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인 고백>
written by. 세모론
01.
뭐지, 나를 왜 부르는 거지? 반에서 쭈그려 살았던 내가 그 녀석의 눈에 띄기라도 한 걸까? 허, 참나, 말도 안 돼. 녀석은 이 지역의 할아버지 할머니까지도 다 알고 있는 '마성의 게이' 김명수이고 나는 숨도 소리 없이 쉬는 찌질이 이성열인데? 180을 조금 넘는 키에 평균적인 남학생의 얼굴의 소유자. 친해지면 조금 나대는 성격. 마른 체구. 그래, 평범해도 너무 평범하다 이거 지. 내가 괜히 김명수와 극과 극을 달리는 ‘흔남’ 이성열이겠냐?
그래. 그래서, 수식어대로 편하게 살겠다는 데 왜, ‘마성의 게이’ 김명수는 지 쫄다구에게까지 시켜가면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거지? 내가 뭐라고. 하긴, 그 귀한 몸이 내 앞에 고이 납시는 게 더 이상하지만,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게다가 지금 내가 그 김명수의 쫄따구를 따라 가고 있는 장소는 분명……학교 뒤편이다. 젠장. 씹힌 소리를 조용히 내 뱉으며 내 옆에 내가 방패용으로 데리고 온 장동우를 바라보았다. 이 익룡을 닮은 녀석은 나의 하나 밖에 없는 단짝친구로써, 지금 내 앞을 유유히 양아치 스텝을 밟으시며 걸어가는 쫄따구님께서 방금 전 점심시간에 멋지게 뒷문을 쾅 하고 열고 등장하시고는 나를 건방지게 부르자 내가 겁에 질린 채로 동우야, 우리는 친구 아이가, 하며 두 손을 꼭 잡고 밖까지 질질 끌고 온 얼굴과 다르게 아주 만만한 친구다. 아까까지 계속 징징 대서 어쩔 수 없이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언제 징징거렸냐는 듯이 평온한 얼굴이다. 약은 새끼. 짜증나서 녀석을 툭 쳤더니 장동우가 귀를 대보라는 시늉을 한다. 왜.
"너, 김명수한테 잘 못 한 거 있어, 없어."
"없어. 나 그 녀석하고 말도 해 본 적 없는데."
"정말로?"
"……아니."
갑자기 생각났는데, 나는 녀석과 딱 한 번, 양심에 손을 얻고 정말 딱 한 번 말을 했다. 아니 녀석만 말을 하고 나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한 일주일 전에 복도 건너편에서 김명수가 걸어오는 데 나는 당연히 인사를 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녀석을 알아도 녀석은 나를 모르는 게 당연했으니깐. 앞에서 말했다 싶이 나는 흔남에 찌질이다. 그리고 간혹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도 인사한 적 없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녀석이 갑자기 나에게 손을 흔들며 성열아, 안녕? 이러는 거였다. 당황해서 나는 헉, 하고는 황급히 손만 흔들어주고 그 자리를 재빨리 벗어났다. 그게 거슬렸던 걸까? 기분 나빴던 거니? 나 따위가 너의 인사에 대답도 안 하고 건방지게 손만 흔들고 튀어서 너무 재수가 없었니? 흑흑. 나 그냥 살지 말까? 뭐래. 장동우가 점점 미쳐가는 나를 보고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 고맙다, 자슥아. 근데 그만 흔들어 줄래?
"정신 차려! 너 어떤 실수 저질렀어?!"
"몰라, 그냥 내가 살면 안 돼는 거였어. 흐규흐규, 동우야 나 어떡해?"
"내가 그 걸 어찌 알겠니. 그리고 벌써 뒤뜰 도착해 버렸으니깐 네가 알아서 잘 하렴."
"동우야, 우린 한 배를 탔어."
"내가 너를 위해 기꺼이 배에서 뛰어내려 주겠어. 그러니 너는 혼자 배를 타고 김명수를 만나고 오렴."
