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01 (어느 봄 날)
"아니, 이거… 이거 왜이래?"
침대에 누운 채 오른쪽 협탁 위에 올려져있는 자명종 시계를 들어올렸다. 어제 분명 오늘 오전 6시 30분에 알람이 울리도록 맞춰놨는데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시계의 시침과 분침, 그리고 초침은 정각 오후 8시에 우두커니 멈춘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누군가의 음모가 틀림없어. 누가 자명종 시계의 건전지를 빼돌린 게 분명해! 하며 시계의 뒤쪽에 있는 뚜껑을 열려 할 때쯤, 머리맡에 놓여있던 휴대폰에서 짧게 진동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가 온 것이었다.
[장난하냐? 전화 왜 안 받아?¿?¿?¿?¿ 먼저 가라고? 알았어. 먼저 감.]
김종인이었다. 현란한 물음표를 몇 개 씩이나 써가며 보내온 문자 메시지가 꽤나 시끄럽게만 느껴졌다. 김종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한 시각-이라 쓰고 현재 시각이라 읽는-은 7시 30분. 등교는 7시 50분까지. 지금 급하게 머리를 감고 교복을 입고 나간다 해도 지각을 면할 순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즉, 19세가 된 이래로 처음으로 등교하는 날인 오늘 아침부터 지각이라니. 첫 날부터 찍히겠구나. 신난다.
머리를 감기도, 교복을 입기에도 아까운 시간을 아침밥을 먹는 데에 할애할 수 없었다. 아침밥은 안 먹어도 되지만, 머리는 감지 않으면 안된다. 아침밥은 안 먹어도 되지만, 교복은 안 입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난 아침밥을 포기하려 한다. 이래도 지각, 저래도 지각… 아, 그럼 아침밥을 조금이라도 먹는 게 나으려나.
*
오늘 하루는 단언컨대, 최악의 하루가, 속된 말론 엿같은 하루가 될 것만 같다. 새 학년 새 학기 첫 날부터 지각을 하지 않나, 오늘 신으려고 꺼내놓은 운동화의 끈이 느슨하게 풀어져있지 않나…. 그나저나 더더욱 문제인 건, 같이 다닐 친구 하나 없이 혼자라는 것이다. 기껏해야 얼굴만 알 뿐, 이야기도 얼마 나눠본 적 없던 친구들이나,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인 친구들 뿐일 것이었다. 내가 지난 학교 생활 동안 너무 김종인이랑만 붙어 다녔었나…. 정신을 차려보니 내 주위엔, 김종인을 제외해 단짝이라 칭할 수 있을 만한 친구가 없었다.
"… 후우."
하필 김종인이랑 반이 떨어질 게 뭐람.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역시 아무렇지 않은 건 없었다. 막상 이렇게 닥쳐오니 괜히 겁이 나면서도 두려웠다.
*
드르륵, 새로운 담임 선생님께 혼날 것을 감수하며 천천히 교실 뒷문을 열었다. 꼭 이런 날-내가 지각하는 날-은 반 학생 전체가 제 자리에 착실하게 앉아있다. 내가 뒷문을 여는 소리에, 서른 몇 명의 눈동자들이 내 쪽으로 향했다. 그 눈빛들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지각생은 나 하나 뿐인 것 같았다. 비어있는 맨 뒤의 창가쪽 자리를 제외한 모든 자리가 학생들로 채워져 있었으니 말이다.
"첫 날부터 지각이네. 이제 고3인데 정신 똑바로 안 차리고 다니지? 엉?"
"죄송합니다…."
담임 선생님이 아직 안 오셨을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일말의 기대감이,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후- 하고 불어버릴 때처럼 한순간에 꺼져버리는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어색하게 허리를 굽히며 죄송하다 말하자, 선생님은 작게 목을 가다듬으시더니 빈 자리를 눈짓으로 가리키셨다. 저 자리에 앉으라는 소리겠지…. 옆자리엔 고동색 뿔테안경을 낀 남학생이 앉아있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우리반 부반장인데, 이번에 또 같은 반이 되었구나. 뭐, 아무렴 상관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키가 작으신 여자 선생님이셨다. 담당 과목은 한국지리라 하셨고, 별다른 말씀 없이 앞으로의 1년 동안 잘 지내보자는 지나치게도 식상한 멘트를 끝으로 본인 소개를 마치셨다. 학기 초반이라 기선을 제압하려는 건지, 아님 선생님의 원래 성격이신 건진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말씀이 끝난 교실은 한동안 적막감이 맴돌기만 했다. 아마 전자가 그 이유일테지. 작년도, 재작년도 그래왔으니까.
