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19
w.규닝
19. 천벌이라도 달게
옥탑방엔 언제나 불이 켜져 있었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우현의 이상 기류였다. 성규가 있는 곳이든, 아니든 옥탑방 곳곳은 환하게 켜진 형광등 빛으로 어두워질 새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이지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현은 불안 증세를 느끼고 있었다. 내 눈 앞에서 너는, 한시라도 사라지면 안 돼. 한 공간 안에 있더라도 내 손에 잡혀야 한다. 우현은 멍하니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는 성규의 발치에 앉아 흔들리는 발목을 한 손으로 감았다.
"저쪽 방 불 좀 끄고 와. 전기세 많이 나와."
"상관 없어."
"미친놈아. 우리 집이니까 내가 상관 있어 끄고 와."
성규가 잡혀 있는 발목을 달랑거리며 말했다. 시종일관 건조한 말투로 성규의 말에 대꾸하던 우현이 고개를 들었다. 싫다고. 그렇게 말해오는 우현은 요즘 들어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에 성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안 가. 밖에 안 나간다고. 저렇게 불 켜 둘 필요 없어."
"꼭 그런 거 때문은 아니야. 너 어두운 거 싫어하니까."
"……."
"안 그래도 집 싫어하는데. 어두워서 더 싫어하면 안되잖아."
우현이 몸을 일으켜 성규의 옆 쪽으로 올라와 앉았다.
성규가 입술을 깨물었다. 또 방심해 버렸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현은 훨씬 더 많이 저를 생각해오고 있었다. 정말 많이. 알량한 제 예상을 뛰어넘어 올 만큼 그렇게 많이. 째깍거리며 거실을 울리고 있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듣고 있다, 옆에 놓인 우현의 손에 제 손을 겹친 성규가 역시나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던지.
그렇게 성규가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풀어 주는 날이면 우현은 하루에도 서너번씩 담뱃갑을 숨겼다. 그렇게 하면 별 어려움 없이 성규의 입술을 얻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럴 때면 언제나 제게 와 닿는 입술을 느끼며 안도감을 찾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따뜻한 숨은 가까이에 잡히고 있다. 우현은 쥔 것 없는 손바닥을 뻗어 성규의 뒷통수를 끌어왔으며, 그러면 성규의 입술은 더욱 깊게 우현에게 묻어왔다.
"너는."
우현이 가져 온 뜨거운 머그잔에 제 손바닥을 겹쳐 잡으면서 성규가 말했다.
"내가 가진 제일 큰 후회야."
후회. 그 말을 듣고도 우현이 웃을 수가 있었던 것은
ㅡ후회라는 것 보다, 그 앞에 자리한 제일 큰,이라는 말에 더욱 큰 의미를 뒀기 때문이었으리라. 어쨌거나 성규에게 저는 가장 큰 어떤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후회와 같이 가슴 저미는 일에서일지라도.
하루 종일 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우현이 잠시 제 무릎을 베고 눈을 감아 잠을 청한 후면 드는 생각이었다.
"후회 할 짓을 왜 했냐고, 누가 나한테 그렇게 물으려고 한다면."
시끄러운 잡음만을 내고 있는 브라운관 위로 이유 모를 적막함이 흐름과 동시에 잔잔한 목소리를 겹쳐 내는 성규가 우현이 으레 그랬듯, 질리도록 따라 웃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누군가가 정말 내게 그렇게 묻는다면 개새끼야 나는.
후회 해도 좋을 만큼 너를 알고 싶었다고. 그래서 지금은, 천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해주겠다.
*
"그렇게 성규 형 집 밖으로 안 나오더니, 이성열 군대 간다니까 이제서야 기어 나오는 거 봐라."
완연하게 날이 개인 3월의 끝자락이었다.
마지막 휴학 서류 건 때문에 찾은 학교에서 만난 호원과 동우가 우현의 목에 헤드락을 걸어왔다. 이 미친. 형한테 홀려서는 친구마저도 마다 하는 새끼. 그렇게 우현의 머리칼을 엉망으로 망가뜨리던 호원은 결국에 배 안쪽을 힘이 실린 주먹으로 얻어 맞고 나서야 우현에게서 나가떨어졌다.
"홀렸다는 표현 쓰지 마. 기분 이상하니까."
"홀린 게 아니면 뭔데?"
"그렇게 말하면 김성규가 날 작정하고 꼬신 것 같잖아. 그냥 내가 멋대로 좋아했던 것 뿐이야."
우현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호원을 쏘아보았다. 그에 호원이 김빠진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인마. 노려보기는."
