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너를 만난다면 03
일단 바쁘니까 가라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나를 먼저 보냈다. 거기다 대고 나 실은 바쁜 거 아니고 약속 없으니까 우리 얘기 조금만 더할까? 하며 엉덩이를 다시 붙일 수도 없는 노릇.
집 밖으로 나가기 귀찮아서 약속 하나 잡지 않은 주말 밤에, 어젯밤 갑자기 생긴 전정국과의 약속을 끝마치고 집에 들어와 멍하니 침대에 앉아 머리를 굴렸다.
대체 뭘 어떻게 정리해야 앞뒤가 맞을까. 그러니까 그 아이와 전정국이 같은 사람일수도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건가. 그 아이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아님 저 어린놈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자라던가. 왜! 꿈속에 나오던 사람이 실존하는 인물이면 초능력도 가능한 전개지!
하여간 망상만 가득 차서.... 또 바보 같은 생각만 하다가.. 오랜만에 일찍 잠들어보자, 침대에 누웠다.
오늘 너랑 똑같이 생긴 남자애를 봤다? 성격은 너랑 다른데 정말 똑같이 생겼어. 얼굴을 보자마자 너라고 생각해서 난생처음 번호도 따보고.
넌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는데 그 남자애는 말해줬어. 이름이 전정국이래. 나이는 나보다 어리고. 그러고 보니 넌 나에게 니 나이도 알려주지 않았어.
너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니가 정말 나보다 한 살 어린 전정국이라서?
말도 안 된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 남자애가 정말 너였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항상 말했잖아. 나랑 같이 가자고.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근데 넌 안된다고 화도 못 내게 웃으면서 말했잖아.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꿈속에서 나와 이번엔 내가 아니라 니가 날 찾아 온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야? 그렇게 믿고 싶어.
다시 뜨면 니가 있는 그 꽃밭으로 가길 바라며 눈을 감고 잠이 들 때까지 속으로 너에게 편지를 썼다.
언제부터 다시 갈수 없는, 다시 볼 수 없는 얼굴에 잊고 있었던 니 말이 다시 떠올라서 괜한 기대가 잔뜩 생겨버렸다.
지잉-
누군데 오랜만에 감성 터지게 옛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걸 방해하는가. 나 지금 굉장히 감수성 넘치고 낭만적이었거든?
[자요? 자는 거 아니죠?]
전정국이었다. 자꾸 딱딱 떨어지게 우연 아닌 것처럼 들어오지 말란 말야. 그럼 정말 믿고 싶어진다고.
[자려고 했는데 방해하지 마]
그냥 씹어버리면 될 껄 왜 또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는지. 확인만 하고 놓지 못한 채 문자에 답장을 해버렸다. 왜 불렀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새벽에 족발도 씹어먹게 생겨서 벌써 자면 어떡해요]
우라질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꽤 빨리 온 답장을 읽고 눈을 정말 양옆으로 찢어 'ㅡㅡ'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쳐다봤다.
시비 트려고 문자 한 거야 뭐야.
[내 꿈이 새나라의 어린이라서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 돼. 할 말 없으면 나 진짜 잔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다소 나이가 어려 이 노래를 못 들어본 친구들은 네이년에 쳐보세요.
[재미없어]
[재밌으라고 한거 아니거든?]
재미없단 소리에 발끈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벌떡 앉아 촥촥촥 문자를 날렸다. 내 드립 무시하는 거니 지금?!
[전화하면 받을래요?]
또 어떤 속을 긁어놓을 싹퉁바가지 없는 문자가 올까 씩씩거리며 폰을 쥐고 있는데 환한 화면으로 들어온 글자는 부끄럽게도 심장을 떨리게 했다.
내가 왜 이런 애의 저런 문자에 설레야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이미 꿈속의 그 아이와 전정국을 한몸화(?)시킨 나로서는 설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난 너한테 설렌 게 아니라 그 남자애한테 설렌 거라고.
폰을 쥐고 답장을 못한 채 눈만 깜박거리며 다시 읽고, 또다시 읽고 있는데 성격도 급하지,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전화가 걸려왔다.
