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29 (엇갈림)
"어디 앉을까? 구석? 창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빈자리들을 훑으며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구석으로 가자, 구석. 왠지 모르게 으슥하고 음침한 곳을 좋아하는 듯싶던 녀석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오늘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난 거냐, 왜 책가방도 없이 빈 손인 거냐며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져오던 주인 아주머니 탓에 당황을 하기도 했지만, 임기응변의 지혜를 발휘해 위기를 자연스레 모면할 수 있어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힘들어. 오늘 너무 많이 걸어 다녔나 봐."
"차 가져올걸."
"에이, 말도 안 돼. 교복 입고 운전하게?"
"… 아, 교복이네."
내 말에 작게 탄성을 뱉으며 제 옷차림을 이리저리 훑기 시작하는 김종인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교복을 입은 채 운전을 하는 녀석의 모습이 쉬이 상상이 되진 않았지만, 교복을 수트로 소화시키는 녀석이기에 그리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집에 갈 땐 업고 갈까. 무심한 듯한 목소리에 애써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즉흥적으로 하게 된 교복 데이트도 이젠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뭘 했더라-. 아침 일찍 일어나 교복을 꺼내 입고 김종인이랑 모교를 찾아갔지. 운동장에서 달리기 시합도 했고, 학교 옥상에서 도란도란 얘기도 나눴어. 몰래 학교를 빠져 나가려다 학주 선생님한테 걸려서 이리저리 둘러대느라 애를 먹기도 했지. 그리곤 영화관에 가서 액션 영화도 한 편 봤고, 분식집에서 끼니도 해결을 했어. 학창시절 때도 우리가 연인 사이였다면 아마 오늘 같은 날들의 반복이었을까. 되게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인데 그 당시엔 왜 하지 못했을까에 대한 아쉬움, 그리워해봤자 어차피 다신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먹먹함이 괜히 가슴을 후려치는 것만 같았다. 얼마 안 있어 다가올 개강을 생각하니 더더욱 울적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개강 생각하니까 숨이 턱턱 막혀."
"그럴 땐 내 생각을 하면 돼."
"… 그건 무슨 논리야?"
"종인이 논리."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로 저런 말을 하면 정말이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을 수가 없다. 논리정연하네. 웃음기 가득 섞인 목소리로 답을 하자, 조금은 민망한 건지 살풋 웃음을 지으며 제 음료를 한 모금 들이키는 김종인이다.
"바빠지겠네. 아마 과제 때문에 잠도 늦게 자겠지."
"… 끔찍하다."
정말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려 보였다. 그리곤, 내 머리를 두어 번 쓸고 지나가는 김종인의 큼지막한 손을 맞잡으며 테이블 위로 늘어지듯 엎드렸다. 그런 내 행동에 저도 덩달아 엎드린 건지, 맞은 편에선 녀석의 샴푸 향이 풍겨왔다. 한결같은 달큰한 향에 기분이 좋아지려던 찰나,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살짝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종인아,"
"응?"
"우리 노래방 갈까?"
"노래방?"
"응, 노래방. 나 마지막으로 갔던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
"너 어렸을 때 맨날 숫자송만 불렀는데."
"… 아니야."
"아니야?"
창피하다는 듯 고개를 아래로 떨구는 내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김종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단지 잊지 못할 추억이나 하나 더 만들자는 의도로 꺼낸 한 마디였지만,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해줄 줄은 몰랐다. 뭣도 모르던 초등학생 시절, 노래방만 가면 항상 숫자송이나 당근송, 우유송을 부르던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걸 김종인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는데….
"노래방 하니까 갑자기 그거 생각난다. 보건쌤 결혼식 때 백현오빠가 축하 불렀던 거."
"아, 그거."
"노래 진짜 잘하시더라. 깜짝 놀랐어."
"잘하긴 잘하지."
"오세훈이 그러던데, 종대오빠도 잘한다고."
"둘이 비슷비슷해."
"진짜? 그럼 되게 잘하는 거겠네. 한 번 들어보고 싶다…."
