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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수ll조회 1030l
이 글은 4년 전 (2019/11/20) 게시물이에요






 욕실에서 겪었던 이야기 | 인스티즈

우리 할아버지 집은 기왓집이긴 하지만
요즘 세상에 가마솥쓰고 나무통에 물받아서 목욕하고 그럴리가 없잖아.
90년도에 다 개조를 해서 타일깔고 욕조, 샤워기 다 들였지.

좀..우리 조부님이 독특하신 분이라-ㅅ-
막 인터넷 잘하시구 카라 좋아하시구;; 아무튼 퓨전한옥같은걸 꿈꾸셨나봐;;
헛간도 기와만 남겨두고 다 헐고 최신식으로 바꾸시고는..
(드라마 궁을 보셔서 그래...ㅠㅠ흑흑)

어릴때 언니 오빠랑 할아버지네서 살았으니까..
언니랑 같이 욕조에 물받아서 목욕을 하곤 했어.

근데 언니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턴 점차 각자 샤워하게 되더라고.
목욕탕을 간다면 몰라도 이제 혼자서 씻기 시작한거지.

할아버지 집은 변기하고 욕실이 따로 떨어져있어.
구조상 그렇게 만들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
게다가 워낙 수맥이니, 가구 두는 방향까지 중요시하던 분이셨으니까.

그날 처음으로 언니 없이 목욕을 하던 날이었어.
옛날 80년대 느낌나는 욕실에 쓰이는 파란 타일 알아?
그 타일이 시퍼렇게 깔린 욕실이었는데
언니가 옆에 없으니까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어.
그동안은 옆에있는 언니가 기가 세고 청정하니 아무런 느낌이 없었었나봐.

소름이 오슬오슬 돋고 등골이 서늘했어.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듯 어깨에 한기가 돌더라.
그래서 오늘은 안되겠다. 머리만 감아야지 싶어서 고개를 숙이는데
누군가의 손이 느껴졌어.
누가 내 머리를 아래로 짓누르는 거야.

바짝얼어서 머리를 막 헤집던 손도 우뚝 멈추고 얼어붙은듯이 가만히 있는데
난 고개를 숙이고 있잖아.

발이 보이더라고.
시퍼런 타일처럼 시퍼런 발이.

근데 난 혼자 집에 있으면 그런 손이나 발을 본적이 많아.

복도를 지나가는데 문이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머리카락이나 손. 발.
그게 무엇인지 잘은 몰라.
할아버지는 그게 혼이 못다 가져간 자취..였던가 흔적이었던가..?
그게 보이는거라하던데 나쁜건 아니라고 하셔서.

이럴때는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서 우선 샤워기를 끄고
다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그 시퍼런 발이 언제 있었냐는 듯 없더라고.
그래서 아 다행이다. 그냥 물러갔나보다 싶었지.

나는 어서 욕실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래서 수납장에서 수건을 꺼내들어 머리를 닦으며 허리를 척 펴는데,
새로 갈아끼운 은색의 샤워기 손잡이에 거울처럼 비춰보이는거야.
내 뒤에 있는 누군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다.'

여자다, 남자다, 그런게 아닌 '검다'고 생각했어.

닦지도 않고 도망치듯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채 내 방으로 막 달려나갔어.
'그런식'으로 그게 보인적은 처음이었으니까.

문을 닫고 얼른 옷을 껴입는데 정말 기분이 오싹했어.
이런 날은 꼭 가위에 눌리곤 해서 어린마음에 무서웠지.
오늘은 할아버지 옆에서 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도저히 못나가겠는거야.

문을 열면 장지문 앞에 그 시퍼런 발이 보일 것만 같았어.

그래서 이불을 뒤집어 쓴채 언니를 막 불렀어.
언니는 바로 옆방이고 분명 달려와줄테니까.

식은땀을 흘리면서 언니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언니가 날 와락 껴안는게 느껴졌어.
내가 무서워할때면 언니나 오빠가 항상 그랬거든.
그래서 안심이 되어 이불을 젖히는데,
눈 앞에 아무것도 안보이는거야.

온통 까맣게 물들어있었어.

언니 품안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곧 알았어.
나를 꽉 안고있는건 언니도 오빠도 할아버지도 아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그 사람이라는 것을.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시퍼런 발이 보였어.



그 뒤는 모르겠어. 정신을 잃은 건 아닌데 기억이 툭 잘려나간 기분이었어.
일어나면 그 모든 일들이 꿈이나 가위 눌려진것처럼 되버리더라고.
그날도 아, 내가 가위 눌렸구나 싶어서 일어났지.

일어나자마자 바로 언니 방으로 가서 물어보았어.
언니 어제 내가 언니 불렀어? 언니 내 방에 왔었어?
물으니 언니가 너 또 가위눌렸었냐고 날 다독였어.
그래서 아니라고 어제 욕실에서 무서운거 봐서 언니 부른거였다고 말하니까
언니가 대수롭지 않게 그러더라.

"너, 그래서 밤새 복도에서 서성거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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