 괜히 여기서 화냈다간 전교생에게서 뒷말이 나올게 뻔하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꿋꿋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쟤한테는 말 편하게 잘하면서 왜 나한테만 경어야”
“……”
“네 얼굴에 상처 낸 놈이랑은 친구해주면서 왜 나는 피해?”
그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전정국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누가 보면 연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아니 그보다 좀 더 한 관계에 놓여있긴 하지만.
그는 왕가의 자식들 중에서도 엘리트였다.
못하는 공부도 없었고 모든 일을 척척해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칭찬만 받고 살아왔을법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뭐가 부족해서 나한테 이래? 왜 자꾸만 날 걱정하고, 나와함께 비를 맞고, 날 기다리고 뭔데 다치지 말고 죽지 말란 말을 하는 걸까.
도대체 왜? 내가 생각한 죄책감과는 하나도 맞아떨어지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이러기 싫은데, 자꾸만 그에게 마음이 갔다.
가장 의지하기 싫은 곳이었고 해서는 안 될 곳이었다.
완벽한 나의 원망 커리어에 그의 실제 모습은 자꾸만 다르게 꽃피워져선 물을 흐렸다.
쓸데없이 활을 잡는 모습이 아름다워선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그렇게 안기고 나에게 남아 있는 건 그의 따뜻한 손. 그 감촉밖엔 없었다.
괜히 도와달라고 하고 싶게 만드는 말투, 표정, 모든 게 다정했다.
나는 여태 그에게 자꾸만 차가운 가면을 씌우고 있었다.
사실 그는 너무 따뜻한 사람이었다, 언제부터 알고있었는지는 모른다.
내가 그 따뜻함에 기대면 어떡해, 그렇게 또 버려지면? 나는 더 이상 살 용기가 나지 않을게 뻔하다.
지금도 죽고 싶어 발버둥 치고 있는데,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괜히 그가 원하던 걸 들어주는 이유는, 글쎄다.
딱 한번만 더, 그 따뜻한 손을 만져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안 피할 테니까 그만해 전정국”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 그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그저 웃어버렸다.
작은 두근거림이 일었다.
***
“네가 제정신이니? 이혼이라니”
큰어머니의 호통이 집안전체에 울려 퍼졌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고 이집에서 나온 모든 말은 큰어머니 귀로 들어갔다.
나는 떨리는 손을 세게 짓눌렀다. 항상 그랬다. 큰어머니 앞에선 알 수 없는 중압감에 맥도 못 추리고 그저 발끝만 바라봤다.
그게 사죄의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린애처럼 한번만 봐달라는 식의 매달림이었다.
“네가 이혼하면 너희 어머니는? 네 어머니는 어떻게 될 것 같니?”
그랬다. 애초에 말도 안 돼는 어리광이었고 철도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
여기서 이혼하고 자유롭게 어디론가 떠나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라고 말하기엔 내가 너무 정신병자 같아서 하지 못했다.
물론 뚜렷하게 그럴 계획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각하고 있던 ‘어머니’라는 단어에 재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게 너희가 합방을 피하는 이유구나, 서로 아끼는 척 하던 건 다 연기였어.”
“큰어머니”
무릎을 꿇고 큰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그리고 숨넘어갈 것 같은 울음을 토해내며 잘못 했습니다를 반복했다.
난 큰어머니에게 애착을 느꼈던 것이 틀림없다.
지금생각해보면 큰어머닌 참 좋은 사람이었고, 늘 내 편의를 물어봐 줬기 때문에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주름진 얼굴이 정말 우리엄마처럼 느껴진 걸 수도 있다.
사실이곳에 원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그저 나 자신 때문에 괴로웠던 것뿐인데, 왜 모든 게 싫다고 내 스스로 연기를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게 들통 난 기분에 어린애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일어나”
어디선가 나타난 전정국이 내 몸을 잡아끌었다.
이런 모습 정말 보여주기 싫었다. 심지어 나마저 낯설고 창피했다. 왜, 늘 이럴 때 나타나선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화가 난 그의 표정은 큰어머니 못지않게 무서웠다.
