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Wears PradaDIORHOMME
악마는 디올 · 옴므를 입는다. w.허리표
01 |
지호는 진회색 코트를 팔에 걸쳤다. 커다란 건물, 번쩍거리는 내부. 하나같이 모델같은 사람들. 그 사이로 자신이 조금 주눅을 들 것 같다. 부러 허리를 당당하게 폈다. 검은 스웨터 안에 받쳐 입은 흰 셔츠가 괜히 주변을 의식하게 만든다. 지호는 고개를 약하게 흔들었다. 이게 뭐라고. 산 지 3년이 조금 넘은 청바지는 아직 무릎하나 튀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보폭이 줄어드는 것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다.
엷은 조명이 박힌 넓은 엘리베이터가 맑은 소리와 함께 열렸다. 최고층. 지호는 바로 눈 앞 투명한 문으로 보이는 카운터로 걸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어….
"유권? 김유권이라는 분이랑 약속이,"
까지 말을 꺼내자 마자 반대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약간 붉게 염색 된 머리가 묘하게 차분한 느낌을 주는 외향. 지호는 자신을 눈에 띄게 훑어보는 눈빛을 보았다. 아버지 코트에, 낡아선 회색이 된 스웨터. 바지는 세월에 워싱 된 느낌까지 제대로네.
"…우지호 씨?"
"예?"
남자는 인상을 조금 구기더니 금새 표정을 숨기고 앞장섰다.
"따라와요."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말을 쏟기 시작했다. 난 표지훈 편집장님의 차석 비서였어. 아, 말 놓을게. 그런데 이제 수석비서가 승진을 해서 내가 수석비서야. 표지훈 편집장? 지호는 아직 끝나지 않은 남자의 말에 질문을 삼켰다. 말 겁나 빠르네.
"얼마 후에 파리로 갈 건데, 그 때 회사에 남을 사람이 있어야 해."
"아,"
"뽑는 족족 잘리고 있어서 우린 오래 버틸 사람이 필요해."
네. 하고 답하려던 것도 다시 주워담았다. 남자가 전달하는 말은 뒤로 남기고 어느새 앞의 코너를 휙 돌았기 때문이다. 보폭을 넓혀 따라잡은 남자는 빙글, 제 쪽으로 돌았다. 그 와중에도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구둣소리가 울린다.
"김유권. 편하게 불러."
비지니스 적인 느낌이 풍겼지만 유권의 웃음은 매력적이었다. 선한 미소에 약간 방심하고 있던 차, 유권이 또다시 앞서갔다. 근데,
"표지훈이 누구에요?"
딱. 아주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얼굴은 별종을 본다는 표정. 아니 처음 봤을때부터 조금 그랬지만.
"방금 그 말은 못들은 걸로 해줄게. 표지훈. 런웨이 편집장. 패션계에서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전설이라고 해도 오버같은 게 아냐. 그 분 밑에서 1년만 일하면 원하는 잡지사가 어디든 프리패스일거라 알아 둬."
이 자리만 준다면 살인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걸. 유권은 또 다른 유리문을 열며 말했다.
"좋은 기회네요."
유권은 소리내서 웃더니 뒤를 돌았다. 이건 너한테 주어진 기회 같은 게 아냐. 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
"지호씨, 런웨이는 패션잡지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여기에선 패션감각이 중요하단 걸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제가 부족하다는 뜻이죠? 이유가 뭡니까,"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맑게 웃는 얼굴은 분명 '그걸 말로 해야 알겠냐'. 멋진 회사에 와서 눈칫밥을 벌써부터 먹다니. 지호는 아랫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유권의 벨소리. 발신인을 확인하던 유권은 약간 사색이 되어 외쳤다. 안 돼, 안 돼! 그러고는 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오는 중이야, 얼른 알려!"
그 와중에 한 남자가 들어와 검은 상자를 유권에게 내밀었다.
"9시 이전에 출근하는 건 손에 꼽지 않아?"
모르겠어요. 기사가 연락했는데 기분이 상당히 안좋은 것 같대요. 동그란 안경을 걸친 남자는 유권의 말을 들으며 지호의 옆을 지나갔다. '이건 뭐야?' 입모양으로 유권에게 속삭이는 것을 유권이 고개를 저으며 대충 넘겼다. 별 것 아녜요. 내가 별 게 아니라고? 지호는 인상을 구겼다. 아까부터 잔뜩 무시당하는 게 분명하다. 남자는 지호 뒤쪽의 문을 열더니 소리쳤다.
"모두 긴장하고 알아서 잘 해."
사태파악이 힘든 지호의 주변이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구두를 갈아신거나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건 기본. 책상 위를 정리하고 누군가는 손자국이 남은 유리를 닦기도 했다. 가장 바쁜것은 단연 수석비서였다. 지호가 멀뚱히 서서 누군가 오는구나, 를 생각하고 있는 동안 유권의 발걸음은 누구보다 빨랐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던 수석비서는 입구쪽에 책상 두개가 붙어있는 깔끔한 공간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책상에 투명한 음료를 가득담은 컵을 준비하고, 두꺼운 책을 여러권 펼쳐두는 등, 그런 행동은 지호가 분위기에 휩쓸려 머리칼을 조금 정리하는 동안 금새 끝났다. 띵- 하고 엘리베이터 멈춘 순간 유권은 이미 내리는 사람의 옆에 서있었다.
"이해가 안 돼. 예약 하나가 그렇게 어렵워?"
"죄송합니다, 어젯밤에 확인했는데…."
"변명 듣자고 한 소리 아냐. 덤에서 보낸 모델 아니라고 전해. 자기 관리도 못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무슨 정신으로 보낸거냐고 물어봐. 마이클 코어스 파티엔 잠깐 들를테니 기사에게 9시 30분에 도착하라고 연락해. 정확히 9시 45분에 픽업하라고 하고. 저번 저녁식사 때 디저트로 나온 파리크라상 랑그드샤는 오늘 저녁 약속에는 취소해. 아주 별로였다고 덧붙여."
깔끔하게 떨어지는 수트를 입은 남자가 선글라스를 던지 듯 넘긴다. 지호가 슬쩍 몸을 숙여 복도를 살피는 동안 깔끔한 저음은 계속 이어졌다.
"진리한테 학무모 회 시간 알려줘. 이번에 안가면 다음엔 그 학교를 니 이름으로 사버린다고 말해. 그리고 이번에 받은 여자 공수부대 사진 별로라고 전해. 추하다고. 사랑스럽고 늘씬한, 잘 빠진. 그런 여군 몇 찾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내가 별을 따오라고 했나? 아니잖아. 다시 찍어오라고 해. 이번 두번째 커버에 쓸 브라질 모델 이민혁이 고른 걸로 가져와. 봐야겠어. 저건 뭐야?"
지훈은 코트와 각종 서류를 넘기고 사무실로 들어서며 눈치를 주었다. 별을 따오라고 했나? 부분에서 그러게요. 하고 답을 하고 뭔갈 쓰는 것에 바쁘던 유권이 얼굴을 들었다. 목소리 짱 낮다, 하고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두 남자를 멀뚱히 보고 있던 지호는, 그제야 제 이야기인 줄을 알고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런 지호를 유권은 등으로 막아서며 '이런 걸 보여 죄송하다.'는 행동을 보였다. 지호는 다시 인상을 구겼다. 이거 면접 하나 보러왔다가 인성 다 망치겠다.
"아무도요."
아니,
"사실, 인사과에서 비서 후보로 보냈습니다. 제가 사전 면접을 했는데 좀…, 아닌 것 같아 보내려고,"
"들여보내."
"예?"
"저번에 니가 넣은 것들은 다 별로였어. 네 눈은 더이상 못믿겠으니 내가 직접 면접을 보려고."
이상.