"내 앞에서 굳이 그 형들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야."
내 말에 무심히 답을 해주는 듯싶던 김종인의 어투가 한층 딱딱해졌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괜히 주눅이 들어 입을 꾸욱 다문 채 애꿎은 음료의 컵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남자 얘기를 꺼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이게 그렇게 정색을 하고 받아들일 일인가에 대한 서운함이 공존해 마음속 한데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게 아무리 실수였다 한들, 어쨌든 내가 잘못한 게 맞는 거겠지. 나도 모르게 네가 싫어하는 행동을 해버린 셈이니까.
"아, 미안."
'미안'이라는 짧디 짧은 단어엔 왠지 모를 어색함과 머쓱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저도 그걸 느낀 건지, 김종인의 미간은 더욱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녀석은 웃고 안 웃고의 인상 차이가 꽤나 큰 것 같다. 웃을 땐 마냥 아기 곰돌이처럼 귀엽고 순수한 인상을 그리지만, 지금처럼 딱딱한 표정을 지을 땐 정말이지 차가운 인상이 되어 버린다. 그게 신기하다고 느끼던 때도 되게 오래 전인 것 같은데, 사실 신기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뭐, 미안할 것까지야."
음료의 정중앙에 꽂혀있는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바라보던 김종인이 낮게 답했다. 분명 화가 난 얼굴인데, 목소리는 꽤나 차분했다. 그런 녀석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곤, 조금이나마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휴대폰을 집어들어 카메라 어플을 실행시켰다. 교복을 수트로 소화시키는 김종인의 옆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
초점과 각도까지 잘 맞춘 뒤 촬영 버튼을 꾸욱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김종인을 포함한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젊은 커플의 시선이 내게 꽂혀왔다. 분명 무음이었던 것 같은데 왜 소리가 났지, 몰래 사진을 찍었다고 또 짜증을 내진 않을까-. 순식간에 차오르기 시작하는 생각들에, 괜스레 허둥대며 다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런 내 모습에 살풋 웃음을 터뜨리던 녀석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내 휴대폰을 쏘옥 집어들었다.
"대놓고 찍어도 상관없는데."
"……."
"사진 하나 찍는다 해서 내가 뭐라 할 것 같아? 더구나 너한테."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와 시선을 맞추며 피식 웃음을 짓던 김종인이 내 휴대폰의 홀드를 열었다. 홀드를 열자마자 보이는 잠금화면과 배경화면이 모두 제 사진인 것을 확인한 녀석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귀여워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테이블 위로 몸을 기대 엎드렸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휴대폰을 이것저것 만지는 듯싶던 녀석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왜? 눈을 동그랗게 떠보인 채 묻자, 마음에 안 드는 무언가라도 본 듯 꽤나 안 좋은 표정을 내비치고 있는 녀석이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잠금도 걸어놓지 않은 채 휴대폰을 무방비 상태로 두었던 게 화근인 듯했다.
"박찬열이랑 찍은 사진이 아직도 있네."
"응?"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김종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러자 녀석은 내게 휴대폰을 들이밀며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바로 눈앞에 위치한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사진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을 테지.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그와 함께 벚꽃을 보러 갔을 때. 분명 지웠다 생각했는데, 아직 사진 몇 장이 남아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그저 녀석의 눈치만 살살 살피며 살며시 휴대폰을 건네 받곤 황급히 사진들을 삭제했다. 언제 적 사진이 지금까지 있는 건지….
"아, 분명 전에 삭제했던 것 같은데…. 내가 착각을 했나 봐."
김종인의 표정은 확연히 굳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뭐."
정말 괜찮은 건지, 애써 괜찮은 척을 하는 건지, 김종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분명 화난 얼굴인데,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다.
"이제 갈까. 아, 노래방 가자 했나."
"… 아니야. 그냥 집에 가자. 피곤하다."
