힝 주옥됬다
뒤늦게 배경음악 바꾸는 바보같은 저를 용서하세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건, 기억도 잘 나지 않을만큼 오래 전 일이었다.
나는 갓난아기였을 무렵부터 고아원에서 자라기 시작한 드문 아이들 중에 하나였다. 낡은 포대기 안에 싸인 채로 고아원 앞에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 날 원장 선생님께서 들이셨고. 이유는....글쎄, 이미 기억도 없는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살고 싶진 않았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 태형이는 아마 내가 5살쯤 됐을 무렵 고아원에 들어왔던 걸로 기억한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살아남은건...태형이 뿐이었다고. 어...이 얘기는 별로 하고싶지 않은데. 이해해주길 바란다. 부모님같은건 우리에게 별로, 내키지 않는 주제여서.
....어쨌든, 태형이와 나는 그곳에서 함께 자랐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사실은 우리가 처음부터 이렇게 애틋했던건 아니었다. 난 어렸을 적 모든 것에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게 거북했다. 잦은 파양 덕분이기도 했고, 또 한 친구 때문이기도 했다. 이건 뒤에 가서 다시 얘기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그래서 시간이 지날 수록 고아원에서의 난 늘 누군가에게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행동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친구는 없었고, 내내 홀로 또래 아이들에게서 동떨어져 생활했던 것 같다. 아마 태형이가 고아원을 들어오기 바로 전까지는 쭉 그랬을거다. 언제나, 혼자.
물론 나도 처음부터 그랬던건 아니다. 잠시 미뤄뒀던 얘길 하자면, 난 고아원에서 자라오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한명 있었다. 정말로 친한 친구였다. 늘 그 아이와 함께 다녔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잤다. 내게 있어선 첫 친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너무나도 쉽게 내 곁을 떠났다. 그러니까, 새로운 가족이 생긴거다.
그 기억이, 어린 나에게 있어선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던 것 같다. 미안해, 아미야. 그렇게 말하며 날 등진 채 뛰어가던 친구의 얼굴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남겨진 후 난 한나절을 엉엉 울면서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어린 나는 더 이상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어차피, 다들 떠날거면서. 우리 엄마처럼, 그 어른들처럼 다들 날 버릴꺼면서. 난 그날 이후 마음의 문을 닫은 채 극도로 예민하게 행동했다. 고아원에 있던 아이들이 그런 날 싫어했던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야, 김아미!
.....
우리 나가서 놀래?
그러니까....바로 태형이만이 그랬던 나에게 유일하게 먼저 다가와 준 아이였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너는 고아원 내에서 꽤나 활발한 아이였다. 태형이는 어렸을 때 부터 친화력이 좋았고, 그래서 아마 나완 다르게 또래 친구들도 태형이를 많이 따랐던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아마 넌, 혼자였던 내가 더욱 신경쓰였던 거겠지. 태형이 너는 언제나, 누구에게나..참 상냥한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난 그런 태형이가 더 싫었다. 난 혼자여도 괜찮아, 난....불쌍한 애가 아니야! 아마 그렇게 외쳤었지, 너에게. 하지만 그건 아마 내게 남은 유일한 자존심이었다는걸 알고 있어야만 했다. 하기사 후에 내가 태형이에게 이 얘기를 했을 땐, 넌 그때 이미 알고 있던거라며 씨익 웃었다. 태형이의 눈에는, 마치 내가 길가에 버려진 새끼 강아지 같았다고 했다. 제 몸을 지킬 힘조차 없는 주제에, 눈 앞의 사람을 경계하며 으르렁대는 꼴이 퍽 귀여워서, 궁금해졌단다. 미친놈. 아마도 난 그렇게 말하며 태형이의 등을 때렸었지.
어쨌든, 난 처음엔 그렇게 널 피해다니기 바빴다. 하지만 태형이의 말마따나, 넌 그런 날 참 징하게도 쫓아다녔고, 끝까지 끈질기게 내 옆에 따라 붙었다. 정말로, 김태형 답게. 어릴땐 그런 네가 정말 싫었었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건가보다.
김태형, 가까이 오지마.
......