지훈의 결정에 유권은 딱딱한 인상을 푸려 노력하며 편집장실을 나갔다. 유권이 은근한 질타를 받는 동안 지호는 자신의 서류를 다시한번 읽고 있었다. 몇번을 검토했지만 스스로 괜찮다고 자부하는 스펙은 당당하게 내세울 만 하다.
"들어오라셔."
빨리. 지호를 재촉하며 손에 들린 크로스백을 뺏어든 유권은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 거 들고 들어가봤자 점수만 깎여. 지호가 쭈뼛거리며 들어서자 지훈이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들었다.
"이름."
"우지호 입니다. 이번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여기서 뭘 하려고?"
"어어… 여기서, 비서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말꼬리를 늘이는 지호를 보며 지훈은 서류를 훑었다. 자신을 평가하는 눈에 지호는 약간 뒤로 물러설 뻔 했지만 겨우 말을 꺼냈다. 원래는,
"미술 관련 쪽으로 지원을 여기저기 했었는데, 마지막으로, 연락이 온 게 여기였습니다."
…. 아무말 없이 안경 너머로 자신을 힐끗 바라보는 얼굴.
"'런웨이'는 읽어본 적 없겠군."
"…네."
"오늘 이전에 내 이름도 들어본 적 없고."
“…네”
"패션에 대한 관심도 없고, 감각도 없어."
지호는 단정하는 말투에 목을 움츠렸다. 천하의 우지호가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이렇게 작아지다니. 그러면서도이 능력있고 수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에게 위축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하나하나 맞는 말을 하는 목소리는 또 나직한 울림이라 더욱.
"그건…, 관점에 따라 다르지 않을,"
"아니. 질문한 거 아냐.“
"아 네…."
지호는 입술을 축이다 괜히 서류에 있는 말을 덧붙였다.
"전 대학 신문 편집장을 했었고, 다른 글을 쓰는 재주는 몰라도 문화 예술 감각쪽으로는 입상 경험도 많습니다."
"이상."
이상? 지훈은 이제 지호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책상 위의 서류를 보는 행동에 지호는 그것이 '볼 일이 끝났다면 나가라.'는 의미인 걸 깨달았다. 오히려 깔끔하게 잘라내는 태도에 지호는 오기 비스무리한 것이 생겨 편집장실을 나오는 발걸음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여기 안맞는다는 거 알아요. 지나다니는 직원들 처럼 하나같이 빼입지도 않았고, 패션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어요. 하지만, 전 똑똑해요. 일도 빨리 배우고,"
뒤돌아 말을 꺼내자 지훈은 턱을 괴고 처음으로 지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수석비서와 지나간 남자, 편집장에게 나란히 무시당한 것에 대한 짜증도 조금 묻어나왔지만 지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지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까의 그 '지나간 남자'가 들어섰다.
"편집장님, 이번 두번째 커버 모델에 '카발리'를 입혀봤는데 이 끔찍하게 큰 깃털 장식때문에 무슨 카지노 쇼걸같아 보이는데요."
지훈은 고개를 돌려 태일이 들고 온 사진을 넘겨보았다. 아주 그냥 자신을 없는사람 취급하는 둘의 행동에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카지노 쇼걸이든 뭐든, 자신의 면접은 이제 끝난것이다.
"감사합니다, 시간 내주셔서…."
지호가 나가고 태일이 그 등을 눈으로 쫓았다.
"…저 불쌍한 애는 누구야? 이달에 '도전 신데렐라' 기사 있어?"
*
지호는 출입증을 반납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에 이렇게 힘든 면접은 이게 마지막이길. 아니 마지막이겠지. 지호는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아직 퍼자고 있을 제 룸메 박경을 생각했다. 차라리 나도 음악쪽으로 갈 걸 그랬나. 각자 자신의 일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호는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자신은 그냥 가만히 서있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빛나는 사람들 속의 혼잣말은 그리 큰 효과를 내지는 못했다.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어차피 패션쪽으로 갈 생각도 없었고. 안 맞는 데에서 일해봤자 내가 힘들어, 내가. 하고 회사를 나가려던 순간,
"우지호씨."
방금 지호가 한숨을 뱉었던 자리. 거기에 서있는 유권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호에게 말을 전했다.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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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
"야, 너 진짜 표지훈 몰라?"
경은 막 맥주를 입에 가져다 대던 지호에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좋은 소식으로 면접이 끝난 밤 경과 자신, 그리고 형과 한해까지 모인 술집의 테이블은 편안하기 그지없다. 대학 다닐 때 지지리 재미도 없는 신문은 더럽게 많이 읽더만. 표지훈이란 석 자는 안보고 뭐했냐? 옆에서 태운이 끄덕였다. 아마 너 말고는 다 알거다. 맞장구가 뻥도 심하다. 지호는 모를 수도 있는거지 따위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흘겼다. 아무튼 취직도 했겠다 맥주가 달다.
"근데 진짜 패션잡지사에 취직한 거야?"
한해는 의자에 기댔던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NIGA? 의심이 잔뜩 낀 표정을 확 한대 때려줄까보다. 야, 전화면접 아냐, 전화면접? 하나밖에 없는 형이라는 건 또 절 놀리기 바쁘고. 하지만 그렇게 찌르는 말도 장난이란 걸 알기에 기분 나쁘지 않다. 테이블이 썩 즐거운 분위기로 물들었을 때 안주를 삼킨 경이 말했다.
"표지훈. 패션계 악마라고 유명하잖아."
"너는 집구석에만 있는 게 어떻게 그리 나보다 더 잘 알아?"
"사실 난 여자거든."
옆에서 태운이 무심하게 끄덕였다. 드디어 밝히는 구나.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 속에,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경이 말을 이었다.
"그 남자 밑에 들어가려고 줄 선 사람만 수백만이래."
전부 여자.
"뭔 말인 지 알겠지?"
"글쎄. 난 그냥 그저 그래."
솔직히 매력적이긴 하더만. 하지만 자신이 여자처럼 목 매달 이유는 없다. 그래도 잘됐네. 니 태운이형 봐라. 언더에서 죽어라 음악생활 하는데 뼈빠지게 힘들잖아. 경의 말은 거의 실실 흘리는 웃음과 같이 나왔다.
"어쭈, 박경 너는 뭐 갤러리에서 일하면서, 아니. 뭘한다더라?"
"아 그건 그냥 알바같은거고."
그래도 난 언더에서 좀 알아주잖아요. 지호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둘을 보며 다시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한해가 투닥거리는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여기서 나만 꿈의 직장을 가졌네."
….
"기업경제연구소?"
한해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니 웃음과 함께 터져나왔다. 웃기고 있네. 한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어우, 그래 내가 제일 비참해. 겁나 지겨워…. 과장되게 울적이는 한해의 등을 토닥이며 태운이 잔을 채웠다. 아무튼.
"엄청 좋은 기회야. 표지훈인지 그 사람 밑에서 일년만 버티면 어디든 하이패스, 라더라."
그래, 축하한다 우지호. 건배. 넷은 잔을 부딫혔다.
*
지호는 높은 전화벨에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제 술집을 나오고 집에 돌아와 경과 두어 캔을 더 마신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착신을 재촉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여보세요? 반대쪽의 말은 거의 요 보다 빨리 튀어나왔다.
- 우지호씨, 표 편집장님이 9월 호 편집에서 가을 자켓 기사를 뺐어. 이렇게 말해도 무슨 말인지 모를테니 쉽게 설명해줄게,
비상이야. 지호는 훨씬 쉬운 설명에 자세를 고쳐잡고 머리를 깨우려 애썼다.
- 게다가 10월 촬영도 연기됬어. 올 때 커피 사 와.
"…지금요?"
아직 반응이 느린 지호의 답에 유권의 말은 마찬가지로 요 보다 빨랐다. 받아적어. 펜 들어.