오랜만에 술이나 하러 가. 멀리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성열의 어깨가 답지 않게 쳐져있는 것을 확인한 우현이 제 어깨에 팔을 둘러 오는 호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대. 그것은 누구에게나 무겁고도 무거운 의미인 것만은 확실했다. 당장 제일 먼저 가게 되어버린 이성열에게도, 이호원, 장동우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도 모두 다.
성규의 곁을 지키느라 오랜만에 바깥으로 걸음을 한 우현이 꽉 찬 소주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죽음을 예고했던 천사에게는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아버린 탓이었다. 애초에 천사니까,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었던 사람. 우현이 성규의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키다 생각해낸 것은 그것이었다.
2주 후에 입대니까 오늘만큼은 만나게 나와라,하는 성열의 문자를 받고, 그제서야 집 밖으로 걸음을 빼면서도 김성규는 옥탑방에 홀로 남았다는 사실이 못내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시간은 벌써 여덟 시가 넘어가는 시각. 끝없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것은 성규의 얼굴이었다. 우현이 시계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집을 비운 지 다섯 시간이 넘어 가고 있었다. 평생 못 볼 새끼도 아니고, 몇 잔만 더 마셔주다가 자리를 떠야겠다고 마음 먹은 우현이 폭탄주를 섞고 있는 성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저승사자도 울 줄 안다니까."
"뭐라는거야, 이성열은."
"니네 모르지? 저승사자도, 울더라고 계속.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사람이 그러더라니까."
성열은 아까부터 이유 모를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그에 뜨악하며 입을 벌린 호원과 동우가 제 옆에 놓인 티슈를 쭉쭉 뽑아 성열에게 넘겼다. 난데없는 저승사자 타령으로 시작한 성열의 술주정의 의미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승사자가 울어. 어쩌면 악몽이라도 꿨다가 무서우니까 괜히 하는 넋두리인 줄로만 알았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꽤나 디테일하게 '저승사자가 운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는 성열을 쳐다보던 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현이 눈물을 찍어 내고 있는 성열의 옆에서 턱을 괴고 혀를 찼다.
"꿈 속에서 저승사자 본 거냐?"
"저승사자가, 울었어. 자꾸."
"그 얘기만 벌써 삼십 번도 넘게 한 것 같은데. 꿈 속에서 저승사자가 나왔다면, 군대에 가서 씨발 니가 죽으려나보다."
성열의 헛손질을 지켜보다가 술을 들이킨 우현이 다시금 잔 속으로 소주를 채워 넣었다. 그와 동시에 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성열은 갈 곳을 잃은 손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트렸다.
성열에게로 모아졌던 시선은 곧바로 우현을 향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분명 이성열인데, 호원과 동우의 시선은 우현에게만 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는 밑도 끝도 없이 술만 마셔대니까. 종래에는 눈썹을 구긴 호원이 또 다시 새로운 잔을 들이키려는 우현의 팔목을 잡아 챘다.
"왜 이렇게 마셔대? 성규형이 술 먹는 거 싫어한대서 얼마 전까지는 입에도 안 대던 새끼가."
"아니야, 입 댔어. 김성규 술 대신 마셔주려면 어쩔 수 없었어."
걔가 여간 술을 잘 먹는 게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며 실실 웃은 우현이 저의 팔목을 잡고 있던 호원의 손을 뿌리치고는 원샷을 했다. 호원이 졌다는 듯 손을 거두어 갔다.
"성규형이랑 싸웠냐?"
"뭐?"
"요즘 집에도 못 오게 하고. 살벌하길래."
"차라리 싸운거였으면 좋겠다."
"그럼 뭔데?"
"아니야."
우현이 맥주가 가득 찬 잔에 소주를 부어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아무것도. 표정만큼은 물론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것이 훤히 드러나 모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호원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미친새끼, 서운하게. 형보다 더 많이 알아 온 친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게 도대체 뭐길래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어깨 좀 펴. 호원이 우현의 어깨를 툭툭 치다가 우현이 말아놓은 술을 가져다가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직도 저승사자 타령과 함께 테이블 위로 널브러져 있는 성열은 동우의 부축을 받으며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들었다. 으 씨팔, 내가 군대 가는데. 군대 가기 직전에 이렇게 게이가 되면 안 되는 거야 그치. 저승사자 이야기로도 모자라 이상한 말들의 연속을 늘어놓고 있는 성열이 매달리듯이 동우의 목을 감싸며 대롱거렸다.
