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이 조금 이어졌지만, 금방 괜찮아졌다.
김태형과 관련된 일은 언제나 익숙하게 넘길 수 있으니까. 그게 나이든, 다른 사람이든.
그만큼 확고한 애였고, 예측 가능한 애였다. 가끔가다가 애매하게 구는 건 빼고.
잠잠한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리 단 연인 사이라도 우리보다 더 삭막해질 수 있는 걸까. 물론 그게 끝이 아니더라도.
책상 위로 엎드리자, 내가 내뱉은 숨이 책상 유리에 부딪혀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김태형은 멍청이. 등신. 자꾸 차오르는 눈물에 속으로 온갖 욕이란 욕은 다 해봤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쉽사리 끝내자고도 못 하는 지독한 인연. 서러운 마음만 구겨지고, 짓눌린다. 헤지며, 낡아간다.
내가 너를 생각하는 것만큼 너도 나를 생각해줬더라면, 그리고 그만큼 나를 좋아해 줬더라면.
끝없는 욕심은 바닥을 기다, 결국엔 연기처럼 푸스스 흩어진다.
그 연기는 가벼워서 다시 위로 올라갔다가도, 빗방울이 되어 도로 떨어지고 만다.
그 비를 맞는 건 오로지 나.
고운 우산을 쓰고 있는 태형이.
한 번만 돌아봐 줘. 축축한 게 싫어. 물을 먹어 무겁게 늘어지는 모든 것들이 무서워.
나는 솜이 아니야 태형아.
툭. 맥없이 유리 위로 떨어진 울음을 거부하듯 휴대폰이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김남준. 그리고 그 이름을 확인함과 동시에, 정말 미안하게도 그보다는 태형이 먼저 떠올랐다.
저번 일도 그렇고, 예전부터 항상 나와 태형이의 연결선은 대부분이 남준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무슨 일이 있겠거니,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여보세요."
- 어, 집이야?
"응, 이번엔 무슨 일인데."
누구 애인 아니랄까 봐 무뚝뚝한 거 봐라. 평소보다 조금 잠긴 남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위가 어수선하게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간간이 고함도 들려오고, 흥이 오른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 김태형이,
"……."
- 좀 많이 취했어.
가지가지 한다 정말. 의자에 걸린 가디건을 집어올리며 위치를 묻는 내가 스스로도 웃겼다.
진탕 취하도록 술나발이나 분 미성년자 김태형도 웃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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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취했다고."
"무슨 신흥 지랄이세요."
걸음부터 똑바로 걷고 얘기해. 자꾸만 내 어깨로 쓰러지는 태형을 감당 못 하고 같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김남준. 오늘만 사는 김남준.
아무리 그래도 건장한 남자 고등학생을 나한테 덜렁 맡기고 가버리냐 매너없게.
한숨을 쉬고 골목길 바닥에 앉아있는데 목덜미로 태형의 숨이 훅하고 끼쳐왔다.
"너 울었지."
취했네. 취했어. 이마를 손으로 밀어내며 떨어지라고 하자, 놈이 다시 어깨 위로 고개를 올린다.
저릿거리는 게 어깨인지, 마음인지.
규칙적으로 숨을 뱉다가, 태형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별거 아닌 거에 긴장을 하고 떨려 하는 내가 너무나도 짜증이 났다.
차라리 이런 모든 게 다 빨리 익숙해진 더라면. 그러면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
그러면 너한테도 참 고마울 텐데. 지금처럼 원망만 하지도 않을테고.
"너 울었잖아."
"……늦었다. 얼른 들어가자."
왼팔을 잡고 일으키는 나를 올려다보는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깊은 눈. 내가 그토록 마주하고 싶어하는 너의 검은 눈.
"울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