그리고 무의식적이든 아니든, 그가 내손을 꼭 잡아왔다.이제 온신경은 그 손에, 화를 내는 전정국에 쏠려버렸다.
“왕자도 절 속이셨습니까?”
“이혼 같은 거 안 합니다. 그러니 그만 하세요.”
“합방날짜를 따로 잡을 가치도 없다. 새아가 너는 지금 당장 방에서 짐 싸서 큰방으로 전부 옮기 거라.
그리고 더 이상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내 귀에 닿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집안에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가 있어야지.”
청천 벽력같은 소리에 다시 주저앉을 뻔했다.
큰어머니가 손짓하자 집안에 일하시는 분들이 일사분란하게 내 물건에 손을 대고, 옮겼다.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린 상황에 멍하니 서 있다가, 전정국의 손이 느껴져 황급히 손을 뺐다.
그러자 헛기침을 하곤 어색해하는 전정국에 어디 머리나 수차례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눈 깜빡 할 새에 큰방에 들어와 앉았다.
아, 나 여태 무슨 유난을 떨었던 걸까.
집이 존나 넓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큰방 안에 또 다른 방하나와 거실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병신 진짜 병신 아…
전정국이 다 씻었는지 욕실에서 머리를 털며 나왔다.
그리곤 소파에 앉아있는 내 눈치를 살핀다. 어색한 공기에 멀미하는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
“씻어”
아, 정말 분위기도 이상한데 씻으라니.
자기가 말하고도 아차 싶었는지 나와 눈을 피하곤 필사적으로 뒤를 도는 전정국의 모습이 어이가 없다.
하긴 혈기왕성한 나이지. 같은 공간에 이성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예민해질 그럴 나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전정국에게 하는 생각임과 동시에 내 자신이 좀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정국의 뒤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나는 누가 봐도 변태다.
수건으로 물기도 덜 닦고 옷을 입은 건지, 얇은 반팔이 살짝 물에 젖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체에 빌어먹을 눈이 자꾸만 간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을 진 모르겠지만 전정국은 잘생겼다.
얼굴만큼 몸도, 그 신체가 뭐라 해야 될까. 사람 잠 못 들게 한다.
“내가 소파에서 잘까?”
그의 배려가 눈물겹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한껏 날 신경 쓰는 듯한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내가다 불편하다.
“됐어 그래도 왕잔데 네가 침대에서 자야지 그러다가 큰어머니라도 들이닥치면 어떡하냐?”
“그건 너무 간 것 같은데”
아하하, 그렇게 한번 웃으니까 갑자기 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가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한 캔 꺼내 나에게 건네곤 자기도 내 옆으로 앉았다. 그리곤 이 어색함을 끝낼 티비를 틀었다.
예능 재방송이었다. 봤던 건데도 봤다고 하면 이상한채널로 또 돌려야하니 입을 꾹 다물고 시청했다.
“……”
“지나치라고 그랬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화들짝 놀라 사이다 캔을 조금 구겼다.
아까부터 티비를 보는데도 아무 소리도, 웃음도 없다 싶더니 저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옆을 보니 그는 날 조금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티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을 이어갔다.
“지나치기 싫으면?”
내 한마디 한마디에 여태 신경을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밤을 지새웠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그냥 이 순간에도 넌 따뜻하다는 말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여태 나 자신의 오해로 덮여있던 그의 눈이 이젠 맑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뚜렷했다. 뚜렷하게 날 보고 있다.
“…그래도 지나쳐”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차가운 사람이 못돼”
“……”
“구질구질해서 안 돼, 차라리 네가 날 이용해 그편이 더 쉬우니까”
이용당해줄게. 이게 왕자의 입에서 나올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문득 무서워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정국의 행동은 알기 쉬웠다. 너무나 알기 쉬워서 오히려 헷갈렸다.
그는 꼭 날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 쪽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조금은 한심했지만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첫 만남부터 끝까지 그의 모든 행동은 오해를 살 만 했다.
아니면 진짜 나쁜 새끼 인거고, 맞으면 내가 좀 나쁜 년이다.
지금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의 마음에 대한 내 대답은 항상 부정적이거나, 거절이거나. 그럴 테니까.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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