"이성열 봐라. 군대 간다고 정줄도 놔 버렸나봐. 너나, 저 새끼나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 듯."
"…뭐, 나는 왜."
우현이 짐짓 인상을 쓰며 호원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노려보는 와중에도 호원의 뒷쪽에 걸린 시계에 눈길이 가 마음은 다시 초조해져왔다. 다섯시간 반 째. 이렇게 늦은 저녁이면, 벌써 바깥은 어두컴컴해졌을 테고 김성규는. 우현이 쓰도록 넘겨대던 술을 삼키다 입술을 물었다. 어두운 거 싫어하는 김성규는 지금쯤 또 혼자다. 우현이 종래에는 소리나게 술잔을 내려두었다.
"야. 어디 가? 앉아."
"김성규 혼자 있어."
"말 끝마다 성규 형이래. 너 진짜 미친놈같아. 자리에 앉아."
호원이 초조하게 굴러가는 우현의 눈을 힘주어 노려보다가 우현의 팔을 끌어 제 자리에 앉혔다. 성규 형 아니면 니 인생 없는 사람처럼 굴지 마. 보자 보자 하니 안되겠으니까 하는 충고야. 호원이 아무런 힘도 없이 자리에 끌려 앉는 우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병신같이 텐션 업 돼서 이성열 보내려고 만든 술자린데 이게 뭐야. 너는 절반 정도 미친놈이 돼서야 나타났지. 저 새끼는 아까부터 무슨 저승사자 타령만 하고 있지."
"…이호원. 나 진짜 진지한데, 어두운 옥탑방에 지금 걔가 혼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성규형한테 잘 해라. 싸우지 좀 말고. 호원이 거품기가 빠진 맥주 잔에 입을 대며 말했다.
"어제 저녁에 성규형이 동우한테 문자 했었어."
그에 불현듯 눈을 치켜뜬 우현이 호원을 주시했다. 호원은 집어 들었던 술을 절반 정도 쉬지 않고 들이키다 입술을 닦았다.
"남우현이 죽고 싶지 않게 도와달래."
거기까지 말하자 들려오는 것은 둔탁한 굉음이었다.
아!씨이팔! 난데없이 휴대폰을 쥐고 벌떡 일어난 성열 탓에 무거운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호프 바닥을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도 울렸다. 핸드폰! 이 핸드폰이 그 저승사자 거라고! 아직도 나랑 핸드폰 안 바꿔줬다고! 눈물 콧물에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쓱 닦으면서 크게 외친 말은 그것이었다. 성열아 앉아. 쩔쩔매며 성열의 어깨를 내리 누르는 동우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
호원의 말에 무언가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넋을 빼고 있던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할 바에야는 얼른 들어가 성규의 얼굴을 보는 편이 더욱 마음이 놓일 거라는 생각에 급하게 챙겨 든 가방을 어깨 위로 걸쳐 메면서 몸을 틀었다.
"이성열은 다음에 한 번 더 만나면 되고. 나 먼저 간다."
진짜 웃기고 있어. 죽고 싶지 않게 도와 줘? 우현이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지금, 니가 나를 죽고 싶게 만들고 있으면서? 그렇게 생각하며 테이블 밖으로 걸음을 떼려던 우현의 발을 다시 한 번 묶은 것은 덧붙이듯 들려오던 호원의 목소리였다. 성규형이랑 잘 좀 지내.
"형이 살면서, 제일 사랑했던 건 개새끼라신다."
술 때문에.
어쩌면 술 때문에 머리가 핑 돌아버린 것이라고 믿고 싶을 만큼 눈가가 따가웠다. 술 때문에. 아까부터 연거푸 들이켰던 술 때문에ㅡ그 취기가 지금에서야 올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우현이 따가워지려는 눈가에 힘을 주어 웃어 보였다.
그걸 누가 몰라? 김성규. 말은 안 해줬지만 다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 집으로 돌아가면 그 말부터 제일 먼저 해 줘야 겠다고 생각한 우현이 들쳐 메고 있던 가방을 고쳐 잡았다. 그러니까, 성열이ㅡ
"씨팔, 이것 봐! 또 나한테 문자 왔잖아. 저승사자한테 오는 문자가 전부 다 나한테 오고 있다니까!"
이제는 거의 우는 목소리로 징징대고 있는 그 목소리가 커지기 전까지는. 동우의 부축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로 엎어진 성열이 짜증기 가득한 목소리로 들고 있는 핸드폰 액정을 호원과 우현 쪽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성규 형이 거의 맨날 김명수라는 새끼한테 문자 보내고 있다고."
