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레스토랑의 직원인듯한 사내가 튀어 나왔다. 찬열은 놀란마음을 추스리고 그 직원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푹 숙이고 있는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찬열은 꼭 이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많은 것을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저기요." 백현은 최근 무거워 진 몸 때문인지 전보다 더 일이 힘들게 느껴졌다. 하루종일 설거지, 홀 청소, 쓰레기치우기, 식자재 정리 등의 허드렛일을 하다보니 제대로 앉아서 쉰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열심히 해야한다는 집념 하나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던 백현이 설거지를 끝내고 주방을 나서는 순간 갑작스럽게 두통과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바로 앞에 있던 고객용 화장실로 급히 들어선 백현은 하루종일 먹은 거라곤 출근할 때 먹었던 빵 뿐인 빈속을 게워내었다. 온몸의 힘이 빠지고 왠지 배가 쑤신 느낌에 덜컥 겁이 났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에 얼른 입을 행구고 화장실을 나섰다. "네?" 백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의 앞에 있는 찬열을 보고 놀라 몸을 굳혔다. "혹시 우리 만난적 있습니까? 낯이 익은 얼굴인데..." "...아니요. 초면인데요." "아니에요. 분명히 우린 구면입니다." 말을 끝낸 찬열은 백현이 가지 못하도록 백변의 팔을 붙잡고 생각에 빠졌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찬열에 당황한 백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찬열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피해야 했다. "저... 죄송한데 팔 좀 빼주시겟어요?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변백현씨" "...." "넉달 전에 퇴사한 ㅇㅇ그룹 기획팀 변백현씨, 왜 저 모른척 하십니까?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찬열은 백현을 레스토랑 주변 카페로 데려갔다. "..." "하..." "..." 백현은 찬열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 내 아이의 아버지의 온기가 손목에 전해져서 차마 놓을 수 없었다. 이대로 따라간다면 생계수단을 잃을 수도 있지만 한순간의 걱정일 뿐이었다. "변백현씨, 왜 저 모르척 했습니까?" "..." "2년 동안 같은 사무실에서 지낸걸로 알고 있습니다. 틀립니까?" "..." "제가 지금 사고휴유증으로 7년간의 기억이 없습니다" "알고...있어요..." "그런데 최근에 기억이 하나 났습니다. 제가 변백현씨를 혼내고 있었습니다. 근데 뭔가... 그 기억을 떠올리면 단지 직장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로 일축하기엔 제가 찜찜하더군요." "아니에요. 저랑 본부장님 그냥 직장상사와 부하직원이었어요." "근데 왜 하필 그 기억이 떠오른 걸까요." "그건...!" 하필... 백현은 입이 썻다. 자신을 단지 부하직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겠지. 자신과의 추억이 '하필' 떠올랐다는 찬열의 말이 백현에겐 자신과의 추억이 가치없는 기억의 한 조각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슬펐다. "근데 말이죠. 제가 백현씨 조사를 좀 해봤는데 퇴사이유가 소문이랑 다르더군요" "네? 무슨말이신지..." "회사데이터에는 건강악화로 인한 퇴사라고 되어있던대, 맞습니까?" 맞았다. 아이를 가지기 위해 몸을 아껴야 했다. 병원을 다니고 다양한 검사를 하는 동안 백현의 몸은 약해질대로 약해져서 임신 전부터 회사를 그만뒀어야 했다. "네...그때 몸이 안좋아서 회사를 그만뒀어야 했거든요." "아직도 그러고 다니는 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지 마세요. 어린 나이에 몸 굴리고 다니는 거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몸을...굴리다뇨" 백현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찬열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변백현씨가 몸접대하다가 우리 직원에게 발각되서 큰 소동이 있었다면서요. 그 쪽 아주 유명하다던데. 직원들 말이 아주 창녀가 따로 없었다고 수군거리던걸 들었습니다." '아니에요. 전 그런적 없어요. 찬열씨 믿어줘요. 당신 나한테 그러면 안되요...' 백현은 속으로 골백번은 소리쳤다. 예상치 못한 찬열의 말에 백현은 정신이 없었다. 어디서 부터가 잘못된건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가장 최악의 말을 들은 백현은 눈물을 흘리지도, 말을 하지도, 생각을 하고 찬열을 볼 자신도 없기에 눈을 감아 버렸다. "혹시 그쪽 나한테도 몸 대준적 있습니까? 그 쪽이 기억난 걸 보니 그 더러운 몸뚱아리가 꽤 만족스러웠나보네요. 직장 잃고 심심하면 연락해요. 엔조이 쯤으로 박아줄테니까." 찬열은 자신의 할말만 하고 테이블 위에 명함을 두고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쳐다본 백현의 모습은 혼이 나간듯 초점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내가 던진 말에 상처를 입던 말던 그건 자신의 알바가 아니였다. 그대로 뒤돌아 몇발자국 내딛는 순간 찬열은 걸음을 멈췄다. '쿵' 찬열의 등 뒤에서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 그 광경을 본 순간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