난 너 싫어! 근데 왜 자꾸 따라오는데?!
......
저리 가라구!
언제는 눈치 없이 내게 다가오던 너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치곤 대들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어린 난 늘 제 분에 못 이겨 혼자 씩씩대다가, 얼마 안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리고 태형이는 내가 그럴 때마다 언제나 그런 나에게 다가와 먼저 손을 잡아 주곤 했다. 그 고사리같은 손으로 흙투성이인 내 손을 잡곤, 내가 울음이 그칠 때까지 너 역시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늘, 우리는 원장 선생님께 더러워진 바지로 혼을 나곤 했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넌 당시 또래 아이들 답지 않게 성숙한 아이였다. 일찍부터 남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어른스런 아이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오늘은 너 운거 안들켜서 다행이다, 그치.
.....
걱정 마, 난 입양 같은 거 안될 거야. 계속 너랑 여기 있을 거야.
...어?
정말? 응. 자, 내 손잡아. 그렇게 웃던 네 얼굴은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 난 얼떨결에 그런 네 손을 잡았었고, 태형이는 그런 나에게 활짝 웃었다. 당시 나와 같이 어린아이였던 네가, 어떻게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던걸 알고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넌 그런 아이였다. 우린 그렇게 가까워졌다. 그 뒤로 기억나던 내 곁엔, 언제나 네가 있었다. 태형이는 항상 겁에 질려있었던 어린 내 곁을 지켜줬다. 내 손을 잡아주던 그 작은 손이, 어찌나 듬직하던지...난 어렵지 않게 널 좋아하게 됬다. 부디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런 태형이를 좋아하지 않기란, 쉽지 않았을거란 걸.
02
얘들아, 오늘은 중요한 분들이 오시니까, 원장님이 부르면 얼른 밖으로 나와야 한다?
언젠간 입양 문제로 어른들이 우리 고아원을 찾아왔던 날이 있었다. 태형아, 우리 안 가면 안돼? 그러자 태형이는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곤 초조해하며 손톱을 물어뜯던 내 등을 토닥여 줬었다. 아미야, 손. 그럼 우린 손을 마주잡곤 멀리멀리 달아났다. 저 사람들 싫어. 고아원에 있던 뒷뜰에 쭈구려 앉은 내가 했던 말이었다. 난 그렇게 말하며 엉엉 울었고, 태형이는 그런 날 끌어안았었다.
아미야, 아미야. 나 좀 봐봐. 그리고 태형이와 나는, 그곳에서 한가지 약속을 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럼 우리 약속하자.
약속?
응, 약속.
무슨 약속?
우리가 언젠간 어른이 되면, 같이 여길 나가는걸로.
정말?
응.
....그치만...여기서 나가면 원장님도 없고, 태형이 넌 친구들도 없는데? 나밖에 없는데? 태형이 넌 금방 외로워서 떠나버릴거야.
아냐, 외롭지 않아.
거짓말....그래 놓고선 또 다른 애들처럼 날 떠날거지? 그럴 거잖아.
아니야, 왜 그런 생각을 해.
......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어떻게?
너랑 내가 여길 나가서 가족이 되면 되지. 가족이 된다는건 평생 같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알지? 여길 나가서 함께할 가족이 없으면, 우리가 서로한테 가족이 되어주면 되잖아. 그러면 우린 평생 같이 있는거야.
...정말? 우리 가족이 되는거야?
응.
이렇게 손 잡고?
...응, 손 잡고.
고마워, 태형아.
넌 아마 모르겠지만, 내가 고아원에서 아무 걱정 없이 웃으며 지낼 수 있었던건 모두....네 덕분 이었어. 까만 크레파스로 마구 덧칠한 도화지처럼, 앞이 보이지 않던 어릴적의 내 미래를.....네가 새로운 페이지로 뜯어내 준거야.
나만큼 어렸던 네가 그 당시 무얼 생각하면서 날 지켜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태형아, 난 그런 네가 참 좋았어. 내 손을 잡고 언제나 어린 날 일으켜주던 너를...참 많이 사랑했어. 그래서, 이젠 내가 널 지켜주고 싶은 것 뿐이야. 이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게된 널, 그래서 나 때문에 멈춰서버린 네 등을, 밀어주고 싶은 것 뿐이야.