이내 미소를 머금은 채 물어오는 녀석에게 애써 고개를 저어 보였다. 사실 피곤하다는 건 핑계였다. 아무리 피곤하다 해도 어떻게든 오랫동안 같이 있을 구실을 만들어내는 나지만, 이런 애매하고 찝찝한 상황에 노래방을 갈 순 없을 듯했다. 가봤자 제대로 즐기기는 커녕, 어색함에 서로 눈치만 볼 게 뻔하니 말이다. 애꿎은 휴대폰의 홀드를 열었다 닫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음 몇 개가 들어있던 컵엔 어느새 얼음이 녹은 미지근한 물만이 남아 있었다.
*
제법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깍지를 낀 손에 슬슬 땀이 차는 것도 같았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김종인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집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눈 대화가 다섯 마디는 되려나-. 분명 화가 난 얼굴이지만,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하고도 침착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녀석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인위적인 가로등 불빛이 살포시 내려앉은 머리칼은 밝은 갈색빛을 띠었다. 살짝 긴 앞머리에 가려 눈매가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이 짓고 있을 표정은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졌다.
"왜."
제 옆모습을 훑는 내 시선이 느껴진 건지, 김종인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춰왔다. 화났어? 까만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며 조심스레 묻는 내 목소리엔 자신이 없었다.
"아니."
화난 거 맞으면서. 마음속에 찝찝한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는 게 확실한데, 내가 봐도-.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젓는 김종인을 바라보다 미세히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내 모습에 녀석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몰랐는데, 어느새 코앞엔 우리집이 떡하니 위치해 있었다.
"지금 너, 화났을 때 얼굴이야."
"화 안 났다니까 자꾸 그러네."
"… 하지 마. 뽀뽀 안 하고 싶어."
곤란하다는 듯 애꿎은 제 뒷머리를 쓸어내리던 김종인이 이내 가까이 다가와 내 뺨을 감싸왔다. 따뜻하면서도 조금은 거친 손의 촉감에 넋을 놓으려던 것도 잠시, 가벼운 키스를 하고자 천천히 다가오는 입술을 슬쩍 밀어내며 미간을 좁혀 보였다. 안 하고 싶어? 축 처진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애써 꾸욱 참으며 천천히 입술을 열어 말을 잇기 시작했다.
"휴대폰에 있던 사진 때문에 그래?"
"뭐가."
"알면서."
단호한 어투에 김종인의 눈썹이 살짝 꿈틀댔다. 그런 녀석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작게 한숨을 내뱉곤 큼지막한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잡았다. 아무래도 찝찝해 이대로 헤어질 순 없을 듯했다. 화가 난 건 아닐지라도 기분이 별로인 건 확실한데, 그 원인이 내게 있다면 어떻게든 풀어줘야 할 것만 같아서였다.
"종이야,"
"응."
"집에서 얘기 좀 하다 가."
"무슨 얘기."
딱딱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어깨를 살짝 으쓱여 보였다. 그리곤 익숙하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꾸욱 눌러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냉랭함에 살짝 몸을 움츠리곤 컨버스화의 끈을 풀었다.
"……."
쉽게 벗겨지지 않는 신발에 인상을 찌푸리려 할 때쯤, 김종인이 무릎을 굽혀 앉는 듯싶더니 무심히 신발을 벗겨주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작게 헛기침을 뱉자,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맞춰오는 녀석이다. 희미하게 지어진 미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 황급히 거실을 지나쳐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나를 따라 덩달아 방 안으로 발을 디디던 녀석이 살며시 방문을 닫았다. 그저 침대에 살포시 앉아 녀석의 행동을 바라보고만 있다,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을 건넸다.
"여기 앉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오는 김종인의 모습이 마치 귀여운 강아지와도 같이 느껴져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옆자리에 털썩 앉아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에게선 포근한 향이 풍겨왔다. 그런 녀석을 흘끗 보다 다시금 큰 손을 잡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화난 거 없어, 진짜?"
"없어."
"있으면 있다 해도 되는데. 풀어주고 싶어서 그래."