- 크림 뺀 라떼 한 잔. 1cm 덜 채운 뜨거운 블랙커피 한 잔. 나머지 두 잔은 아무거나. 그렇다고 정말 달아빠진 걸 주문하는 취향은 아니길 바라. 아,
지호가 겨우 눈을 말끔하게 떠 시계를 볼 때, 유권이 덧붙였다. 뜨거워야 해. 절대 식으면 안 돼. 자명종은 아직 울리기도 전인 5시다.
*
지호가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겨우 집을 빠져나왔다. 머리카락은 채 다 말리지도 못했다. 출근 길 스타벅스에 들려 까다로운 주문을 쏟아낸 하며 지호는 잠깐 생각했다. 근데 나 진짜 달달한 거 좋아하는데. 걷는 몇 분에 커피가 식지 않도록 아주아주 뜨겁게 주문을 했더니 아 조,온나 뜨겁다. 지호가 발걸음을 조심해 걷는데 이번엔 휴대전화가 울렸다.
- 도대체 어디야?
이젠 여보세요도 말하지 않았다. 거의 다 왔어요. 역시 전화는 먼저 끊겼다.
*
지훈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따라 기사는 2분을 늦고. 회사 앞 하필 차를 댄 곳은 물 웅덩이였다. 평소처럼 칼같이 사무실에 들었더니 제가 직접 뽑은 비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훈은 약간 신경질 적으로 물었다.
"내 커피가 아직 오지 않은 이유는 뭔가? 오다가 죽기라도 한 거야?"
유권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수화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샘플 의상들이 지훈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뒤따라 지호가 팔꿈치로 문을 밀며 들어왔다. 유권이 빨리도 오네. 하고 혀를 차며 벌떡 일어섰다.
"이 일이 만만한게 아니란 걸 좀 알아둬. 계속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나한테까지 영향이 미치니까. 코트는 고이 걸어 놔."
내 눈에 띄이지 않게. 지호는 돌아서는 마지막 말을 들었다. 인상이 절로 구겨지는 걸 말리지 못했다. 에라이, 더러워서. 지호가 차석비서 책상에 가방을 올리고 주섬주섬 앉으려는데 유권이 빈 쟁반을 들고 튀어나왔다. 아 뭐, 커피를 던지고 나왔나, 왜 이렇게 빨라. 지호가 목도리를 푸는 사이 주의사항이 두두두두 쏟아졌다.
"이제, 전화를 받는데. 벨이 한 번 울리면 바로 받아야 해. 자동 응답기로 넘어가는 거 제일 싫어하셔."
아아,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없을 땐 절대로 자리 비우면 안 돼."
"어…, 그럼."
"안 돼. 전에 어떤 비서가 잠깐 화장실 다녀온다고 자릴 비웠는데, 라거펠드 전화를 놓쳤어. 호주에서 걸려온 전화를. 그날로 잘리고."
그 친구는 지금 벼룩시장에서 일해.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대기. 알겠습니다.
"아 그래. 일단 차석비서와 수석비서 일은 달라. 일정 관리 같은 건 내가 하니까, 지호씨는…. 나머지."
유권은 다시 처음의 그 천사같은 미소를 지었다.
"난 미술부에 책을 주고 올테니까 절대 자리 비우지 마."
"책?"
"응. 이 책."
유권은 후배를 가르치는 친절한 선배의 모습을 하고 책을 내려놓았다. 천사인지 악마인지 도대체가 종 잡을 수가 없다. 아, 악마는 저 안에 있고.
"이건 모컵이라는 건데, 다음 호의 모든 기사다 들어있는 가제본이야. 이걸 매일 밤 편집장님의 집에 가져다 놓으면 메모를 달아 아침에 돌려줘. 원래 이걸 가져다 놓는 건 차석비서가 해야 할 일이지만 표지훈 편집장님은 사생활을 중시하고 낯선 이가 집에 들락거리는 걸 싫어하셔."
니가 싸이코가 아니란 게 완전히 증명될 때 까지는 내가 이 일을 할거야. 덧붙이는 말이 아주 그냥. 지호는 끄덕이던 고개를 딱 멈췄다. 유권이 책을 들고 미술부로 향하는 데 전화가 울렸다. 순식간에 당황한 지호가 전화…! 라고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알아서 처리해. 였다. 받, 받아야 겠지. 지호는 아직 다 풀어내지 않은 목도리를 매만지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런웨이 편집장 사무실입니다. …예 제가 말한 게 표지훈 편집장님 사무실입니다. …네. …네. 회의 중이십니다. 메모 남겨드릴까요?"
지호는 나름 차석 비서답게 행동했다. 성미에 안맞는 조곤조곤한 말투가 절로 나왔다. 네, 알겠습니다.
"어…, 혹시 '베르사체' 스펠링 아세요?"
뚜, 뚜, 뚜, 전화가 끊겼다. 거 모를 수도 있지. 지호가 냉정한 수화기를 보며 입술을 비죽이는 사이 얼굴이 낯익은 태일이 다가왔다. 손에 들린 것은 남성용 구두 한 켤레. 딱딱하게 빛나는 가죽구두가 아닌 캐주얼한 스타일. 눈이 마주치자 살풋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다.
"275, 맞지?"
"예? 맞긴 한데요. 왜요?"
내민 손을 얼른 받으라는 듯 흔든다. 어어…, 필요 없어요. 전 운동화 신은 모습으로 면접을 보고 취직했는데요. 태일은 '글쎄,' 하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지호의 책상 위에 구두를 올려놓았다. 아니, 삼세번을 거절하려는 지호를 딱. 멈춘 태일이 지호의 빨간 목도리를 쓸었다. 이건 잘어울리네.
"예에,"
지호가 괜히 머쓱한 기분에 책상을 이리저리 뒤적이는 데 사무실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비서."
괜히 구두 쪽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는 지호의 귀로 다시한번 들려오는 목소리.
"김비서."
태일이 눈짓도 주지 않은 채 중얼거리 듯 말했다.
"너 부르는거야."
지호는 잠깐 의문을 담았다 벌떡 일어났다. 김비서? 사무실 안쪽 넓은 공간에는 지훈과 또 다른 몇이 서있었다. 공통점은 모두 스타일이 좋다는 것과 잔뜩 긴장한 자세라는 것.
"내가 요구한 건 이게 아니지 않아? …김비서. 대체 몇 번을 불러야 오는건가?"
"제 이름은 우지혼데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 장소에 있던 모든 눈길이 지호에게 쏠렸다. 심지어 지훈도. 지호는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꺼낸 말 어찌할 수 없겠다 싶어 뒤를 뱉었다.
"우비서, 하면 좀 이상하지만 헷갈리는 것 보단 나을 것 같은,"
데,요…. 지훈은 지호를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하고 웃었다. 그게 또 더럽게 멋져 지호는 아까보다 두배 반 정도 더 부담스러웠다.
"'캘빈 클라인'에서 스커트 열 벌 정도 가져 와."
"어떤걸로…,"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나 해."
지호는 속으로 캘빈,클라인 스커트.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일 오전 8시 '59번 부두' 예약해 놓고, '마크 제이콥스'에 신상품 좀 보겠다고 전해. 시몬 씨에게 전화해서 재키 킴으로 하겠다고 하고. 드 마셜리 에이드에선 아직 연락이 없나?"
드,
"드 마셀,?"
"드. 마셜리. 에이드."
전화 연결해. 지호는 뒤돌아 나오며 기억을 상기시키려 애썼지만 벌써 반절은 까먹었다. 드 뭐? 그건 또 뭐야. 그리고. 김비서? 몇 걸음 걸어 나가기도 전에 지훈이 지호를 다시 불렀다. 아, 우지호라니까.
"예?"
다시 그 얄짤없는 얼굴을 돌아보자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고는 아주 대놓고 자신을 위 아래로 훑는 지훈.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와선 코가 바랜 어그부츠에 시선이 머문다. 성희롱을 넘는 무시같아 뒷목이 또 뻐근하다. 아 걍 성희롱이 나을 거 같다.
"…이상."