도대체 왜 첫 날부터 야간 자율학습을 정상적으로 실행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이제 3학년이니 오히려 더 잘된 일인가? 아냐, 난 그래도 내일부터 공부하겠다 마음 먹었었다고…. 원래 공부랑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이건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절대불변의 법칙이다.
집에서 가져온 몇 가지의 문제집들과 교과서들을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제비뽑기를 하든,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랜덤으로 번호를 돌리든가 해서라도 자리를 바꿀 줄 알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 앉은 자리로 앉다가 한 달이 지나면, 그때서야 자리를 바꾸겠노라고 담임 선생임은 말씀하셨다. 맨 뒷자리라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맨 앞자리 보다는 훨씬 낫다는 점에 감사하며 강당으로 이동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요즘 시업식은 시업식 같지도 않다. 사실 시업식 뿐만 아니라, 방학식, 개학식, 하다 못해 종업식이나 졸업식도 예전 그 느낌이 나는 것 같진 않다.
전교생들이 모인 강당은 한없이 좁아보였다. 1층, 2층으로 나누어진 강당의 2층은 3학년들의 차지였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반은 9반이니 오른 편…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강당 안에 가득 울려퍼졌다. 새로운 교복이 아직 어색한지 제 옷 매무새를 자꾸 매만지기만 하는 1학년들, 이미 1년을 겪어 이젠 익숙하다는듯 자기네들끼리 한 데 뭉쳐 시끄럽게 떠들고있는 2학년들이 2층 아래로 가득 보였다. 마치 개미떼들처럼 바글바글거리는 까만 머리통들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만 있자니 왠지 모를 웃음이 나왔다.
"……."
그건 그렇고, 너무 따분하다. 친한 친구가 없으니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저 가만히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 앉아있는 이 자리도 너무 어색하고, 이 곳의 분위기도 너무나 어색하다. 모든 것이 어색해. 온통 어색한 것으로만 가득하다. 역시 이럴 땐 아무리 할 게 없어도 휴대폰을 꺼내, 볼 일 없는 카카오톡에 들어가, 이미 본 적 있는 다른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을 다시 한 번 더 들여다보는 게 가장 좋은 상책이다.
"… 어."
휴대폰을 꺼내려 살짝 몸을 돌렸을 때, 저 멀리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괜히 치솟는 그리움과 반가움에, 그만 눈물이 흐를 뻔했다.-사실 지나친 과장이지만-
- 김종이뉴ㅠㅠㅠㅠㅠㅠㅠㅠㅠ
- 딤종인
- 김
- 종이야
- 김종이!!!!!!!!!!!!
- 김paper~
- 야
- 확인 좀 해라...(흑흑)
- 나 아는 애 없어... 외롭다고..
연속으로 몇 개의 카톡을 다다다- 보내곤 김종인 쪽을 흘끗 보았다. 웃고 떠드느라 진동 소리를 느끼지 못한 건지, 그냥 무감각인 건지, 김종인은 휴대폰을 꺼내들지 않았다. 그 모습에 괜히 심술이 나면서도 답답해, 다시 빠르게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 야야야
- 헤이
- 호우
- Hey
- 야인마
- 감각이 없으세요?
- 야~~~~~ 호~~~~~
- 김종이ㅣㄴ
- 김조닌
- Kim Jong In
- ㅡㅡ
- (울음)
느꼈다. 꺼냈다. 봤다. 읽는다. 이제 답장이 오겠지. 하며 잔뜩 들뜬 마음으로 휴대폰을 꼬옥 잡았다. 그러나 김종인은 아예 버튼 하나 누르지 않은 채 휴대폰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시켜 카톡 메시지를 읽곤 다시 제 겉옷 주머니 속으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제 옆에 앉아있는 친구-같은 댄스 동아리였다며 이번에 같은 반이 되어 김종인이 굉장히 기뻐라하던 오세훈이라는 사내-와 다시금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는 '김종인' 이라는 딱딱한 세 글자 뒤에, 더 딱딱한 두 글자를 추가해야 하는 것이 마땅함을. '김종인새끼'
*
지루하기만 했던 시업식이 끝나고, 일부러 천천히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김종인이 서서히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라 하지? 아프다 할까? 아님, 학원?"
"학원은 내가 써먹을 거야, 새끼야. 넌 아프다 하던가, 음… 아씨, 어떡하지?"
태평하게 대화를 나누며 티격대듯 걸어오는 180 남짓의 사내 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곤 눈이 마주쳤다. 게임 얘기에 열중한 채 한껏 토론을 펼치며…
"… 어, 뭐냐. 너 안 내려가? 여기 멍청이같이 서서 뭐해?"
내게 짜증스러운 말을 지껄이는 김종인과.
"너… 이씨, 왜 내 카톡 무시하냐?"
"카톡?"