"없는 걸 어떻게 있다고 해."
끝까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어 보이는 김종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아니라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 자라난 찝찝함이란 쉬이 해소될 리가 없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괜히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을 뿐더러, 나 또한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신경 쓰지 마. 괜찮다니까."
웃음 섞인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정말 괜찮다는 걸 확인이라도 시켜주고 싶은 건지, 장난이라도 치듯 내 검지손가락의 끝을 살짝 깨무는 녀석이다. 그 느낌이 따끔하면서도 간지러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녀석은 아까 못 한 입맞춤을 퍼부어오기 시작한다.
"… 간지러워."
"너 간지럽히는 게 내 취미야."
지금 이 곳이 침대 위라는 걸 자각하곤 점점 깊어지려는 입맞춤을 자연스레 막아냈다. 그런 내 모습에 작게 고개를 갸웃해 보이는 듯싶던 김종인이 이내 기지개를 쭈욱 켰다.
"나 자고 갈까."
"너 편한 대로 해. 네 집에서 자는 게 더 편하긴 할 텐데…."
내 어깨에 기댄 채 툭 내뱉듯 말하는 김종인에게 덩달아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런 내 대답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작게 하품을 하던 녀석이, 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싶더니 천천히 방안을 훑기 시작했다. 볼 것도 없는데 도대체 뭘 구경하겠다고-. 느리게 고개를 움직여가며 주변을 둘러보는 녀석을 흘끗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내지었다. 살짝 짧은 교복 바지를 보자 다시금 웃음이 터졌다. 내심 부끄러웠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교복 데이트를 해주었다는 것에 은근한 고마움이 느껴졌다. 오늘 이후로 아마 다신 입을 일이 없을 교복이니, 오늘이 가기 전에 이런저런 자잘한 추억들을 만들어두고 싶었다. 휴대폰 앨범엔 오늘 찍은 사진들이 제법 많이 쌓여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서 찍은 셀카 사진, 학교 옥상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김종인 사진, 카페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김종인 사진, 영화 티켓을 입에 문 채 옷 매무새를 정돈하는 김종인 사진-.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김종인 사진이 거의 전부였지만, 그 많은 사진들 중 둘이 같이 찍은 셀카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게 조금은 놀라웠다.
"종이야, 우리 셀카 찍을…"
"이거 뭐야? 향수."
기쁜 마음을 가득 끌어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김종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우리 셀카 찍을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녀석의 물음에 힘없이 먹혀 들어가고 말았다. 녀석의 긴 손가락이 책상 위 작은 상자를 가리켰다. 예쁘게 포장이 된, 누가 봐도 선물로 보이는 상자였다.
"어? 아, 향수…."
"남자 향수네. 내 거랑 똑같은 거."
"……."
"누구 주려고."
실은 얼마 전, 향수 매장에 들러 향수 하나를 구입했다. 김종인에게 사줬던 것과 같은 종류의 향수로 말이다. 나를 향해 던져오는 물음에 애꿎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죄를 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떨굴 필요는 물론 없었다. 그러나, 왠지 녀석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 화부터 낼 것만 같아 겁이 났다. 나도 모르게 바닥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바로 앞에선 녀석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내 건 아니잖아, 그치."
"……."
"누구 거야?"
"……."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
"네가 왜 말을 안 해주는 건지 궁금해."
도경수 선배 줄 선물이야. 그동안 작게나마 고마웠던 일이 너무 많았어서, 감사의 의미로 향수 하나 구입했어. 네가 그 향 좋다 했잖아. 그래서 그냥 너랑 같은 향수로… 산 건데. 사실대로 말하면 화낼 거지. 화낼 거잖아.
"말하기 곤란한 거면 굳이 안 해도…"
"아빠 생신 선물이야."
순간적으로 떠오른 답에 다짜고짜 입술을 열어 한 마디를 뱉었다. 내 입술로 향해있던 김종인의 짙은 시선이 이내 내 눈동자로 꽂혀왔다. 굳게 닫힌 녀석의 입술이 살짝 움찔댈 때마다 내 심장도 덩달아 움찔대는 것만 같았다. 표정이 어둡다. 눈꺼풀이 감겼다 뜨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 아, 그래."
