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02 (애인>김종인≥친구)
아침 드라마는 역시 지루하다. 뒷 이야기가 너무도 뻔할 뿐더러, 대부분 다루고 있는 소재는 출생의 비밀이라던가 배우자의 외도로 인한 복수였다. 저 여잔 분명 지금 하고있는 음식집이 대박날 거야. 그래서 남편과 내연녀에게 복수를 하겠지. 어찌됐든 결말은 해피엔딩일 거…
"… 아."
갑자기 까맣게 꺼지는 TV를 바라보며 작게 탄성을 내질렀고, 곧이어 탁- 소리를 내며 아빠가 리모콘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TV를 보면서 먹는 밥이 얼마나 맛있는데! 물론 드라마가 재미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먹는 밥보단, 결말이 뻔히 예상되는 드라마를 보면서 먹는 밥이 훨씬 좋고 맛있었다.
"너 밥 얼른 안 먹니? 아직도 봄방학인 줄 알아? 또 지각하려고 이렇게 느긋한 거지? 얼른 먹고 얼른 씻어야지."
마지막 남은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며 엄마가 내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시간은 아직 넉넉한데 왜이리 재촉인 거야…. 아직 반이나 남은 밥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 작게 하품을 하며 된장국이 담긴 그릇에 밥을 모조리 밀어넣었다. 아, 학교 가기 싫다. 야자 하기 싫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서 하는 두 번째 등교. 어제 만큼이나 오늘도 역시 가기가 싫었다. 어젯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뻗었던 것 같다. 공부를 할 거라 마음 먹고 챙겨온 문제집은 결국 한 번도 펴보지 않았다. 역시 김종인은 무서운 놈이다. 녀석의 예상대로 행동하고 있는 나도 조금은 소름이 끼치지만…. 아냐, 오늘은 진짜 꼭 공부해야지. 공부 할 거야. 하다 못해 수학 세 문제라도 풀 거고, 영어 단어 열 개라도 외울 거야.
"○○아."
"응?"
"너 과외할래?"
"… 과외?"
"엄마 아는 사람이 학원 하거든? 그분 아들이 지금 휴학 중이라는데,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고 있다네?"
"… 웬…."
"네가 언어가 좀 부족하잖니? 마침 전공도 언어 관련이래."
"학원 다녀도 될 것 같은데…."
"엄마도 고민 많이 해봤지. 학원을 다닐까, 과외를 할까…. 근데 저렴한 가격으로 해준다길래…. 아무래도 학원을 다니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번거롭게 왔다 갔다 안 해도 되고."
"… 대학생이라고? 휴학 중?"
"응. 혼자 하기 좀 그러면, 종인이한테 같이 하자고 하던지."
"… 걘 과외 같은 거 절대 안 할 텐데."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온 탓일까. 녀석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은 자연스레 연락도 주고 받으실 정도로 많이 절친해져 있었다. 근데 어쩌죠. 김종인 걔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과외 같은 걸 할 애가 아니네요.
갑자기 과외라니. 난 태어나서 과외 같은 걸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아, 사실 어릴 적에 그건 했었다. 튼튼영어였나? 텐텐영어였나? 사실 이름조차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것도 과외라는 집합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원소일까….
일단… 생각은 해볼게. 바로 확답을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애매하게 대답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
오늘은 다행히 등굣길이 여유로울 것만 같다. 교복을 다 입고 후드집업까지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직 시간이 8분 씩이나 남아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느긋하게 체육복도 챙기곤 천천히 가방을 멨다. 그리곤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해주는 어느 남자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리다 운동화를 신었다. 운동화 끈이 리본 모양으로 예쁘게 묶여있었지만, 얼마 안 가 금세 풀어질 것처럼 느슨해 보였다. 묶여있던 리본을 풀어 다시 짱짱하게 묶곤 휘파람을 불며 집을 나섰다.
모두의 마블 모두 해~ 모두의 마블 모두 해~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게임의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로딩에서 멈춘 채 게임이 시작되지 않는지,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이는 녀석의 뒷모습이 괜스레 한심해 보였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굽히고 앉아있는 녀석의 뒤로 슬쩍 다가갔다. 방금 머리를 감고 나온 건지, 녀석에게선 은근한 샴푸 향이 났다. 이 와중에도 게임이 하고 싶을까….
