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고 길기만 한 여름 날, 우리들의 학교 이야기
8.
" 야, 일어나. 우리 지각이야. "
오랜만에 꿀잠 취침 중인데 왜 박찬열 개새끼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지는 모르겠다.
" 아놔, 일어나라고 ooo "
" 한번 건드릴때마다 한대씩이다 박찬열 "
이리저리 내 볼을 꾹 꾹 눌러대다가 내가 이불 속으로 숨어버리니까 이번엔 머리카락을 가지고 이리저리 꼬고 엉키게 하며 장난질인 박찬열에게
낮게 깔린 걸걸한 목소리를 애써 쥐어 짜내며 경고하니까 금새 조용해 지는 녀석이었다.
" 형 냅둬요. 원래 쟤 자면 아무도 못깨워. "
옆에서 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내 방까지 건너온 김종인이 박찬열에게 충고하니 박찬열은 그런게 어딨냐며 여전히 이불을 끌어내리는 중이었다.
" 김종인, 빵가루 흘리면 사살이야. "
슬그머니 방향을 돌리는 김종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 야, oo아 좀 일어나 봐. 오빠 학생부인데 지각하게 만들거야? "
박찬열은 내 엉덩이를 토닥 토닥 거리며 한 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인다. 결국 나는 아직 눈도 채 못뜬 채로 이불을 걷어치웠고
내 얼굴과 1c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눈을 말똥거리며 뜨고있는 박찬열과 찐하게 아이컨텍을 했다.
" 야 "
" 어, 어? "
적잖이 놀란건지 내게서 떨어질 생각도 않고 눈만 어벙하게 뜬 녀석이 나에게 되물어온다.
" 비켜, 무거워. "
" ... "
" 무겁다고 새끼야. "
" oo아,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무슨 드라마 속 주인공 같다. "
가끔식 그런 날이 있다. 한번 쯤은 정기적으로 박찬열이 맞아야 하는 날.
" 그게 바로 오늘 인거 같아. "
" 어? "
가볍게 박찬열의 정강이를 걷어 찼는데, 뭔가 정강이가 아닌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이불에 아직도 폭 갇혀 있는 터라 박찬열의 얼굴만 보이는데 그 표정이 묘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 ... 야. "
" 왜? "
" 니가 방금 찬 게 어딘 줄 알아? "
" 정강이 아니야? "
내 말에 박찬열은 점 점 표정이 굳어가다 못해 아예 울상이 되어 버린다.
그러더니 이제는 헛웃음을 짓더니 그대로 이불에 쓰러져 버리고 나는 그런 박찬열의 반응에 놀라 몸을 일으켜 박찬열의 상태를 살펴 보지만
아무래도 박찬열은 십년 쯤 늙은 얼굴을 한채 몸을 구부리고 끙 끙 거렸다.
" 뭐야, 아직도 준비 안했어? "
마침 김종인이 교복차림을 한 채 내 방에 들어왔고 나도 또한 울상이 된 채 김종인에게 처음으로 성을 떼고 급하게 불렀다.
" 종인아, 얘 이상해 "
김종인은 눈이 동그래진 채 나에게 다가왔고 금새 박찬열의 표정과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 꼬리뼈를 치는 박찬열의 모습에
김종인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바라봤다.
" 누나가 이제 찬열이 형 책임져야 해. "
" 뭔 끔찍한 소리야. 나보고 결혼 하지 말라는 소리 돌려서 하는 거지? "
김종인은 박찬열을 겨우 겨우 일으켜 자신도 꼬리뼈를 치는 것에 동참했고 내가 계속 자리를 뜨지 못하니까
어서 가서 씻고 나오라며 눈짓을 해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향했지만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계속해서 뒤를 돌아 박찬열의 모습을 바라봤다.
박찬열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진지하게 김종인에게 무엇을 말하는 거 같았고 김종인은 안쓰러운 표정을 하며 계속해서 박찬열의 꼬리뼈를 두드려 주었다.
내가 씻고 나오자 박찬열은 조금은 안정된 형태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 목욕탕 갔다왔냐? 우리 좆됐어. 존나 지각이거든. "
" 몇 시인데 그래? "
" 8시 5분. 김종인 그 미친새끼 학생부 주제에 끝까지 같이 간다고 뻐겨. "
" 너도 학생부야. "
" 아, 맞다. "
어째 다름없는 박찬열의 모습에 나는 조금 안심이 되어 조심스레 옆에 섰고, 박찬열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픽 픽 웃기 바빴다.
" 나 걱정했지? "
" 또 짖네 우리 찬열이 "
" 근데, 너 나 책임 져야 해. "
" 김종인도 모자라서 너 까지 왜그러냐 진짜. "
" 너 때문에 내 미래의 후손들을 못볼 뻔 했으니까 당연히 니가 책임 져야지! "
그 말은 즉슨 내가 바로 박찬열의...
" 무슨 말인지 이해 가지? "
능글맞게 웃는 박찬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나는 그저 김종인의 가방끈을 붙잡은 채 걸음을 빨리했다.