"모르는 척 하지마. 아예 대화방도 안 들어와 봤지, 팝업창에 뜬 메시지 보고 아예 폰 집어넣었잖아. 차라리 그냥 제대로 된 읽씹을 하든가. 얌체도 아니고 그게 뭐냐. 그냥 읽씹보다 그런 얌체같은 읽씹이 더 나빠, 너."
"… 너 나 감시하고 사냐? 소름 끼치네."
"어디서 적반하장이야? 내 카톡 왜 무시했어? 진짜… 내 마음은 쥐뿔도 모르고…."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 보고만 있던 김종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죄를 지은 마냥 옆에 멀뚱히 서서 김종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던 오세훈이 슬슬 머쓱해졌는지, 애꿎은 제 머리칼을 정돈하는 척을 해보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 먼저 교실 간다. 얘기 나누다 와."
그리곤 휘적휘적 강당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마치 알콩달콩 얘기를 나누던 연인 사이에 눈치없이 낀 옛 친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하여간 기분이 더러웠다.
"짜증나, 너. 평소에도 내가 카톡 보내면 이딴식으로 씹고 그래?"
"아니, 아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어쩔 수 없는 상황? 오세훈이랑 웃고 떠들던데? 그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 아씨, 몰라. 이딴 걸로 화내는 나도 참 우습다."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어느새 강당 안은 김종인과 나, 둘만이 남게 되었다. 입학식을 비롯한 시업식이 살짝 길어졌던 탓에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아아, 오늘 입학식을 비롯한 시업식이 10분 정도 길어진 바람에, 다음 수업 시작 시간이 조금 바뀌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강당 안에 학생 부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머쓱한듯 제 뒷머리를 긁적이던 김종인이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내 어깨에 제 팔을 거칠게 걸쳤다. 그 느낌이 아프기도 하고 무겁기도 해서 억지로 녀석의 팔을 떼어놓으려 안간 힘을 썼지만, 역시 남자는 남자였나 보다. 꿈쩍도 않는 녀석의 팔을 마지못해 가만히 놔두곤, 눈을 치켜 뜨며 김종인을 째려보았다.
"강당 안에 갇히겠다. 얼른 교실이나 가자."
"또 이렇게 그냥 넘어가지?"
"내가 뭘 또."
다른 쪽 손으로 내 머리칼을 잔뜩 흩뜨려놓는 녀석 탓에, 안그래도 곤두서있던 신경이 더욱 더 예민하고도 날카로워지는 것만 같았다. 팔꿈치로 김종인의 복부를 가격하곤, 녀석이 아파하며 배를 부여잡을 때쯤 다시 손바닥으로 녀석의 등을 찰싹-하고 내려쳤다.
"머리 막 이렇게 헝클어놓는 거,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이거든?"
"… 아, 너 여자 아니잖아."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채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는 녀석에게 헛웃음을 크게 내뱉곤 천천히 먼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같이 가자며 아픈 배를 부여잡고 걸음을 빨리 해오는 김종인을 슬쩍 바라보며 꽤나 얄밉게 느껴지도록 비웃어주곤 교실까지 빠르게 뛰었다. 역시 쉬는 시간이라 그런지, 교실 안은 적당히 어수선했다. 터벅터벅 걸어 내 자리로 와 앉았다. 다시금 피어오르는 외로움과 어색함에, 한 번도 펴 보지 않아 표지가 빳빳한 문학 교과서를 꺼냈다. 잘 읽히지 않는 문학 작품을 일부러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어보았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딱 이 문장을 다 읽었을 때, 겉옷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문자가 아닌 카톡이었다. 상대는 김종인.
더이상 아예 확인조차 하지 않아 노란색으로 작게 쓰여있는 1이라는 숫자가 없어지질 않았다. 아직 확인을 안 한 것이거나, 아까처럼 미리 봐버리고 아예 씹는 것. 둘 중 하나겠지. 재수없는놈.
오늘따라 쉬는 시간이 왜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문학 작품만 읽으며 쉬는 시간을 흘려 보내기엔 뭔가 아쉬워, 김종인의 프로필 사진을 꾸욱 눌렀다. 작게 봤을 땐 무슨 외계인인 줄 알았는데, 나름 귀엽게 찍는답시고 손으로 모양을 만들어-아무리 봐도 저건 스키장에서나 쓰는 고글 같다.- 찍은 자기 사진이었다. 저런 사진은 누가 찍어줬대…. 아님 타이머 맞춰놓고 지가 혼자서 찍은 거 아냐? 그 생각을 하니 괜히 웃음이 터져나왔다.
"저기."