지호는 거의 자리로 뛰다시피 걸어 책상위의 구두를 낚아챘다. 아오! 속으로 오만 짜증을 다 부리며 신발을 갈아신는데 딱 맞는 게 더 화를 부추긴다. 드 마셜리 에이든? 안쪽에서 낮게 재촉하는 목소리에 머릿속은 엉망진창. 번호, 드 마셀…, 지호가 여기저기 잔뜩 허둥대고 있을 때 돌아온 유권이 능숙하게 수화기를 건드린다.
"놔 둬. …'런웨이'의 표지훈 편집장님 사무실입니다. …연결 됐습니다."
그러곤 여유롭지만 속도가 몸에 밴 자세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지호는 다급히 불렀다. 뒤엉켜 나오는 생각이 저도 못알아먹겠다. 지호는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설명했다.
"저를 불러놓곤 뭐, 뭐…, 59번 부두 이야길 하고, 시몬, 잭? 잭한테 뭘 하라고 하고, 아. '캘빈 클라인' 스커트랑,"
아 또 뭔갈 보잔 이야기도 했어요. 유권은 어지러운 설명을 듣더니 대충 정리에 나섰다.
"무슨 스커튼지 들었어? 색이나 모양."
"아니요. 물어봤는데…,"
"미쳤네. 질문은 절대 금지야. 다른 건 일단 내가 할테니까 지호씨는 캘빈 클라인에 가 봐."
"제가요?"
유권은 그럼 누가? 예의 그 눈빛으로 말했다.
*
택시에서 내린 지호는 급히 달렸다. 그러곤 까먹은 요금을 내러 조금 더 달리고. 캘빈, 캘빈. 서두르는 걸음속에서 또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편집장님?"
-도착했나?
"아뇨 거의 다 도착했,"
툭. 또, 또! 이 망할 태도는 회사 이미지야 뭐야! 지호는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쑤셔넣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자마자 다시 울리는 소리. 아악! 속으로 잔뜩 짜증을 부리며 다시 귓가에 갖다 댄 휴대전화. 이번엔 수석비서다.
-지호씨. 나간김에 '에르메스'에서 스카프 25개 신청해 놔. 학교가서 쌍둥이들 책가방 챙기고, 편집장님 지금 외출하셨어. 오는 길에 스타벅스 들러서 오늘 아침 그대로 주문해 와.
지호는 발을 멈추지 않으면서 겨우 다른 쪽 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꺼냈다.
"다시 좀 말해봐요."
툭.
"여보세요?"
뚜, 뚜, 뚜, .
*
몇 십분 뒤, 지호는 각종 종이가방에 둘러싸여 있었다. 스커트 수십벌이 담킨 쇼핑백, 아르, 에르메? 스카프 샘플. 그 손엔 스타벅스 커피 네 개. 자신의 짐가방과 뚝뚝 끊기는 망할 전화를 위한 휴대폰. 투명한 문을 낑낑대며 열고 들어선 지호를 유권이 한숨과 함께 맞았다.
"말이 아니네."
네네, 제 꼴이요. 지호가 겨우 어깨의 짐을 내려놓을 때 지훈이 들어섰다. 다녀오셨, 지호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은 채 코트와 서류가방을 던지다시피한 지훈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코트 챙겨, 우지호씨. 처음 겪는 상황에 멍한 지호를 깨운 것은 유권이었다. 아니 자기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12시에 간부들 컨셉 회의 있으니까 각오해두는 게 좋을거야."
전화선 뽑아 놓고. 유권이 이것저것 정리를 하며 지시를 하는데 깔끔하게 생긴 남자가 나타났다. 왔어? 하고 친근하게 웃는 유권과 비슷하게 답하는 게 꽤 친한 사이인 듯 하다. 마찬가지로 스타일은 자신에게 딱 맞춰입은 듯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우지호씨, 이쪽은 이민혁. 촬영부에 있어. 인사해, 새로 온 '김비서'야."
"안녕하세요."
와아,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내가 뭐랬어. 하고 뭐가 그리 좋은지 마주보고 웃는 게 제게 편한 대화는 아닌 것 같다. 제가 한 인사는 어디로 튕겨낸 건지.
"지호씨 난 이제 점심 먹고 올게. 내 점심시간은 20분. 지호씨는 15분."
금방 다녀올게 하고 해사하게 웃는 것에는 이젠 면역이 되버렸는지 속으로 잔뜩 그 미소를 씹었다. 근데 진짜 다 잘나긴 했어. 지호는 자신의 검은 니트를 끝부분을 한번 더듬었다. 옷장을 거의 장악하고 있는 검은 옷 중 그나마 나은건데.
"아니 뭐, 전화받고 커피 타는데 턱시도까지 입어야 되는 거냐고."
괜히 시계를 한 번 보는데 수석비서의 점심시간은 채 1분도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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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유권은 정말 20분을 단단히 채우고 돌아왔다. 지호는 유권이 의자로 돌아오기도 전에 일어나 회사 내의 식당으로 향했다. 자신을 도마 위에 올린 대화가 몇 십분 전부터 계속 되었으리란 생각에 기분은 상한 지 오래. 대놓고 티를 내지는 못하니 소심한 반항이라도 하는 셈 치고 지호는 걷는 보폭을 더 크게했다.
"15분."
안들려.
*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당 안은 한산했다. 드문 드문 보이는 직원은 대부분이 남자. 소수의 여자 직원의 접시 위는 대부분이 야채. 힘들겠네. 지호는 고개를 저으며 크게 차려진 음식들 앞으로 갔다. 그러다 스친 짧은 생각이, 15분 안에 식사는 무슨. 지호는 디저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아무의 손도 닿지 않은 것 같은 디저트들은 긴 테이블에 늘어서 있었다. 으아, 지호는 그 중 치즈케익을 몇조각 집어들었다.
"치즈케익 먹게?"
세 조각 쯤 집었을 때 맞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이태일. 지호는 태일이 준 신발을 신은 발을 약간 움찔했다. 지호의 접시 위에 오른 노란 빛깔의 케익을 훑은 태일은 어울리지 않게 블랙 커피를 한 잔 따랐다.
"스트레스엔 단 게 좋으니까요."
"스트레스?"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엷게 웃는 얼굴이 새삼 다시 보인다. 속지 말자. 저 얼굴을 하고선 분명 전화를 뚝뚝 끊겠지. 지호는 정확하게 네 조각을 올려 반원모양을 만든 후 태일에게 물었다. 여기 여자들은 아무것도 안먹어요?
"전부 44 사이즈에 목숨 걸었지."
저런, 지호가 혀를 차는데 태일이 덧붙였다. 그리고 여기 남자들은 핏이라는 게 뭔 지 정도는 알아. 분명 자신을 겨냥한 말. 네네. 지호는 그 것을 한 귀로도 듣지 않았다. 콘 수프를 담는데 살짝 튄 방울이 니트에 닿았다. 대충 접시를 올려놓고 티슈로 닦아내며 옷 버렸네, 하고 중얼거리는데 주변이 자신을 돌아보다 마는 것이 느껴졌다.
"신경쓰지 마. 어차피 집에 그딴 옷 많잖아."
태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표지훈이 딱딱하게 사람의 피를 말린다면 이 사람은 존,나 맑게 웃으면서 욕을 한다. 수석비서 포함, 회사 컨셉 한번 뚜렷하다.
"패션 계에 오래 몸 담고 있을 것도 아닌데 일일이 여기에 맞출 필요는 못 느낍니다."
뭐 어때요. 살짝 퉁명스럽게 튀어나간 말이지만 태일은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는 말았다. 뱉어놓고도 약간 후회를 집어먹은 지호는 제 자존심을 욕했다. 근데 세상은 너 혼자 사는 게 아니거든. 얇은 샌드위치를 집으며 또 무어라 더 말하려던 태일의 휴대폰이 울렸다. 시종일관 웃는 표정을 이어가며, 이태일입니다.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더니 갑자기 접시를 내려놓는다.
