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찬열] 사신밀담 04
(부제 : 누구를 위해 술을 나르나)
그렇게, 5월 중순.
[일어나숑- 일어나숑-]" 아 싫어... 조금만 더.. "
전날 밤 과도한 아르바이트로 인해 늦게 잠든 탓에 한참을 뒤척이던 찬열이 결국 시끄럽게 울려대는 휴대폰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아, 그래
일어난다. 일어난다고.. 알람 주제에 주인한테 모욕감을 준다며 피곤에 물든 얼굴로 8시를 가르키는 시계를 보다 욕실로 터덜터덜 걷는 찬열
은 몹시도 피곤했다. 곧 출근할 시간이다. 아직까지 냉동실에 가득한 복숭아로 아침을 때우고 가야겠다.
그간 오디션을 보아 왔던 4월은 쭉 찬열에게 재수가 없었고, 이번 5월은 하루종일 아르바이트만 하며 살다시피 했던 탓에 찬열에게는 거의지옥이었다. 아르바이트도 하필이면 새벽을 내리 달려야 하는 나이트 서빙에 청소였다. 일을 하다 보면 싸우는 취객들과 후덜덜한 잔해들을
치우는 데 이골이 날 대로 났지만 시급이 제일 센 알바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 군대 문제야 고아였던 탓에 제 2국민역으
로 빠진다 치고 액수를 듣기만 해도 아찔한 등록금과 세금은 어찌 충당한단 말인가? 사실 조금 돈이 남아있긴 했다. 4월에 찍었던 화보에 대
한 월급을 가까스로 받아내긴 했지만 그 액수야 신인 모델이고 크게 유명한 것도 아니라서 그리 많지는 않았다. 설상가상 요즘 들어서는 종
종 잠을 설쳤다. 꿈에서 붉은 새가 자신을 괴롭히곤 했기 때문이었다. 찬열은 작게 하품을 했다. 잠은 아직 덜 깼다.
곧 여름 되면 에어컨을 틀어야 할 것 같은데,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찬열이 욕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항상 창문을 열고(가장 작은 창문이긴 하지만) 에어컨을 켰기 때문에 찬열은 가히 최악의 전기세 낭비를 저지르고 있었다.
4월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모두가 재수없는 일이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재수없었던 일을 꼽자면 이랬다.찬열은 오디션에 합격해 W기획사와 계약했다. W기획사는 계약금을 조금 줬다. 찬열은 그때부터 이 곳이 사기가 아닌가 조금 고민했다. 하지
만 기획사는 화보 촬영 스케줄을 잡아주었고, 일단 데뷔는 시켜주었기에 컬렉션 모델로서 런웨이 데뷔만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제법 유명
한 모델 서넛도 이 기획사에 속해있었기에 일단 사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사태는 거기서 터졌다.
- 딱 한번만 술 따르고 분위기 맞춰주면 된다니까." 미쳤어요? 제가 그런걸 왜 합니까? "
기획사는 찬열에게 스폰서를 요구했다.말도 안된다며 즉각 거절했지만 기획사의 회유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하지 않는다고 거절해 버렸다. 제 몸을 팔
아서 성공하느니 무명으로 남아있더라도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싶었다. 몸을 내던져 성공하고 싶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결국 회
유는 불발로 돌아갔고 찬열은 그것으로 마지막인 줄만 알았다. 그리고, 첫 화보촬영을 성공적으로 끝낸 지 일주일, 기획사 대표가 검찰에 의
해 붙잡혀갔다. 온갖 신문사에 일면지로 실렸을 만큼 대사건이었던 그것을 찬열은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 죄명은 사기죄와 횡령죄, 그리
고 성매매였다.(무려 미성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기획사나 대표나 관계자들이나 싹 다 조사를 받았고 회사는 망했다.
찬열도 피해자였다. 그렇게 스폰서 안 한다고 말했는데도 술자리 약속이 10개는 잡혀 있었다는 것을 보면 말 다했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스폰서 할 뻔했다. 그러나 정작 증인이 없었다. 전부 자기 피해를 숨기기에 급급하며 도망치는 게 다여서, 보다 못한 찬열
이 참고 조사인 자격으로 증언을 해 주었다. 워낙 사건이 충격이라 3사에서도 인터뷰가 왔는데, 찬열은 쿨하게 그에 수긍해서 3사 9시 뉴스
에는 찬열의 얼굴이 나오게 되었다.