말도 안 돼, 왜 어째서 벌써 담배꽁초가 수두룩이 쌓여있는 뒤뜰에 도착해 버리고만 거지? 저기 앞서가는 쫄따구님, 님이 저 모르게 순간이동 하셨나요? 분명 아까 2층이었는데?! 으악, 동우에게 살려달라고 손잡고 애원해 봐도 애는 나를 위해 기꺼이 지가 희생을 하겠단다. 아니야, 차라리 내가 너에게 양보를 할께. 제발 나 좀 살려줘!!
그렇게 미쳐가고 있는데 쫄따구님이 칼 맞은 얼굴답게 낮은 목소리로 데리고 왔어, 라고 하고 무리 안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나는 장동우에게 시선을 돌리며 뒤뜰을 살펴보았다. 저기 멀리 한 가운데에서 나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대는 바로 전설의 김명수 인가요. 그 주위는 그 패거리와 김눈모(김명수만 보면 눈 돌아가는 모임)가 둘러싸고 있다. 반면 이 곳은 달랑 나와 장동우. 아니, 내가 그 쫄따구 형님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모여든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꿀꺽, 더 긴장돼 죽겠다. 김명수 화나면 존나 무섭다는 데. 물론 그 모습을 본 인간은 별로 없다지만, 나는 절대 보고 싶지 않다.
김명수가 서서히 뒤를 도는데 나는 무슨 내가 cf를 보고 있는 줄 알았다. 자세히 본 적은 없어서 그런가 다른 사람들이 잘생겼다, 잘생겼다, 해도 별로 그렇게 못 느꼈는데 지금은 녀석이 잘생겼다는 걸 온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김눈모의 회원, 나의 사랑하는 동생 성종아. 내가 너에게 호모라고 해서 미안. 그래, 김명수 참 잘생겼구나. 근데 왜 나에게 다가오는 거니?!! 김명수는 활짝 웃으며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발자국 정도 남겨두고 마주 서있는데 나는 지금 죽을 것 같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심장어택이야, 알아? 녀석의 주위가 블링블링 빛이 나서 눈이 다 부셨다.
"성열아, 왔어?"
어, 어떡해! 흐헉흐헉 나 숨이 쉬어지지 않아! 녀석이 너무 잘 생겨서 그래,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생길 수가 있어? 엄마, 나는 왜 이래? 나도 김눈모나 할까, 아빠? 남자 목소리가 어떻게 저리 낮고, 그래서 멋있을 수가 있는 거야?! 사지가 딱딱하게 굳는다. 벌써 저 뒤로 장동우가 도망가는 소리가 들리고 애들이 수군거린다. 어머, 봤어? 여기저기 코피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나도 터질 것 같다. 콧구멍이 시큰시큰. 다리가 후들후들.
"성열아."
"……왜, 왜?"
쫄았다. 오금 저리고 얼어붙어. 어디서 들어본 말인데. 암튼 그게 딱 내 상황인데, 녀석의 낮은 음성이 불러주는 내 목소리가 참 가슴 설레게 멋있다. 역시 마성의 게이.
"할 말이 있는데."
"……어."
"여기 서 해도 될까?"
"어, 괜찮아."
녀석이 주위를 한 바퀴를 둘러보더니 또 다시 나에게 웃어 보인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린다. 무슨 내가 탑 스타와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야, 이성열 말투 왜 저렇게 띠꺼워? 누군가 그랬다.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입이 얼어붙어서 간신히 말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내 입 좀 풀어줘요. 아니, 나 좀 여기서 꺼내 줘요. 그러면 착하게 조잘조잘 말 할 수 있어요.
"정말로?"
"무슨 말인데……?"
"……."
정적이 나는 정말로 무섭게 만든다. 천천히 말을 기다리면서 김명수의 얼굴을 넋 놓고 보는 데 녀석이 볼이 붉어진다. 어, 붉어진다? 붉어진다고?
"이성열, 나는 네가 참 좋다. 나랑 사귀자."
.
..
...
헐.
갓뎀.
오 마이 갓.
왓 이스 디스?
오, 신이시여.
내가 지금 무슨 소릴?!