"… 아, 깜짝이야."
제게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느낀 건지, 김종인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곤 영혼없이 놀라주며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벌떡 일어나자, 아래로 향해있던 내 시선이 자연스레 위로 향하게 되었다.
"왔으면 말을 하던가."
"어차피 방금 나왔거든요. 넌 여기 쭈그려 앉아서 뭐하냐?"
"데이터가 왜이리 안 터지지. 게임에 오류가 있는 건가."
동문서답을 하는 녀석을 힐끗 보며 한심하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입술을 불퉁 내민 채 중얼거리듯 말하는 녀석의 표정엔 아쉬움과 짜증스러움이 섞여있었다.
"너 요즘은 타이니팜 안 해?"
"그거 때려 친 지가 언젠데."
김종인은 겉모습과는 달리 유아틱하면서도 소녀스러운 면이 있었다. 녀석은 타이니팜… 이라는, 농장을 가꾸며 동물을 키우는 게임을 한동안 즐겨 했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나, 새로 개봉한 슬픈 영화가 보고 싶어 녀석에게 같이 보러 가자고 조르던 때가 있었다. 그때 녀석은 못 이기는 척 같이 따라가 주었고, 아무런 문제 없이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 미리 사둔 팝콘을 먹었다.
'망했다.'
'왜?'
'아… 어떡해.'
계속해서 나오는 광고 탓에 점점 지루해지려 할 때쯤, 상영관 안의 불이 꺼졌고, 김종인이 꽤나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밖에 휴대폰이라도 두고 왔나 싶은 마음에 덩달아 다급해하며 녀석의 반응을 살폈고, 녀석은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기만 했다. 그리곤 말하는 것이었다.
'불곰 먹이 줘야 하는데.'
'… 어?'
녀석이 걱정하던 것은 다름아닌 게임이었다. 3분 정도 뒤에 불곰에게 먹이를 줘야 하는데, 상영관 안의 불이 벌써 꺼져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대략 두 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는 등 옆에서 쫑알쫑알 말이 많았다. 그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겨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분명 슬픈 영화였던 것 같은데… 영화 중간중간 자꾸만 떠오르는 불곰 생각에, 영화엔 제대로 집중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하여간 웃긴 놈이다. 수업 중간엔 갑자기 양이 배고프다며 밥 달라고 매애- 하고 울어버리는 바람에 휴대폰을 빼앗기기도 했었고, 야자시간엔 갈색 토끼를 얻으려 교배를 했는데 하얀 토끼가 나와버렸다며 작게 짜증을 내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예민한 전교 1등의 째림을 받기도 했었다. 역시 동물 애호가 다웠다. 그놈의 타이니팜… 아직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때려 쳤구나.
"근데 미련 남아서 삭제는 안 했어."
"미련?"
"내가 농장을 얼마나 잘 꾸몄었는데. 보여줘?"
"… 아니, 됐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나를 바라보며 녀석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제 겉옷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 후드 속에 쏘옥 집어넣는다. 꽤나 묵직한 느낌에, 손을 뒤로 해 후드 속 물건을 꺼냈다. 녀석이 넣어준 것은 다름아닌 딸기우유였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 김종인에게 시선을 옮겼고, 녀석은 다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제 몫인 듯 보이는 초코우유를 꺼냈다. 그리곤 이로 빨대 껍질을 뜯어 노란 빨대를 물었다.
"고마워. 웬 우유?"
"나 아침 안 먹었어."
"늦잠 잤어?"
"어. 30분 정도."
"… 아."
"내 거 사는 김에 네 거도 같이 샀어."
"… 올, 네가 웬 일로 내 것까지 챙겨줘?"
"대신 나중에 치킨으로 갚아."
그럼 그렇지. 네가 그럴 리가 없지.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그리곤 노란 빨대를 입에 문 채 초코우유를 뜯는 녀석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 빨대는?"
"아, 내가 안 줬어?"
"안 줬어."