"……."
"나도 선물 하나 사드려야겠다."
아무렇지 않게 답하곤 김종인이 선물 상자를 집어들었다. 상자의 디자인을 훑는 둥, 괜히 겉표면을 만져보는 둥 의미없는 행동들의 연속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 보면 내가 참 죄인이 된 것도 같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스스로 덜컥 겁을 먹고 걱정을 하는 꼴이라니, 정말이지 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 아."
그리고, 결국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상자가 살짝 열려있던 게 화근이었을까, 안에 들어있던 조그마한 편지 하나가 책상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아 상황을 모면하자니, 그건 이미 늦은 듯했다. 슬쩍 훑기만 해도 한눈에 딱 들어오는 큼지막한 글씨가 꽤나 보기 껄끄러웠다. 'To. 도선배'
"도선배?"
"… 아, 그니까…."
"아버님 생신 선물이 아닌 거네."
"……."
"거짓말이었구나."
꽤나 담담한 목소리로 해오는 날카로운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상황이 답답하고 화가 난다는 듯 김종인이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나. 향수의 주인이 그였다는 사실보다 녀석을 더욱 화나게 한 건 아마 내 거짓말일 듯했다. 일부러 화를 돋우려던 건 당연 아닌데, 나도 모르게 녀석의 신경을 건드려 버리고 만 셈이었다. 굳게 다물어진 도톰한 입술은 조금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덩달아 무거워진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며 녀석의 소매 끝을 잡았다.
"… 그동안 선배한테 여러모로 고마웠던 게 많잖아. 보답이라도 좀 할 겸…"
"안 궁금해, 그런 건."
"……."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화를 내, 짜증을 내."
"……."
"그거 말하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데."
제 소매의 끝부분을 잡고 있던 내 손가락을 슬쩍 떼어내 부드럽게 손을 맞잡은 김종인이 다시금 한숨을 뱉었다. 억지로 화를 참아내려는 듯한 모습에 괜한 미안함이 차기 시작했다. 그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녀석의 말을 곱씹었다.
"… 미안."
"미안하다는 말 그만 듣고 싶어."
식상한 사과의 멘트를 단칼에 잘라내 버리는 김종인의 모습에 다시금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나름 배려랍시고 거짓말을 했던 건데, 내 마음은 조금도 이해해주려 들지 않는 녀석에게 은근한 서운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라는 거야, 미안하단 말도 듣기 싫으면.
"그래도 나름 널 생각해서 그런 거야. 단지 아무 이유없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고."
"이유가 있든 없든 거짓말을 한 건 잘못이잖아."
"그래, 잘못인 건 알아. 근데 어떻게 사실대로 말을 해? 아주 잠깐이라도 다른 남자 얘기가 나오면 넌 정색부터 하는데 내가 어떻게 말을 해? 분명 꽁해있을 게 뻔한데 내가 어떻게 사실대로 말을 하냐고."
순간적으로 치민 서운함에 이런저런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곤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김종인의 표정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그러나 내가 뱉은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사실대로 말을 하면 네 기분이 상할 게 뻔한데 어떡해. 씩씩대며 녀석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다시금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야,"
"……."
"… 도대체 넌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했길래."
"……."
"맞아, 나 네 입에서 다른 남자 얘기 나오는 거 싫어해."
"……."
"그럴 때마다 쉽게 삐지고 꽁해있을 때도 많아."
"……."
"근데 그게 다잖아."
"……."
"나만 봐달라고 발악을 하는 것도 아니고."
"……."
"네가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네."
길게 한숨을 뱉은 김종인이, 들고 있던 향수 상자를 내 손에 건네왔다. 얼떨결에 받은 상자를 멀뚱히 내려다 보기도 잠시, 곧이어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난 고작 이런 이유로 너랑 다투기 싫어서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은 척해보려 노력하는데,"
"……."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진짜 못 참겠어."