뒤에서 쪼개며 같이 가자고 소리치는 박찬열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박찬열 oo에게 인생 꾀인 날.
9.
" 아, 그래서 지각을 했다고? "
" 네, 어쩔 수 없었어요 종대선배. "
종대선배가 입꼬리를 한 껏 올리며 나와 종인이에게 싱글 싱글 웃으며 다가온다.
oo이는 함께 가던 도중 어떤 키 작고 눈이 똥그란 녀석을 만나 서로 투닥 대더니 반으로 가버렸고, 학생부인 나와 종인이는 지금
" 엎드려 뻗쳐. 학생부 이미지 실추 죄다. "
바로 종대선배에게 갈굼 당하고 있는 중이다.
" 하나, 하면 종대선배 둘, 하면 사랑해요 실시 "
여기가 무슨 수련회인가? 하는 생각에 숙였던 고개를 올려 눈을 부릅 떴지만 종대선배는 여전히 해맑게 웃으며 우리를 바라봤고
그 위압감에 나는 종인이 먼저 무릎을 반납했다. 김종인도 부리나케 무릎을 반납했고 그런 우리를 보고 종대선배는 요새 후배들이 눈치도 빠르고~ 하며 좋아 죽는 중이였다.
그 때 였다.
학생부 문이 열리고 변백현의 쫑알거림 대신 산뜻한 실내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 어, 왔네. 경리야. "
종대선배는 눈길을 한 번 주고는 그대로 우리에게 돌려 압박을 주기 시작했고 나는 또 먼저 종대선배 제가 참 좋아하는데요. 하며 힘차게 푸시업을 하기 시작했다.
" 선배, 애들 잡고 있는 중이에요? 괜히 왔네. "
" 아냐, 잡기는 무슨. 그냥 선배로써의 애교지 애교. "
애교? 이게 애교? 이 씨발 애교 두 번 했다간 아주 후배를 저세상으로 보내시겠어요.
몇 분 전, 종인이와 우스갯 소리를 하며 학생부 문을 여는 그 순간 종대선배는 팔짱을 낀 채 책상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제 왔어? 하며 웃는데,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 김루한한테 삽이나 빌려달라 할까. "
김루한인지 김누한인지 모를 사람에게 삽을 빌려야 겠다며 중얼중얼 거리던 종대선배에게 나는 그 삽의 용도가 무슨 용도로 쓰일지 불안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듯 통과했고 나만큼 눈치 빠른 애도 없을 거라며 자신을 타독이며 얼른 무릎을 반납했었다.
" 저희 땅에 묻지만은 말아주세요. "
내 말에 종대선배는 환하게 웃었다.
" 야아, 찬열아. 넌 나를 왜 나쁜 선배로 만드니? 내가 그 짓을 왜해 너희들한테. "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종대 선배의 눈빛이 묘하게 변하던 것을.
이십분의 종대선배 사랑해요를 외친 후, 나와 종인이는 풀려나 학생부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고
언제 도착했는지 변백현은 과자를 몇 개 풀어놓고 종대선배와 나눠먹으며 또 시덥잖은 의견을 내고 있었다.
" 선배, 요즘 동아리 활동 내역서를 보는데, 아주 신기한 동아리가 있더라구요. "
" 그게 뭔데? "
관심 없다는 듯 종대선배는 질소칩을 아작아작 씹어먹으며 옆에 있는 박경리에게 건냈고, 박경리는 그것을 받아먹으며 변백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썸머워즈라고... 아무튼 하는 거도 없고, 회원도 적고... 거기에 ooo가 있는게 신기하지만요. "
" ooo가 거기에 가입이 되어있어? "
종대선배는 적잖이 놀란 듯 커다란 눈을 더 똥그랗게 뜨며 고함을 질러댔고 그 고함에 나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선배 목소리 안그래도 큰데... 오죽하면 방송부애들은 종대선배가 연설하는 날이면 마이크를 안주냐고...
" 네, 이번에 새로 가입했던데요, 근데 그 동아리 아주 신기하단 말이죠. 담당 선생님도 없고, 동아리 회장은 우리 학교 또라이로 유명한 김루한.
그리고 그 밑에 회원은 김루한 시다바리 김민석, 싸가지 없기로 일등인 도경수... 그리고 ooo 이렇게가 끝이구요. "
ooo 얘는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동아리에 나한테 말도 없이 가입을 한거야?
과자를 먹다 나도 모르게 목이 막혀 사레가 들렸고 종인이는 그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등을 팍팍 쳐주었다.
" 아직도 그 동아리가 있었네... "
나즈막한 박경리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박경리를 쳐다보았고, 박경리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여전히 미소를 띈 채 웃고 있었다.
박경리 얘도 평범한 애는 아닌데, 그 이유가 왜인지 모르게 항상 신비주의란 말이지. 베일에 쌓여 있는 듯 하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나는 하교 길에 oo에게 그 동아리에 들어간 것을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은 이유 스물다섯가지를 듣고 oo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학생부 공주님 박경리의 등장
10.