오다 길에 흘렸나…. 왜 없지. 제 주머니를 뒤지며 말하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곤 제가 입에 물고있던 빨대를 가리키며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이거라도 줄까?"
"… 됐네요. 그냥 마실래."
그럼 그러시든가. 무미건조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딸기우유를 뜯어 한 모금 마셨고, 본능적으로 우유팩 속을 확인했다. 정말이지, 색소가 들어가지 않아 흰 우유 마냥 새하얗기만 한 딸기우유는 아직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물론 무색소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딸기우유가 딸기우유 같지 않달까.
"맞다, 나 오늘부터 야자 매일매일 해."
"헐, 진짜? 왜? 이제 고3이니까?"
"뭐, 그렇지."
"네 자의 아니지? 너희 어머니가 시키신 거지?"
"응. 안 그럼 집 비밀번호 바꾸고 나만 안 알려줄 거래. 이게 말이 돼?"
"아싸! 잘 됐다. 그럼 나 이제 집에 혼자 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괜히 마음이 들떠 생글생글 웃으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그저 야간 자율학습을 매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건지, 한숨을 길게 내쉬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아침에 들었던 엄마의 말이 생각나 김종인의 팔을 툭툭 쳤다.
"너 과외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웬 과외?"
"그냥… 아침에 엄마가 말해줬거든. 과외해줄 사람을 찾았는데, 너랑 같이 해볼 생각 없냐고."
"… 아."
"할래? 네가 싫어하는 야자도 과외하는 날은 빠질 수 있잖아."
"야자 시간엔 자도 되지만, 과외 시간엔 못 자잖아."
… 그래. 그렇지. 맞는 말이네. 왠지 모르게 말려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근데, 내가 왜 얘를 설득하고 있지? 나도 과외 같은 거 별로 생각 없을 뿐더러, 김종인이 과외를 하든 말든 상관 없는데 말이지. 내가 왜 녀석을 설득하고 있는 거지….
"… 아니다. 하기 싫으면 안…"
"하지, 뭐."
"어?"
"학교에 오래 있는 것보단 낫겠지, 뭐."
"……."
"어차피 너희 어머니가 우리 엄마한테 곧 말하실 걸. 우리 엄마 귀에 들어간 이상, 난 무조건 하게 될 듯해."
"… 그래. 그럼 같이 하자."
녀석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되게 성가셔 할 것 같았는데…. 뭐, 잘 된 일인가? 어찌됐건 언제가 됐든 과외를 하게 될 것이었다. 이 선택이 과연 어떠한 후폭풍을 불러오게 될 지에 대해서, 지금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도 몰랐고, 김종인도 몰랐다.
*
여유롭게 교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나름 일찍 도착했다 생각했지만, 교실 안은 아이들로 북적북적했다. 이제부터 지각을 하면 지각비 1000원을 걷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기선제압에 기가 팍 죽었던 건지, 오늘은 지각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각생이 없는 건 좋은 현상이지만, 이런 식으로 아이들이 빈틈이 없다면 아무래도 좀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너무 완벽하기만 한 건 매력 없지. 약간의 허점도 있어야 상대방의 호감도를 살 수 있는 법이야.
담임 선생님은 그저 어제 정하지 못한 1인 1역할에 대한 말씀만 하실 뿐, 지각생이 0명인 것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으셨다.
"반장 선거를 하기 전까진 번호 순서대로 임시 반장을 할 거야. 이의 있나?"
"하루에 한 명이요?"
"그래."
동글동글한 안경을 낀 남학생이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어차피 곧 반장 선거를 하게 될 테니, 뒷번호인 난 임시 반장을 할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아싸, 신난다.
"음, 서기 할 사람?"
선생님이 주변을 둘러 보셨다. 당연하듯 아이들은 선생님의 눈을 피했고, 나도 고개를 떨궜다. 왜 하필 이럴 땐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는 건지….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정신을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을 즈음, 다시금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이 몇 일이지?"
"3일이요."
"3월 3일이니까… 3의 세 제곱을 하면 뭐지?"
"27이요!"
"음, 27번이 서기 하도록 하자."