정말이야. 난 그냥, 그거면 돼.
02
멈춰선 발걸음이 돌처럼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뒤를 돌아보기가 겁이 났다.
"...아미야, 김아미. 너 맞지?"
하지만 여전히 귓가엔 태형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던 태형이의 목소리는 정말 듣기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어서...난 순간 나도 모르게 태형이의 이름을 외칠 뻔 한걸 겨우 참았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환청을 들은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나한테 가까워지는 발자국이, 태형이의 목소리가, 지금이 꿈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그럴리 없어, 내가...보일리가 없는데. 난 결국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입을 틀어막았고, 터져나오는 울음에 억지로 입술을 깨물었다. 욱욱 거리는 내 목소리에, 어쩐지 귓가로 들리던 태형이의 발걸음 소리가 더 빨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곧 그 발소리는, 바로 내 등 뒤에서 멈춰서 있었다.
"아미야, 뒤 좀 돌아봐."
"...."
"....너 맞잖아. 김아미 맞잖아..."
나 좀 봐봐, 아미야. 굳이 뒤를 돌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태형이가 울고 있다는 것 정도는.
오늘이 두번째였다, 이렇게 태형이의 울음소리를 듣는건. 그래서 더 슬펐다. 눈물을 참는게 점점 힘이 들었다. 나 역시 태형이를 보고 싶었다. 눈을 마주하고, 울고 있는 태형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돼. 만약 지금 태형이가 나를 본다면, 태형이는 평생 이 집에 발을 묶인 채로 멈춰 있을 거야. 나를 따라서... 그건 아마도 본능과도 같은 직감이었다. 태형이는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운 아이였고, 미련할 정도로 나를 챙겨주던 아이였다. 그런 태형이가.....절대 죽은 나를 두고, 혼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난 혹시나 내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봐 입을 더 세게 깨물었고, 듣지 않으려 귀를 막았다. 그리곤 그렇게 눈을 깜빡이자 갈 곳을 잃은 눈물 방울들만이 바닥으로 쉴새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귀를 꾹 막은 손틈 사이로, 들릴 듯 말듯한 태형이의 목소리가 날 괴롭게 만들었다.
"....울지마, 아미야."
"....흑..."
이 바보같은 김태형, 지금 날 위로할 처지야 네가? 난 그 순간마저도 다정하게 흘러나왔던 정말 김태형 다웠다. 하지만 그래서 더 슬펐다. 네 품에 안겨 그냥 다 잊고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됐다. 너를 위해서라도, 죽어버린 나는 이제 사라져야 했다. 그래야 네가 날 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여기서 빨리 나가야 돼. 뒤 돌지마, 김아미. 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그렇게 나 자신을 꾸짖었지만,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가야 하는데. 하지만 소용 없었다. 억지로 귀를 막은 손은 점점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김아미 바보, 멍청이, 병신, 또라이. 속으로 이런 나 자신에게 별별 욕짓거리를 다 뱉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난 끝내 떨어지지 않는 두 발에...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미야. 나를 부르던 태형이의 목소리....그런 태형이를, 내가 두고 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니, 아니다. 다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내가 그냥 태형이의 곁에 있고 싶은 것 뿐이다. 태형이 네가 평생 날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나라도,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이런 이기적인 나에게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난 천천히 귀를 막은 손에 힘을 풀었고, 일부러 너에게 말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불러도 난, 너 안볼거야."
"...김아미."
"난 이미 죽었어, 네 얼굴을 보면 더 흔들리기만 할거야."
"...."
"...."
"...."
"....그러니까 제발 날 위해서, 가라고 말해줘. 태형아"
"...."
"부탁이야. 태형이 네가 말하면, 왠지 편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애써 울음을 참으며 독하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떨려오는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난 갈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말마따나 극락왕생할 자신도 없었지만, 어디든 여기보단 나았다. 여기 계속 있으면 평생 떠나고 싶지 않아질거야. 그렇게 생각한 난 그저 들키지 않기만을 바라며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태형이는 대답이 없었다.