"……."
"굳이 나 생각해서 선의의 거짓말 같은 거 안 해도 돼."
"……."
"나한텐 솔직했음 좋겠어, 네가."
쨍그랑,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던 향수를 실수로 떨어뜨림과 동시에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모서리가 살짝 깨진 건지, 진한 향을 지닌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와 상자를 흥건히 적시기 시작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향이 괜히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어지럽게 얽힌 머리를 뒤로하곤 멍하니 눈을 꿈뻑였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찌그러진 상자를 집어들며 작은 파편들을 치우기 시작하는 녀석의 팔을 살짝 잡았다.
"… 내가 할게."
"……."
"… 내가 한다니까."
"놔."
차갑게만 들려오는 한 마디에 힘없이 녀석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동안 웃는 얼굴과 다정한 모습을 자주 봐서 그런 걸까, 김종인의 화난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건지 난 하나도 모른다. 미안하단 말도 전혀 효과가 없을 뿐더러, 서로 감정만 상할 뿐이었다.
"… 김종인."
"……."
"… 종인아."
"… 갈게."
투명한 액체로 번진 방바닥을 말끔히 닦아낸 김종인이 몸을 일으켰다. 갈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건네오는 딱딱한 말에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쓰렸다. 도대체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거야. 내가 정말 크나큰 잘못을 한 건가. 네가 그렇게 화를 낼 만큼 내가, 잘못을 한 건가.
"……."
나빴어. 김종인 나쁜 놈. 내 마음도 몰라주고. 진짜 나빴어. 들리지도 않을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같은 좋은 날 사소한 문제로 다툴 건 또 뭐야. 이미 가버리고 없는 녀석을 향해 서운함을 토해냈다. 화가 난 김종인은 가버리고 없지만, 좁은 방안엔 김종인의 향이 아직 짙게 남아 있었다. 교복 소매가 닭똥 같은 눈물로 서서히 젖어가기 시작한다.
보고 싶었어요. |
오랜만이죠. 예전 아이디 필명을 현재 아이디와 연동할 수 있다는 걸 이제 알았네요. 이렇게나 늦어서 죄송한테, 앞으로도 텀이 짧진 않을 거라는 것 또한 더더욱 죄송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걸 다 표현하자니 입이 부족하네요. 다들 잘 지내셨나요? 어느새 추운 겨울이 왔어요. 겨울이 왔다는 건 2015년도 곧 끝임을 의미하겠죠. 감기 조심하세요. 따뜻하게 입고 다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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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보고 싶었습니다. :)
