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라는 드라마틱한 말로 시작하고 싶은데 사실 내가 여주를 본 건 운명보다는 필연에 가깝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것도 아니고 아카데미에서 하는 써머 캠프의 일원으로서 만난 것이니, 우연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눈에 반했다 라는 사실은 음 오글거리지만 어느 정도 인정하고 들어가야겠다. 어김없이, 어쩔 수 없이 늦었던 어느 날에 애들이 한 곳에 모여있길래 그저 시끄럽다 정도의 생각을 하며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할 게 없어 대충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순간에 애들의 몸 사이로 여주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관심은 고마우나 지금은 매우, 귀찮다 라는 게 여실히 보이는 표정에 웃음이 날 뻔했다. 그래서 오래 바라본 것이 화근인지 눈이 마주칠 뻔했다. 놀라서 그냥 엎드려 버린다는게, 그대로 쭉 자버렸다. 선생조차 날 깨우지 않고 냅두길래 이럴 바에는 침대에서 잘래 하는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성실히 다니지 않는 사람을 양아치라고 부른다면 나는 써머캠프 양아치라고 불려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에. 그래도 이제는 조금 자주 얼굴을 비칠 이유가 생기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이 가는 사람이 생겼는데 눈도장 정도는 찍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어울리지 않게 캠프에 매일같이 얼굴을 비치려..고 노력했다. 필드 트립을 간다고 했을 때는 아마 같은 클래스 애들이 모두 의아해 했겠지, 마크가 왜? 하고. 그리고 버스에 올라탔을 때는 정말 오랜만에 이 지긋지긋한 레이시스트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여주의 옆자리가 비어있었거든. ‘I`m from Korea.’ 여주가 지겹도록 여러번 말하는 걸 들었는데 그럼 그렇지 이 머저리들은 기어코 이 아이까지 배척해내고 있는 거였다. 진짜 박수라도 쳐 주고 싶네. 솔직히 가슴팍이 조금 두근거리기는 했는데 두 눈 딱 감고 비어있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을 걸고, 같이 다니고.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야 여기에 몇 년 더 붙어있었고, 붙어있을 예정이라고 하지만, 겨우 한 달- 다른 애들과 얘기하는 걸 엿들었다는 부분에서 마음 속으로 여주에게 여러번 사과했다.- 있는 캠프가 그리 좋지 않은 기억들로 가득 차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닥, 저 새끼 애들이 잘 해주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가까이서 웃고 대화해보는 건, 멀리서 몇 번 훔쳐보는 것이랑은 차원이 다르게 나를 여주에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진짜, falling in love. 말그대로. 신기하면 눈을 빛내고, 지루하면 처음 듣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궁금한게 생기면 못 참고 내게 물어봤고, 할 말이 없으면 눈을 굴리며 무슨 말을 해야하나 고민했다. 좋아하는 이야기를 할 때면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에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지 모르겠다. 그런데 여주가 그러니까, 내가 빠지고 말았다. ‘사랑은 나서서 하는 거야.’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만났어? 라고 어린 내가 묻는 말에 언젠가 엄마랑 아빠가 웃으면서 해 준 말이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나서고 있다. 그 애 곁에 있으면 나도 덩달아, 밝고 에너지 있고 뭐랄까 쿨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주말을 같이 보내고 싶었다. 전날 큰 맘 먹고 까맣게 물들여 어색해진 머리를 툭툭 털면서 첫 데이트를 기다렸다. 편하게 입고 나오려다가 무언가 눈치 챈 엄마가 셔츠를 다려 내미는 바람에 단추가 목끝까지 채워져있었다. 불편해서 하나 풀러냈다. 여주가 와야 좀 숨통이 트이고, 이 주변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근데 솔직히 다시 말하면.. 이날의 여주는 좀 핫했다.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흩날릴 때는 꼭 에리얼 같이 예뻤고, 청자켓이 펄럭거리도록 동동 뛸 때는 팅커벨같이 예뻤다. 자켓을 벗지 않기를 원했는데, 더운지 자꾸만 애매하게 내려 걸치길래 아이스크림을 사다 줬다. 지나가며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나 미어캣처럼 두리번 거렸다. 누가 쳐다볼까봐. 동물을 좋아하는 것 같길래 어렸을 때 빼고는 가본 적이 없는 아쿠아리움에 데려갔는데, 끝마무리가 좀 이상했다. 별 생각 없이 그냥 익숙한 길로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일 뿐이었다. 이게 다 존 때문이야!! 