실망했겠지.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한테 질렸을거란 생각도 들었다. 알고 있었다. 난 지금 네 상냥함에 기대어 너에게 가장 잔인한 말들을 내뱉고 있다는 걸.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난 씁쓸히 웃었고, 나 자신에 대한 환멸감에 치를 떨면서 다시 고개를 떨궜다. 마음 독하게 먹자, 김아미.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쉼호흡을 했다.
그리곤 힘없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태형이의 손이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곤 강한 힘으로 날 자신과 마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난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태형이의 품 안에 가둬져 버렸다. 그리곤 태형이가 하는 말에, 난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럼,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계속 있을거야?"
"....흐..."
"....그럼 가지마. 가지마, 아미야."
캄캄한 방 안이라도 알 수 있었다. 죽은 이후 처음으로 마주봤던 태형이의 얼굴은, 눈물로 마구 얼룩져 있었다.
바보같은 김태형, 멍청한 김태형. 치사한 김태형. 결국 애써 참고 있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태형이는 그런 날 더 세게 끌어안으며 내 등을 토닥였고, 난 그게 더 서러워 엉엉 울기만 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네가 날 잡아줬음에 기뻐하는 내가, 어쩐지 추하다고 생각했다. 난 천천히 태형이의 허리에 팔을 감았고, 태형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꺽꺽거리는 날, 태형이는 그저 말없이 끌어 안아주기만 했다. 익숙한 체취였다. 그리워하던, 김태형의 냄새. 멈출 줄 모르는 내 눈물로 인해 태형이의 어깨가 젖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냥, 지금은 네 품에 안겨 마음껏 울고 싶었다.
"난 후회 안해. 네가 뭘 걱정하는진 몰라도, 괜찮아. 오히려 너무 좋다, 이렇게라도 널 볼 수 있어서."
"...."
"....그러니까, 그만 울어 김아미."
그렇게 말하는 태형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바보, 바보 김태형. 그리고 그런 너의 목소리에, 내 울음소리가 더 거세졌다. 마치 어린 시절의 김태형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제 머리에 피가 흐르는 지도 모르고 상처입은 새끼 강아지를 다정하게 보듬어 주던, 그 어린날의 네가 생각났다. 늘 올곧은 김태형. 그래서....더 바보같은 김태형.
"미안해..."
"...."
"..태형아"
그러자 날 끌어안고 있던 단단한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물론 꿈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던건....아마도 내가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겠지.
겨울의 잔향
태형이는 울음이 그친 뒤에도 한동안 날 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내가 숨 막힌다며 바르작 거리기라도 할 때면, 그럴 때마다 태형이는 날 더 꽉 껴안았다. 불안해서 그래, 또 사라질까봐. 난 그렇게 말하는 태형이가 안타까워서, 결국 그 품에 한참을 안겨 있었을 수 밖엔 없었다. 김태형 이 멍청아, 내가 어딜 간다고 그래?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도 태형이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흔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네가 날 놓아줬던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였다.
"이제 좀 진정됐어?"
"...응."
"우리 얼굴 지금 엉망이겠다."
"그러게."
"울고 있는 김태형 얼굴도 보고 싶은데, 방이 어두워서 잘 안보여. 우선 방 불부터 키고 얘기하자."
그런건 왜 보려고. 난 내 말에 툴툴거리던 태형이의 목소리에 난 괜히 킥킥 웃었다. 그리곤 방 불을 키기 위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태형이가 다급하게 그런 내 팔을 잡아챘다. 내가 킬게, 넌 여기 있어. 난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가 불을 키는 태형이를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네가 사라질까봐. 태형이가 뭘 걱정하는지는 나도 안다. 하지만 이 상태라면....내가 걱정하던 일이 정말로 일어날까 겁이 났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태형이는 지금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태형이가 방 안의 불을 켰고, 한동안 깜빡이기만 하던 전등이 순간 환하게 켜졌다. 난 그런 태형이의 뒷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다가, 날 향해 뒤를 도는 태형이의 팔을 막무가내로 잡아 끌곤 내 침대에 앉도록 어깨를 내리 눌렀다. 여기 좀 앉아봐. 그러자 제법 순순히 끌려오던 태형이가, 뭐냐는 듯 내 눈을 맞췄다. 눈이 많이 부었네. 난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는 천천히 태형이의 옆에 따라 앉았다. 그리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김태형, 뭐가 그렇게 불안해."