"…알았어. 그거 내려 놔."
"에?"
"표지훈이 컨셉회의를 30분 앞당겼어."
그 말은, 지호는 아직 결과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넌 지금 아주 늦었단 거지, 김비서."
태일이 지호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치즈케익의 끄트머리도 맛보지 못한 지호는 그대로 끌려갔다. 이태일은 의외로 힘이 셌다.
*
엘리베이터 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내려 들어간 편집장실은 이미 난리도 아니었다. 갖가지 샘플은 테이블이며 옷걸이며 잔뜩 널려있고,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의 모델들과 디자이너 셋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들어서자 마자 딱 정확히 들린 것은 여느 때보다 더 낮은 듯한 목소리.
"식상해."
지호는 자신이 지적이라도 받은 것처럼 으,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컬렉션이 마음에 안 드는지 조금 거칠게 샘플을 뒤적거리는 지훈에 디자이너는 아주 죽을 맛이겠다. 타이스켄스가 새 허리라인을…, 겨우 자신을 변호하려 나선 디자이너의 목소리는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태일은 아직까지 붙잡고 있던 지호의 팔을 제 뒤쪽으로 밀었다.
"뒤에서 가만히 보고나 있어. 저 감상이 너한테 쏟아지기 전에."
다른 드레스들은 어딨나? 디자이너의 말을 끊고 뒤를 도는 지훈은 이때껏 본 중 가장 기분이 나빠보였다. 심각한 분위기에 지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을 구긴 지훈이 깔끔하게 세운 머리를 쓸었다. 빨리 움직여.
"이, 이건 마음에 드실 거에요."
"아니."
당황스럽게 만들지 마. 누가 할 소릴, 지호는 디자이너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현명하게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왜 컨셉회의가 늘 이렇게 엉망인건가, 준비할 시간은 항상 충분하지 않아?"
약간 언성을 높힌 지훈에 밖에서 서류를 들고 들어오려던 유권이 조용히 몸을 돌렸다. 지호는 수첩을 꺼내 고개를 박았다. 애퍼타이즈는 어딨지? 디자이너는 떨리는 목소리로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받기로 했습니다.를 겨우 중얼거렸다. 더 필요하다고 전해. 디자이너는 급히 어시던트에게 뭔갈 속삭였고 지호는 대충 선을 끄적였다. 나갈까, 나가버릴까. 차라리 공기가 되는 편이 마음편하겠다.
"…그나마 나은 게 있긴 하네. 어때."
지훈이 집어든 것은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에 나올법한 샛노란 빛의 드레스. 그걸 보고 태일은 '괜찮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지호는 잠깐 머리를 짚고 싶었다. 촌스러운 프릴이 달린 꿀색의 발레리나 의상. 그것을 악마가 집어드는 순간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미,친건가 세상이 미,친건가.
"하지만 너무,"
"7월 초에 출시 된 '라르끄와' 같아? 악세서리만 제대로 갖추면 괜찮을 거 같은데?"
지훈은 태일의 의견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안심을 담은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을 지호는 모르는 척 했다. 이 드레스에 맞는 벨트는 어디있나? 조금쯤 숨을 돌리며 긴장을 풀었던 다른 디자이너가 급히 악세서리를 모아 둔 테이블로 다가갔다. 지훈은 드레스를 살피며 낮게, 하지만 확실하게 중얼거렸다.
"다음부턴 준비성이 좋은 디자이너를 컨셉회의에 집어넣지."
옷걸이를 헤치고 디자이너가 손에 든것은 벨트 두개.
"여기, '토프 콜' 제품이요."
두개가 너무 달라서 결정하기가 어려워요.
"푸,"
지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눈에는 두 벨트가 너무도 똑같아 보였기 때문에. 검은 색에, 커다란 장식. 다른 건 굵기와 길이 정도? 수첩에 '두개가 너무 달라서.'를 적은 지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편집장실의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미,친.
"뭐가 우스운지?"
지호는 진작에 나가 있을 걸 따위를 되뇌이며 할 말을 찾았다. 작은 웃음하나가 이렇게 혼이 쏙 빠지는 상황을 만들다니. 아아 멍청이.
"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제 눈엔 다 똑같아 보여서요…. 아직 이런, 물건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지호는 느리게 말을 뱉는 와중에도 단어를 골랐다. 신입 비서의 무지함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지만.
"'이런 물건'?"
힐끗 바라본 태일은 '저질렀네.' 하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그래, 넌 이런 물건은 너와 아무 상관이 없는 물건으로 보이나 보군. 옷장에서 겨우 고른다는 게 보풀이 잔뜩 일어난 검은 니트. 그러면서도 지성은 단단히 갖춘 양 잘난 척을 하는데. 지금 니가 입고있는 색의 문화사 정도는 꿰고 있나보지 김비서? 아니,"
우지호.
눈을 마주치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데 가슴이 뜨끔, 한다. 선생님께 혼나는 초등학생이 된 듯한 느낌인가 하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하고 가슴 한 구석이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지호는 묵묵히 지훈의 감상을 들었다. 태일의 경고가 딱 맞아 떨어졌다.
"지금 너한테 딱 어울리는 유럽의 가정부나 입던 색은 1981년 마크 제이콥스가 처음 시크패션의 정점으로 세우고, 흔히 앤트워프파라고 불리는 희대의 디자이너들이 숭배하는 꼼 데 가르송이 만들어낸 패션 블랙이지."
평소와 다름없는 저음으로 읊는 것은 자신이 대학에서도 배우지 않은 것. 지훈은 말을 이으며 벨트를 골라 드레스의 허리께에 둘렀다.
"꼼 데 가르송 40주년 컬렉션과 동시에 한정판인 블랙 꼼 데 가르송의 출시로 블랙 컬러는 지면에 나섰고. 자켓, 하나 가져와. 그 후 여러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에서 발표된 패션 블랙은 30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퍼졌지. 그리고는 백화점으로 내려갔고, 마지막으로 네가 자주 이용하는 할인 코너 한켠에 자리잡아 시즌을 마감할때까지 수백만불의 이익과 일자릴 창출했어."
자켓 하나를 가져오란 말에 당장 화려한 프린팅이 등장해 드레스 위에 걸쳐졌다. 지호는 침을 삼켰다. 눈 앞이 아득해지려는 것을 겨우 말렸다.
"대신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나. 패션과는 상관 없다는 네가…. 실은 패션계가 고른 색을 걸치고 있다는 게."
지훈은 마지막으로 챙이 넓은 페도라를 집어들었다.
"…그것도 '이런 물건'들 사이에서 고른."
와,
나.
제대로 찍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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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
"난 그냥 벨트가 똑같아 보인다고 말했다고."
벨트가, 똑~같~다~고! 너는 검은 뱀이랑 까만 뱀이랑 구별 해보라면 하겠어? 지호는 경이 토스트를 굽는 내내 방 안을 쿵쾅거리며 돌아다녔다. 입에서 면도날 나오는 줄 알았다 진짜! 아니. 그 목소리는 면도날 같은 걸론 형용할 수가 없어! 우지호. 하고 자신을 낮게 부르던 으르렁거림을 기억해내고 지호는 몸서리 쳤다. 경은 처음엔 귀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을 비웠다. 오늘도 몇 캔 따고 재워야 겠다. 김하고 초코파이가 없는 게 다행이지.
"야 조용히 해."
"너가 해!"
어우, 신경질적인 고함에 경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쏟아지는 불평 불만에 잠깐 정신을 놓고 있는 새 토스트 한쪽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아.
"1년을. 어떻게 버티냐."
지호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다행히 오늘은 저녁이 들어갈 기분이 아닌 것 같다. 경은 숯이 된 토스트를 못 본 척 슬쩍 버리고는 냉장고를 열었다. 차게 남은 맥주가 딱 두개 남았다. 내일 퇴근할 때 두캔 사와라.
