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뜸 싫다는 말부터 꺼내는 김한빈에 순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한빈이의 시선이 김지원에게 닿아 있다.
순간 멍. 어, 어. 뭐라고 해야하나 싶어서 멍한 표정으로 한빈이를 바라보는데 옆에서 웃음 섞인 김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네 남자친구는 내가 싫은가 봐. "
김지원의 장난스러운 말에 어설프게 웃음 짓고 있던 내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김지원은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저렇게 말하는 게 이상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서러운 마음이 든다. 짝사랑은 다 그런건가 봐. 다른 사람을 남자친구라고 말하는 게 아무렇지 않은 김지원에 이유는 없지만 왠지 서운했다.
농담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한빈이의 말에도 기분 나쁜 티가 없는 김지원은 이내 나와 한빈이가 아닌 제 무리의 다른 아이들과 다른 이야기에 열중했다.
" 표정. "
" 어? "
" 왜 그런 표정이야. "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김지원을 한참을 바라보던 한빈이가 그제야 내게 말을 걸어온다.
한빈이가 말을 걸기 전까지 멍하니 초점 없이 땅만 보고 있다가, 순간 한빈이의 목소리에 정신이 깨었다.
" 내 표정이 어떤데? "
" 모르겠어. 이상해. "
" 화난 거 같아? "
" 그건 아니야. "
아직 표현을 하는게 서툰 김한빈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수업 시간이 다 된 건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무리들이 다들 수업을 듣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김지원도 무리와 함께 자리를 떠나는 건지 뒤를 돌아 내게 눈웃음을 지으며 입으로 인사했다.
'안녕.'
김지원과 동기 무리가 떠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짧게 한숨이 입밖으로 새어 나왔다.
김한빈은 남자친구가 아니야! 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아까 김지원에 대한 그 서운함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후회가 밀려온다.
남자친구 아닌데 …. 남자친구라고 알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그러다 문득 김한빈에게로 고개를 획 돌렸다.
" 야. 넌 어떻게 거기서 대놓고 싫다는 말을 해. "
" 싫으니까. "
" 처음 본 애잖아, 걔가 왜 싫어. 그렇게 처음 봤으면서 인사도 하기 전에 대뜸 싫다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
" 그럼 안 돼? "
" 안 돼. "
" 왜 안 돼? 싫은 걸 싫다고 한 건데. "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김한빈의 태도에 어이가 없다. 참 나. 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한빈아.
뭐라고 말하려다 포기하곤 그대로 한빈이의 옷깃을 잡고 학교 건물 쪽으로 한빈이를 이끌었다.
어찌됐든 우리 목적은 오늘 학교 구경이니까. 구경하고 싶다던 학교는 구경하고 가야지.
" 근데 너. "
" 응? "
" 너 왜 쟤 앞에선 얼굴이 빨개져? "
같이 걷는데 (사실은 옷깃을 잡고 끌다시피 한빈이의 앞에서 걷고 있는데) 갑작스레 뒤에서 물어오는 질문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얘는 오늘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말을 많이 하는 거야. 진짜.
" 내 얼굴이 빨개졌어? "
" 열도 나고 빨갰어. 아픈 사람 같이. 왜 쟤 앞에선 그래? "
" 그럴 이유가 있어서 그래. "
" 왜? 이유가 뭔데. "
" 넌 말해줘도 몰라. "
" 쟤가 너 아프게 해? "
한빈이의 질문은 '쟤가 네 몸을 아프게 만들어서 네가 얼굴도 빨개지고 아픈 것 처럼 열이 나는 거냐.' 였을 테지만 그 질문이 내게는 조금 다르게 와닿았다.
김지원은 날 아프게 한다?
그렇지 뭐, 짝사랑 중이잖아. 행복하기만 한 짝사랑이 어디 있겠어.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괜히 김한빈의 질문에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코끝이 찡해지는 것도 같고.
" 아프게 하냐니까. "
되묻는 목소리에 한빈이를 마주보고 서선 고개를 저었다.
" 그런 거 아냐. "
" 진짜야? "
" 진짜야. 왜, 쟤가 나 아프게 하면 가서 혼내주게? "
장난스럽게 던진 말인데 김한빈의 표정은 심각하다. 눈동자가 일렁였고, 그 눈동자 속의 초점은 오롯이 나였다.
굳게 다문 입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화난 듯한 그르렁 소리가 내 귓가에서 울렸다.
제 옷깃을 잡고 있던 내 손목을 꽉 쥐는 한빈이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만 안 둬. "
낯설다.
이런 김한빈은 낯설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런 거 아니라고 얼른 고개를 젓고는 한빈이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내 쓰다듬는 손길에 김한빈의 눈동자가 풀렸고 그르렁거리던 소리도 사라졌다.
" 김한빈. "
" 왜? "
" 너 밖에서 함부로 그르렁거리지좀 마. 무서워 죽겠어. "
내 말에 김한빈이 킥킥대며 웃는다.
*
하루 종일 김한빈과 학교 근처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틈틈히 아직 끝내지 못한 과제가 머리에 떠올랐지만 이미 이렇게 나와버린 걸 어쩌나.
