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20
w.규닝
20. mors sola
명수의 발길 또한 우현이 그랬던 것처럼 텅 빈 현관을 향해 다급하게 이어졌다.
가쁘게도 차오른 숨이 캄캄한 현관 앞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명수가 넋을 잃은 발걸음을 집 안으로 옮겼다. 없어. 홀린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약한 창문을 거세게 두드려오는 빗소리에 어우러져 묻혀가고 있었다.
거실을 떠난 발걸음은 급하게도 부엌 쪽으로 향했다가 멈추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또 다시 발걸음은 안쪽 방으로. 하지만 어딜 가든 습기에 눅눅해진 공기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현관 밖으로 나오려던 명수의 발걸음을 멈춘 것은 우현이었다.
"니가 왜."
명수의 멱살을 움켜 올린 우현이 침침하게 꺼진 벽 위로 명수를 몰아붙였다. 그 바람에 떠밀린 뒷통수가 투박하게 벽에 닿는 소리가 났다. 니가 대체, 김성규한테 뭔데. 여전히 울고 있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렇게 결국은 명수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야 울컥 하고 치미는 감정에 이를 악 문 우현이 그 동안 성규의 입에서 수도 없이 쏟아졌던 이름의 주인공에 잇새로 새어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진짜 좆같다. 완전 씨발 개치사한데. 그렇게 아낀다던 이 개같은 새끼만 눈 앞에 던져 놓고 가버린 김성규가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치사해 죽겠는데 미워하기는 싫다. 명수의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드는 생각은, 그 얼굴로 인해 간접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천사의 얼굴일지라도 결국은 김성규니까 미워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차마 터지지 않는 욕지거리에 입술만 물고 있을 때 넋을 뺀 명수의 입에서 다시금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 있어, 김성규형.
"…니가 숨겼지."
"……."
"어디에 숨겼어. 김성규형 어디에 숨겨놨어."
"숨겨? 내가? 김성규를 내가 숨겨?"
기어코 악에 받친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명수의 멱살을 세게 움켜 올렸다.
"내 눈 앞에서. 이제 겨우 잡은 사람을 도망치게 만든 게 누군데 지금,"
"……."
"숨겼다고? 그게 할 말이냐? 씨발 내가."
멱살을 움킨 손에 힘을 준 우현이 명수의 몸을 둔탁하게 밀어냈다. 내가. 다시 한 번 끝 말만을 되뇌인 우현이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었다. 이제서야 겨우 잡은,
"마침내 묶어둔 사람을, 니가 뭔데."
진짜 뭔데.
도대체 전부터, 진짜 니가 뭔데.
우현이 쥐었던 명수의 옷깃을 현관 밖으로 힘을 줘 밀었다. 그 바람에 몸이 틀어진 명수의 어깨 위로 찬 빗방울이 다시금 젖어들었다. 부서진 슬레이트가 흘려보내는 비가 머리며 어깨며 할 것 없이 묵묵히 가라앉은 명수에게로 쏟아져내렸다.
온기 없는 옥탑 위는 적막했다. 점점 거세지는 비가 비어있는 화분 받침대를 소리나게 두드려오는 와중에도, 깨진 소주병과 함께 나뒹굴어진 담배 꽁초들이 젖을대로 젖어 눅눅하게 흩어진 채 좁은 웅덩이에 잠겨가는 와중에도. 비를 선동한 바람에 흔들리는 전깃줄마저 한 층 더 휑한 소리를 더해가고 있는 그 와중에도 둘 사이엔 침묵만이 가득했다. 천사의 옥탑방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짙은 회색으로 둔갑해버린 옥상은 그토록 침침한 공기만 채워내고 있었다.
니가 사랑한다고 했던 새끼는, 너의 부재에 말이 없다.
이게 니가 바랬던 결과인지 궁금하다. 단지 제가 받을 고통에 극단적으로 몸을 숨기고 나서 너는 지금 편하게 숨을 쉬고 있는지. 미치도록 이기적이었던 네 선택에 너는 지금 만족하고 있는지를. 그 덕에 저렇게나 힘 없이 비 오는 옥탑 위에 젖은 어깨를 내어주고 있는 저 녀석의 모습은 예상이나 했었는지. 그러니까,
나는.