*
출근 3일째
지호는 여느때보다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출근준비를 했다. 최대한 깔끔한 옷을 골라서. 자리에 앉아 정확히 9시를 가리키기 조금 전, 지훈이 편집장실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
"아이작 연결해."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지훈이 남긴 것은 책상위로 던져진 코트와 가방. 지호는 지훈의 뒤로 인상을 구겼다.
출근 4일째
역시 9시가 조금 못 된 시간. 지훈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다.
"좋은 아침,"
입니다. 까지 뱉지 못한 인사는 코트와 가방에 밀려났다.
"내 커피는 어디있나?"
지호는 출근하는 직장인이 잦아든 거리를 달렸다. 스타벅스는 또 회사에서 어찌 그리 멀리 있는 지.
출근 6일째
인사는 아예 접었다. 또다시 내팽개쳐진 새로운 코트와 가방.
"란제리 부서에서 사진 좀 가지고 올라와."
그리고 지시사항. 지호는 복잡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겨우 내려간 란제리 부서로 향했다. 속옷차림의 눈부신 모데들 사이로 붉어진 얼굴을 겨우 가렸다.
출근 10일째
"차 브레이크 좀 살펴 봐."
지호는 정비소에 가던 도중 4차선 한가운데 멈춘 재규어 그대로 트럭에게 깔릴 뻔 했다.
출근 17일째
"어제 읽던 신문 어디 뒀나?"
그게 존,나 깔끔한 당신 성격에 남아 있을리가!
출근 21일째
"쌍둥이가 캠프 갈 때 서핑보드가 필요하다더군, '부기 보드' 스프링 레드 컬러."
지호가 자신만한 서핑보드를 들고 바삐 걷는 데 전화가 울렸다. 이젠 받기도 꺼려지는 게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
"여보세요?"
- 여름용 샌들 잊지 마.
친절한 유권의 빠른 정보에 지호는 뒤를 돌다 선량한 시민 둘의 정강이를 가격했다.
출근 26일째
"'마놀로' 구두 찾고 페트리샤 데려 와."
지호는 지훈이 완전히 편집장실로 들어간 후에야 유권에게 입모양으로 물었다. '그게 누구에요.' 30분 뒤 지호는 도심 한가운데 구두 수십켤레를 끼고 대형견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출근 32일째
"오다 구입한 테이블 가져 와."
출근 33일째
"전에 갔던 레스토랑 저녁 예약 해둬."
출근 39일째
"이스트 사이드 샘플 사진작업 다녀 와."
"'겟푸드'에서 주문한 시리얼 10박스 찾아 놔."
"지난 해 8월 자 노트 가져 와."
"'부기보드' 펄 레드 서핑보드 하나 더 구입해 오도록."
· · ·
*
"드 마셜리 에이드 연결해."
지호는 지훈의 지시사항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들었다. …'런웨이' 표지훈 편집, 네.
"연결 됐습니다."
지호는 자신 쪽의 수화음이 끊어질 때까지 귀를 대고 있다가 수화길 내려 놓았다. 퇴근 시간이 다가와 불을 끄니 건물 밖의 어둠이 순식간에 안으로 스며든다. 드디어 주말. 유권은 자신의 두배가 넘는 서류가 그득한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 주말엔 편집장님이 출장 가셔서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네요."
지호는 컴퓨터 전원을 끄며 웃었다. 주말에 형이랑 같이 식사하기로 했어요. 나중에는 모여 놀고. 굳은 어깨를 주무르며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댄 지호가 잠깐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유권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선배는 주말에 계획 없어요? 나름 한달가까이 선,후배 사이로 마주보고 있어 가능해진 가볍게 물은 질문에, 유권이 햇살같이 웃었다.
"있어."
그러고는 미련없이 휙, 돌아나간 유권의 뒤로 남은 후배가 중얼거렸다. 니예니예!
*
"한해형이 추천했어, 여기."
여기 취직하려다 팅겼고. 지호는 천장이 높고 좋은 음악이 흐르는 식당에 태운과 마주 앉았다. 이게 뭐냐, 분위기 잡는 식당에 형제가 둘이 앉아서. 하고 투덜거리던 태운도 이내 메뉴판을 훑었다. 그러다 잠깐 지호를 보더니 두꺼운 가죽커버를 탁, 소리나게 덮어 테이블 한쪽에 곱게 올렸다. 지호야.
"왜?"
"난 좀 걱정된다. 저번엔 그냥 취직 잘했다고 놀고 마시고 축하했지만, 기사 읽어보니 그사람 인성은 정말…, 별로라던데."
지호는 태운이 자신의 상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으로 단어를 고심해 고른 것을 눈치챘다. 가끔 이렇게 정말 형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에 지호는 살짝 뜨끔했다. 자신이 형을 걱정하게 만들 정도라면 이미 소문은 말 다 한 것이다.
"미술 쪽으로 재능도 있고, 감각도 있었잖아. 그 쪽으로 갈 거라더니 지금은 무슨 잡지의 무슨 편집장의 무슨 비서고."
"형…."
하나같이 맞는 말에 지호는 괜히 웃으며 말을 꺼냈다.
"괜찮아. 딱 일년인데."
아니 이제 한 달 지났으니까 11개월 정도다. 괜찮다니까? 태운은 약간 석연찮은 듯한 눈빛이었지만 이내 다시 메뉴판을 펼쳤다. 눈을 접으며 웃는 동생이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게 뻔히 보인다. 하지만 도리가 없다. 태운이 별 수 없이 메뉴로 눈을 돌리는데 지호가 장난스럽게 몸을 숙였다.
"그렇게 동생이 걱정되면 오늘 저녁은 부담해주시던가."
"놉."
아오. 이럴 땐 또 한결같은 형제애가 참 얄팍하다. 잔잔한 클래식이 깔리는 식당에 시끄러운 벨소리가 울린다. 지호는 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표집장' 지호는 액정에 뜬 발신인을 확인하자 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곡선으로 모양이 난 고급스러운 의자가 바닥을 끌었다. 어, 나.
"나 잠깐 전화 좀."
눈을 맞추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태운의 눈에는 겨우 사그라들었던 형의 염려가 차올랐다. 지호는 식당의 조용한 테라스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내 비행편이 결항됐어. 빌어먹을 날씨 때문이라는데, 난 오늘 밤 꼭 돌아가야 돼. 쌍둥이가 내일 발표회를 해.
"예?"
- 돌아, 가야 겠다고.
"어…, 알겠습니다. 방법이 있나 알아볼게요."
*
지호는 저녁식사 내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늦은 시간인 줄 알지만, 오늘 밤 마이애미 발 비행기 있습니까? 여보세요, 마이애미 발 비행편을 구할 수 있을까요? 태풍이 온다는 건 저도 알, 없습니까? 알겠습니다. 태운은 파스타를 볼까지 묻히며 그런 지호를 걱정스레 바라봤지만 이젠 지호에게 형을 달랠 여유가 없었다. 여기저기 연락을 하는 도중 지훈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네. 알아봤는데 전부 날씨 때문에 뜰 수 가 없대요. 지호는 식사를 마치고 나온 거리에서도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 말이 되나. 겨우 이정도 날씨에 비행기가 못 뜬다는 게?
여긴 맑지만 거긴 지금 딱 태풍이 눈 옆이거든요. 제일 심한 곳이요, 시,발! 지호는 비바람이 유리창을 흔드는 소리가 버젓이 들리는 수화기 저편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기분이 저조한 편집장의 목소리가 자신을 물어뜯을 듯 했다.
- 아는 지인들 한테 모두 연락해. 전용기를 가진 사람은 모두. 당장.
전화가 끊겼다. 아악! 미,친, 분명 날 피말려 죽일거야! 지호가 횡단보도에서 있는 짜증을 모조리 부리는데 태운이 기가 찬 듯 말했다.
"뭐, 공군에 연락해서 제트기라도 부르라고 그래?"
"아니!"
…가능해?
