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와 1편을 보고오세영
bgm.
[흐른 -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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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블에 앉아있어. 차 끓여줄게. "
" 네 - "
잠시 뒤 커피포트가 삑삑 울어대는 소리가 난 뒤
쪼르르 익숙한 소리와 함께 갤러리 안은 진한 장미차 향으로 가득 찼다.
[2]
w. lucid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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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장미차를 진하다 못해 독한 향이 날 정도로 많이 우려서 드신다. 그래야 맛이 산다나 뭐라나.
하지만 코가 예민한 나는 그 냄새가 독한 향수처럼 느껴진다. 선배가 장미차를 우리고 난 뒤 갤러리에 들어서면 나는 그 역한 향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 질 정도다.
그걸 아는 선배는 내가 오기로 한 날에는 감사하게도 일부러 자제해주신다.
자, 여기. 선배가 내 테이블 앞자리 찻접시 위에 유리와 유리가 부딪히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찻잔을 올려주신다.
평소보다 정말 많이 약해진 장미차 향. 딱 내가 향기롭다고 느낄만한 그런 정도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인사를 했고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두손으로 꽉 쥐어 온기를 느낀다.
밖에 비도 오겠다. 온몸이 노곤노곤해지면서 나른해지는 기분이다.
선배는 갤러리 안쪽 자기 방에서 차 한잔을 더 우려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의자를 빼 앉는다.
그리고 아직은 조금 뜨거울 차를 후루룩 잘도 마신다.
괜히 내 혀가 덴 것 같아 표정을 구기며 선배를 바라보자 선배는 그런 나를 보고 푸훕 웃음을 터트린다. 아 못생겼어.
아무리 장난이래도 그런 독설을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선배. 나는 장난스럽게 발끈하며 차를 끼얹어 버리겠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선배는 농담농담 하며 내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한다.
갤러리 안이 장난스러운 선배와 나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훈훈해지는 기분이다.
**
"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
차를 반쯤 비워내자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론트 옆에 있는 책장에서 무엇을 주섬주섬 챙겨 품에 안아든다.
내가 도와드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어어 아니야.앉아있어. 그런 나를 만류하며 품에 책과 종이를 한가득 안아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테이블 위를 치우며 그 물건을 놓을 자리를 만들었고 선배는 그 위에 물건들을 올려놓는다.
콰앙. 물건을 내려놓자 테이불 위 깔아놓은 유리에서 엄청나게 묵직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리고 선배는 다시 의자를 빼 앉으며 책 하나를 집어든다.
" 오늘 잘 부탁해- "
생글생글 귀엽게도 웃으며 말하는 선배.
오늘 여기온 이유는 다름아닌 선배 갤러리가 가을맞이 새단장을 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다.
컨셉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가구배치는 어떻게 바꿀 것인가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선배는 나와 머리를 맞대고 구상하기로 했다.
나에겐 엄청나게 유익한 기회였고, 선배는 일손을 조금 덜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선배는 책을 이리저리 넘겨보더니 무언가를 찾은 듯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내게 내민다.
다양한 인테리어 예시가 들어있는 책자였다. 이거 어때? 손가락으로 왼쪽 페이지를 가리키며 내게 묻는 선배.
" 이런 분위기로 갈건데 가을맞이 새단장 치곤..조금 여름같나? "
" 아뇨아뇨. 전 괜찮은데, 색이 좀 밝은 것 같기도 하고요..좀만 갈색계통으로 낮췄으면 좋겠는데. "
" 역시 그렇지? 아 여기 페이지도 잠깐 봐봐. 난 이거 맘에 들더라. "
" 어어. 이거 괜찮다. "
페이지를 촤라락 넘기며 열심히 종알종알 설명을 하는 나를 선배는 미묘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바라본다.
나는 선배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왠지 모르게 조금 살벌해 보이는 표정의 선배를 마주봤고 나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선배에게 물었다. 왜 웃어요?
그제서야 선배는 손으로 입을 가려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선배는 입에서 뗀 손으로 턱을 괴어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대답한다.
그냥. 참 열심히 하는게 귀여워서.
**
차를 몇잔 째 비워냈을까.
그제서야 일이 서서히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한동안 움직이지 않아 뻐근해진 몸을 풀어준다.
선배도 많이 피곤했는지 테이블 위로 축 늘어져 앓는 소리를 낸다. 아고 죽겠다.
뻗어올린 팔을 내려놓으며 참았던 숨을 하! 뱉어내고는 나도 선배처럼 테이블 위에 늘어져 버렸다. 지쳐버렸다.