내 생각은 단 하나도 하지 않고 가 버린 건지. 만약 정말 그렇다면, 김성규.
이번에야말로 죽을 이유를 니가 준 것 같다고. 네 달 남짓 만난 내 천사에게, 거짓말처럼 잔혹했던 김성규, 너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든 우현의 눈에 녹이 슬 대로 슬어 칠이 벗겨진 평상이 들어왔다. 그러면 또 다시 습관처럼 떠올라버리는 건 김성규와 저의 잔상. 만난 지 일주일 남짓 되었을까, 대책없이 술 병을 기울이고 있던 천사의 손목을 잡고 나서 했던 말은 술, 마시지 마. 그 뒤로는 연쇄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김성규의 대답이.
'죽을까?'
'…….'
'술도 마시지 말고, 담배도 피지 말고. 몸도 안 팔면 내가 뭐할까. 그냥 확 죽을까, 나?'
이제서야 아프도록 실감이 나 오는 까닭은, 결국은 이렇게 되서겠지. 김성규.
그 때도 내 대답은 아마 죽지 마,였던 것 같은데. 너는 끝까지 고집스러웠다. 끝까지 제 멋대로였고, 끝까지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기껏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 발뺌하듯이,
너는 끝까지 내게 천국은 주지 않았다.
* * * * *
하필이면 오늘, 비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유난히 색이 가라앉았던 구름은 결국은 시원하게 비를 쏟아 붓고 있었다. 쌔하게 마른 눈을 들어 올려다 본 하늘이 무거웠다. 꼭 저처럼. 성규가 품에 안아 들고 있던 화분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잎사귀에 떨어져 내렸어야 할 빗방울이 성규의 손등 위로 쏟아져 내렸다. 너는 어제 물 먹었으니까, 더 이상 물 주면 죽어버릴텐데. 성규가 제 손바닥 아래에 버티고 있는 꽃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만큼은 살아주길 바래서 데리고 나온 거였는데, 하필이면 비가 올 게 뭐야.
규브리엘이 잘 사는 방법. 2~3일에 한 번 꼴로 물 주기. 까먹으면 절대 안 됨. 꼭 하는 짓 만큼이나 삐뚤빼뚤했던 우현의 쪽지를 떠올린 성규가 조금 웃었다.
그거, 잘 하고 있었는데. 한 번도 안 까먹고 꼬박꼬박 물 줬었는데. 네 말마따나 니가 선물했던 거니까 이것만큼은 내가 키워보려고. 그렇게 생각하며 건조했던 흙이 젖지 않게끔 손바닥으로 우산을 만든 성규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버스 정류장 맞은 편에 위치한 작은 꽃집이었다.
"…임시 휴업…."
실은 몇일 전부터 눈여겨 봐 둔 터였다. 우현과 서점에 들렀다 돌아오던 길에서도 흘끔거리며 봐 둔 꽃집은 규모는 작지만 주인이 꽃들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는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결국에 찾아온 꽃집의 유리 문 위에는 임시 휴업이라고 적힌 종이가 비를 맞아 눅눅하게 붙어 있었다.
왜 하필이면 비가 오고, 하필이면 문을 닫은 건지. 지독히도 저를 등진 세상이라고 생각한 성규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정말이지 끝까지도 재수 없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불이 꺼진 꽃집 내부를 빤히 내다보던 성규가 빈 화단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시원하게도 머리며 옷에 비를 퍼붓는 하늘 탓에 금세 쫄딱 젖은 성규가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빗물에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화분 위로 갖다 대었던 손바닥을 떼었다. 여기 두고 갈 거 였는데, 그러면 결국에 비를 맞아야 할 것 같아서. 손바닥을 떼어 낸 화분 위로 금방 비가 차올랐다. 건조하게 말라 있던 흙이 순식간에 짙은 빛을 띠었다. 거센 비에 휘청휘청거리는 잎사귀들을 물끄러미 내려보던 성규가 빈 화분들 사이에 조그마한 제 화분을 내려 두었다.