"...."
"나 어디 안가. 네가....가지 말라고 했잖아."
"...."
"그러니까, 평소처럼 행동해. 김태형은 김태형 답게."
"...."
"알겠어? 이 바보 김태형아"
그렇게 말하며 내가 씩 웃자, 대화 내내 날 묘하게 바라보던 태형이가 못 말린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이젠 김아미 다 컸네, 나한테 설교도 하고? 그리곤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는 태형이의 얼굴에, 난 일부러 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아직도 애인줄 알아? 창피하니까 그런 말투 그만 좀 해라, 쫌! 그러자 태형이 또한 마주 웃더니 큰 손으로 내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싫은데? 하곤 혀를 낼름 내밀었다.
"김태형, 죽었어! 너 이리 안와?"
"싫은데? 싫은데?"
난 변한게 없는 태형이의 행동에, 이젠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태형이의 웃는 얼굴은 실로 오랜만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순간 그런 생각을 하자, 태형이를 잡으려 손을 뻗던 내 움직임이 뚝, 하고 멈춰 버렸다. 아니...오랜만이 아닌가? 그리곤 인상이 찌푸려졌다. 난 내가 죽은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니까. 그러고 보니까, 그 때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흐른거지?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태형이는 어느새 그런 나를 따라 조용해져 있었다. 그래서 난 힐끗 태형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김태형, 오늘 며칠이야?"
"...오늘? 나도 몰라."
"뭐? 놀리지 말고 빨리 말해"
"진짜 몰라, 난 그 날 이후로 그동안 계속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그러자 이어지던 태형이의 말에, 내 눈이 순간 흐려졌다. 태형이가 말했던 '그 날'이 언젠지 정도는 나도 안다. 어쩐지 너무 말랐더라, 이 멍청이. 난 그냥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히려 태형이가 더 담담하게 말해서 그런지, 바보처럼 내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난 황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어쩐지 김태형 너 머리 떡졌더라, 그동안 머리도 안 감았냐?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 어느새 내 침대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태형이가 발끈하며 일어났다. 아니거든? 나 머리 감았거든? 니가 냄새 맡아보던가? 그러면서 슬금슬금 내 옆으로 다가오는 태형이의 머리를, 난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그러면서 내 무릎엔 왜 눕는데?"
"좀 봐줘라, 계속 이러고 싶었단 말이야."
".....누가 김태형 변태 아니랄까봐."
마음껏 욕해라, 난 안 움직일거야. 그렇게 말하며 내 무릎을 베고 누운 태형이는 눈을 감았다. 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태형이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미동없이 누워있는 태형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기만 했던 것 같다. 밝은 곳에서 가까이 바라봤던 태형이의 얼굴은 좀 더 푸석해졌고, 좀 더 말랐고, 좀 더 피곤해 보였지만...뭐, 그래도 멀끔하니 잘 생겼네, 김태형. 그렇게 생각하며 난 살풋,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태형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태형이가 그런 내 시선이 느껴졌나 보다. 어느새 태형이는 스르륵 눈을 뜨곤 멀뚱히 날 올려다봤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왜 계속 쳐다봐."
".....쓸데없는 말만 하는 이 입이 문젠가? 응?"
"..으읍! 으프드그! 으그느르!"
그렇게 난 쫑알거리는 태형이의 입을 두 손가락으로 세게 집으며 흔들다가, 우연히 눈에 띈 책상 달력에 눈이 갔다. 11월? 달력의 페이지는 아직도 11월에 머물러 있었다. 난 시선을 달력에 고정시킨 채, 여전히 읍읍대고 있는 태형이에게 물었다. 김태형 너 이번엔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아니면 이거 안놔줄거야. 그러자 태형이는 알겠다는 듯 내 손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읍읍거렸고, 난 다시 천천히 손을 떼곤 태형이를 바라봤다. 아, 진짜 김아미. 힘은 더럽게 세가지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태형이는 갑자기 진지해진 내 두 눈에 움찔하더니 또 다시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왜, 뭐가 궁금한데? 난 아예 태형이에게 몸을 돌려 앉았다.
