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뇌에 약간의 휴식을 줄 거란 말임. 때마침 엄마아빠도 오랫동안 집을 비운다니까 그동안만 나한테 상을 주기로 마음 먹었어.
조금만 느슨해져야지. 너무 빡빡하게 하면 그게 다 스트레스가 되는 거니까. 정말,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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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더워. 너무하네 진짜."
아무리 7월이고 여름이 시작됐다 한들 이렇게 더워도 되는거야? 지구온난화는 정말 심각한 문제였어 나 진지하다 지금;
이제부터 물도 아껴 쓰고 나 혼자 시원하겠다고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지도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었음
그런 의미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사러 가야겠다 하고 손부채질을 파닥거리면서 문을 열고 나왔는데 옆집에 누가 이사를 오나 보더라고?
어쩐지 아침부터 뭔가 소란스럽더라니 밖을 보니까 이삿짐 센터가 있었음. 문 앞에 짐이 많이 쌓여 있지 않은 걸로 봐선 가족이 이사 오는 것 같진 않았어
짐만 보니까 혼자 사는 사람 같던데... 갑부라도 되나? 시기도 시기라 만사에 극도로 예민한 상태인 나는 민폐 끼치는 사람만 아니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음
주머니 속에 든 500원짜리 동전 2개나 짤랑거리면서 신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렀어.
그리고 곧 내 옆에 누가 내 옆에 나란히 서길래 그냥 별 생각 없이 옆을 봤는데.
???
!!!!!
!??!?!!??!?!?
닥쳐라 내 심장;
오며가며 우리 동에서 마주칠 만한 사람들은 싹 다 꿰고 있는 내가 이렇게 생면부지인 사람은 있을 수가 없고 무엇보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음.
게다가 이 층에서 타는 사람이라면 저 사람이 이번에 이사 오는 사람이 확실했음 와씨 대박인 거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나랑 잠깐 눈 마주치고 다시 정면을 보는데 진짜 이건 그냥 로또. 귀여운데 또 잘생기긴 졸라 잘생긴 그런? 심지어 눈 밑에 매력점까지 있어서 내가 환장할 만한 포인트는 다 갖춘 사람이었음
속으로 몇 살이지? 잘만 하면 썸 타는 거 아니야?! 하고 김칫국을 거진 다섯 사발은 원샷 때리고서 다시 은근한 곁눈질로 그 남자를 살폈어.
......품에 무엇을 안고 계신?
어째서 애를 안고 있는 거지? 왜? 도대체 왜죠?
보니까 애를 한두 번 안아본 게 아닌 것 같은 거야 나도 친척 중에 아가들 있어서 자주 놀아줬는데 저건 진짜 프로의 포스가 막 나;
그 말은 즉 애아빠라는 거지. 설마 저 젊어 보이는 나이에 애도 있는 거야? 이 말은 곧 아내도 있고? 그럼 한 가족이 짐이 왜 그렇게 적지?
어쨌거나 그럼 방금까지 제멋대로 달달한 망상을 펼친 나는 자연스레 멋쩍어지는 상황이었음...
고1을 마지막으로 곁에 남자친구란 생명체를 둬봐서 그냥 외로움에 잠시 눈이 돌아간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어 좀 아쉽더라ㅋㅋㅋㅋㅋ 정말 조금 아쉬울 뿐이었음 완전 내 이상형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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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이거 제가 먼저 고른건데."
"망고맛을 우리 애가 워낙 좋아해서."
"...네?"
"다음에 만나면 사례할게. 우리 같은 아파트 같던데, 한 번만 양보해줄 수 있어?"
"아니, 사례랄 것까진 없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또 뭐가 되겠어요. 그냥 가져가세요."
"고마워."
나랑 동시에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진 좋았어 오면서 계속 길이 겹치는 것까지도 좀 물음표스럽긴 했는데... 그러려니 했는데......
편의점에 하나 남아있던 내 사랑 망고맛 메로나를 선수쳐감.