큼지막한 화분들 사이에 자리한 규브리엘은 제법 어울렸다. 엄마, 아빠, 자식. 꼭 가족 같네. 무서운 기세로 비를 받아내고 있는 화분들을 보면서 실없게도 웃은 성규가 금방 내려 놓은 화분의 잎사귀를 손으로 매만졌다. 좋겠네. 가족 생겨서. 규브리엘.
그리고는 함께 가져왔던 온도계를 주머니에서 꺼내었다. 날씨 탓인가, 15도 가까이 내려가 있는 온도계를 천천히 젖은 흙더미 위로 꽂아 두었다. 그러면 또 다시 잔상처럼 떠오르는 건 우현의 글씨. 온도는 22˚가 가장 적당하니까 온도계 봐 가면서 물 줘야 함. 어디선가 목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아 한 쪽 입꼬리를 올린 성규가 가만히 모았던 무릎 위로 제 턱을 올려 놓았다.
너는 기억할까, 싶다.
온도계를 꽂은 화분을 선물로 받기 전에,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지. 성규가 애꿎은 온도계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한가롭던 우리의 수 많은 날들 중 한 때.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하릴없이 카드놀이 따위나 하다가 내가 문득 꺼냈던 그 말. 끝은 싱겁기 그지 없게 잘라먹었었지만 그 때 분명,
"내가 너보고, 온도계 같다고 했었는데. 남우현."
왜냐고 물었던 네 물음에는 그저 '내 맘인데,'하고 답하긴 했었지만. 딱히 설명까지 하려니까 민망해져서 그만 뒀었던 말. 성규가 차갑게 젖은 무릎 위로 올려두었던 턱을 떼어내다가 살짝 웃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너는 역시 온도계를 닮았다. 내가 이만큼 뜨거우면 너도 같이 뜨거워졌고 내가 이만큼 차가우면 너도 같이 식어왔으니까. 술 먹지 말라며, 대신 저를 봐 주는 게 좋다며 내가 들었던 술의 병목을 힘있게도 잡아왔던 그 때의 손바닥이 기억난다. 모든 것을 나에 맞춰 내 주위에 잠식해오던 네가 유난히 싫어했던 것은 내가 식어가고 있을 때. 똑같이 따라서 식어가던 너는 베인 상처에 붙이는 밴드처럼 다시금 우리의 온도를 높여왔다. 그래서 그렇게 말 했던 거라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내 앞에 놓인 것은 네가 두고 간 온도계다. 그만큼 꼭 닮았는데, 너는 그걸 어쩌면 기억할까 싶기도 하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으로 감상에 빠져버린다면, 어쩌면 꽃집 앞에 영영이고 발이 묶여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성규가 기어이 웃으며 저린 무릎을 탁탁 쳤다. 오래 수그려 있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애써 멀쩡한 생각으로 저의 정신을 매도한 성규가 처량하게도 흔들리고 있는 화분의 잎사귀를 툭 건드렸다. 잘 있어. 그렇게 시덥잖은 마지막 인사를 소리내어 꺼낸 성규가 마침내 굽혔던 무릎을 펴려 했을 때였다. 화분 뒤 쪽에서 삐죽이 튀어 나온 하얀 모서리가 성규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두어번 눈을 깜빡인 성규가 하얀 귀퉁이를 살짝 잡아 당겼다. 그에 쉽게 딸려 나온 것은 새하얀 네임 택. 멀쩡하게 붙어 있었을 네임 택은 빗물을 만나 축축하게 젖어버려 이미 흐물흐물하게 화분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성규가 네임 택을 반듯이 펴 읽었다.
"규브리엘. 은방울꽃."
규브리엘, 하며 적힌 삐뚤빼뚤한 글씨 옆 쪽에 조그맣게 적힌 꽃 이름 하나. 성규는 그제서야 규브리엘의 원래 이름이 은방울꽃이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다가는 작게 웃었다. 이름 하고는, 유치하게. 그렇게 생각하며 휘어지게 웃으려는 성규의 눈꼬리를 다시금 딱딱하게 굳힌 것은 그 다음 글씨였다. 규브리엘, 은방울꽃. 꽃말.