' 저도 몰랐죠.. 데뷔시켜준대서 왔는데 돈을 떼어먹고 해외에 나르려는 시도를 했다니 할 말이 없네요.. 스폰서 요구를 하더라고요,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죠. '
꽃미남이라며 잠깐 화제를 모았던 찬열의 인터뷰 내용은 화제가 된 직후 디씨종자들에게 신상이 털리면서 과거 피팅모델 경력과 오디션에서 부득이하게 떨어졌던 지난날의 과거들이 전부 공개됨에 따라 적절하게 풍자되었다. 탈락 통보를 내리는데 자신이 지은 미묘한 표정이 합
성되어 짤방으로 힛갤에 올라가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기획사 홈페이지를 해킹해 최종 오디션 영상까지(정확히 말하자면 직캠)까지 털
어서 내보내는 것을 보고 찬열은 디씨종자들에게 진심으로 공포감을 느꼈다. 불명예스럽지만 별명도 생겨버렸다. 매일 양보한다고 멘탈신,
멘탈갑, 호구신,호구甲,호구왕, 그리고 근성이 대단하다며 근성甲이라는 별명까지. 디씨 힛갤까지 올라간 찬열의 동영상 내용은 덧글까지 포
함하자면 대략 이랬다.
- 죄송합니다. 박찬열-고자- 씨는 탈락입니다.-으아아아아아!!
-ANG?
-고자라니!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ANG?ANG?ANG?ANG?ANG?ANG?ANG?ANG?ANG?ANG?
[호구왕ㅋㅋ호구왕ㅋㅋ호구왕ㅋㅋ호구왕ㅋㅋ호구왕ㅋㅋ호구왕ㅋㅋ호구왕ㅋㅋ호구왕ㅋㅋ]
[넌 호구신이랑께ㅋㅋ넌 호구신이랑께ㅋㅋ넌 호구신이랑께ㅋㅋ넌 호구신이랑께ㅋㅋ넌 호구신이랑께ㅋㅋ넌 호구신이랑께ㅋㅋ]
[넌 장식임ㅋㅋ넌 장식임ㅋㅋ넌 장식임ㅋㅋ넌 장식임ㅋㅋ넌 장식임ㅋㅋ스폰서가 우승ㅋㅋ스폰서가 우승ㅋㅋ스폰서가 우승ㅋㅋ]
[이새끼도 존나 운없다 뭐 저런년한테 지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구왕 운지ㅋㅋ호구왕 운지ㅋㅋ호구왕 운지ㅋㅋ호구왕 운지ㅋㅋ호구왕 운지ㅋㅋ호구왕 운지ㅋㅋ호구왕 운지ㅋㅋ]
[死번째는 너랑께!死번째는 너랑께!死번째는 너랑께!死번째는 너랑께!死번째는 너랑께!死번째는 너랑께!死번째는 너랑께!死번째는 너랑께!]
[저새낀 맨날 떨어지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死0번 떨어졌다던데 오오 호성성님]
[으이구!불쌍!]
찬열은 갖가지 다채로운 덧글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미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권에 들어 상황은 그야말로 안습이 된 상태라서 찬열은 그냥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다 내가 호구인 줄 아는구나. 서러운 마음을 부여잡고 찬열은 캡처를 떠 사이버 수사대에 명예훼손으로 신고
를 클릭했다. 아무리 찬열이 대인배라 하여도 길거리나 시내에 나갈 때마다 받는 안쓰러운 시선은 참으로 미묘했기 때문이었다. 사이트에도
법적으로도 별 재재 하지 마시고 그냥 글만 내리라고 해 주세요. 내용을 덧붙인 찬열이 이내 메일을 보냈다.
[너네 다 고소미 ㅎㅎ]
물론, 이 말도 잊지 않았다.
- 야, 저사람 어디서 좀 보지 않았냐?- 걔잖아, 그 근성..
- 헐 진짜?
주변에서 수근대는 사람들을 애써 모른 척 하면서 고개를 푹 숙인 찬열이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필 일하는 곳이 시내 나이
트라 더 그랬다. 꼴도 말이 아니다. 염색은 다 풀리고, 대강 하고 나온 탓에 지금 상태가 영락없는 양아치다. 그래도 뉴스에 나온 게 잘못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오지 않았다면 화보 촬영한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풀리는 일 없는데 좋게 좋
게 생각하자, 두달 전 문제의 그 사건 이후로 초탈해진 찬열이 나이트를 향해 총알처럼 달렸다. 하루라도 더 일하고 돈 더 받아야지.