꽤나 독특한 방식으로 서기가 뽑혔다. 27번으로 보이는 앞자리의 여학생이 하던 행동을 멈추곤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살짝 보이는 책상 위엔, 영어 듣기 문제집과 몇 권의 공책이 쌓여있었다. 작년엔 내가 27번이었는데… 어쨌든 다행이다.
"서기가 할 일은 출석부 관리, 야자 시간 출석 체크, 그 외 기록할 사항들이 있다면 다 서기가…"
"어? 선생님! 저 야자 안 하는데요…?"
아, 그래? 선생님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직접적인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여학생은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서기'라는 역할을 맡는다는 건 어느 면으로 보나 귀찮고 따분한 것이었으니까. 그것도 고3이라는 가장 중요한 이 시기에!
"지각생?"
"오늘 지각한 사람 없어요."
"그럼, 어제 지각생?"
선생님이 슬쩍 반 아이들을 둘러 보셨다. 어제 지각생… 이라면 나잖아. 인정하긴 싫지만 점점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너 어제 지각했지? 옆 짝꿍이 내게 말했다. 그 한마디가 왜이리 얄밉고 짜증나게 느껴지는 건지…. 알아, 나도 안다고…. 내가 어제 지각했어.
"… 저요."
"야자 매일 하지?"
"네에…."
서기 당첨. 태어나서 서기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난, 서기라는 것에 대해 아예 무지했다. 출석부 관리? 이동 수업 때 출석부를 가지고 다니면 되는 건가? 그리고 비어있는 칸엔 각 교과목 선생님들의 싸인을 받으러 다니고? … 웬 고생이야, 이게.
한숨을 포옥 내쉬며 휴대폰을 꺼내 김종인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가 서기라니….
풉,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러자 옆에 앉아 연습장에 수학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던 짝꿍의 시선이 잠깐 내게 옮겨졌고, 난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미안. 2년 전 같은 반이었을 땐 몰랐는데, 작은 소음에도 쉽게 반응을 하는 예민한 성격인 듯 싶었다. 아님 고3이 되어 많이 예민해진 건가…. 단순한 추측으론 모를 것이었으며, 아침 자습이 끝났다는 종이 치자마자 머릿속에서 그러한 생각이 달아나버릴 만큼, 그다지 대수로운 것도 아니었다.
*
1교시는 체육이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체육 수업은 교실에서 하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체육 수업이 들은 날 비나 눈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날이면 운동장에서 해야 할 수업을 교실에서 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난 교실 수업이 좋았다. 원체 몸을 움직이고 뛰노는 체육이라는 과목을 싫어했으니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나와 다르게 김종인은 체육을 참 좋아라 했다. 체육 수업이 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날씨와 비례하듯 녀석의 기분도 확 다운되어버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속으로 녀석을 비웃었고, 이를 알 리 없는 녀석은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넌 무슨 과목이 제일 좋냐 물으면 당연 체육이라는 답을 해줄 정도로, 녀석은 체육을 좋아했다. 그러나 밖에서 몸을 움직이는 체육 수업만을 좋아했던 것이지, 교실에서 하는 체육 이론 수업은 끔찍이도 싫어했다. A가 넘쳐나는 수행평가 점수와는 달리, 지필평가 점수는 영 엉망이었다. 그래도 수행평가와 지필평가의 비중이 8:2였어서 그런지, 녀석은 반 아이들 중 총 합산한 체육 점수 탑 파이브 안에 들 정도였다.
이건 후문이지만, 난 그때까지만 해도 녀석은 분명 체육을 전공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곤 했었다.
깨끗하게 빤 체육복을 입고 출석부를 챙겨 교실을 나섰다. 그래도 교복보단 체육복이 따뜻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봄바람이 제법 서늘하게 느껴졌다. 망할 꽃샘추위. 얼른 여름이나 다가와라. 막상 다가오면 또다시 겨울을 찾을 테지만….
*
"자, 설명 다 들었지? 맨 첫 번째 줄부터 나와."
6개의 허들을 나란히 세워놓으신 선생님이 첫 번째 줄을 지목하며 말씀하셨다. 허들이라니… 내가 정말 싫어하는 종목 중 하나다. 중학교 3학년 체육대회 날, 허들 세 개 때문에 달리기를 꼴찌했던 적도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제법 낮게 보이던 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왜이리 높게만 느껴지는 건지… 정말 모를 것이었다.