'..'
바깥에서는 여전히 내리는 비가 갤러리 앞에 쳐놓은 천막을 두드리고 있다. 시끄러운 우리집 근처와 달리 술집과 조금 떨어져서 그런가 빗소리가 생생히 잘 들린다.
그 소리에 은근한 박자감이 느껴져 손가락으로 '탁,탁' 테이블 위를 두드린다.
둘 다 테이블 위로 한쪽팔을 뻗어 머리를 베고 누워 서로의 손끝이 닿을랑 말랑 하는 거리에 놓여있다.
선배는 내가 손가락으로 빗소리에 박자를 맞추자 그걸 발견하고는 선배도 내 박자에 맞춰 네 손가락을 움직여 타닥 타닥 나른한 박자를 이루어 나간다.
그러다가 지루해졌는지 손끝을 움직여 장난스럽게 내 손가락을 툭툭 건드린다. 거기에 질새라 나 또한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손가락이 서로를 간지럽힌다. 기분이 미묘하다.
그러다 선배는 내 손끝을 꽉 잡았고 기분이 이상해진 나는 오바스럽게 팔을 확 내려버렸다. 그리고 몇초가 지나지 않아서 바로 후회했다.
선배가 뻘쭘해 하시면 어떡하지. 괜히 내가 오해한다고 생각하시면 어떡하지.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순식간에 주위 공기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선배가 이럴때 장난스럽게 말이라도 걸어주면 괜찮을텐데 선배는 테이블에 누워 아무런 미동도 없다. 얼굴 표정은 팔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고.
괜히 나는 혼자 더 뻘쭘해져서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책상 위에 올려진 신문을 들어올리며 어색하게 소리내어 읽는다.
" 어?..오..오늘 신문이네요? "
" ... "
" 한동안..행방이 묘연하던 연쇄살인마. 현대판 잭더리퍼라고 불리던 그가 최근에 다시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
처음엔 어색한 공기를 풀어보려고 읽어내린 기사였지만 그 제목이 나를 흥미롭게 만들어 계속해서 읽어내려 갔다.
중간에는 아예 소리내어 읽는 것도 멈추고 바쁘게 눈동자만 움직여 한글자도 빠짐없이 읽었다.
" 허..이거 완전 썩을 놈이네? "
기사 하나에 모든 감정을 이입해서 읽었더니 기사 하나 읽었을 뿐인데 온몸에서 쫙 기가 빨린 느낌이다.
테이블 위에 신문을 거칠게 쾅 내려놓고 애꿎은 선배에게 노발대발 화를 내기 시작했다.
"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에요! 뭐야! 살인하면서 쾌감을 느끼는거야 뭐야! 상또라이 아니야?? "
그러자 여전히 누워있던 선배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고개를 살며시 들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선배가 쳐다보던 말던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선배가 살인마도 아닌데 막 화를 냈다.
내가 뭐라는 지도 모를만큼 빠른 속도로 욕섞인 말들을 마구 뱉어냈고, 선배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이해한다는 듯이 웃고있다.
선배는 아예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켜 내가 내려놓은 신문을 들어올린다. 그리고는 선배도 한번 더 신문을 읽으면서 내게 말을 건넨다.
" 경찰들도 참 무능하다. "
쫙 펼쳐진 신문에 선배 얼굴이 가로막혀 선배 목소리가 웅얼웅얼 거린다. 그래도 대충 알아들은 나는 거기에 격하게 맞장구 치며 대답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걸까. 선배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나는 또 거기에 맞장구 쳤다.
선배는 기사를 다 읽었는지 신문을 곱게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꽉 접혀진 신문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멍하니 손을 바라보며 내게 말한다.
" 난 이런 사람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
" 무슨 생각이요? "
찻잔에 담긴 마지막 차를 입안에 털어 꿀꺽 삼키고는 아리송한 말을 던지는 선배에게 묻는다.
선배는 여전히 멍하니 자신의 손만 바라보고 있다. 한번 나간 넋이 잘 돌아오는 거 같지 않아 선배 눈앞에서 손을 휘저으며 정신차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배는 놀란 기색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이러는 걸까. 이런 사람들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긴 할까. "
" ... "
" 아. 원래 이런 사람들한테는 제정신이란 게 없나. "
자신이 한말이 웃겼는지 피식 웃으며 다시 천천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차키를 집어들고 나를 일으켜 세운다.