그러하다. 내가 먼저 골랐는데도. ㅇ으ㄴㅇㄹㅇㄴ마ㅣㅓㄻㅇㄴㄹ 짜증나 죽겠는 거야 심지어 먼저 말 까는 건 또 무슨 일?'먹을 건 무조건 뺏기지 않는다'가 내 신념인데 19년 인생 살면서 처음으로 그 신념에 금이 가는 일을 당해버렸어
아까 잘생겼다는 말은 취소임. 아무리 내 이상형이라 해도 그렇지 내가 먼저 찜한 걸 뺏어가는 건 그 상대가 애라도 용납할 수가 없었음.
그렇다고 눈이 초롱초롱한 아기를 안고서 망고맛을 우리 애가 워낙 좋아한다느니 마음 약해지기 딱 좋은 말만 하니 줄 수밖에 없잖음?
결국 오리지널 메로나를 집어 들고 씩씩대면서 그 남자보다 먼저 계산대로 향했어.
"계산해 주세요."
"1000원입니다."
"그리고 저기, 망고맛 메로나 좀 많이 입고 해주세요."
"네?"
"제가 양보만 하고 사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저ㄱ..."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대놓고 '나 화났다'를 온 힘을 다해 얼굴로 표현하면서 편의점을 박차고 나갔어.
더 짜증나는 건 내가 계산하는 걸 보고 웃겼는지 옅은 미소를 머금고 보던 '앞으로 내 이웃이 될 사람'이었음ㅋㅋㅋㅋㅋㅋ 웃음이 나오시는지?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는다 했거늘 닥치고 조용히 먹어야지... 이야 신난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랠 겸 터덜대는 발걸음으로 웹툰이나 보면서 가니까 금세 아파트 엘리베이터 근처에 도착했어.
버튼을 누르고 얼마 안 있어서 금방 내 망고맛 메로나 가져간 그분이 내 옆에 나란히 서더라?
그제서야 아까 계산대에서 뱉은 언행들이 떠올라서 개쪽팔리는 거야 먹을 거에 환장하는 애로 보였겠다 싶었음^^... 역시 같이 엘리베이터 타기 껄끄러운 마음에 나가려는데.
"12층 맞지?"
"...네? 아, 네."
"이번에 이사 왔거든. 몇 호야?"
"1203호...요."
"난 1204혼데. 옆집이네."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난 후 한동안 어색한 공기가 작은 사각형 공간을 가득 채웠어...^^ 하필 우리 층이 12층이라 꽤 오래 올라가거든 게다가 이 사람도 같은 층에서 내리니까 더 어색해 아오ㅋㅋㅋㅋㅋㅋㅋ
12층 도착했다는 소리랑 동시에 열리는 문으로 어색한 공기는 지워졌음. 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도어락 풀고 집에 뛰어 들어가서 심호흡만 연신 내쉬었지.
안심한 것도 잠시 후드집업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나서 마음의 평화는 또 깨져버렸음...
......핸드폰이 없어졌어ㅎㅎ 그 날은 유난히 되는 일이 없더라
내가 아까 오면서 만지작거리고 분명히 주머니에 넣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엄마가 돌아와서 n시간은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한데?
조급하게 머리를 굴리다 생각난 건 아까 그 유부남 하나밖에 없었어.
물어보기라도 해야겠다, 하고 옆집 문 앞으로 가니까 이사 때문인지 문이 조금 열려 있길래 조심조심 들어갔어.
"저기..."
왜 대답이 없지.
"아무도 안 계세요?"
"누구세ㅇ... 아."
"으악!!!!!"
"...뭐야, 왜 놀라?"
무슨 귀신이세요? 어떻게 이렇게 소리 하나 없이 불쑥 튀어나옴?
몇 년 전 이맘때 불까지 끄고 이불 속에 혼자 꽁꽁 숨어서 보던
우물 속 사다코도 이보다 무섭진 않았어ㅋㅋㅋㅋㅋ 그건 2D고 이건 5D잖아ㅎ...?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진짜
"하... 다름이 아니라 혹시 제 핸드폰 못 보셨어요?"
"그 하얀색 스마트폰? 갤럭시 아니야?"
"보셨어요? 네네, 맞아요!"
"아까 주워오긴 했는데 어디다 뒀더라. 이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런 거 가지고 뭘. 아까 말했던 보답 지금 해줘도 될까?"
"네?"
"괜찮으면 잠깐 들어와서 기다려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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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