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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개소리야."
*
"너도 몰랐어? 나도 방금 알았는데 옆집 남자래. 얘 이상형인가 봄."
"아... 작게 좀 말해, 작게 좀..."
"진짜야?"
"응, 당연. 들어보니까 첫눈에 반한 듯."
"...다시 말해봐. 뭐?"
"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니까?"
"너한테 물어본 거야, ㅇㅇㅇ."
얘 또 시작했음.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뭐가 열받아서 정색 빨고 난리냐고.
"야야, 나 먼저 간다?"
"...간다고?"
수현이는 구준회가 이런 태도로 나오는 건 처음 봐서 그런지 우리 눈치만 계속 봤음. 쭉 우리 둘을 번갈아보다 의미심장한 얼굴로 쪼개더니 그새 튀었고...
원인 제공자가 가면 난 어쩌라고? 나랑 얘만 어색하게 남기고 가면 그 뒤는?
"음, 그러니까."
"어제 그 사람?"
"맞다고 하면 맞는 건데 맞는 건 아니고 준회야... 어?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솔직하게 나한테 말하면 될 거 아니야. 너랑 내가 남도 아니고."
"그게 아니고 구준회..."
"그래, 나한테 말하기 좀 불편했다 쳐. 이수현한텐 그런 거 말할 수 있고 나한텐 못 말 하고?"
아니 왜 하나같이 내 말을 들어볼 생각도 안 하는 거?ㅋㅋㅋㅋㅋ 애초에 이 자식은 무슨 자격으로 저딴 표정 짓고선 툭툭 대답하는 건데?
"결론은 네가 좋다는 사람이 어제 본 그 사람이란 거네. 나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데 얼굴이나 보여줘라. 얼마나 보여주고 싶었으면 그렇게 자랑을 했냐?"
퍽 서운한 기색이라 저 페이스에 말려들어가서 영문을 모르겠는 와중에도 조금 미안해질 뻔했음. 얘 지금 서운해서 눈에 뵈는 게 없나봐.
구준회가 화났을 땐 일단 입 닫고 미안하다 비는 게 제일 잘 먹히지만 지금의 난 어이가 저 멀리 말머리성운까지 날아간 지 오래였음;
내가 얘한테 구구절절 해명할 필요가 있냐고. 지금 제일 짜증나는 건 구준회 말투야 뭐 저렇게 비비 꼬아서 말하는데ㅋㅋㅋㅋㅋㅋ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수현이한테만 이런 비밀을 털어놨다고 생각해서 서운함에 이러는 게 확실한 것 같았음. 미친 거 아니야? 네놈이 5살인지?
"네가 지금 서운한 건 아주 잘 알겠거든?"
"서운한 게 문제가 아니라. 아, 좀."
"그럼 왜 화내는데. 어제부터 너 좀 이상한 거 알아?"
"아오, 그래. 서운해서 이런다. 됐냐 이제?"
"와... 진짜 서운해서 이러는 거였어? 너 내년에 스무 살 되잖아, 나잇값 좀 해!"
"하다 하다 나잇값 하라는 말까지 하네."
"나한테 말할 기회 좀 줘봐. 아씨... 뭐가 꼬이긴 했는데 아무튼 진짜 좋아하는 건 아니고, 별 의미없이 한 번 툭 던져본 말이라고. 그리고 여자애들끼리 더 편하게 이런 말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나 참 어이가 없네."
"...진짜? 좋아서 한 말 아니라고?"
"그렇다니까? 왜 자꾸 아저씨 관련해서 조금이라도 꼬투리 잡히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내가 너무 몰아붙였나 애가 약간 주눅들어있는 거 보고 급 미안해졌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는 말까지 듣고 움찔하더니 힘 빠지게 웃길래 난 또 인상을 구김. 나 보고 어쩌라는 거? 다시 뭐라 하려던 참에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하더라.
"야."
"뭐, 뭐뭐!"
"알았으니까 그냥 집이나 가자."
-
"...구준회?"
"……."
"나 내린다?"
"어."
"다음에 볼 땐 웃으면서 봐야 돼? 알았지?"
"……."
"나 갈게!"
"...야, 잠깐만. 여기 아닌데? ㅇㅇㅇ?"
원래 내가 내리는 정거장이 준회가 내리는 정거장보다 앞에 있음. 그렇게 먼저 내리긴 내렸는데... 뭐지,
이 찝찝한 마무리는. 구준회가 마지막에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못 들은 것 같아.아까 싸움 아닌 싸움으로 조금 어색해진 기류가 너무 싫었단 말임? 그래서 버스에서도 내가 일부러 의문형으로 말을 끝내고 대화를 이어가려 해봐도 묵묵하게 입만 다물고 있는 거야. 애새끼 달래는 것도 아니고 진짜 유치하지 않음?
오늘 하루는 두 마리한테 물어 뜯긴 날이구나ㅋㅋㅋㅋㅋ 그렇구나...
한숨 쉬고 주위 한 번 둘러봤는데... 나 진짜 뭐 하는 거지. 여기 어디? 나 어디서 내린 거?