씨발, 좆됬다.
#.
다시 한 번 천천히 생각해 보자. 김명수 앞에 '마성의 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다면 나 이성열 앞에는 '흔남'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래, 어쩜 나를 그리 잘 나타내는 수식어 인지. 녀석과 나의 갭을 알려주는 간단한 수식어이다. 그런데 울인남고의 살아있는 신화, 이 지역의 팬 수만 해도 1000명이 넘어가는, 이 시대의 엄친아 종결자 김명수가, 왜,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이유로, 그 딴 고백을?
이성열, 나는 네가 참 좋다. 나랑 사귀자.
이성열, 나는 네가 참 좋다. 나랑 사귀자.
이성열, 나는 네가 참 좋다. 나랑 사귀자.
이성……. 캭!! 나 죽을 거야!!
"그래, 친구야. 네 마음 다 이해 해."
으허허허헝, 나는 눈을 가리고 울어제꼈다. 처음은 시늉이었는데 점차 눈물이 찔끔찔끔 나와 당황했다. 아니, 근데 나 정말 슬퍼. 어떻게 평범한 흔남 이성열 인생에 이런 일이? 정말 나 꿈꾸는 거 아니야? 그러나 볼을 몇 번을 꼬집어 봐도 여전히 아프다. 화끈화끈 달아오른 뺨이 서럽다. 정말 이게 사실이야? 김명수가 나에게 고백을 한 게 정말로?! 김명수가 미친 게 틀림없다. 왜 나를? 하, 앞이 캄캄하다. 물론 내 손으로 눈을 가려버려 캄캄한 거지만 아무튼 이제 나는 정말 김명수한테 찍힌 거다! 우왕, 신나! 내 인생 좆되는 거야!!
"계집애처럼 질질 짜냐?"
땀내와 함께 나타나 시비 트는 목소리는 옆 반 농구부 이호원이다. 작년에 같이 친하게 지냈던 친구인데 조금 많이 또라이다. 냄새나, 저리 꺼져. 나는 학교 운동장 스탠드에 바로 앉았다.
"모래 들어가서 그러거든?"
"너 김명수한테 고백 받았다며?"
"닥쳐, 개자식아."
이호원이 킬킬 웃으며 장동우 옆에 앉는다. 동우가 당황한다. 저 또라이 새끼는 본 적도 없는 애 옆에 앉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동우가 어색하게 호원이에게 눈인사하는 데 저 자식은 손이나 덥석 내민다.
"안녕, 난 줄남 이호원이야."
"줄남이라고?"
"어, 줄여서 말하는 남자."
"키아아아아크흐흐흐흥, 너무 웃겨!"
뭐야, 뭐지 이 상황은? 동우야 너 설마 저 하급 개그에 웃어주는 거야? 빵 터진 거야? 울고 있는 나의 등을 따뜻하게 토닥여주었던 장동우의 손은 금세 내 등짝에서 사라져 호원의 무릎을 팡팡 치고 있다. 헐, 어이없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동우는 나에게 등을 보인다. 까르륵 까르륵, 장동우 웃음소리가 참 아름답게 들린다. 어이, 나는. 충격 먹은 너의 단짝친구는. 등을 두드려 뒤돌아보라고 신호를 줘도 장동우는 뒤를 도는 척도 안 한다. 으허허헝, 서러워서 크게 울어봐도 나는 차갑게 식어간다.
"아, 더더."
"응? 더더?"
"어, 더더."
"더더가 뭐야?"
"더럽게 더워."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핳!!"
녀석들 주위에는 꽃바람이 부는 거 같은 데, 왜 녀석들 바로 옆에 있는 나에게는 무슨 이유로 모래바람만 내 뺨을 거칠게 후려치고 가는 거지? 입 안에 들어오는 모래를 섞어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아, 더짜.
더럽게 짜증나네.
오늘부로 인생의 종을 치게 된 나 이성열에게 오는 관심은 개미눈꼽만큼도 없다. 아 서러워라. 그나저나 나 이제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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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때문에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