고백을 이르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바보같이 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다고 내 마음을 숨길 생각도 없었으니 내 잘못도 아예 없지는 않은가? 아니, 마음을 숨기지 않는 건 잘못이 아니니까 나는 잘못이 없었다. 그렇게 대형사고를 쳐 놓고도 나는 이상한 사람같이 여주의 사진이 들어있는 내 핸드폰을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는게,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하는게, 이렇게 몸이 붕 뜨는 일인지 이제야 처음 알았다. “Mark!” 소란스럽다며 경고를 주는 형의 외침은 무시하자. 주말이 너무 꿈 같아서 그랬나, 월요일에 너무 늦게 눈을 떠 버렸다. 서둘러서 신호등 앞으로 달려갔지만 당연히도 아무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첫 번째 시간이 끝나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가야겠다는 생각에 좀 서둘렀다. 크로스백에 매달린 농구공 키링이 짤랑 짤랑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런 좆같은 광경을 볼 줄 알았으면 더 더 서두를걸 그랬다. 들어가자마자 본 장면은 여주가 온 첫 날이랑 모습 자체에서 다를 게 없었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 분위기는 나한테 더 익숙했다. 뻔하지 뭐. 일부러 눈을 치뜨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졸아드는 어깨들이 우스웠다. 오늘따라 한글 타자가 잘 안 쳐져서 욕을 짓씹었다. 말해주지 않는 네가 미운데, 미워할 수가 없었다. 내 탓이니까. 점심시간이나마 여주와 나만의 시간을 만들었는데,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상황인지도, 어떤 기분인지도,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라서 그저 미안하기만 했다. 애들이 좀 덜 다니는 길로 걸을걸. 길거리에서 소란 피우지 말 걸. 안들키게 조심히 할 걸. 나는 나쁜 놈인게, 여주한테 다가가지 말 걸 이라는 후회는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 나는 후회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겁이 났다. 내가 너무 큰 욕심으로 여주를 잡아 먹은 게 아닌가 하는 겁이 났다. 나를 봐 주는 두 눈 속에 그런 생각은 들어있지 않은 게 뻔한데도 상상이란게 계속, 겁이 나게 만들었다. 울먹이는 여주의 어깨를 조심히 토닥였다. 괜찮을 거라고 속삭이며, 머리를 굴렸다. 다음 날, 나는 전처럼 까만 후디를 뒤집어쓰고, 대충 트레이닝복 반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다. 양아치로의 복귀였다. 저 새끼들이 날 질 낮은 새끼로 만든다면 그 기대에 최소한은 부응해 줄 생각이었다. 그래도, 미움 받기는 싫어서 조금의 소심함을 여주에게 남겨 보냈다. “Hey!” 쯧, 오늘도 공이나 튕기고 있는 남자애들이 날 반겼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이 사람들이 내 편들이라 찾아온 것임은 확실했다. 나 사고 치려고. 그렇게 말하자마자 환호를 하고 뒤집어지는 반응을 보이는게 웃겼다. 아니 우스운 게 아니라 진짜 웃음이 났다. 이래도 저래도 내 편인 사람들. 피터가 하는 개소리 들었어. 아니 내용은 개소리가 아닌데 개가 짖으니까 개소리더라고. 그렇게 낄낄 거려주는 게 고마웠다. 나는 못 그러니까. “Can we make another rumor?” 내 말에 또 눈을 빛내는 게 보였다. 꼭 경기 시작 직전의 플레이어처럼. 기껏 머리를 굴려 생각해 낸 것은 단순했다. 소문이 났으니 소문으로 덮자. 사실 나랑 여주가 데이트를 했다는게 잘못된 소문은 아니지만, 그걸 가지고 신나서 씹어대는 새끼들이 문제였지만, 그래도 덮을 수 있으면 좋으니까. 분위기가 좀 가라앉으면 좋으니까. 이미지가 좀 안 좋아져도, 그거야 뭐 상관없으니까. 야 소문 들었어? 마크가 여주 좋아하는 거 사실이래. 그래서 걔 어제 자기랑 같이 다니는 무리 데리고 김여주 안 좋은 얘기 한 애 집 앞으로 찾아갔다는데? 몰라 어제 저기 육교 아래에서 무리에 둘러싸인 피터를 여자애들이 봤대. 엉엉 울었다는데, 좀 웃기지 않냐. 마크 무서운 줄도 모르고 신나게 입 털더니. 아, 내가 이 말 한 건 비밀이야. 알겠지? —————— 안녕하세요 동동동입니다 (자체 줄임닉) 지난 주말 연재를 못한 건 정말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었어요. 월요일에 뜬금없이 9편을 내 놓은 것은 이렇게 마크의 속마음을 토요일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마이 캐내디언 보이프렌드는 이제야 중반과 고비를 넘어섰는데요, 너무 질질 끄는 느낌이 있지 않나 해서 이렇게 공지를 덧붙입니다. 이번 글을 기점으로 마이 캐내디언 보이프렌드의 분량을 늘리고, 다만 연재 주기를 불규칙적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그래도 주에 한 번은 찾아뵙겠지만, 스스로 글의 루즈함을 느끼고 있어서요. 또한 썰과 글을 하나씩 더 구상 중인데요 동혁이가 주인공인 썰 (댓글 썰) 과 제노가 주인공인 글 (줄글) 중에 무엇을 먼저 보고 싶으신가요? 덧붙여 말하자면 암호닉도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암호닉 : 동쓰 베리 딸랑이 하라하라 혀긔 메리 슈비두바 작결단1호 찬네
이런 글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