툭툭, 옆에 앉아있던 짝꿍이 내 팔을 쳐왔다. 선생님 들어오셨어. 휴대폰 집어 넣어야 돼. 김종인 프로필 사진에만 온 신경이 집중해있던 탓에 수업 종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휴대폰 홀드를 닫은 뒤 다시 주머니 속에 쏘옥 집어 넣었다. 문학 시간, 아마 꾸벅꾸벅 졸게 될 것이다.
*
"모르고 내일 시간표로 챙겨 왔어."
3교시 쉬는 시간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다짜고짜 우리반 교실 앞으로 찾아와 나를 불러낸 김종인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문학 교과서 좀 빌려주라."
제법 당당하고 활기찬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저 녀석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 보고만 있자, 나를 지나쳐 터벅터벅 교실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멍하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만 있는 김종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곤 녀석의 팔을 툭 쳤다.
"우리 교실에 멋대로 들어오면 안돼. 칠판 안 보여? 몽쉘 32개 사오기."
맛 좀 보라는 듯한 어투로 칠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녀석의 인상이 서서히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아랑곳 않은 채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내 자리를 찾는다.
"아, 여기네."
예상 외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꽤나 빠르게 내 자리를 발견해낸 김종인이 피식 웃으며 내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자연스레 책상 서랍으로 손을 집어넣어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 녀석이 내 자리를 단번에 찾아냈을까를 고민할 즈음,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샤프-김종인이 16살의 내 생일 때 선물로 줬던-와 대문짝 만하게 이름이 적혀있는 미통기 교과서가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아…
"4교시 끝나고 바로 갖다 줄게."
"뻥치시네. 맨날 교과서 같은 거 빌리면 다음 날에 주거나, 내가 직접 찾아가서 달라고 닦달을 해야 돌려주면서."
괜히 찔리는지 녀석이 제 뒷목을 어루만지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제 큼지막한 손으로 내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는다.
"이번엔 빨리 갖다줄게. 필기는 하지마?"
"어, 하지마. 너 글씨 지렁이잖아. 그리고 어차피 할 것도 없을 걸. 내가 필기 다 해놨거든."
"올, 웬 일로? 너 문학 시간에 맨날 졸잖아."
"… 아니야."
아니라고 말 하면서도 괜히 찔렸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김종인이 피식 웃음지었다. 그리곤 천천히 뒷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황급히 시계 쪽으로 시선을 옮겨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쉬는 시간은 6분이나 남아있었다. 녀석이 반으로 돌아가면 난 또 혼자가 되어 의미없는 행동을 되풀이 하거나,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려 하겠지. 아직 말을 붙여본 친구도 없으니….
"데려다 줄게."
"뭐?"
"네 반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바로 옆 반이잖아. 데려다 주긴 무슨."
"아, 그래도!"
어린 아이같이 떼를 쓰듯 녀석의 교복 와이셔츠 끝을 당기며 막무가내로 말하자,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마냥 고개를 갸웃한다. 네가 내 심정이어 봐라, 분명 이러고도 남았을 걸.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놓고."
"아, 미안."
서둘러 녀석의 옷깃에서 내 손을 떼어냈다. 그리곤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교실까지 데려다 주겠다던 말이 꽤나 무색할 만큼, 김종인의 교실은 겨우 한 발짝 거리였다. 그나마 뒷문으로 나왔기에 망정이지.
"… 아, 이게 진짜 뭐냐. 반이 코 앞인데 뭘 데려다 주냐고. 어이가 없네."
"아, 널 위해서 내가 그냥…"
제 반으로 향하는 내내 어이없음 50, 우스움 50의 비중을 두고 투덜거리던 김종인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냥 좀 묵묵히 넘어가주면 될 걸 꼭 저렇게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다. 하긴, 김종인은 항상 그랬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1학기 1차 지필평가가 끝난 기념으로 피자집에 가서 피자를 먹었던 때였을 것이다. 피자를 한 조각 반 쯤 먹었을까,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오는 느낌과 뭔가 찝찝한 느낌이 돌아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었다. 예상대로 오늘이 마법에 걸리는 그 날이었으며,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녀석이 눈치 채지 못하게 콜라에 꽂힌 빨대만 빨아 찔끔찔끔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배도 살살 아플 뿐더러 왠지 입맛까지 떨어져 먹고있던 피자 조각만 억지로 먹어 치운 뒤, 녀석이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귀신 같은 김종인이 입 안에 음식물이 가득 담겨 볼이 빵빵해진 얼굴로 나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왜 안 먹냐.'
'아, 배불러서.'
'뻥.'
'진짜거든.'
'너 보통 때 같으면 네 조각 이상도 먹잖아.'
'내가 언제!'
'두 조각 먹고 그만 먹는다는 게 말이 돼? 그럼 나 혼자 남은 거 다 먹으라고? 그럼 나 여섯 조각 먹는 건데?'