" 더워 뒤지겠다. "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냐면, 바로 루한선배의 아기수박을 돌보고 있는 중이랄까.
이번에 방울토마토 서리가 너무 심해졌다며 혼자 바들바들 이를 갈던 루한 선배는 기막힌 생각을 해냈다.
바로 수박 키우기 였다.
아무래도 수박은 방울토마토 처럼 야금 야금 서리도 못해갈 뿐더러, 여름에는 수박이 제격이지! 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금새 텃밭에는 수박모종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 수박을 왜 내가 돌보고 있는건지 모르겠다는 거지.
" 야, 농땡이 그만 부려라. ooo 다 보고있으니까. "
저 멀리서, 그러니 정확히 말해서 우리 동아리실 컨테이너 박스 옥상 파라솔에 루한선배, 민석선배, 도경수가 티타임을 즐기고 있고
나는! 이 땡볕 아래에 루한선배의 밀짚모자를 쓰고 수박을 심고 있다 이거지!
" 선배, 너무 더운데 저도 올라가면 안돼요? "
" 응 안돼요. "
정말 매정하다. 인간이 어쩜 저렇게 매정할 수 가 있어? 나는 또 고개를 팩 돌려 수박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뒤에서는
oo 삐졌다며 즐거운 듯 웃고 있는 민석선배와 루한선배였다. 정말 선배들만 아니었으면 아주 그냥 강냉이를...
" 야. "
" 앗, 차가워. "
내 옆으로 언제 내려온건지 도경수가 큰 눈알을 나에게 쏘아대며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을 내밀었다.
근데 왜 줘도 얼굴에 대 주냐. 나는 불만스럽지만 입술 한번만 더 비쭉 내밀었다간 바로 도로 가져가버릴 도경수임을 알기에
해실 해실 안되는 눈웃음까지 지으며 그 보리차를 두 손으로 가져갔다.
" 병신, 두 손으로 받기는. "
싸가지 없는 새끼.
등을 돌려 다시 파라솔로 올라가는 도경수를 흘겨보고는 그냥 밭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야, 거기 수박모종 있을지 누가 알아! 앉지마! 하며 루한선배의 목소리가 고래고래 내 귀를 때렸지만, 내 알바인가. 내 수박인가 이게?
나는 무념무상 보리차를 홀짝거리며 파랗다 못해 투명한 여름 하늘을 바라 보며 멍하니 오늘 저녁밥을 생각했다.
박찬열이 외식하자던데... 박찬열이 카드를 긁어줄까...
툭
하고 내 코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쏴아 하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로 호스의 물줄기가 뿜어져 내려왔고 나는 왁 하는 소리와 함께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맞고 말았다.
" 우리 수박이 숨 못쉬잖아. 일어서. "
호스를 들고 개구지게 웃고 있는 루한선배였다.
그 뒤에는 민석선배가 이미 반쯤 젖은 머리를 하고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내가 그 손을 잡고 일어나는 순간
아마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팀은 도경수와 나, 그리고 민석선배 루한선배
꽤나 맘에 안드는 조합이었지만 여전히 날 갈궈대는 도경수의 눈빛에 나는 그저 깨갱 하며 옆에 붙어섰다.
" 지는 사람, 아이스크림 내기 어때. "
" 좋아요. "
루한선배의 눈빛이 이글거리다 못해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루한선배가 호스를 뿌리자마자 도경수는 언제 들고 온 커다란 물총을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민석선배 또한 자신과 닮은 귀여운 다람쥐모양 물총을 들었는데 앙증맞게 쏘아대는 물줄기에 화를 낼 때, 나는 비장의 무기 빨간 고무대야에 물을 한가득 퍼담아
민석선배에게 그래도 들어부어 버렸다.
민석선배는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몸을 부르르 떨고는
" 뒤졌어. ooo "
하고는 사악하게 웃었다. 우리는 루한선배의 수박밭에서 한참을 물싸움을 하다가
결국 수박모종을 다 밟아 버렸다. 물론 루한선배는 그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바지 정중앙을 맞추어 굴욕을 준 도경수를 잡는다고 혈안이 되어
자신이 오히려 애지중지 수박아기라고 아끼던 밭을 짓밟고 있었다.
도경수는 더욱더 환히 웃으며 루한선배를 피해 앞 서 도망쳤고 루한선배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잡히면 수박과 도경수가 이마키스를 하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끝까지 따라가고 있었고
나또한 결국 마구잡이로 민석선배에게 까불다가 결국 목덜미가 잡혀 빨간 고무대야로 샤워를 한번 해야했다.
결국 승부는 무승부로 끝이 났고
컨테이너 박스 위 옥상 파라솔에는 교복 셔츠 네개가 나란히 위에 올려져 따뜻한 햇살을 맞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잡힌 도경수는 우리들의 아이스크림을 사러 축축히 젖은 신발을 신은채 매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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