귀찮아 죽겠어. 짜증나 죽겠어. 그렇게 팔에 힘을 빼려는 성열의 손에서 떨어지려는 핸드폰을 급하게 낚아 챈 건 우현이었다.
어쩌면 성규라는 이름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발걸음조차 조금이라도 늦추어 버린 것도 다 그 탓이었으리라. 우현은 성규의 문자라는 대목에서 이미 핀트가 어긋나 있었다. 미끄러지려는 핸드폰을 고쳐 잡아 확인한 액정은 어두운 호프 위로, 미명같은 빛을 내며 방금 전 도착한 문자 내용을 담아내고 있었다.
「김명수. 이젠 옥탑방에 아무 때나 찾아와도 뭐라 안 해.」
「비밀번호」
우현의 심장 부근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0000.」
왜.
왜, 김성규. 우현이 술 병들이 가득한 테이블 위로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비밀번호가 왜. 거기까지 생각한 후에는 그냥 무작정 호프집을 박차고 나간 것 같다. 그러니까, 유리 따위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등 뒤로 흘려두며.
짜증이 날 만큼 바깥 바람은 차가웠다. 오늘은 어쩐지, 하늘부터가 캄캄하더라니 결국은 이렇게 비까지 쏟아지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ㅡ 꿈 속에서도조차 예상치 못했던 것은 당연했다.
* * * * *
김성규의 전부는 김명수라고 했다.
미칠듯이 잔인한 말이었지만 성규의 입은 그렇게 말해왔다. 삶의 이유였던 그 녀석이 다시는 저를 찾지 못하도록 죽어야 맞는 거라고ㅡ 어쩌면 저보다 남에게 더욱 잔인하게 들려오는 말일지도 모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오는 김성규는 제멋대로였다.
제대하고 나면, 김명수가 혹시라도 자신을 찾아오게 될 까봐 겁이 난다고 말해오는 천사.
우현이 성규의 옆에 못이 박힌 듯 서 있게 되었던 탓도 결국 그것이었다. 결국, 죽으려는 이유에 저의 역할이 눈꼽만큼도 들어가 있지 않았음에도.
처음 천사의 옥탑방에 따라가게 되었다가 홧김에 뛰쳐나왔던 정류장 앞에 도착하자 하나 둘 씩 떨어져 내리던 빗방울이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현이 물방울로 인해 짙은 색으로 변해 가는 정류장 표지판 앞에 멈춰 서다가 숨을 골랐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옥탑방을 찾게 되어버린 탓에 평상 위에서ㅡ허락되지도 않은 키스를 나누었던 그 장면은 머릿속에서 빛처럼 빠르게 번져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었던 정류장을 다시 지나 언덕 앞으로 달리는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진짜 씨발이야."
이미 절반쯤은 울고 있는 목소리가 겨우 뱉어낸 말은 욕지거리였다.
숨이 턱까지 올라와 거칠어져버린 숨소리만이 조용한 언덕 위에 흩어지고 있었다. 침침한 하늘에 비까지 가세한 날씨 또한 잔인했다.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싸하게도 들려오고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후드득 거리며 치고 있는 빗소리에, 달리던 발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던 우현이 올려다 본 것은 이제 마악 불빛이 들어온 가로등의 전등이었다.
우현이 왈칵 하고 차오른 눈을 세게 비볐다.
옥탑방 밖이라면 질색이던 김성규가 까칠한 걸음을 옮길 적마다 함께 지나쳤던 가로등 빛은 오늘도 변함없이 환했다. 제 자취방에 함께 갔다가, 선물로 주었던 작은 화분을 안고 언덕을 오르던 김성규가 멈춰 섰던 것도 가로등 아래. 어두컴컴한 골목길 옆에 모순처럼 자리한 가로등은 저희들이 주고 받았던 구원이라는 단어 만큼이나 환했던 존재.
어느 날엔, 서점엘 들리고 싶다며 걸음을 옮기던 김성규가 이끌리듯이 멈추어 선 것도, 전부 다 이 곳. 환한 빛 아래. 우현이 엉망으로 번져오는 눈물에 입술을 깨물며 멈췄던 발걸음을 떼어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지고 있는 비는 시원하리만치 무서웠다. 짙은 아스팔트며, 주차 해 둔 자동차 지붕을 소리내며 치고 있는 비가 쉴새 없이 달리고 있는 우현의 눈 앞을 흐리게 만들었다.
