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21
w.규닝
21. 무색
제 아무리 걸작이라 해도, 색이 바랜 수채화는 제 본래의 값 절반 이상을 잃어버리기 마련이었다.
온기 없는 4월은 한창이었다. 곳곳마다 피는 벚꽃이 무색하도록 건조한 대문 앞은 찬 기 운 섞인 바람이 내는 문소리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성규가 늦어지는 날이면, 늘 그렇듯이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발장난만 하던 대문 앞 못생긴 계단. 바람에 흔들려 옥상에서 떨어진 소주병 파편이 그 위로 어지럽게 떨어졌다.
색을 잃은 수채화가 낙서로 전락했다.
그와 함께, 특별할 것 없는 나날들은 조용하게도 흘러갔다. 성열의 입대를 거친 시간은 흐드러지게 화려한 벚꽃잎을 남기었고, 그것은 또 다시 한 결 얇아진 겉옷과 파스텔톤의 하늘을 가져다 주었다. 호원이 담배 끝에서 틱틱거리며 금세 꺼지는 라이터 불을 내려다보다가 인상을 구겼다. 불 떨어졌다. 라이터 있냐? 그에 동우가 고개를 저었다. 빈 라이터를 저만치 튕겨낸 호원이 사람들이 다니는 곳 반대편 스탠드로 몸을 뉘이면서 늘어지는 소리를 냈다.
"되는 게 없네. 불도 없고."
"호야. 거기 눕지 마. 더러워."
"이성열도 없고, 남우현도 없고. 공강시간에 할 건 또 징그럽게 없고."
"거기 아까 성종이가 음료수 쏟았어."
아, 씨발. 퍼득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호원이 어쩐지 눅눅하게 젖어오는 느낌이던 왼쪽 어깨를 탈탈 털었다. 음료수라 하지만 원인 모를 파란 액체가 맨손에 묻어 나오자 리얼하게 인상을 구긴 호원이 젖은 손을 맨바닥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런 건 눕기 전에 말 해 줬어야지. 띨빡아. 난데없이 욕을 들어먹은 동우가 입술을 삐죽이다 한숨을 쉬었다.
"진짜 심심하긴 하네. 뭣보다 남우현이 그 지경이 되가지고, 재미 없어."
"걔 어디 있냐?"
"집에 있겠지."
"성규형 집?"
"아니. 자기 집."
동우가 금방 사 왔던 음료수 캔을 따며 고개를 저었다.
"성규형 없어지고 나서 옥탑방은 얼씬도 안 하잖아. 아직까지."
"……."
"……."
"……."
"…호야."
"왜."
"성규형은 꽃뱀이었을까?"
아!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딱밤에 머리를 감싸 쥔 동우가 앓는 소리를 내며 맞은 곳을 문질렀다. 호원이 그런 동우를 내려다보다가 혀를 찼다. 생각하는 거 하고는.
"그런 건 아니야."
"아 씨! 맨날 때려. 그리고 그런 게 아닌지 니가 어떻게 알아?"
"적어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
"넌 그리고, 우리 중에 그나마 제일 친했다는 새끼가,"
호원이 질린다는 눈으로 동우를 흘겨보았다. 그런 말은 잘도 한다. 호원이 동우의 머리를 멀찌감치 밀어트렸다.
"꽃뱀이라니, 말 하는 거 하고는. 그리고 꽃뱀은 너지 무슨 성규형이냐?"
"나?"
"그래."
"나???"
"너."
"내가 왜?????"
"걔랑 깨졌다며."
너무나도 쉽게 저의 이별 얘기를 꺼내는 호원에 말문이 턱 막힌 동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입 안 가득 들이킨 음료수를 소리나게 꿀꺽 삼킨 동우가 소매로 입술을 닦았다. 드,드드들었어? 그에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인 호원이 동우가 들고 있던 음료수를 낚아채 들이키며 대답했다. 응. 목울대로 들어가는 목소리가 하는 행동 만큼이나 건조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당연히 들었지. 그렇게 씹어대던데."
"…날 씹어?"
"가루가 되도록."
"……."
"게다가 뭐? 헤어지는 이유가 '호야를 좋아하게 돼서'?"
이게 진짜 미쳤냐? 기어이 목소리를 높여 관자놀이 옆 쪽에 댄 손가락을 빙빙 돌린 호원이 일부러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호,야,를, 좋,아,해? 부러 스타카토처럼 딱딱 끊어 비아냥거린 호원이 동우의 얼굴 앞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예기치 못한 저의 변명이 호원의 입에서 먼저 터져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동우가 당황해 마지 않던 두 눈을 부릅 뜨고 제 목 언저리를 손으로 짚었다. 야! 그건!