두 번째 줄이었던 내 차례는 순식간에 다가왔다.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출발선에 섰다. 대략 15분 동안 기본 동작을 가르쳐 주시긴 했지만, 중학교에서 다 배우고 왔을 거라 멋대로 생각하는 선생님의 생각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중학교에서 배우긴 했다만,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허들을 두고 뛰라 하다니, 정말이지 잔인하기 그지 없었다. 그냥 오늘은 기본 동작만 주구장창 연습할 순 없는 건가요, 선생님….
그냥 두 눈 꼭 감고 높게 뛰자. 무조건 높게 뛰면 어떻게든 되겠지. 망할 허들. 내가 왜 저딴 장애물 때문에 이런 고생을…? 그건 그렇고, 김종인이랑 같이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녀석의 말투를 닮아가는 것 같다. 망할… 이라는 말을 내가 쓰게 될 줄이야. 참으로 신기할 노릇이었다.
"… 어어…!"
헛딴 생각을 하며 허들을 향해 뛰었다. 그러다 그만 스텝이 꼬여 어정쩡한 자세로 점프를 하게 되었고, 그대로 허들에 무릎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하필 발목이 접질린 상태로 넘어질 게 뭐람…. 넘어지는 와중 오른쪽 손으로 바닥을 짚는 바람에 손가락 두어 개가 욱신거렸다. 몇몇 학생들이 내게 다가와 걱정스레 괜찮냐며 물어왔고, 난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을 해야만 했다. 지금 내겐, 아픔보다 창피함이 더 크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애써 괜찮은 척을 해보이며 운동장 스탠드에 앉으려다, 늦기 전에 보건실에 가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멋쩍게 웃으며 힘겹게 걸음을 뗐다. 바닥에 닿을 때마다 찌릿찌릿 욱신거리는 오른쪽 발못 탓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게다가 손가락도 아프다. 빨갛게 부어오른 오른손을 바라보다, 차디찬 왼손으로 감쌌다. 그나마 보건실이 2층이었으니 다행이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느릿느릿 보건실 안으로 들어가 간단히 치료를 마쳤다. 발목과 손가락에 파스를 뿌렸고, 심지어 손가락 세 개엔 붕대까지 감았다. 어차피 수업 시간도 10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종이 칠 때까지 그냥 보건실에 데리고 있겠다며 보건 선생님은 체육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셨다. 물론 보건실에 가만히 앉아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는 게 훨씬 편하다는 건 사실이지만, 보건 선생님과 단 둘이 있으려니 조금은 어색한 감이 들었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
"네? 아, 아뇨…. 괜찮아요."
종이컵에 커피믹스 가루를 털어넣으신 선생님이 정수기 쪽으로 다가가며 말씀 하셨다. 살짝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 답하자, 선생님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보건 선생님은 꽤나 말끔하고 청량한 인상을 지닌 분이셨다. 우리 학교엔 작년에 처음 왔으며, 보건 선생님이 남자였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지라 인기도 꽤나 많았다.-사실 잘생긴 외모 때문일 것이다.- 당연하듯 선생님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으셨다. 꾀병을 부리고 보건실로 찾아오는 학생들이 드물지 않게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반대로, 남학생들 사이에선 원망의 대상이었다. 그래봤자 다들, 부러움을 가장한 원망감이겠지.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그는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선망의 대상일 거고.
선생님은 잘생긴 외모 뿐만 아니라, 친절한 성격까지 갖추신 분이셨다. 거의 모든 것을 갖췄다 해도 과언이 아닌 선생님을, 몇몇의 여학생들은 '준면쌤'이라며 친근하게 불렀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그냥 넘어가듯 멋쩍게 웃음만 지으실 뿐, 별다른 말씀은 없으시다는 걸 지나가다 들은 듯하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선생님께 인사를 하곤 천천히 보건실을 나섰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째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난간을 잡고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3학년이 맨 꼭대기 층이라는 게 다시 한 번 더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오늘따라 교실이 멀다. 계단이 높다.