*
"어젯밤 쌍둥이들은 멋졌어.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는데 박수소리가 대단했어."
지훈은 소매를 정리했다. 손목시계를 덮지 않는 하얀 셔츠에 달린 커프스 단추가 보였다. 지호의 시선은 그 위로 옮겨 갈 줄을 몰랐다. 옮겨 갈 수가 없었다. 모두 감탄했지.
"나만 빼고. 난, 거기 없었으니까."
지훈의 목소리는 아주 가라앉아 있었다. 그에 맞춰 지호의 고개도 무게를 더해갔다. 지훈이 부드럽게, 하지만 성큼 지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여태껏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지훈은 생각보다 컸다. 작은 자존심 하나도 망가질 만큼. 자신보다도 조금 더.
"죄송합니다."
"내가 왜 널 고용했는 지 알아?"
"…."
"난 항상 스타일 좋고, 늘씬하고, 패션을 숭배하는 그런 여자들만 뽑아왔어. 하지만 대부분 실망스러웠지."
…멍청했으니까.
"넌 이력서도 인상적이었고 직업윤리에 대한 연설도 들어줄 만 했어. 그래서 넌 뭔가 다를 거라고. 한 번 바꿔보자고, 모험을 한 번 해보자고. 일종의.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넌 나를 실망시켰어. …어쩌면 앞선 멍청한 여자들보다 더."
지호는 눈물을 떨구지 않도록 눈을 적게 깜빡였다. 제가 보기에 꼴사나울 모습은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마음을 다잡고 이를 꾹 물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 맑게 돌아왔을 때 지호는 겨우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최선을 다했…,"
"이상."
지훈은 지호의 말을 잘라내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변명하나 들어주지 않는 상사가 야속하고, 변명하나 하려는 제가 쓰렸다. 겨우 말렸던 눈물이 다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지호는 뒤를 돌았다. 편집장실을 나오려던 지호는 입술을 한 번 물고 뒤를 돌았다. 그냥 걸어 나갈 수 있을리가. 내가 시,발 여기서 뒤도 참 많이 돈다. 머리 한구석에서 면접 때가 떠오르며 그 때의 악몽이 치밀어 올랐다.
"당신이 호텔방에서 쌍둥이들 독촉전화를 받고 있을 때, 난 모든 여행사, 심지어 항해편까지 알아봤습니다. '이상'이란 말 한마디로 내가 한 노력을 잘라내기 전에, 조금이라도 남을 한번 생각해보시면 안돼요?"
끝끝내 참았던 설움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발음이 뭉개진 것 같았다. 엄마 미워요, 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지호는 부러 크게 소리를 내던 걸음을 멈추고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그러곤 다시 뒤를 돌아 아직도 제 등을 보고 있던 지훈과 눈을 맞췄다.
"…이상입니다."
지호는 잔뜩 붉어진 눈가로 편집장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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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
지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 코를 훌쩍였다. 거울이 비추는 얼굴을 보고싶지 않아 괜히 앞만 바라보았다. 몇 층으로 내려가던 일단 거기서 내리자. 지호는 울음으로 가득 찬 숨을 뱉었다. 편집장실을 빠져나오고도 진정이 되기는 커녕 더 서러워지기만 한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지호가 들어오는 사람을 피해 옆으로 지나가려는데,
"뭐야."
붙잡힌 팔은 익숙한 감각. 태일이 약간 놀란 눈을 하고 지호를 쳐다보았다. 울기도 울고 있었지만 속으로 표지훈을 잔뜩 욕하고 있던 터라 지호는 깜짝 놀랐다. 그러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잠깐 자신이 어떤 꼴이었는 지 잊은 지호는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냥 빨리 혼자 있고 싶다. 다행히 한창 근무시간이라 복도는 한산하다. 그나마도 통유리 때문에 눈물을 참고 걷는 사람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지기 힘들테지만. 설움으로 뒤죽박죽이 된 머리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지호씨.
"울어?"
약간 낮은 눈높이가 볼을 감싸온다. 응? 그리고 재차 되묻는 예의 그 상냥한 목소리. …아니요. 입술을 꾹 물고 고집스럽게 대답하는 것에 태일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얼마나 비벼댔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눈매가 웬만한 모델들 색조화장보다 진하다고 태일은 생각했다. 잠깐 이 커다란 어린아이를 토닥이고, 태일은 자신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뭐가 필요해?"
위로?
"…."
네 그거요. 지호가 꿍얼거렸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마주앉은 채 태일은 시선을 제 손끝에 박은 지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쯤 귀여운 동물을 돌보는 느낌이 되어 태일은 지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톡,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던 지호는 머리께에 내려앉은 무게감에 눈을 반짝 떴다. 다정한 손.
"말해 봐. 표지훈이 너한테 뭘 바랬는 지."
지호는 다시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날 싫어해요."
"그래, 그건 이미 아는거고."
윽.
"제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겠어요. 하라는 걸 잘 해내는 건 당연한거고. 뭔가 하나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절…."
아주 못잡아 먹어 안달이에요. 지호는 아주 정확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중얼거리는 투로 쏟아내는 말을 가만 듣고있던 태일이 지호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응. 1단계는 끝났어."
"예?"
"위로 해주는 척 하는 거. 끝. 이제 지호씨한테 현실을 가르쳐 줘야지."
"무슨 현실이요."
편집장님이 절 싫어한다는 거요? 겁나?
"너 이 일 그만둬."
태일은 지호의 놀란 눈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때려치워. 새로운 비서는 널렸어, 알고있잖아. 지호씨 빈자리는 패스트푸드보다 더 빨리 채워질거야."
우지호, 넌 그냥 징징대고 있을 뿐이야.
지호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에 입을 딱 벌렸다. 내가, 그냥 징징대고 있을 뿐이라고? 이렇게 성미에 안맞는 일을 여기서 터져나올까 저기서 터져나올까 꾹꾹 눌러참으며 하고 있는데. 가라앉았던 울분이 다시 튀어나오려는 데, 그게 또 이 사람 얼굴을 보면 그럴 수가 없다. 지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태일은 조용히 웃으며 지호의 볼을 쓸었다.
"충격 받은 표정하지 마. 내가 뭐라고 해주길 바라? '불쌍한 김비서. 표지훈이 널 혼냈어? 저런, 그거 참 안 된 일이네.'?
정신차려 지호씨. 표지훈은 그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지금 니가 일하는 곳은 세기의 거장들의 작품을 발표하는 곳이라고. 할스톤, 라거펠드, 델 라렌타. 그들이 작업한 건 예술 이상이야. 더 위대해. 우리 삶의 일부를 창조하는 거니까."
태일은 아무 반박도 하지 않는 지호를 착하다는 듯 또 몇번 토닥이며 테이블의 '런웨이'를 집어들었다.
"이건 그냥 잡지가 아냐. 누군가에겐 꿈이 되는 존재라고."
지호는 정말 다른 세계의 이야기에 쏙 들어간 억울함은 이미 잊었다. 여기서 얼마나 많은 거장들이 일해왔는 지, 지호씨는 하나도 모르잖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은 죽는 시늉도 하는 이 자린, 너한텐 그저 스쳐지나가는 자리일 뿐이고. 조곤조곤 맞는 말에 지호는 아무말도 꺼내지 못했다.
"왜 표지훈이 감사의 의미로 너를 쓰다듬어주지 않고 일과 후에도 일거릴 안겨주는 지 궁금해?"
톡톡. 유리 테이블을 두어번 두드린 태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정신차려. 마지막 조언을 끝으로 태일이 어지러운 작업대로 몸을 돌렸다. 눈가는 이미 말라버린 지 오래. 지호가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태일의 사무실은 화려한 프린팅의 천이라던가 높은 서류로 가득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몸 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 자신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팔다리에 엉엉 울었던 갓난아기일 뿐이었다. 지호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알았어요. 제가 모자랐습니다."