장난치듯이 천사를 놀려가며 지나치던 낮은 담벼락. 화분을 들고 가다 무겁다며 잠시 쉬었던 쓰레기통 옆 화단. 커다란 화살표가 그려진 바닥 위에서 한참 동안을 뒤쳐진 우현을 향해 기다리던 김성규의 잔상까지. 더욱 검은 회색이 된 하늘은 모든 것을 가려내고 있는 듯 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모든 것을 등 뒤로 내보내며 옥탑방까지 달려가기를 몇 분 째. 익숙했던 풍경들은 이미 우현의 등 뒤에서 싸한 빗방울을 맞아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착한 대문 앞은 캄캄했다.
칠이 벗겨진 대문을 아무렇게나 밀어 젖힌 우현이 급하게 계단을 올랐다. 미쳤지, 김성규. 니가 진짜…미쳤지 김성규. 이미 체면 따위야 지난 말이었다. 볼품없게도 울면서 도착한 옥탑방 안 쪽은 지금, 머리 위의 하늘처럼 컴컴하게 꺼져 있었다.
0214가 아닌,
0000을 누르는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믿기 싫었던 것은 성규의 부재.
예감이 아닌 직감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맞아 떨어지는 표현이었다. 직감은 언제나, 예감보다 잔인한 편이었으니까.
다급하게 비밀번호를 눌러봤자 캄캄했던 옥탑방 안에선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불은 꺼져 있었던 모양인지, 미약하게나마 남아있어야 할 미열조차 띠고 있지 않을 만큼 어두운 공기만이 눈 앞에 나타났다. 우현은 더 둘러볼 것도 없이 적막한 거실 안쪽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좆같아."
현관 앞에 멈추어 선 우현의 눈가가 아까처럼,
"진짜."
진짜….
따끔하게 시려오는 것도 전부 술 기운 때문은 아닌 모양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버렸지만.
김성규가 아끼던 화분 위로 빗물이 고였다.
너무 많이 물을 받아낸 화분이 결국엔 흙빛이 섞인 빗물을 바닥 위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우현의 눈이 느리게 그것을 훑어왔다. 그렇게, 밑바닥이 깨진 화분의 끝이 가리키는 곳은 낡아 빠진 평상.
벌써 날이 여러 개는 나가버린 평상 아래로는 언제나 그랬듯이 비어 있는 소주 몇 병. 그 옆으로는, 재떨이에 버금 갈 만큼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담배 꽁초가 빗물을 만나 눅눅하게 젖어 있었고, 화분 잃은 받침대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내리고 있는 빗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찾지 말아달라고 할게.
죽어도 널 찾아다니지 말라고, 김명수에게 내가 말할게.
나도 너를 잊고 살게.
그러니까 그냥, 사라져주기만 하면 안 되냐고 그렇게만 묻고 싶다. 내 눈 앞에서 없어져도 된다는 소리니까. 그게 어디가 되었든 아무 곳으로나 평생을 도망가서 살아도 내가 용서하겠다는 소리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죽지만 않으면 안 돼? 죽지만 않으면.
어딘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살아주기만 한다면, 나도 너를 잊고 살아 주겠다고,
약속할게 김성규. 볼품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한참을 울기 시작한 우현의 무릎이 그대로 꺾여 힘을 잃었다. 이미 비어버린 옥탑 위에서 울어봤자 들리는 이가 없다는 걸 인지한 후에 터져나오는 눈물은 더욱 더 비참함만을 안겨 주었다. 왜 하필. 자리를 비운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인데 너는 왜 하필 지금. 아직까지도 답답하게 차오른 밭은 숨을 내뱉으면서 울기에는 취기조차 채 가시지 않았음에도ㅡ 이미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벅찬 숨은 끝없이도 가쁜 소리만을 뱉어내게 만들었다.
"씨발, 야."
그렇게 한참을 빗물에 식은 현관 앞에 앉아서 불규칙적으로 터지는 숨만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아마 몇분 전의 저만큼이나 바쁘게 들려오는 발소리는 예상대로 대문을 박차고 계단을 올랐다. 고개를 빗물 위로 처박고 있던 우현이 눈을 들어 인기척을 올려다 보았다. 급하게도, 빠르게 언덕을 지나쳐 달렸던 저처럼 급하게도 달려 온 것 처럼 보이는 명수가 겨우 오른 계단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주인집 아들."
허탈하게 꺼진 눈이,
"어디 있어. 김성규는."
대문 앞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은, 그것만큼은 아마도 저와 같겠다고 생각한 우현이 흐트러져있는 명수의 옷매무새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꺼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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