'많으면 남기면 되잖아. 물론 돈이 아깝긴 하겠지만….'
'배부르다는 거 뻥인 거 다 알아. 혹시 피자에 침 뱉었냐?'
'아니라고!'
'그럼 왜.'
녀석이 입 안에 있는 음식물을 다 삼키고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켰을 때까지, 내 입은 꾸욱 닫혀 열릴 줄을 몰랐다. 가만히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답답하다는 듯 짜증을 내던 김종인의 표정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 그 날….'
'뭐?'
'그 날… 이라고.'
'그 날?'
'… 아, 생리한다고!'
'…….'
'… 그래서 배도 아프고… 입맛도 없다고….'
'… 미안.'
굳이 이유를 캐묻는 녀석 탓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말했다. 내 대답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작게 사과의 말을 내뱉던 김종인이 어색하게 고개를 떨궜다. 내가 이럴까봐… 숨기려 했던 건데.
하여간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 답을 알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피자집에서의 그 경험 이후로 그 버릇은 조금이나마 사그라든 것 같기도 하지만….
아웅다웅 티격태격 김종인을 반에 데려다주고 다시 반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쉬는 시간은 1분 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4교시는 체육이었다. 대부분의 체육 시간이 그렇듯, 첫 수업은 교실 수업이었다. 제법 험상궂은 인상을 지닌 남자 체육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앞으로 있을 수업 시간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주셨다. 1학기 때엔 이러한 운동을 배울 것이며, 수행평가의 기준은 이렇게…
"어허, 너희들 이제 고3이야. 아직도 고1, 고2 때 버릇 못 버리고 꾸벅꾸벅 졸면 어쩌자는 거야?"
자신의 코 앞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한 남학생의 책상을 몽둥이로 툭툭 치며 선생님께서 내뱉으신 말이다. 번쩍 잠에서 깨어난 학생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모든 선생님들이 다같이 짜기라도 한 듯, 술술 나오는 문장들엔 공통적인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너 이제 고3인데 뭐하는 거니. 고3인데 그래도 되겠어? 고3이니까 정신 차리고 공부해라. 공부 열심히 한다고 해가 될 건 전혀 없다. 고3인데. 고3이니까. 고3이잖아. 고3…
그놈의 고3.
… 고3이 뭐길래.
*
15분? 20분? 동안의 꿀잠이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마치신 선생님께서, 남은 시간은 자유 시간을 주셨다. 본인도 이렇게나 설명이 일찍 끝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조금은 얼떨떨해 보이기까지 했다. 20분 남짓 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하다, 결국 책상 위로 엎드린 채 눈을 꼬옥 감았다. 공부의 왕도나, 공부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똑똑한 학생들은 누누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수학 문제 하나를 풀어 보라고. 그 당시에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 느껴질 만큼 쉬운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책상에 엎드려있던 상체를 일으켜 시계를 확인했다. 몇몇의 아이들은 종이 울리자마자 급식실로 달려간 것인지, 몇 개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오늘 급식은 과연 뭘까. 자고 일어나서 목이 좀 마른데, 시원한 사과주스나 딸기우유가 나왔음 좋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바로 옆인 김종인의 반으로 향했다. 거의 항상 그래왔듯이, 급식을 같이 먹기 위해서였다.
"어, 거긴 한 시간에 1000원이야."
"진짜? 왜이렇게 싸냐. 내가 가는 PC방은 한 시간에 1500원인데."
"대신 1년 뒤엔 1500원 내야 한다."
"왜? 담뱃값이나 과잣값 오르듯 PC방도 오르냐?"
"아니, 성인되잖아."
"아, 맞다…. 영원히 미자이고 싶다."
반쯤 열려있는 뒷문 사이로 김종인과 오세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의 대화 주제는 게임, 야동이라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또 게임과 PC방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종인과 오세훈 사이에 낄 수가 없었다. 오세훈과 안면은 텄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며, 김종인은 분명 오세훈과 같이 급식을 먹으러 갈 것처럼 보였고, 내가 그 사이에 낀다는 건 어느 방면으로 보든 민폐였기 때문이다.
뭐 어쩌겠어.
그냥 나 혼자 먹으러 가야지….
*
"감사합니다."
후식 메뉴인 에그타르트를 급식판에 올려주신 급식 아주머니께 작게 목례를 하며 감사의 멘트를 전해드렸다. 혼자 먹는 급식은 처음인 것 같다. 어디서든 혼자 무언가를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라, 급식을 먹을 때도 누누이 김종인과 함께 먹곤 했다. 녀석은 댄스 동아리였기 때문에, 동아리 부원들끼리 점심 시간마다 모이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난 교실에서 녀석이 오기만을 기다리다, 점심 시간이 20분이나 지나고 나서야 녀석과 급식실로 향하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여느 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오늘은 혼자였다.
