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거슬리는 문의 비명소리를 무시한채 도영이 오래된 창고의 문을 열었다. "내가, 씨발, 여기 숨어 있지 말라고 했지." 어둠 속에서도 맹랑하게 뜨인 눈이 한쌍, 게슴츠레 뜨여 제가 온 걸 알아차리기는 했을까 싶은 눈이 또 한쌍. 그리고 그 주인공들은 지금, 엉켜 있고. "그럼 어떡해요 형." 여주 누나가 괴롭다는데, 옆에서 돕는 게 내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제노의 손은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 식으로 참 끈덕지게도 여주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하나는 무릎 아래로 손을 둘러 다리를 감고, 다른 하나는 어깨를 붙잡아 그녀가 제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도록 만든 제노는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을 짓고 도영을 바라봤다. 저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 지 도영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창고 안에는 지독히도 매혹적인 향들이 진동을 하고 있겠지. 베타인 도영은 경험해보지도 못한 그 향이. 여주도, 제노도 꽤 특별한 케이스. 그래 어디 가면 돌연변이 소리 들어도 어쩔 수 없을만한 그런 특이함. 오메가 형질의 센티넬과 알파 형질의 가이드. 말의 요철이 절묘하고도 정확하게 딱 맞물리지 않는가. 서로를 만난 이후부터 당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탓에 이렇게 도영이 발 벗고 찾아 나서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아무도 그에게 명령하지 않았지. 다만, 여주를 향한 소유욕이 도영을 움직이게 만들 뿐.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다고 생각했다. 훈련을 마치고 얼굴선을 따라 목까지 주욱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아 돌겠다 싶은 마음이 비단 센터 사람들 중에서도 도영에게만 들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먼저 다가가 물과 수건을 건네며 제가 내미는 호의를 받기 위해 뻗어지는 손을 은근슬쩍 매만지는데 성공한 건 도영이었다. 잠깐의 접촉이, 그 순간의 감각이 두 사람의 몸을 짜릿하게 만들었고, 여주는 자꾸만 도영을 찾게 되었다. 그래 계속 그럴 줄만 알았지. 그 묘한 홀림이 오메가 발현의 전조 현상만 아니었더라면.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센터는 마침 딱 좋은 짝이 있다며 도영의 손아귀에서 김여주를 앗아갔고 도영은 정말이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아, 좆나, 아! 센터 꼰대들은 감사히 여겨야 한다. 도영이 가이드이기에, 폭주를 할 수 없기에, 센터 건물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음에. 하필이면 제노는-어디 괴롭힐 수도 없게- 도영이 아끼는 동생이라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또 자랑하고 다니던 아이였다. 알파 오메가, 그런 쪽에서는 영 소외되는 평범한 베타인 것이 이렇게 뒷통수를 때릴 줄은 몰랐지. 착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실실 웃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긴 머리를 한 쪽으로 모아 늘어뜨리고 손에는 검은색의 반장갑을 낀 채로 손가락을 어설프게 까딱이며 인사하는 여주를 본 후로는 다 뒤틀려버렸다. 그게 제노의 심산이든, 도영의 배알이든. 여주는 그게 좋았다. 오메가와 센티넬. 그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자신을 대표한다는 게,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첫만남에 제 허리와 등을 잡아채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향을 맡는 제노의 뒷통수를 내려다보다가는 아, 됐다 하는 이상한 성취감이 피어올랐다. 단순 정신계인 줄로만 알고 있던 제 능력 역시, 제노의 곁에서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구체화되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유혹자, Fascinate.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어째 악당같은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가지를 않는 것 같았다. 너무 재밌거든. 저기 있는 쟤가 본인을 손에 쥐고 싶어서 어떤 수를 쓰려고 하고 있는 지, 옆 방 센티넬이 누구를 좋아해서 저 안달을 내는지, 성인이 될 때까지 곁을 지켜주겠다며 단단한 척 하던 김도영이 사실은 저를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훤히 알 수 있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임무가 아니면 능력 사용은 자제하기로 제노와 유치한 그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다른 새끼들 홀리고 다니는 것도 싫고, 여기저기 흩뿌리느라 향이 옅어지는 것도 싫다며 으르렁대는 제노에게만큼은, 여주는 힘을 쓸 수 없었다. 저를 감싸 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득한 소유욕을 내포한 채 예의 그 페로몬으로 몸을 뒤덮은 저 알파에게 어찌 반항하겠는가. 손끝만 스쳐도 제 몸 상태를 알아차리는 제노를 속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에, 아니 불가능하기에 여주는 머리 굴리지 않고얌전히 지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저 품이 내 것이 된다는데 굳이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여주야." 매번 그렇게 얄쌍하게 올라가 있던 도영의 눈꼬리는 이제 그녀를 부를 때만 애달픔이 매달려 축 쳐지기 일쑤였다. 그러면 여주는 아주 해맑던 때로 덜아간 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도영 오빠 하고 대답했다. 그 호칭과 이름에 저 이가 죽도록 목을 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굳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 한마디에 휘감아지는 도영이니 제노와의 계약에서 문제가 될 것이 하등 없다고 여겼다. 알고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소유욕보다는 희박하지만 여전히 끈덕진 가이드의 소유욕을. 다 알면서도 머리 꼭대기에서 노니는 게 즐거워서 장단 맞춰 웃음을 지었다. 언제까지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다음의 타깃과 목표를 알려주고 나서도 도영은 여주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사족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