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도 이렇게 고이면 독이 된다
네가 떠나면서
나는 흉가로 남아
황사의 날들을 지나며 한 방울
독의 힘으로 눈뜨고 있었다
첫아이를 위한 태교처럼
그리움을 다스렸다 이슬을 보면
아지랭이를 떠올렸다 바람에 날리는
풀씨를 보며 산맥의 뿌리를 생각했었다
일어나는 먼지를 들판의 기침으로
여기기도 했었고
그러나 흉가에서 내 몸 속에 고이는
물은 피가 되지 못하고
독으로 변하고 있었다 불똥만 닿아도
폭발하고 만다는 그 푸른 독으로
눈물 만큼 고이고 있었다
봄날은 고단하게 그렇게 지나갔다
독은 아직 고요하다
이문재, 적막강산
흐린 날
누군가의 영혼이
내 관절 속에 들어와 울고 있다
내게서 버림받은 모든 것들은
내게서 아픔으로 못박히나니
이 세상 그늘진 어디 쯤에서
누군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가
저린 뼈로 저린 뼈로 울고 있는가
대숲 가득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이외수, 장마전선
먼 곳에 내가 더 많다
그때 힘이 없어
용서를 빌지 못한 그 사람도 아직 나였다
그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그 사람도 여전히 나였다
돌에 새기지 못해 잊어버린
그 많은 은혜도 다 나였다
아직도
내가 낯설어 하는 내가 더 있다
이문재, 밖에 더 많다 中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기형도, 노을
마음에 꽂힌 칼 한자루보다
마음에 꽂힌 꽃 한송이가 더 아파서
잠이 오지 않는다
정호승, 영등포가 있는 골목 中
이별이 슬픔에게 말하네
울지마라 울지마라
헤어짐은 절망이 아니다
차오르는 슬픔아
차라리 날선 시선으로
울컥울컥 심장을 찌으러다오
무력한 자존심이 바닥까지 비워지면
흐뭇하게 가슴을 내어주마
속절없는 상처야
단단히 아물어라
다가올 그리움 아프지 않게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하루 종일 네 이름만 되뇌이다 보니
더 보고 싶어진다
오늘따라 비까지 내리고
이러다 내 가슴에 홍수지겠다
보고 싶다 못해
아프도록 그리운 밤
윤보영, 보고 싶은 사람
어떤 사람이
비수처럼 느껴질 때
날카로운 것으로
당신의 마음을 마구 휘젓고
가슴 에이게 한다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
프란츠 카프카, 비수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진은영, 멜랑꼴리아
머지 않아 그날이 오려니
먼저 한 마디 하는 말이
세상만사 그저 가는 바람이려니
그렇게 생각해 다오
내가 그랬듯이
실로 머지 않아 너와 내가 그렇게
작별을 할 것이려니
너도 나도 그저 한세상 바람에 불려가는
뜬구름이려니, 그렇게 생각을 해다오
내가 그랬듯이
순간만이라도 얼마나 고마웠던가
그 많은 아름답고, 슬펐던 말들을 어찌 잊으리
그 많은 뜨겁고도, 쓸쓸하던 가슴들을 어찌 잊으리
아, 그 많은 행복하면서도 외로웠던 날들을 어찌 잊으리
허나, 머지 않아 이별을 할 그날이 오려니
그저 세상만사 들꽃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을 해 다오
행복하고도 쓸쓸하던 이 세상을
내가 그렇게 했듯이
조병화, 나도 그랬듯이
네 몰락이 내 가슴을 흔든다
지옥의 변방에서 하나의 경계선을 그으며
두려움에 떨면서
내던져진 정체불명의 존재인 나
몰락이여, 내 가슴을 흔들어라
천왕성에서 내가 기억할 너,
명왕성에서 내가 낳을 너, 사랑하는
너를 상실해 버린, 너
어떻게 해야하나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이연주, 몰락에의 사랑 中
결국 그런 것이다
구름처럼 한번 밀려온 인연
아득하고 아득하여서
비라도 뿌리는 일
그래서 비가 오면
한사코
하늘아래
누군가 아득한 것이다
윤성택, 인연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김경주, 비정성시 中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나도 당신도 두렵기만 합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울처럼 당신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이성복,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