" 가자. 데려다 줄게. "
어느새 시계를 보니 12시. 처음엔 사양하려고 했지만 집앞에서 또 주정을 부리고 있을 술꾼들을 생각을 하니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
그래서 그냥 의자에 걸린 옷을 조용히 집어들어 팔에 쑤셔넣었다. 죄송하지만 이번에만 좀 신세를 져야겠다.
선배도 옷걸이에 걸린 갈색자켓을 내려 몸에 걸친다. 그 동안 나는 우산꽂이에 꽂아두었던 우산을 다시 집어들었고
선배는 갤러리 안쪽으로 들어가 방을 정리하고 계속 돌아가던 제습기도 끄고 마지막으로 갤러리 안에 불을 모두 끈 뒤 나를 문밖으로 밀며 나간다.
" 어서어서 나갑시다- "
문밖으로 나와 갤러리 앞 천막 밑에서 비를 피해 갤러리 문을 잠구는 선배를 기다린다.
무릎을 꿇고 앉아 유리문 밑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어 '철컥' 문을 단단히 잠근다. 그리고는 손잡이를 여러번 흔들어 본뒤 제대로 잠겼나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 차가져 올게. 차를 가져온다며 갤러리 뒤로 뛰어가려는 선배의 팔을 붙잡았다.
아뇨. 그냥 걸어가요.
왜. 내가 차로 태워주면 되는데.
선배 없으면 언제 이 시간에 비맞으면서 여기를 걸어보겠어요.
**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집 빌라에 다 도착했다.
생각해보니 선배는 우산이 없어서 내 작은 우산하나로 둘이 비를 피해야 했다. 덩치 큰 선배는 왼쪽 어깨를 아예 홀딱 젖어버렸다.
죄송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재밌어 죄송하다는 말은 기어코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서로 바짝 붙어 걸으니 우리의 우정이 돈독해진 느낌이었다.
다 도착했어요.
빌라 안까지 들어오려는 선배를 만류한채 우산이 없는 선배에게 내 우산을 건네드리고는
선배에게 휘적휘적 팔을 크게 흔들어보이고 빌라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는 한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빌라 안으로 사라지는 내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든든해 보이던지
어둑어둑한 계단을 올라가는데도 왠지 모르게 보호받고 있는 느낌이라 하나도 무섭지 않..
' ... '
젠장 또다.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말은 취소다.
아까와 똑같은 상황이다.
나와 누군가의 위치가 바뀌었을뿐. 이번엔 내가 올라가고 그 사람이 내려오고 있다.
이번에도 택운씨겠지.
애써 담담한 척 하며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계단을 올라간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좀 이상하다.
천천히 한계단 한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아닌 급하게 뛰어내려오고 있는 소리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되게 발자국 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고 나는 아까와 달리 그자리에 바짝 굳어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다시 내려가서 재환선배에게 윗층까지 데려다달라고 할까. 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그 짧은 시간동안 수백번 왔다갔다 거렸다.
하지만 뒤돌아 뛰려는 순간 발자국 소리는 이미 내 뒤까지 가까워졌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급하게 뛰어내려오고 있는 사람을 확인한다.
" ..택운씨? "
어두운 주위 때문에 게다가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는 달빛이 역광이라 저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대충 덩치로 보아 택운씨라고 추측할 뿐이다.
택운씨로 추측되는 이 사람은 내가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여지껏 내려오던 것처럼 빠르게 내 옆을 지나갔고 얼핏 보인 그 사람은 역시 택운씨였다.
도대체 어딜 저렇게 급히가는걸까.
바깥에 비도 오는데 우산도 챙겨가질 않는다.
정말 누구에게 쫓기고 있듯이 뛰쳐나가는 택운씨다.
" 무슨 일이지. "
꽤 심각해보였던 택운씨의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심각해져 조용해진 계단을 오른다.
터벅터벅.
힘풀린 다리로 어찌어찌 계단을 오른 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열쇠를 꺼낸다.
내가 복도에 나타나자 나를 인식하고 저절로 켜지는 복도 불. 계단에도 이런 거 좀 설치해주지.
짤랑짤랑. 주머니에서 열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에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열쇠꾸러미를 꺼내 현관 열쇠를 엄지와 검지사이에 쥐었다.
206호
우리 집 앞이다.
열쇠를 열쇠구멍에 끼워놓고 돌렸다.
" ... "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빠르게 문을 닫은 뒤 다급하게 잠금장치를 건다.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현관에 기대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그리고 열쇠를 돌려도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지 않던 이유와 우리 집앞에 내 발자국이 아닌 물에 젖은 발자국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