"....."
"....."
그리고 다시 마주봤던 태형이의 두 눈은, 방금 전까지 나와 함께 웃고 떠들고 있었던 사실이 무색할만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게 아마 진짜 네 모습이겠지. 알 것만 같았다. 태형이 넌 언제나 날 안심시키려고 억지로 웃곤 했었으니까. 그러자 난 어쩐지 다시 울컥하는 기분에, 억지로 눈을 부릅뜨곤 태형이에게 물었다.
"지금 11월 맞아? 나 죽은 뒤로 몇 일이나 지난거야?"
"....."
"김태형."
말해주기로 했잖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태형이에게 내가 애원했다. 그러자 태형이는 한동안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몇번이고 한숨만 쉬다가, 결국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달도 더 지났어. 네 장례식도 이미 끝난지 오래고."
"...뭐?"
한달? 방금 한달이라고 했나? 난 믿을 수 없는 태형이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기껏해봤자 일주일 정도 지났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나 시간이 많이 지난건가? 머릿 속이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한달씩이나 지나서 내가 다시 여기로 오게 된 이유가 뭐지? 대체 왜? 난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로 나도 모르게 손톱만 물어 뜯었고, 그러자 순식간에 태형이가 그런 내 손을 잡아 채갔다. 씁, 물어 뜯지말랬지. 난 그렇게 태형이의 꾸짖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아서인지 찌푸린 미간은 그대로 였다.
태형이는 계속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곤 어쩐지 걱정스러운 듯 날 쳐다보는 시선이 꽤나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부탁을 했다. 너무 울었더니, 목이 아프다고. 물 좀 가져다 달라고. 그러자 태형이는 잠깐 묘하게 날 바라보더니, 다시 활짝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기 가만히 있어. 몇번이고 그렇게 당부하며 거실로 나가는 태형이의 뒷머리를 씁쓸하게 바라봤다. 죽은 사람이, 목이 마를리가 없잖아. 이 바보야. 난 거실 부엌에서 그릇을 꺼내는 듯,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풀썩, 침대에 누웠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계속 궁금했던 질문을 중얼거렸다. 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거야. 그저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혀 꺼낸 투정과도 같은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런 내 귓가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야 네가 원했으니까지."
"....에?"
그리곤 내가 처음듣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뜨자 보이던건.....
"까꿍."
침대에 누운 내 배 위에 앉아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던, 이상한 남자 한명이었다.
작가의 말 |
지민이 형입니다. 2화에요~으아 분량조절 실패했다 저번 화에 뜨거운 반응 보여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려욥! 저번화가 맛보기였다면, 이번화부터는 제대로 된 전개에 돌입합니다. 본편 앞부분엔 계속해서 여주의 독백으로 이어갈 생각이구요...아닐수도 있고ㅎ 최대한 감정표현에 주력하려고 노력했지만.....잘 되질 않았슴다ㅠㅠㅠㅠ글쓰는건 너무 어려워8ㅅ8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 제 머리에 피가 흐르는 지도 모르고 상처입은 새끼 강아지를 다정하게 보듬어 주던 ) 이부분은 그냥 비유입니다! 초반 여주의 독백에서 태형이가 경계심 많던 어린 여주를 새끼 강아지같다고 표현했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나온 그냥 별거없는 비유에요......그냥 태형이가 저 말처럼 언제나 여주를 지켜왔다는 것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죄송해여; 이해하기 어려우셨져ㅠ절 매우 치세요. 아무튼 겨울의 잔향은 이런 분위기로 쭉 흘러갈 듯 합니다. 과연 마지막 의문의 남자는 누굴지ㅎㅎㅎㅎ많이 기대해주세욥 다음편에서 뵈요! 그리고 석진센빠이, 침침, 태태뿅, 태형이형, 오예, 밤열한시 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암호닉이라니, 생각치도 못했어요! 그저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ㅠㅠㅠㅠ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