아, 서럽다.
힘겹게 마지막 층에 다다라 딱 두 개의 계단만을 남거두고 있을 즈음 문득, 운동장에 출석부를 놓고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망할… 망할 출석부. 망할 서기. 망할 허들! 오늘도 어제처럼 되는 일이 없다.
"멍청이, 거기서 뭐하냐."
화장실을 다녀오던 참인지, 복도를 걷던 김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손에 묻은 물기를 탈탈 털며 내게 다가왔고,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마지막 남은 계단을 올랐다.
"뭐해? 거기 가만히 서서."
"……."
"… 야, 너 손…"
붕대가 칭칭 감긴 내 손을 보더니 김종인이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허들 뛰다가 넘어져서 다쳤어. 근데 내가 운동장에 출석부를 놓고 왔는데… 그것 좀 가져다 줄 수 있어? 꽤나 다급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러자 김종인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곤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녀석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곤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발걸음을 뗐다. 오늘 역시, 어제처럼 최악의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
쏜살같이 뛰어 출석부를 가져다 준 김종인 덕에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다행히 1교시를 제외한 오전 수업은 모두, 이동할 필요가 없는 교실 수업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살짝살짝 고통이 느껴지는 발목을 두어번 매만지곤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반 아이들이 급식실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엎드려 있으니 작은 소리도 모두 크게 들려왔다. 아직 교실에 남아 문제집을 풀어나가고 있는 어떤 아이의 샤프 소리, 나란히 앉아 휴대폰 게임에 열을 올리고 있는 두 남학생의 목소리, 복도를 거니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 누군가 내 앞자리 의자를 빼며 털썩 앉는 소리.
"밥 먹으러 가자."
곧이어 앞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했다. 마치 제 자리인 냥 내 앞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녀석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던 김종인이 덩달아 일어나선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곤 내 팔을 제 어깨에 걸치게 하려던 행동을 거두곤 망설임 없이 제 허리에 두르게 했다. 의도치 않게 팔로 김종인의 허리를 감싸게 되어버린 상황에 흠칫 놀라며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 뭐해?"
"부축."
"…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왜?"
"… 오해 하잖아, 다른 애들이."
"뭐 어떻게 오해 하는데?"
"……."
"오해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 해. 그게 우리 잘못이야? 멋대로 오해를 한 자기들 잘못이지."
"……."
"어차피 졸업하면 안 볼 애들이야."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웅얼거리듯 말하곤 고개를 떨궜다. 교실 바닥의 정교한 무늬를 바라보며 할 말을 떠올려내고자 애썼다. 잠시간 침묵이 감돌고 반 아이들이 모두 급식을 먹으러 가 교실 안이 텅텅 비게 되었을 즈음, 녀석이 다시 입술을 뗐다.
"아, 알겠다."
"……."
"허리 잡기 부끄럽구나."
"… 뭐?"
"업힐래, 그럼?"
저 놈이 지금 뭐라는 거지…. 왜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타이니팜 계정을 삭제해놓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어쩔 수 없이 녀석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급식실로 향했다. 여러 개의 시선들이 내게 꽂혀왔고, 아픈 발목을 이끌며 억지로 걸음을 빠르게 옮기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게 부담스러웠다. 급식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김종인과 떨어질 수 있었고, 먼저 식판을 집어들던 녀석이 붕대가 감긴 내 손을 흘끗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내 식판까지 대신 들어 제가 두 몫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멍청이같이 서있지만 말고 자리나 잡고 있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급식판 두 개 들기엔 무거울텐데…. 저러다 국 쏟아서 손 데이기라도 하면….
시간을 너무 지체했던 탓인지, 자리는 아이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다 먹은 학생들은 여유부리지 말고 어서 일어나 달라는 급식 지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무리를 짓고 앉아 수다의 꽃을 피우고 있던 네 명의 남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빨리 그쪽으로 걸음을 옮겨 앉았고, 임자가 있다는 신호를 주듯 맞은편 자리에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어? 야, 안녕."