…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김종인 교실에 들어가 볼 걸 그랬나. 빌려줬던 문학 교과서를 가지러 왔다는 핑계로…. 어차피 기회는 이미 떠나갔으니,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빠르게 생각을 지우곤 아무 빈 자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 먹는 것도 서러우니, 얼른 먹고 교실로 가야겠단 생각이 가장 먼저였다. 자리에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며 젓가락으로 밥을 작게 떠보였다. 푸슬푸슬, 우리 학교 밥은 왜이리 꼬들꼬들한지 모르겠다. 난 이렇게 푸석푸석하고 꼬들꼬들한 된밥 보단 약간의 물기도 있으면서 반짝반짝 윤기도 나는 진밥이 좋은데 말이지.
"… 아."
몰랐는데, 아까 걸음을 옮기면서 살짝 흔들렸던 것인지, 국이 반찬 쪽으로 조금 흘러들어가 에그타르트가 반쯤 젖어있었다. 오늘 국 메뉴가 쇠고기무국이었으니 망정이지, 매운탕이나 김치찌개였으면 큰일났을 뻔했다.
"……."
에그타르트가 쇠고기무국에 빠지든, 매운탕에 빠지든. 알 게 뭐야. 빠지든지 말든지. 지금은 단지 외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까.
퍽퍽한 밥을 한 숟가락 떠 먹고 깍두기를 하나 입에 집어넣었다. 분명 배는 고픈데 밥은 잘 넘어가질 않았다. 오늘따라 밥이 맛없다. 국도 내가 좋아하는 국인데…. 하는 수없이 밥을 국에 말았다.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아무렴, 상관 없었다. 어차피 안 나올 테니까. 그리고 나와봤자… 나 혼자니까. 혼자라 아무도 볼 사람이 없으니까.
얼른 친구를 사겨야지, 내가….
"… 왜 혼자 먹냐."
바로 앞자리에 누군가의 급식판이 놓여졌다. 그게 누구인진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털썩 앉는 김종인에게 슬쩍 시선을 줬다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급식판을 내려다 보았다.
"네 에그타르트는 왜 이러냐. 국에 반신욕을 하고 있네."
장난스러운 녀석의 목소리를 듣자 괜스레 또 다시 울컥해지는 기분이었다. 서서히 눈가에 눈물이 차올라, 시선이 향해있는 급식판이 흐물흐물하게 보였다. 눈 앞이 눈물에 가려 뿌옇기만 했다. 수업을 혼자 듣고, 이동 수업 때엔 혼자 이동하고, 쉬는 시간엔 혼자 할 일을 하고… 다 상관 없었다. 조금 외롭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밥을 혼자 먹는다는 건 정말이지… 싫었다.
"왜 말 무시해. 나한테 삐진 거라도 있냐?"
"… 오세훈은?"
"밥 먹겠지. 왜."
"… 누구랑."
"지 친구들이랑? 아, 잘 몰라."
"……."
"교실 가보니까 네가 없길래 무슨 일인가 했지."
"……."
"왜 먼저 왔냐. 혼자 먹는 건 죽도록 싫어하면서 혼자 먹고 있고."
"……."
"여보세요, 저기요."
똑똑, 소리가 나게 테이블을 두드려 내 주의를 제게로 집중시킨 김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괜히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녀석은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었다. 그러면서도 녀석에게 입을 꾸욱 다물고 표정에도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 건, 단순히 나에 대해 차오르는 창피함과 짜증감 때문이었다.
"왜그러는데. 반에서 무슨 일 있었어?"
"……."
"야."
"… 종 치자마자 너희 반 앞으로 갔었어."
"……."
"너랑 점심 같이 먹으려 했는데, 오세훈이랑 얘기하고 있더라."
"……."
"근데 내가 그 사이에 어떻게 끼어. 오세훈이랑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민폐잖아."
"날 불렀어야지. 교실 안까진 안 들어오더라도, 복도에서 날 불렀음 됐잖아."
"말했잖아. 민폐라고."
"민폐고 말고 할 게 어딨어.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민폐 어쩌고를 따졌는데?"
"너한테 민폐라는 뜻이 아니잖아."
"오세훈 좋아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럼 그딴 걱정 하지마. 걔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아. 그니까 이따 석식 먹을 땐 당당하게 나 불러."
"야자 짼다며."
"… 아."
"……."
"석식은 먹고 갈게."
설마 그거 때문에 삐진 거냐? 하여간 잘 삐진다니까. 김종인이 덧붙여 말했다. 그 말을 애써 무시하며 젓가락으로 깍두기를 하나 집어먹었다. 그 후론 김종인도 별말이 없었다. 5분~10분 정도 더 일찍 급식을 받아 먹기 시작한 나보다 녀석의 급식판이 더 빠르게 비워지고 있었다. 괜히 입맛이 없어 남은 반찬들을 국에 밀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김종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다 남기냐."