애써 고개를 저어 과제 생각을 잊고는 맛있는 것도 먹고, 하고 싶은 것도 오랜만에 왕창 하며 시간을 보냈더니 벌써 날은 지고 어두워졌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밤 11시. 이렇게 늦었을 줄은 몰랐는데, 모처럼의 외출이 즐겁긴 했던 듯 얼마 가지도 않은 것 같던 시간이 벌써 1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이제 들어가자. "
" 조금 더 있으면 안 돼? "
집에서 하던 버릇을 감출 수가 없는 듯 옆에 나란히 걷던 김한빈은 오후가 되자 아주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제 팔을 걸쳤다.
내 볼 옆에서 까딱이는 김한빈의 손가락을 꽉 잡고는 고개를 저었더니 금새 풀이 죽은 모습이다.
" 조금 있으면 12시야. 너 위험하잖아. 늑대 되면 어떻게 집에 데리고 들어가. "
" 그냥 집에 가자고 하면 되잖아. "
" 이건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너 늑대로 돌아가면 내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 "
" 왜 못 알아들어? "
당연한걸 묻냐는 듯한 김한빈의 되물음에 순간 어버버, 했다가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다. 당연한 거였구나.
그럼 지금까지 내말 다 알아 들으면서 못들은 척 맨날 내 다리 위에서 자고! 그랬던 거야?
순간 떠오른 생각에 김한빈을 흘겨보니 김한빈도 같은 생각이 든 건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가 잡지 않은 제 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톡 친다.
" 치지 마. "
" 폭신폭신해. "
" 그 단어 왠지 묘하게 기분 나쁜 단어다, 너. "
" 사실 폭신폭신은 아닌데 다른 말은 모르겠어. 되게 …. "
" 말랑말랑해? "
" 말랑말랑? 그게 뭔데. "
" 어, 말랑말랑은 말야. 그게… 음…. 이런 걸 말랑말랑이라고 하긴 하는데…. "
말랑말랑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지? 고민을 하던 중에 멈춰서는 한빈이의 발걸음에 덩달아 나도 멈춰서게 되었다.
왜 멈춰? 하고 김한빈을 바라보는데, 아무런 표정도 없는 한빈이가 앞을 바라보고 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앞을 바라보니 키 큰 남자 세 명, 아니 네 명이 우리 앞을 막고 서있다.
" 뭐야. "
한빈이의 낮은 목소리에 남자들은 피식 웃으며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애기들, 오빠랑 형아가 돈이 없어서 그런데 돈 좀 빌려줄 수 있을까?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작게 떨리는 내 몸을 더욱 꽉 끌어안은 한빈이에게서 아까와 같은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안 돼. 한빈아 안 돼. 손가락이 아니라 한빈이의 손을 꼭 잡고는 안 된다며 속삭였더니 잠깐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고는 다시 앞의 남자들을 바라본다.
" 돈 드릴게요. "
" 우리 예쁜 애기는 착해서 좋네~ 애기는 몇 살이야? 옆에 이 쬐깐한게 남자친구야? "
" …여, 여기 있어요. 이거 밖에 없어요. "
" 애기가 손이 조금 작네. 오빠들은 이거보다 더 필요한데. "
돈을 받기 위해 가까이 다가온 남자 한 명이 손가락으로 내 뺨을 쓸었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고, 잠깐 멈췄던 한빈이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려왔다.
" 손 대지 마. "
한빈이의 낮은 목소리에도 뭐가 그렇게 웃긴지 제 무리와 웃기 바쁜 남자는 아예 이번엔 손가락이 아닌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피부도 좋네, 곱다, 돈은 됐으니 오빠랑 같이 갈까?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한빈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주먹이 오고 갔고, 처음 보는 한빈이의 싸우는 모습, 그리고 이런 상황에 진정하려고 해도 자꾸만 몸이 덜덜 떨렸다.
남자 네 명이 한빈이에게 달려들었고, 한빈이는 열심히 버티고 있었지만 여기 저기 빨간 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고라도 할까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든 내게 보이는 건 시간이었다.
11시 40분.
곧 12시. 김한빈은 늑대로 돌아간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빈이가 늑대로 돌아가면…?
떨리는 손으로 112를 눌렀고, 근처를 돌던 행인들 무리에 의해 싸움은 멈춰졌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 머리속에는 오직 한빈이를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집은 가까웠고, 쓰러진 사람들 중에서도 또렷히 보이는 한빈이에게로 곧장 달려갔다.
" 한빈아, 한빈아…. "
어딜 그렇게 맞은 건지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씩 웃는 김한빈의 모습에 순간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뭘 웃어. 지금 싸워놓고, 이렇게 피 질질 흘리면서 뭐가 좋다고 웃어.
씨이…. 겨우 김한빈을 부축해 일으켰더니 제 무게를 모두 내게 실어온다. 그런데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겁지 않다는게 또 안타까웠다.
말랐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말랐었나.
도와준다던 사람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비틀거리는 한빈이를 겨우 지탱하곤 앞에 보이는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빈이에게서 떨어지던 빨간 피들이 하얀 원피스 위로 뚝뚝 떨어져, 원피스가 빨갛게 물들어갔다.
왠지 모르게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아무 말도 없이 김한빈을 부축해 가는데, 김한빈은 무슨 말이 그렇게 하고 싶은 건지 기어이 입을 열었다.
" 나 멋있지. "
" 뭐가 멋있어. 하나도 안 멋있어. "
" 늑대였음 쟤들 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데 …. "
" 입 다물고 집이나 가. 진짜, 왜 그렇게 많이 맞아선…. "
겨우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김한빈은 현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12시.
김한빈은 늑대가 되었다.
현관에는 회색 털이 붉게 물든 늑대 한 마리가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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