시끄러운 소리들이 귀를 찢어지게 메웠지만 찬열은 아랑곳하지 않고 청소만을 할 뿐이다. 잔해를 치운 뒤에는 술병들을 나르러 창고로 갔다.
오늘은 다행히 사나운 욕을 하며 싸우는 청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술 좀 그만 처먹어라.. 저것들은 사람도 아니다, 개다, 개다, 개다..
속으로 신나게 씹어대던 찬열이 한심한 표정으
로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쟤네들은 왜 저러고 있는지, 나도 한창엔 클럽에서 몸도 흔들고 춤도 추고 했었지만 쟤네들처럼 술처먹고 미친짓
은 안했는데. 이런 곳도 오고 하니까 그래도 돈 좀 있나보네. 난 휴학하고 돈벌려고 이런 곳에서 구르고 있는데.. 묵묵히 깨진 술병의 잔해들
을 치우는 찬열이 이 곳은 진상 손님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근 보름을 일했지만 여기처럼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단 하루도 없
는 곳은 처음이다. 치고 받고 싸우는 광경도 광경이지만, 별 험한 꼴을 다 당하는 건 자신이었다. 얼마 전에는 불륜(으로 추정되는) 남녀 때문
에 여자들끼리 싸우는 것을 막다가 얼굴에 온갖 상처가 다 났더랬다. 지금도 손톱에 세게 긁혀 무슨 깡패처럼 뺨에 딱지가 생겨 있었다. 그래
도 그나마 오늘은 좀 조용한가, 싶었지만..
- 너 7번 방 좀 가봐라, 거기 지금 술병 깨지고 싸우고 난리 났대!" 아..씨벌.. "
아니나 다를까,들고 있던 술병들이 떨어질 뻔 했다. 으악, 외마디 신음을 내뱉는 찬열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번엔 무슨 험한 꼴을 당할까 걱정이 된다.
찬열은 오늘도 달렸다. 달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오늘도 재수가 없으면 어떡하지? 오늘도 재수가 없지만 이건 언제나 있어온 일이다. 늘불운남이었던 찬열에게는 좋은 일이 생긴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름 긍정적이게 인생을 살아온 자신이 나름 자랑스럽기도 했다. 다
만 찬열도 신이 아니라 사람인지라 과도한 스트레스는 참을 수 없을 뿐이다. 오늘은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푹
푹 내쉬던 찬열이 이내 7번 방 앞에 섰다. 아니나 다를까,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찌른다. 막으려는 생각으로 문고리를 잡았는데 잡자마자
찰지게 뺨 때리는 소리가 제 귀에 똑똑히 들어온다. 오, 무서워. 겁이 많은 찬열은 일단 몇 분만 보류하기로 했다.
- 개새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역시나 오늘도 바람난 남친과 그 여친 같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한 건 착각이겠지?
- 어쩌라고,
이상하다.
폭풍 파이트를 하고 있는 듯한 앙칼진 여자 목소리는 처음 듣는데 뭔가 간간히 들리는 남자 목소리가 묘하게 귓가에 익다..
에이, 설마. 설마 아니겠지. 잡생각을 지운 찬열은 어쨌건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방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저기, 죄송한데 여기서 이러시면 안…!?!?
아, 오늘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재수가 없는 것 같다.문을 열자마자 찬열은 제 머리에서부터 목을 타고 전신으로 줄줄 흘러내려오는 수많은 액체들을 느껴야 했다. 이 향취는 분명 술이렷다.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좀 싸워도 이럴 것까진 없잖아. 양주병을 들고 있던 여자도 당황했는지 들고 있던 양주병이 테이블로 깨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찬열의 바로 앞이었다. 밑으로 떨어지는 양주병과 함께 안에 들어있던 술들이 찬열의 와이셔츠를 더럽
히며 장렬하게 사망했다. 찬열은 그야말로 술 범벅으로 쫄딱 젖어버린 제 신세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아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 저와 반대쪽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을 우연히 마주한 순간 낯빛이 시퍼렇게 변하고 말았다.
찬열은 생각했다.
오늘은 진짜 최악이라고.
핫싼같은 피부, 더러운 눈매부터 저 짜증나는 특유의 표정까지.
눈이 풀려있는 남자는, 분명히 두 달 전에 찬열과 실랑이를 벌였던 그 싸가지 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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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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