내가 버스에서 핸드폰만 하는 스타일이라 평소에도 그냥 감으로 내리거든... 그래서 내가 길치인가 봐... 난 매우 심각한 길치임 대체 오늘 하루 왜 이러냐고.....
주변 큰 길로 나가니까 번화가가 나왔음 여기가 명동 근처였나 봐. 난 이런 번화가 혼자 절대 못 와 집 가는 법을 모르니까^^...
서둘러서 핸드폰 꺼내고 뭘 타야 되는지 네이버 지도나 보려고 했는데 이번 달 데이터 끊긴 게 그제서야 생각났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3 되고 데이터 줄여서 더 빨리 끊긴 거임 최악;
남은 건 전화밖에 없었어... 구준회한테 전화하기엔 지금 당장은 불편해서 싫었고 전화부 뒤져봐도 어느 누구 하나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야... 그동안 난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를 느꼈음
가나다순으로 펼쳐진 전화번호 목록을 쭉쭉 내리는데 'ㅇ' 목록에 구세주 하나가 있었어.
[여보세요?]
"절 매우 치세요..."
[또 뭘 부탁하려고 이래.]
"저 명동이거든요? 아저씨도 지금 명동이죠? 알바 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 집 아니죠? 저번에 명동에서 알바한다 그랬죠? 그쵸?"
[...그렇긴 한데 너 쇼미더머니 나간 적 있어? 합격 목걸이 줘도 돼?]
"저 심각하단 말이에요... 데이터도 없고 집 가는 법을 모르겠어요."
[하... 내가 정신 붙들고 다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주변에 뭐 보여?]
"이제 진짜 잡고 다닐게요...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CU 보이긴 하는데... 주변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오면 알 거야, 나 이제 바쁘니까 끊고 문자 보내놓을게. 관계자분한테 말해둘 테니까 빨리 와.]
잔뜩 시무룩해져서 마지막 희망인 아저씨한테 전화해본 거였는데 역시 믿을 건 아저씨밖에 없었음ㅠㅠㅠㅠ 아침에 번호 교환한 건 신의 한 수였어 정말...
금방 아저씨한테 문자 왔는데 일단 자기 일하는 곳으로 오라는 내용이었음. 이따 퇴근할 때 같이 집 들어가자면서 일하는 곳 위치 설명해놨길래 그거 들여다 보고 차근차근 찾아갔어... 다행히 여기서 얼마 안 가니까 나오는 곳이더라 아저씨는 천사가 분명했음
"이 건물인가..."
아저씨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도 생각보다 건물이 커서 여기가 맞나 고개를 갸웃했음. 라이브 카페더라?
이런 곳에서 일하는구나, 무대 정리 같은 일 하는 건가?
라이브 카페 중에 미성년자 들어가도 되는 곳은 별로 없는데 여긴 정말 건전하게 미니 콘서트장 같은 분위기였음. 그 와중에 완전 내 스타일;
벌써부터 마음에 들길래 수능 끝나면 이런 곳 많이 다녀봐야겠다... 하고 문득 생각했음. 지금 공연 중인지 밖까지 음악 소리가 울리는데 눈을 여기저기 굴리면서 조심스레 들어갔어.
-
들어오니까 저 앞에서 이미 공연하고 있더라고?
신나는 분위기인 곡이 이제 막 끝나고 잠시 불이 꺼졌음. 무대가 다시 밝아지는 것도 금방이었는데 이 때 깔리는 곡이 도입부부터 진짜... 정말 좋아서 멍하니 빨려들어갔어.
반주를 따라 작게 몸을 흔드는 사람들이 나란히 깔린 무대 앞으로 다가가서 위를 올려다봤는데, 그 순간 노래하기 시작하는 목소리도 동시에 들려오는 거야.
BGM :: Team B - 기다려
"한없이 웃기만 하네요, 그녀도
아무렇지 않게 시간은 그댈 잡고 또 흘러가네요"
아,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냐고? 그냥, 그냥 넋을 놓고 눈도 못 뗀 채 노래 부르는 아저씨만 계속 봤어. 아무 생각 없이. 난 저 목소리에만 집중해야
했으니까 그 어떤 생각도 할 겨를이 없었거든.사람들 사이에 묻혀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뒤에서 눈 하나 깜빡이지도 못하고 입까지 벌린 채로 감탄하고 있었어.
이 순간만큼은 아저씨를 제외하고 아무 것도 안 보였어.
노래가 끝날 때까지.
"시간아 가라, 가라 더 빨리"
노래가 끝나고 아직까지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아직 멍하게 서있는데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도 잦아들었어.
무대 아래에서 환호하고 박수 치는 사람들을 쭉 훑던 아저씨가 뭔가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거든?
그렇게 계속 두리번거리다 저 뒤에 있는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그제서야 다시 무대 앞을 보면서 만족스럽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어줬어.
그리고 아마 이 때 깨달았던 것 같아.
아, 나 지금 정말 이 사람한테 반했구나.
***
노래하는 김진환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