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San E - 나 왜이래 (inst.)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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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리 시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지만 이 정도 거리에서 사람 구별은 되거든? 누가 봐도 아까 같이 있었던 그 실루엣이 맞아서 반가워서 아는 척 하러 가려는데, 살짝 실눈 뜨고 보니 저 오른손에 뭔가 들려있는 거야. 그게 뭔지 3초 동안 멈춰서 생각했는데 저 하얀 물체는 담배가 확실했음. 상식적으로 3살짜리 애 아빠가 담배나 피운다는 건 이해가 안 되잖아.
뭐야, 아닌가. 그냥 아저씨 닮은 다른 사람이겠지 싶어서 지나가려 했음.
그런데 우리가 가려는 곳은 저 아저씨 '닮은꼴'의 앞을 가로질러서 가야 하는 방향이었음.
난 여전히 내 뒤에 딱 붙어서 내 목만 끌어안고 있는 구준회를 떼내려 온몸을 흔들고 얜 죽어라 안 떨어지는 기괴한 장면이 연출됨ㅋㅋㅋㅋㅋㅋㅋ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이 우리 쳐다보면서 가는데 진짜 쪽팔려서 뒤지는 줄;
진심으로 야마 돌기 직전에 갑자기 얘가 귓속말로 풀려라, 풀려라 조곤조곤 속삭여서 결국 빵 터지고 말았음ㅋㅋㅋㅋㅋㅋㅡㅡ 빡치게도 구준회는 내 약점이 귓속말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음
"아, 떨어져봐 제발 좀!"
"나이스. 웃었다."
"간지러워서 웃은 거거든."
"일단 웃은 건 맞잖아."
"아, 예예. 그러시겠... 헐. 아저씨 맞잖아?"
"뭐? 누구?"
"아저씨?"
"...어? 뭐야. 너가 왜 여깄어?"
미친. 아저씨 맞네? 날 보자마자 황급하게 일어나서 담뱃불을 밟아 끄더니
되게 얼빠진 표정으로 보는 거야. 제가 더 당황스러운데요. 아니, 이 사람이 지금 길거리에서 담배를 빨고 있었다고?
"뭐야. 야, 이 사람 누ㄱ..."
"잠깐만 있어봐. 담배가 얼마나 몸에 안 좋은지 안 배웠어요? 그거 뭐냐, 막 폐도 썩고 그런 거 학교에서 사진 안 보여줬어요?"
"누구냐니까?"
"아, 물론 그런 걸 배우긴 했는데 내 말은."
"답이 없네. 나중에 언제 한 번 집에서 얘기해요. 그러는 아저씬 왜 여기 있어요?"
"집? 지금 집에서 얘기하자 했냐?"
"아는 형이 다쳐서 당분간 내가 일요일마다 땜빵하기로 했거든."
"어디서요? 아저씨 일하는 거 보고 싶은데."
"가자, ㅇㅇㅇ."
"어? 잠깐만, 나 할 말 더 있는데? 갑자기 왜 끌고 가냐고 구준회!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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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야."
"왜 끌고 왔어, 할 말 더 있었다니까?"
"그니까 누구야."
"그냥 옆집 오빠...라고 보기엔 아니지. 옆집 아저씨야."
"그냥 옆집 아저씬데 왜 네가 저 사람이 담배를 피우든 말든 신경을 써."
"...왜 이래? 갑자기 무게 잡고?"
얘 갑자기 왜 이래? 이런 적 처음이라 매우 당황스럽습니다만?
자꾸 꼬치꼬치 캐묻길래 나도 좀 정색하고 왜 이러냐고 물어보니까 아차, 하더라.
"...아씨, 이게 아닌데."
"지 혼자 뭐라는 거야. 왜 이러냐고."
"누군진 모르겠는데 저 새끼 불안하다고. 그것도 존나."
"야. 너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한테 저 새끼가 뭐야, 저 새끼가. 무슨 뜻이야?"
"몰라, 그냥 엮여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아."
"나 지금 너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 돼. 적응 안 되게."
"아까 보자마자 그냥 딱 첫인상이 별로였어. 내가 왜 그랬겠냐? 아까 네가 집에서 얘기하자 그랬을 때 놀라서 너 집 안 보내려고 했어."
"집을 안 보내?"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미친 놈. 너 무슨 생각 했어?"
"오늘 진심으로 집 안 보내줘도 괜찮?"
"아, 또 뭐래! 하지 마!"
음흉한 드립 하나로 아까같이 적응 안 되는 상황은 종결됐음ㅋㅋㅋㅋㅋㅋㅋ 조금 더 돌아다니다 준회가 집에 데려다주는 내내 내가 사람 보는 촉이 있다느니, 내가 이래 봬도 첫인상 도사라느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더라고?
잡소리들은 가볍게 무시하고 집 오자마자 거실에 대자로 뻗어서 자연스레 리모컨 찾다가 식겁했어... 내가 고3이라는 사실을 잠깐이나마 잊고 있었나 봄...
이러면 안 된다고 애써 스스로한테 주문을 걸고 책상까지 기어가서 한참 N제나 풀고 있는데, 문득 아까 준회가 했던 말이 생각났어.
'몰라, 그냥 엮여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아.'
그냥 스치는 말이긴 했는데 얘가 의외로 사람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나보다 일찍 사회로 뛰어든 애니까 그런가.
별 말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고정해도 그 말만 둥둥 떠다녔어.
왜? 왜 엮여서 좋을 건 없다는 거야? 난 이렇게 찝찝하도록 마음에 걸리는 게 제일 싫었음. 그래도 아까 끝낸 얘기를 다시 끄집어내서 물어볼 필요까진 없고... 뭐 어쩔 수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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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이었음. 이 날 따라 원래 일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빨리 일어나서 여유가 넘쳤음. 딱 그 때까진 더없이 상쾌한 기분이었어. 후다닥 씻고 빠르게 교복으로 갈아입었는데... 그랬는데...... 아침이면 밥을 먹어야 되잖아?
별 생각 없이 밥통을 열었는데 밥이 죽이 돼 있는 거임ㅋㅋㅋㅋㅋㅋㅋ 생각해보니 어제 취사 버튼을 안 눌러놨던 게 그제서야 생각남. 진짜 멍청인가?
"아, 어쩌지. 먹을 거 하나도 없는데..."
좋은 수가 하나 떠오르긴 했는데 이걸 실행으로 옮기기엔 그저 민폐충이 될 뿐이었음. 그러나 내가 아침을 거른다면 시체나 다름없다는 팩트가 민폐 끼치기 싫은 자아를 이겨냈음.
그래서 어쨌겠어, 대충 눈치 깠지?
"...아저씨..."
"왜 왔어? 인터폰 벨 듣고 지금 일어난 건데..."
"죄송한데... 밥 좀 주시면 안 돼요?"
"...뭐라고?"
"아니... 제가 어제 취사를 안 눌러놔서 밥이 망했어요."
"미치겠네.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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