갑작스레 내 팔을 툭툭 치며 말을 걸어오는 오른편 누군가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세훈이었다. 아, 안녕.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자, 녀석이 크게 밥 숟가락을 떠먹었다. 4교시 수업 시간을 꿀잠으로 보냈던 건지, 녀석의 앞머리는 살짝 뻗쳐있었다. 김종인과는 달리 하얀 피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날렵한 턱선과 높은 콧대. 녀석의 인상은 마냥 차갑기만 했다. 그러나 겉모습과는 다르게 은근 허당기가 가득한 놈이라며 김종인은 오세훈에 대해 얕은 설명을 해줬었다.
"손은 괜찮냐? 다쳤다며."
"어떻게 알아? 김종인이 말했어?"
"응. 허들하다 넘어졌다며. 완전 덜렁댄다면서 뭐라뭐라 하던데."
"… 아."
"근데, 김종인은?"
"아, 곧 올 거야. 내 급식까지 대신 받아준다길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김종인이 양쪽 손에 급식판을 든 채 주변을 둘러보다 나를 발견하곤 걸음을 옮겨왔다. 다행히 걱정과는 달리 녀석은 꽤나 안정적인 모습으로 식판을 내려놓았고,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아, 밥맛 떨어지게 왜 오세훈 옆이야."
"뭐래."
앉자마자 티격태격하는 녀석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곤 왼손으로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오늘 점심 메뉴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후식으로 나온 오렌지 4분의 1조각이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들었달까. 왼손으로 어설프게 배추김치를 집어 밥 위에 올려놓았다. 오른손으로 숟가락질은 가능했지만, 젓가락질은 무리였다. 이럴 땐 정말이지, 양손잡이가 되고 싶다. 양쪽 손 자유자재로 젓가락질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고 편할까. 하필 오늘 급식의 주메뉴가 왼손 젓가락질론 집기 힘든 잡채일 건 뭐람. 망할 잡채. 잡채 때문에 기분도 잡칠 것만 같았다.
제 친구들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잔반을 처리하러 가는데도 불구하고, 오세훈은 그저 자리에 가만히 앉아 나와 김종인을 번갈아 바라보고만 있기 바빴다. 그리곤 오렌지를 집어 껍질을 까더니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듯 말했다.
"아무리 봐도, 니네 둘 사귀는 것 같아."
"죽을래?"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와버린 말에 황급히 입을 막았다. 오세훈은 살짝 당황한 건지, 피실피실 웃으며 미안하다 사과를 해왔다. 당사자인 난 이렇게 강한 부정을 해보이는데에 반해, 정작 또다른 당사자인 김종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밥을 먹는 데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마치 한석봉의 어머니 같았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나는 밥을 먹을 테니, 넌 열심히 떠들어대거라. 그저 평온하기만 한 녀석이 밥을 오물오물 씹다 슬쩍 고개를 들었다. 어설픈 왼손 젓가락질로 김치를 집고있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하던 녀석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왼손으로 젓가락질 하기 불편하지 않냐."
잡채는 아직 그대로 있네. 맛있던데. 녀석이 덧붙여 말했다. 집기 어려운 잡채는 팅팅 불은 채 하나도 줄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녀석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헛기침을 한 김종인이, 옆에서 계속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오세훈에게 그만 가보라며 턱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오세훈이 배싯 웃으며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와 김종인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능구렁이 같다.
잔반을 처리하고 급식실을 나서는 오세훈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김종인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리곤 제법 딱딱한 어투로 내게 말을 내뱉었다.
"젓가락 줘."
"왜?"
"먹여주게."
"… 미쳤어?"
"왜. 오세훈 갔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냥. 네가 오세훈이랑 있는 거 불편해 하는 것 같아서. 같이 있기 불편한 사람도 갔으니, 내가 먹여주면 마음 놓고 편하게 받아 먹으라고."
"… 먹여달라 안 했는데?"
"보는 내가 답답해서 그래."
아무렇지 않게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하는 김종인을 똑같이 바라보다 시건을 아래로 떨구었다. 먹여주겠다니, 쟤가 오늘따라 왜이래. 단 둘이 있어도 그럴까 말깐데, 보는 눈도 많은 학교에서 도대체 무슨….
"……."
"……."
