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룰은 잔인하다. 가지고 싶은 것은 어떤 추악한 짓을 해서라도 손에 넣는다. 나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라면 우정이나 사랑 따위의 감정놀음에 놀아나서도 안 되고, 입에 바른 도덕적 윤리나 순리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방금 전까지 잡았던 손을 놓아버리고 잔인하게 상대의 살을 가르고 심장을 도려내야 한다. 그 심장을 짓밟아서라도, 나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깔끔하게 제거해야 한다. 설령 그게 개미새끼 한 마리 일지라도.
그리고 지금 내가 간구하는 것은, 김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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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빈을 처음 본 건 지난 과 모임 떄였다. 꼴에 1학년이라고 선배들이 주는 술잔 하나하나 쭉 들이키는 게 꽤 귀엽기도 하고, 술이 넘어갈 때 일렁이는 목젖이 섹시했다. 말하는 투며 무언가를 좇는듯한 카만 눈빛이 20살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성숙해서 나도 모르게 홀릴 뻔 했다니까.
김한빈이 사람 여렷 홀렸더라. 시선을 거두고 주위를 둘러보니 선배들이며, 동기며, 후배들이며. 전부 김한빈을 바라보는 눈빛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 눈빛 진작에 되돌리는 게 좋을텐데. 어차피 김한빈은 나한테 오게 되 있어. 하지만 오늘은, 이만.
나는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고, 그 중에는 김한빈의 시선도 섞여있었다. 과 동기들은 내게 야유를 보내왔고, 선배 몇은 요즘 후배들이 선배 개념이 없다며, 선배보다 먼저 일어서네 어쩌네 하고는 이빨을 까 댔다. 나는 고개를 푹푹 숙이며 정말 죄송하다고 연신 반복했다.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김한빈에게 얼굴이라도 익히려면 오늘 하루 쯤은 포기해햐 하거든.
다음날, 풀 공강이 있는 날이지만 학교에 들렀다. 이유는 뭐겠어. 김한빈 눈에 꽂히기 위해서지. 멀리 복도에 김한빈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김한빈 옆구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입을 놀려대는 여자애들도 함께. 학식 자기랑 먹자, 과제 같이하자, 조별과제 같은 팀 하자. 어쩜 그리 시끄럽게 울어대는지. 매미는 짝을 찾기 위해 시끄럽게 울지만, 며칠 살지 못한 채 죽는다. 지금, 그 매미가 한 마리 죽을 차례.
"저기, 윤희?"
여자애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내 목소리와 함께 김한빈을 둘러싼 여자애들의 주위엔 정적이 맴돌았고, 김한빈의 시선도 내게 향했다. 그 여자애는 짜증난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리더니 날 바라보곤 낯빛을 바꾸었다. 생글생글 사람 좋은 웃음을 띄우면서.
"네?"
낭랑한 목소리가 공중에서 분산됬다. 꼴에 김한빈 앞이라고, 내숭은. 나는 최대산 상냥한 목소리로, 최대한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날 바라보는 김한빈이 내 속에 품은 아찔한 칼촉을 볼 수 없도록.
"언니가 친오빠 군대 면회에 가야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해. 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여자애는 말을 더듬으며 그걸 왜 자기에게 물어보시는지 모르겠다며 내게 되물었고,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네게 물어봐서 정말 미안하단 표정을 내포하고는, 사과가 묻어나오는 말투로
"아..미안해. 나는 네 남친이 군대갔다고 해서. 잘 알줄 알고.."
윤희라는 여자애는 내 말을 듣고는 얼굴을 붉히더니 나와 김한빈을 번갈아 쳐다봤다. 김한빈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자애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더니 같이 있던 여자애들 몇 명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 무리들이 사라지자 두어 명 남았던 여자애들도 나를 바라보더니 자리를 피했다. 이제 이 공간에는, 나와 김한빈만이 있었다.
"영악하네요."
날 계속 바라보던 김한빈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꽤 당황했다. 나보고 영악하다니. 분명 김한빈 앞에서 속을 칭칭 동여맸는데?
"제 앞에서 윤희 망신도 주고, 여자애들도 다 떨어뜨리고."
김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실 미소라기보다는 조소에 더 가까웠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왔다. 내가 들켰어? 도대체 왜?
"이걸 고맙다고 해야할지, 뭐라고 해야할지."
김한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김한빈은 나를 바라보며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그 웃음에 온 몸이 경직됬다.
"얼굴은 예뻐가지고, 하는 짓은 딱 여우네요."
김한빈은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머리칼들이 김한빈의 손 끝에서 흩어졌다. 이 상황에서도 김한빈은 여전히 섹시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김한빈의 눈을 마주했다. 검은 눈동자가 빛을 받아 짙은 고동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묘한 눈이 나를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들켰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며 웃음을 흘렸다. 나는 김한빈의 손을 잡아 내렸고 김한빈은 그런 내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두어 번 숨을 깊게 내쉬었고, 속으로 갖가지 계산을 해댔다. 여기서 포기해야 할까,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할까, 아니면 이대로 돌진해야 할까.
"그럼 뭐, 할수 없네. 안녕."
나는 입술을 깨물며 김한빈에게 손을 흔들었고, 김한빈은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나는 눈썹을 찡그렸고 김한빈은 한바탕 웃은 뒤에 숨을 가다듬고는 내 혼을 홀려놓는 말을 내뱉었다.
"여기까지 와 놓고, 이렇게 가면 어떡해요 누나."
이것도 다 작전인가? 하는 말을 덧붙이는 김한빈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등을 돌렸다. 김한빈이 이렇게 대단한 놈인 걸 진작에 알았으면 이런 망신도 안 당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헤엄쳤다. 갑자기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붉게 상기된 얼굴을 푹 숙이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잡아왔다. 김한빈이면, 진짜 쪽팔린건데.
"튕기는 맛도 있네"
들려오는 말이 쫀득하게 내 귀에 달라붙었다. 목소리가 영락없는 김한빈이었다. 아 씨.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김한빈이 손을 뻗어 내 턱을 치켜올렸다. 내 발간 얼굴이 김한빈을 향했다.
"부끄러워 할 줄도 알고."
김한빈은 말을 내뱉고는 푸스스 웃더니 내 손과 제 손을 겹쳐왔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내 옆에 서서는
"같이 학식 먹으러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