* 암호닉 * [ㄱ/ㄲ] 가글 / 가락 / 가지 / 개구리 / 거꾸로해도정수정 / 거뉴경 / 건망고 / 검은콩두유 / 고기만두 / 공주 / 구글조닌 / 구사일생 / 규규 / 귤껍질 / 귬귬 / 근댕 / 글잡캡틴미녀 / 기적 / 김종이ㄴ / 까까 / 까리까리 / 깜종인 /꺄 / 꽃이된다 / 꿀꿀 / 꿀잼 / 꿍야슈슈 / 뀨룽 [ㄴ] 나노 / 나니꺼 / 나무 / 나징너징 /나침반 / 냠냠 / 냥냥 / 너구리 / 너와나의연결고리 / 네네스노윙 / 녹차라떼 / 눈망울꽃 / 눠누 / 니나노 [ㄷ/ㄸ] 다래 / 다예 / 다원 / 다이아 / 단이 / 단팥 / 달달이 / 도도토 / 도비 / 도어엉 / 도토도 / 됴깡 / 독자17 / 듀근듀근 / 듀바 / 듀퐁 / 디보 / 따따 / 따스한 / 또해 / 똥잠 / 뚜더지 / 뚜뚜 / 뚜비뚜밥 / 뚱바 / 뚱이 [ㄹ] 라온이솔 / 라인 / 라코 / 랑우 / 런웨이 / 럽럽럽 / 럽미베베/ 레몬뚜뚜 / 레몬사탕 / 로리나 / 로운 / 로이 / 롯데월드 / 루피뚜 / 리리 / 리찌 / 릴리 [ㅁ] 마시멜롱 / 만떼 / 말랑 / 망고 / 망고빙수 / 맥듀 / 맴매맹 / 메론빵 / 메리미 / 멜리멜랑 / 멜팅 / 모별 / 모서리 / 모찌 / 몽글몽글 / 몽디 / 몽이 / 뭉이 / 미리별 / 민럽 / 민석쀼쀼 / 민소쿠쨩 / 민속만두 / 민툽 / 밍뿌 / 밍쏘쿠 [ㅂ/ㅃ] 바나나 / 바나나킥 / 바자다가 / 바카 / 바퀴 /박보 / 밤비 / 밥 / 배리 / 배큥아리 / 백현모양처 / 버덕 / 벚꽃너굴이 / 별다방커피 / 보노보노보 / 보스 / 복숭아 / 봄봄 / 봄비 / 분무기 / 불가 / 불꺼진방 / 붕붕 / 비비빅 / 빵 / 빵야빵야 / 빼민 / 뽀뽀뽀 / 뿅아리 / 뿌꾸빰 / 쁌쁌 [ㅅ/ㅆ] 사랑현 / 삼디다스 / 상상 / 샤니빵 / 서쥬니 / 설레미 / 설렘사 / 셜록 / 숑숑이맘 / 수박마루 / 슈둥슈둥 / 슈팅스타 / 스누 / 스무살의봄 / 스윗슈가 / 스윗펌킨 / 스트로베리 / 스파게티 / 스폰지밥 / 슨니야 / 시동 / 시매니저 / 시카고걸 / 썬다운 / 쑤우쑤우 / 쓔쓔 [ㅇ] 아가야 / 아야어여 / 아이스크림 / 안녕내게다가와 / 알콩/ 애를도라도 / 얍스 / 양념치킨 / 어린왕자 / 어화둥둥 / 여니 / 열럽 / 영쓰 / 예헷 / 오빠설렘사 / 오세훈의각시 / 오호랏 / 올봉 / 왕 / 요거트 / 요맘때 / 요미요미 / 용이 / 우유퐁당 / 우주최강 / 우호라 /윋드유 / 윌리웡카 / 윤슬 / 윤윤 / 윤천사 / 융융 / 은망고 / 은하수 / 이과생 / 이레네 / 이야핫 / 일루와 [ㅈ/ㅉ] 자몽이제일조아 / 자몽타르트 / 자전거 / 젤라 / 종달샘 / 종대마님 / 종스팸 / 종이니니 / 종이인형 / 종종걸음 / 지블리 / 짝짝 / 짱구여친 / 쪼꼬렛 /쫑니 / 쮸쀼쮸쀼 / 찌개 / 찐빵 [ㅊ] 찬샤 / 찰떡 / 체니체니첸 / 체리 / 초코 / 초코붕 / 초코파이 / 쵸파/ 치드봉봉 / 치즈돈가스 / 츤데레 [ㅋ] 카프 / 코난 / 코카콜라맛있다 / 콩부인 / 콩콩 / 쾌지나첸첸나네 / 큥쓰큥쓰 / 큥큥 / 키엘 / 킴벌리 [ㅌ] 타니 / 털ㄴ업 / 테라피 / 툭툭 [ㅍ] 포시 / 퓨어 / 플럼피 / 핑구 [ㅎ] 핫초코 / 해피 / 햄버거 / 행쇼 / 허니잼 / 형광등 / 호두 / 호이호잇 / 훈훈 / 희망 / 히밤 [영어] DB /dprth8391 / HaMo / YUNE [숫자] 0408 / 0616 / 0618 / 0622 / 1226 / 3관왕센 / 500원 / 84니니 [특수문자] #두근
암호닉 신청은 당분간 받지 않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