"아, 먹여주ㄱ…"
"… 배불러."
배부르다 말하며 남은 밥과 반찬들을 국에 밀어넣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녀석이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어이없다는듯 헛웃음을 짓곤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의기소침해져 녀석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급식판을 집어들으려 왼손을 뻗었다. 그러나 먼저 선수쳐 내 급식판을 집어든 녀석 탓에, 내 왼손은 갈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김종인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양쪽 손에 들린 식판의 잔반을 처리했고, 먼저 급식실을 나섰다. 그런 녀석을 따라 뒤늦게 급식실을 나섰고, 창틀에 팔을 기댄 채 밖을 내다보고만 있는 녀석의 뒤에 조심스레 섰다. 내 인기척을 느낀 건지, 녀석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화가 난 듯 보이는 녀석의 표정에 괜스레 주눅이 들었다.
"너 웃긴다."
"… 왜."
"내가 그렇게 싫어?"
"……."
"싫으면 싫다 말로 하던가."
"……."
"나름 너 생각해서 한 말이야. 손 불편해서 제대로 못 먹고있는 게 딱해서 먹여주겠다 한 건데,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이냐."
"… 그게 아니라, 주변에 보는 눈도 많은ㄷ…"
"주변 핑계 좀 그만 대. 연인 사이라 오해 좀 받으면 어때. 아까도 내가 말했지 않나? 걔넨 어차피 졸업하면 안 볼 사이라고."
"……."
"아, 넌 그냥 그런 오해를 받는 자체가 싫은 거구나."
"……."
"난 뭐 좋은 줄 아냐."
"……."
"그냥 무시해.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어떻게 살아."
"……."
"오세훈한테도 말할게. 너랑 나 절대 사귀는 사이 아니니까 앞으로도 그딴 말 지껄이면 입 봉해버린다고."
"……."
"그리고 너도 앞으론 싫으면 싫다, 하지말라, 말로 해."
김종인이 먼저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두세 칸씩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것 같다. 저걸 어떻게 풀어줘야 하지. 내가 잘못한 게 맞겠지. 그리고…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창피해서 그런 거였는데. 나쁜놈. 속도 모르고.
계단 난간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욱신욱신, 역시나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여기가 몇 층이지. 아직도 3층이라니. 4층은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계단이 도대체 몇 개나 있는 거야. 초등학생 시절 가위바위보를 하며 계단을 오를 때 세어보고 단 한번도 세어본 적 없던 계단의 개수를,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지금에서야 또다시 세어보기 시작했다. 열 둘, 열 셋, 열 넷…
"……."
마지막 계단에 발을 내딛으려던 찰나, 익숙한 발이 보였다. 아침에 실내화를 갈아신을 땐 몰랐는데, 녀석은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져있는 발목 양말을 신고 있었다. 삼선 슬리퍼 밖으로 튀어나온 곰돌이의 동그란 귀가 꽤나 귀여웠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손엔 카스테라빵과 소보루빵, 바나나 우유가 들려있었다. 혹여나 아침처럼 빨대를 길에 흘리진 않을까, 빨대도 두 개나 들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야자 끝나고 아이스크림 사 먹으려고 갖고 왔던 돈 다 털렸다."
"……."
"나중에 세 배로 갚아라."
내 후드 속에 빵 두 개와 우유, 그리고 빨대 두 개까지 넣어준 김종인이 계단을 한 칸 내려와 나와 나란히 섰다. 그리곤 머뭇거리듯 제 뒷목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혼자 올라가기 힘들면 잡던지."
방금 전까지 씩씩거리며 화를 낼 땐 언제고, 녀석의 목소리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녀석의 말에 살풋 웃음짓곤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곤 살며시 녀석의 팔을 꼬옥 붙잡았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발목의 통증이 반쯤 줄어든 것만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
점심 시간은 짧았다. 오후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어느새 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예비종이 울렸다. 체감 상 7교시는 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제 고작 4교시가 지났고 점심 시간이 지났다. 하루는 짧은 것 같으면서도 길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길어도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빨리 주말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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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조절이 왜이렇게 힘든 걸까요.. 오늘도 실패했네요.. 또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