"피,핑계야!"
"당연히 핑계겠지. 그럼 그 웃기지도 않는 이유가 진짜겠냐? 그러니까 내 말은 왜 하필 핑곗거리에 날 써먹는 거냐고. 덕분에 게이 취급 자알 받았네요. 미친 장동우야."
순식간에 귀 끝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동우의 얼굴 앞에서 제 얼굴을 떼낸 호원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동우가 빠르게 깜빡이는 눈으로 호원의 옆모습을 훑어보았다. 더 이상 그 문제에는 덧붙이는 말 없이 눈을 찡긋한 호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꽃뱀은 너지 성규형이 아니야."
"…꽃뱀 소리 안 하면 안 돼?"
"사정이 있었겠지."
동우의 투정을 잘라 먹은 호원의 눈길이 시끄러운 캠퍼스 주변 너머를 향해 머물렀다.
"형은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거고."
"……."
"남우현은 별 거 아닌 일에 유난인거고."
"……."
"그거 뿐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그런 것 뿐이었으면.
그렇게 말하는 호원의 목소리가 유난스럽게 떠들며 지나가던 학생 무리의 소리에 묻혔다. 그에 슬그머니 음료수를 집어 드려던 동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선 겨우 들어올린 고개가 호원의 눈길이 향한 곳과 같은 곳에 머물렀다.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으면. 호원의 말에 맞장구를 친 동우가 신발 끝으로 스탠드 바닥을 툭툭 건드리다가 호원을 따라 몸을 뒤로 뉘였다.
"어쨌든,"
"응."
"여름 휴가는 물 건너 간거야."
동우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완전 쫑 난거네."
"둘이라도 갈래?"
머리칼을 흩뜨러트리는 바람에, 앞머리를 두어번 정리한 호원이 무심하게 물었다.
* * * * *
핸드폰 액정은 벌써 몇 번째 멋대로 꺼지고 있었다.
씨발. 뭐 이래.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욕지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우현이 멍청하게 꺼진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거. 하필이면 오랜만에 학교에 나가는 날 말썽인 휴대폰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구긴 우현이 눈 앞에 보이는 벤치에 대충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별게 다, 짜증나게 굴고 있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맞이한 4월은 청량했다.
원초적인 비밀번호를 가진 도어락은 이제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시원하게 폭우가 쏟아지던 날. 여러 번 붙이려 들었던 담뱃불조차 억수같은 비에 금방 꺼져버리기 일쑤였던 2주 전의 그 날 이후로 생긴 습관은 돌아 가기. 우현은 휴대폰이 멋대로 꺼지기 전에 동우에게 보내 놓았던 문자 내용을 머릿속으로 상기시켰다.
30분 더 걸려. 아마 그렇게 보냈던 문자에 돌아온 답장은 질린다는 투의 타박이었다. 그러니까 돌아 오긴 왜 돌아 와. 그냥 오던 대로 오면 되지. 우현이 안 주머니 깊숙히 넣어 두었던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휴학을 마친 학교에 종종 돌아가는 길은, 길대로 잔인했다. 일상처럼 넘나들던 옥탑으로 가는 길, 그 언덕. 정류장. 모든 것을 가로질러야만 하는 그 길은 우현에게 번거롭지만서도 한 결 편한 갓길을 이용해 다니게끔 만들어 주었다. 그럴 때마다 우현은 먼저 도착한 일행에게 덧붙이듯 문자를 보내 놓았다.
30분 더 걸려. 가려면.
문자는 동우에게 보낸 것 같았는데, 답장을 보내 온 쪽은 호원이었다.
「미친 새끼. 시간 아까운 줄 알아.」
옥탑방 주위를 돌아 학교에 향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호원에게 듣는 말이었지만, 우현에게 시간이 아까운 법은 없었다.
너와 관련 된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시간이 아까운 법은 없었으니까. 우현이 마침내 담배 끝에 불을 올렸다.
짧았던 거리를 이렇게나 겉 돌아 다니는 것도, 너의 잔상을 지워보려 골목길, 정류장 주변에는 한 발짝도 얼씬 않는 내 습관까지도.