근데 저도 잘하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지호의 시선이 등을 보이고 어깨를 으쓱하는 태일에게 닿았다. …올ㅋ? 선배님? 선배. 형.
"고맙다는 인사는 됐어."
"아뇨,"
태일이 형? 태일은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날렵하게 찢어진 눈매가 살갑게 웃는 낯과 마주쳤다.
"…싫어. 절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은 느낌에 태일은 당장에 정색을 하며 발을 빼려했지만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호가 태일을 욕하면서도 막 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태일도 마찬가지다.
*
"도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지 모르겠다."
태일은 이, 이전 호까지의 의상이 모두 있는 곳의 문을 열었다. 백화점 한 층보다 더 넓고 가득 차 있는게 지호에게는 어질어질하다. 지호는 익숙하게 걷는 태일의 뒤를 따랐다. 아마 이 안에 있는 옷 개수만 해도 자신이 여태 입은 것의 몇 십배는 될 것 같다. 아니 본 것의 몇십배.
"그래도 키나 사이즈는 모델 샘플링에 맞을 것 같아 다행이네."
처음엔 절대 못한다며 고개를 젓던 태일의 발걸음은 이제 거의 유권의 것과 비슷한 속도였다. 이 회사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신경 써주는 것은 태일밖에 없다. 지호는 고마운 등을 보며 따가운 눈가로 슬쩍 웃었다.
"그레이? 아냐 의외로 지호씨는 피부톤이 밝지. 이거. 이거. 셔츠도."
태일이 온갖 것을 지호에게 던졌다. 저번에 준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보이는 구두도 몇 켤레 날아왔다. 지호는 그 디자인이 아무리 비슷해도 이번엔 웃지않았다. 또 다른 옷들을 몇 벌 건네던 태일은 아예 지호에게 짐을 걸치 듯 했다. 중간중간 여성용 옷도 보이는 것에 인상을 찌푸리자 여전히 샘플을 뒤적이던 태일이 군소리 말고 받아. 하고 스치 듯 중얼거렸다. 으, 쓸데없이 단추가 깃에 세개나 붙은 셔츠는 뭐야. 심지어 분홍색.
"엠포리오 아르마니. 시계는 자스페로로 해. 쓸데없이 딱딱한 건 지호씨한테 안어울리니까."
한 팔에 몇 개나 되는 악세서리를 찬 지호를 돌아 본 태일이 영락없는 짐꾼이 된 듯한 지호를 훑었다.
"잠깐 머리 손질 좀 하자."
…누가 해주는데요? 내가.
*
이른 아침부터 유권은 자판을 두드렸다. 그 옆에는 민혁이 싱글싱글 웃으며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 친구는 언제 와? 풋풋한 게 보기 좋던데. 풋풋한, 에서 민혁은 조금 웃음을 참았다.
"활약이 대단하던데. 저번에는 뷰티팀에서 레인부츠 신은 모델을 보더니 '밖에 비와요?' 하더라."
민혁은 장난스럽게 미간을 잡았다. 지호가 도마위에 선 대화는 유권의 웃음으로 이어졌다. 유권은 타자를 치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편집장님이 무슨 생각으로 지호씰 뽑았는 지 모르겠어."
"글쎄, 그 이유는 언젠가 알게 되겠지, 먼저 알게되면 알려줘?"
민혁이 여전히 웃음을 참으며 말을 끝냈을 때, 한 인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금전까지 자신들의 도마 위에 있던 활어, 또는 악마. 잠깐 시선을 돌려 확인했다.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항상 간단하게 던지던 좋은 아침이에요, 지호씨. 란 인사가 어딘가에 턱, 막힌 것 같다. 비서실의 문을 연 건 분명 지호가 맞다.
엘리베이터부터 쭉 이어진 복도는 말 그대로 '런웨이'. 지금까지 '블랙'을 걸쳐왔던 지호라면 오늘은 정말 '패션 블랙'. 이마를 가리던 지저분한 앞머리는 조금 쳐 올리고, 완전히 검게 물들인 머리와 똑같은 색의 피어싱이 어느새 지호의 귓가에 자리잡았다. 가벼워 보일 수 있는 외모에 걸친 비스토어 런던 캐주얼 수트는 딱 맞아 떨어지는 슬림한 핏. 목을 감싼 셔츠는 예의 그 쓰리버튼. 옷을 골라주던 태일에게 극구 사양했던 정장바지 대신, 깔끔하게 달라붙은 검은 스키니는 태일이 주었던 게 아니었지만 썩 잘 어울렸다. 쏘로크래프트의 봄 컬렉션 슈즈는 밝은 투톤의 편안한 디자인으로,
말 그대로 지호의 '패션'은 완벽했다.
피부와 잘 어울리는, 태일이 쓸었던 빨간 목도리를 한 지호는 유권과 민혁에게 눈으로 인사했다. 좋은아침입니다.
"지호씨,"
유권의 말을 막은 건 차석비서 자리의 전화벨 소리. 캘빈 클라인 크로스 백을 내려놓은 지호는 수화기를 들었다.
"네. 표지훈 편집장님 사무실입니다. …네. 지금 자리에 안계신데 메모 남겨드릴까요?"
알겠습니다. 여유롭게 통화를 끝낸 지호에게 유권이 평소보다 약간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호씨 오늘 달라보이네요."
의외로 유권의 눈엔 옹졸한 빛이 없었다. 그것은 민혁도 마찬가지. 이 회사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정말 '패션에 무지한' 자신을 무시했던 것이다. 지호는 눈을 접고 웃었다. 민혁이 이제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네. 하고 자리를 비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훈이 들어섰다. 또 새로운 가방과 코트. 평소와 다름없이 코트를 벗어 가방과 함께 놓으─거의 던지─려던 지훈의 행동이 딱 멈췄다. 항상 앞을 보고 있던 시선이 지호에게 닿았다. 그 새 지호는 지훈의 손에 들린 것들을 받아 옷장에 정리하고 서류를 챙겼다. 내리깐 시선에 속눈썹이 원래 저렇게 길었던가, 눈꼬리가 저렇게 유하게 올라갔던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시덥잖은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든다. 지훈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 흠, 하고 숨을 뱉었다.
빨간 목도리를 풀어내는 지호를 보는 지훈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는 것은 수석비서만이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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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잉에ㅛ!!1!!!!!1!!!!ㅎㅁ요ㅛㅛ1!!!!!!!!!!!!!!!!!!!!!! 응ㅇ아ㅏㅏ아아ㅏ!!!!!!!!!! ㅠㅠㅠㅠㅠㅠ (신이 나 힙합댄스를 춘다)
아무튼 이제 다시 안녕하세요 이사왔습니다 좀비입니다, 악디입 연재 시작해염 ㅠㅠㅠㅠ 쀼쮸뀻쥬쥬 혹시라도 기다리셨던 분들은 모두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ㅠㅠㅠㅠㅠㅠㅠ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구독료는 음슴 ㅎㅎ
읽어줘서 사랑해요! |
NIC |
커텐 말복이 정석 이어폰 JJ 폰 쿠쿠 행쇼 라푼첼 용마 까망 신알신 갈비찜 이불 Ps 객관식 광란의밤 쓔 규요미 스꼬르 둘리 0201 열이 비즈 올리비아 파워생수♥ 생수 뉴뉴 딲따구리 젤리 그대 몽몽몽 베지밀 뀨 가란 달달 삐맨 떡덕후 유학생 가락 핫삥꾸s2 홍두무 곰돌이 색연필 잠와 굥지철 끄앙 상어 기린 후후하하 열두시 앨리스 뽀뽀틴 표부 씹덕터져 죠무룩 피코방앗간♡ 보끔밥 벨 핑크팬티 토끼 쿠쿠 외수 하품 아닛어머! 탤탤 표르르 비회원 떡쳐라 삐뽀삐뽀 꿀징어 스파르타 우죠코털 봉봉 바게트 곶감 틴트 짜세 프라푸치노 노트 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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