"입맛이 없어서."
"네가 입맛이 없을 때도 있어?"
발로 녀석의 정강이를 툭- 찼다. 예의상 삼선 슬리퍼는 벗고 말이다. 김종인이 작고 짧은 신음을 뱉으며 제 정강이를 어루만졌다. 그런 녀석을 흘끗 바라보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잔반을 처리하고자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같이 가자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물을 꿀꺽꿀꺽 마시곤 먼저 급식실을 나섰다. 그리곤 얼마 안 지나 김종인이 입 안에 물을 가득 머금은 채 급식실에서 나왔다.
"야."
"응?"
"아- 해 봐."
"왜?"
"아, 얼른."
다짜고짜 입을 벌려 보라는 녀석이 조금은 의심스러웠지만, 속는 셈 치고 입을 작게 벌려 보였다. 그러자 곧이어 입에 무언가가 물렸고, 얼마 안 있어 그게 후식 메뉴로 나왔던 에그타르트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먹어."
"이걸 왜 나 줘? 네꺼잖아."
"배불러.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
"별로 안 좋아한다고? 그… 언제지… 작년인가? 그 당시에 에그타르트 나왔었을 땐, 너 다 먹고 또 받아왔었…"
"말도 참 더럽게 많다."
국에 반쯤 적셔진 내 에그타르트가 안타까워, 나를 생각해 대신 자기 것을 준 것이라 멋대로 생각해도 될까… 모르겠네. 김종인 성격에 나를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을 거라는 걸 알지만서도, 괜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괜히. 그냥.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었다. 첫 날부터 시행되는 야간 자율학습인지라, 아예 대놓고 잠을 자거나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이 많았다. 늘 그렇듯 야자 시간은 조용한 기류에 휩싸여 적막하기만 했고, 조금만 움직여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짝꿍의 교과서를 빌려, 문학 시간에 깜빡 조느라 놓쳤던 필기를 그대로 베꼈다. 그리곤 아까 김종인이 빌려간 후로부터 귀퉁이에 조그맣게 생겨난 낙서를 하나둘씩 지우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런 유치한 그림을 왜 내 교과서에다 그리는지 의문이다.
김종인은 정말 칼 같았다. 석식까지 먹고 가겠다는 약속을 칼같이 지켰다. 석식 시간 땐 점심 시간 때와 달리 녀석이 먼저 우리반 앞까지 와 나를 기다렸었다.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사소한 그 행동이 얼마나 고마웠었는지 모른다.
5분 뒤면 야자가 끝난다. 5분 뒤면… 어, 4분. 4분 뒤면 집에 갈 수 있다. 김종인은 아직 PC방이겠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서히 가방을 싸는 아이들이 보였고, 난 느긋하게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아직 종이 치지도 않았는데 가방을 싸는 건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냐. 이제 고3인데 아직도 그 버릇을 못 버린 것이냐… 라는 등의 지겨운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이유가 한 몫 했기 때문이다.
*
3월의 밤은 아직 추웠다. 아침엔 그리 추운 것 같지 않았는데, 역시 밤이 되니 쌀쌀했다. 입고있던 후드집업의 지퍼를 올렸고, 주머니 속에서 이어폰을 꺼내 휴대폰에 연결했다. 휴대폰 배터리가 20퍼센트밖에 없었지만, 음악을 들으며 집까지 가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혼자 하교를 하는 것도 오랜만… 인 건 아니구나. 김종인은 일주일에 야자를 세 번밖에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혼자 하교하는 길은 언제나 무섭다. 3학년들은 1,2학년보다 한 시간이나 더 학교에 있어야 했다. 2학년일 당시엔, 3학년들 불쌍하다. 어떻게 야자를 한 시간이나 더 할 수가 있지….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별다를 바는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이 생활이 익숙해져버린 걸까. 신기하다.
어두운 길거리가 무서워 괜히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펑키한 팝송과는 대조되게, 밤길은 무섭고 음산하기만 했다. 다음부턴 김종인이 야자를 째겠다 말하면 때리고 물어서라도 뜯어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왜냐하면 밤길은 무서우니까. 김종인은 싫지만 밤거리는 무서우니까. 어두운 거리는 무서우니까. 무서우니까. 무서우…
"아악!!"
갑작스레 뒤에서 가방끈을 잡아끄는 누군가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빽 질렀다. 공포에 잔뜩 질린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닿은 곳엔 덩달아 놀란 듯 보이는 김종인의 모습이 보였다.
"… 아씨, 놀랐잖아!"