너를 생각하는 시간까지도, 지난 우리의 일들까지도. 이렇게 무책임하게 사라진, 어쩌면 죽어버렸을 너일지라도 잠시나마 너를 떠올리는 순간까지 아까운 시간은 눈꼽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이렇게, 너의 부재가 무서워 옥탑방 근처에는 눈길조차 주지 못하는 지금이지만, 그렇게 2주라는 시간은 잘도 지나갔으니까. 벌써 빈 택시는 여러 대나 도로 앞을 지나갔지만 벤치 맡에 꿈쩍 없이 앉아 있던 우현이 입 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개새끼. 집 나가지 말라고 니가 그랬었는데."
저 멀리 반대편 도로에는, 비가 오던 날 제가 숨가쁘게도 내달렸던 정류장이 눈에 밟혀 코를 찡긋했다.
"집 나와서 미안. 주인 없는 집이라,"
버티기가 힘들어.
그 때처럼 삼일 안에 돌아올 것도 아니잖아. 담배를 뺀 입을 꾸욱 다물은 우현이 힘이 빠진 어깨를 벤치 등받이에 닿게끔 기대었다.
니가 그렇게 염려했던 김명수도 몇 일 전엔 입대를 마쳤다. 나보다도 그렇게 살뜰히 여기던 옥상 위 화분들은 아마도 지금 쯤 파삭하게 말라 비틀어져 있겠지. 그 날 이후로는 어떤 비도 내린 적이 없었으니까. 니가 바꿔 놓았던 비밀번호도 0000.아마 그대로일 것이다.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많은데, 찾아갈 이는 없으니까 여전히 비워져 있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겠지. 우현이 제 앞 쪽으로 서서히 멈췄다가 다시금 출발하는 택시를 멍한 눈으로 좇으며 생각했다.
이렇게나 니가 남긴 것들은 초라하다. 천사를 만난 것들이 받아야 하는 댓가인가 싶을 정도로 그렇게 많이.
아마도 다시는, 아무도 믿지 못할 것 같은 날들만 무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우현의 머리맡으로, 방금 전 문을 연 꽃집에서 풍겨오는 튜베로즈 향이 짙었다.
꽃 내음에 아주 잘 어울리는 봄. 니가 없는 나날들은 한없이 아름다워서,
ㅡ죽고 싶다. 김성규. 너를 등진 세상이 이렇게나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
"둘이서 무슨 피서야."
그에 동우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다가 눈 맞으면 무슨, 남남커플 되겠네."
동우의 말에 별 생각 없이 웃은 호원도 맞장구를 쳤다. 미친새끼.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라. 소름 돋아 씨발. 그렇게 성종이 음료수를 엎질렀던 자리를 피해 누운 호원이 우현으로부터 답이 없는 핸드폰 액정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다가 웃어보였다. 남남커플. 생각하면 할수록 존나게도 소름 돋네. 저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멀찌감치에서 킥킥거리며 웃고 있는 동우에게 발길질을 한 호원이 웃지 말라는 말과 함께 저도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휴가를 계획했던 것은 춥디 추웠던 작년 12월이었는데, 어느덧 날씨는 이렇게나 풀려 있었다. 까마득하게 오래 전, 장난 삼아 여름 휴가에 대해 꺼냈던 말이 이토록이나 실없고도 묘한 기분만 안겨 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아직까지는 서늘한 바람이 얼굴에 스치자 어깨를 올린 동우가 코끝을 찡긋했다.
"시간 참 자알 간다."
그러게. 너도, 나도. 남우현 입대도 이제 곧이고. 호원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실실거리며 웃었다.
그러면 제대는 성열이가 제일 빨라? 그 제일 비실 거리는 게? 동우가 다 빈 음료수 캔을 소리나게 찌그러트리다가 호원을 따라 웃었다. 입대 전 날까지 저승사자 타령 하면서 질질 짜던 놈이 제일 먼저 제대해서 학교엘 다니고 있을 거라니. 아이러니하면서도 웃기잖아.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 호원이 동우가 찌그러트려 놓은 캔을 스탠드 저 아래로 걷어차며 대답했다. 그러겠지. 아마 그 돈귀신은, 제대 하자마자 복학 해서 알바나 하고 있을 거다. 호원의 시덥잖은 뒷담화를 끝으로 나란히 낄낄거린 둘이 약속이나 한 듯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코를 훌쩍였다.
그것도 이제 다 2년 후의 일이네, 뭐. 호원의 독백은 이전 것처럼 시시콜콜하고도 싱숭생숭한 기분만을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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