Lily of the Valley.
ㅡ당신은 나의 인생을 채워줍니다.
인생을, 까지 적힌 글씨는 빗물을 만난 탓에 조금은 흐릿하도록 번져 있었다. 성규가 제 손을 들어 종이 위로 얹었다. 더 이상 번지지 않길 바라며 손을 얹은 종이는 성규의 눈가를 찌릿하게끔 만들어왔다.
채워줍니다.
왈칵 차오른 눈물을 애써 감출 새도 없이 종이 위로 손을 덮은 성규가 지독히도 저를 울려 오는 우현에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차갑게 젖은 저의 심장께를 남은 한 손으로 움켜 쥐었다. 온도계가, 그러니까 온도계가 다시금 나를.
너는 언제나 거짓말 같았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오는 것도 실은 전부 다 거짓말 같았고, 어쩌다가 만난 사람에게 갖는, 조금은 지나친 흥미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너는 멀쩡할지 몰라도 나는 위험하다고. 이렇게 살다간 결국 나만 손해를 갖고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는 그토록.
거짓말이 아닌, 거짓말처럼 말도 안 되게ㅡ 나를 사랑했던 것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온도계.
잔인하게도 나를 따라오던 너는 지금 이 순간마저 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
불이 꺼진 꽃집, 슬레이트 지붕 위로 후드득거리며 쏟아지고 있는 빗소리가 성규의 정신을 어지럽도록 만들어왔다. 죄악일까, 생각했다. 비를 동반한 휑한 바람이 어두운 유리창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대는 와중에, 그 앞에 놓아둔 빈 화분들과 플라스틱 받침대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맞부딪혀오는 와중에. 그 사이에 새롭게 놓아 둔 우리의 화분이 센 바람에 여념없이 흔들리다가 결국 줄기의 방향을 비틀어버릴 정도까지 되었을 때ㅡ 한참동안을 울다가 든 생각은 죄악이었다. 거칠 것 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와 마찬가지로 펑펑 울게 되어버린 이 순간마저 나에게는 죄악일까. 조건 없이 내게 와준 너에게 받는 천벌일까. 너의 인생을, 마저 채워주지 못해 받게 되어버린 천벌일까.
그 어떤 대가일지라도 달게 받겠다고 맹세했던 지난 날 때문에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 성규의 입에서 기어이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늦은 오후, 빈 거리는 공허해진 꽃집 만큼이나 조용했기에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왔다. 그렇게 뚝뚝 흘러내린 눈물은 빗물인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화분을 얹은 바닥 위로 떨어져내렸다.
너는 만나선 안 됐었는데. 정말이지 그러면 안 됐었는데. 큰 후회가 될 줄 알았음에도ㅡ 이만큼이나 나를 무너뜨릴 정도로 큰 후회가 될 줄 만큼은 꿈에도 몰랐던. 씨발, 개새끼야 너는,
뜨거운 제 눈가를 옷 소매로 벅벅 닦아낸 성규가 끝없이도 쏟아지는 눈물에 애먼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미 빗물이며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볼 만 했다. 결국에 개새끼 너는, 형편없게도 나를 무너뜨리고야 막을 내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절로 자조적인 웃음을 띤 성규가 그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에 제 옷소매를 갖다 대며 볼품없게 젖은 제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남우현, 개새끼야 넌.
내 인생의 커다란 변수였다. 있어서는 안 됐을 아주 커다란 그런 변수. 이토록이나 내 발목을 붙잡을 줄 알았다면. 혹은 그와 함께, 처음으로 다시 돌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편의점 앞에 앉았던 네게.
다시는 절대로. 그게 설령 다음 생의 일이라고 할 지언정 나는 절대로,
ㅡ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임을 맹세한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인피니트/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 20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3/a/f/3af765f309f4a30e00754db7a13c38e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