"뭐래. 내가 더 놀랐다, 너 때문에."
"… 왜 아직도 교복이야? 이제 PC방에서 돌아오는 길?"
"어. 이제 집에 가려고."
"… 아아…."
"근데 앞에 웬 멍청이 같은 애가 보이길래."
"… 죽는다, 진짜."
"너 이어폰 꽂고 다니지 마."
"아, 이거? 괜찮아. 별로 안 위험해."
"아니,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뒤에서 누가 부르면 못 듣잖아. 나 너 한참 불렀어."
"… 그래?"
"어. 누가 보면 너 귀 먹은 줄 알겠다. 앞으론 이어폰 꽂고 다니지 마라. 내가 네 사회성을 길러주기 위해…"
"사회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얼른 가자, 나 추워."
그리곤 한동안 말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손이 시렸는지 제 겉옷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무심히 걷기만 하던 김종인이 갑작스레 한쪽 손을 빼더니 내 가방 고리를 잡아 가방을 들었다 놓았다. 가방이 꽤나 무거웠던 탓에, 녀석이 들었다 놓는 가방 무게에 한 번 휘청하고 말았다.
"가방이 왜이리 무겁냐. 교과서 학교에 안 놓고 왔어?"
"아, 문제집 몇 권 가져왔어."
"어차피 집에서 공부도 안 하잖아."
정곡을 찌르는 듯한 말에 괜히 뜨끔해 어색하게 웃음을 짓곤, 팔꿈치로 녀석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찔렀다. 그러자 피식 웃으며 얄밉게 말한다. 맞구나? 맞지, 맞지? 그리곤 녀석이 내 가방끈을 살짝 잡아당기며 제법 무미건조한 어투로 툭 내뱉듯 말했다.
"줘."
"응?"
"가방 주라고."
"아, 싫어. 별로 안 무거워. 괜찮아."
"너 걱정해서 하는 말 아니야. 내 어깨가 허전해서 그래."
"네 가방은 어디다 두고?"
"집 들렀다 PC방 갔지, 당연히."
"아아…."
"줘, 얼른."
"… 싫어. 됐다니까."
"가방 대신 네가 올라갈래?"
"……."
"농담."
결국 녀석의 고집에 못 이겨 천천히 가방을 넘겨주었다. 가방 속에 들어있는 거라곤 영어 독해 문제집 두 권과 미통기 개념 원리 문제집. 그리고 연습장과 단어장, 공책 몇 권이 전부였다. 아, 추가로 필통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은 꽤나 묵직했다.
"… 하필 왜 빨간색이야."
하필 가방이 왜 빨간색이냐며 투덜거리는 김종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가 멜 땐 엉덩이의 살짝 윗부분까지 내려오던 가방이 김종인의 등에 붙어있으니 꽤나 미니미같이 보였다. 가방끈이 짧은 게 불만인 건지, 녀석은 인상을 찡그린 채 자꾸만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좀 늘리면 안돼?"
"아, 어차피 곧 집인데 뭘. 그냥 가. 귀엽구만."
"귀엽고 나발이고… 밤이라 다행이다."
"밤이 왜? 어차피 넌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잘 안 보이니까?"
"… 아까 네 에그타르트처럼 네 가방도 반신욕이 하고 싶다네?"
아직 빗물이 마르지 않아 물이 흥건하게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가리키며 김종인이 말했다. 황급히 고개를 내젓곤 멋쩍게 웃어보이자, 녀석이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 까불고 있어.
"근데 너, 내 교과서에 낙서 해놨더라?"
"낙서? 아, 봤어?"
"당연히 봤지. 뭔 이상한 외계인 같은 그림을 그려놨던데?"
"외계인? 그거 외계인 아니고 네 초상환데."
"죽고 싶어?"
녀석의 등을 퍽퍽 때리곤 잔뜩 화를 내며 말하자, 그제서야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오는 김종인이다. 매일이다시피 투닥대고 싸우면서도, 어째서인지 화는 금방 풀려버리고 만다. 왜일까? 왜지….
3월의 밤은 아직 추웠다. 시리도록 차가운 추위도 시간이 지나면 물러날 것이고, 어느새 따스한 햇살을 비추는 여름이 올 것이다.
길고 길게만 느껴졌던 엿 같았던 오늘 하루도 어느새 저물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더 나은 오늘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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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돌아왔어요..! 프롤은 현재 시점이었지만, 1화부턴 과거로 돌아간답니다. 근데 분량 조절을 실패했네요...; 죄송해요..
오늘도 역시 감사드리고, 좋은 하루 되세요!
아 그리고! 치환기능? 그게 생겼네요...? 그걸 적용하는 게 나을까요? 아님 그냥 이름을 비워놓는 게 좋을까요.. 고민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