[받았네]
"...."
[안 받을 줄 알았는데]
거절하면 될 껄 그걸 또 받아버렸지 뭐. 나름 튕긴다고 바로 받지 않고 지잉- 지잉- 몇 번의 진동이 울린 뒤에야.
얼굴 때문에 인지하지 못 했던 목소리도, 그 목소리도 꿈속에서 듣던 그 목소리가 맞았다.
"왜 전화했니, 이 야밤에"
[내가 귀찮아요?]
"응"
[거짓말]
"...."
[귀찮았으면 받지 말았어야지. 그냥 무시하고 잤어야지]
아... 괜히 받았어... 내가 왜 얘한테 말리고 있는 기분이지.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어.
"안 받으면 계속할까봐 받았다 왜. 걍 끊는다? 왜 전화했냐니까? 넌 왜 자꾸 사람 말을 무시하고 니 말만 하냐!"
[받아도 계속할 건데. 한번 받았으니까 계속 받아야죠]
".... 대답이나 해"
사람 참 할 말 없게 만드네. 그래 니 말이 다 맞다.
[내일 우리 또 볼 거예요]
"뭐라고?"
[카페는 질리고. 밥 먹을래요? 뭐 좋아해요?]
"너랑 밥을 왜 먹어!"
[내가 먹고 싶으니까]
최강 지멋대로야 내가 본 사람 중 넌 최고로 니 멋대로야!! 한마디도 안 지고!! 자기 말만 하고!!!
"난 싫은데?"
[그럼 짜장면]
"짜장... 야, 너 여자랑 밥 먹어본 적 없어? 짜장면이 뭐야 짜장면이..."
[없어요. 여자랑 밥 먹을 땐 뭘 먹어야 하는데]
"음... 파스타라던가"
[느끼해]
"아님, 스테이크라던가"
[비싸요]
"또.... 초..밥?"
[그런 거 좋아해요?]
"아니 난 별로. 난 입이 저렴해서, 돈가스나 삼겹살"
[그럼 그거 먹으러 가요. 내가 찾아보고 문자 찍을 테니까 그때 봐요. 잘자고]
"야, 잠깐만! 야!!"
왜... 왜!! 왜 난 쟤한테 끌려다니는 거지? 난 단지... 짜장면이란 말에... 흥분했을 뿐이고... 그냥... 여자랑 밥 먹은 적이 없다길래 안쓰러워서 추천해준 것뿐인데...
어느새 약속이 잡혀있냐고 왜...
폰을 붙잡고 아무리 불러봐도 자기 말만 하고 전화는 끊겨버렸다... 하...
잠이나 자자...
****
나는 왜 황금연휴에 여기 앉아 잘 알지도 못하는 애 앞에서 멍하니 있는 것인가. 요즘 들어 참,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문자에 찍힌 내용은 소문으로 자주 들었던 돈가스 맛집과 1시라는 시간뿐이었다. 그걸 왜 그냥 넘기지 못하고 이렇게 앉아있는지 모르겠다만.
말로만 듣고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앞에 앉은 너랑 말고 남준이랑 오고 싶었다고 난! 사진도 막 찍고 엄청 감상하면서 하나하나 맛있게 음미하며 먹으려고 했는데!
마음의 준비도 못했고 게다가 같이 올지도 몰랐던 사람이랑 와서 그런지 젓가락을 들지 못하고 멍하니 얼굴만 쳐다보니까 한 개 들어 맛을 보려는 전정국이 내게 물었다.
"안 먹어요?"
"너 많이 먹어..."
정말 나와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너는 무슨 생각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돈가스 좋아한다고 해서 어렵게 찾은 건데, 좀 먹지"
어렵게는 무슨 검색 한 번 하면 바로 나오는 집이구만. 헛웃음을 치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먹는다, 먹어"
기껏 입까지 가져간 돈가스를 다시 놓으려는 전정국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나도 젓가락을 들었다.
그래 기왕 나온 거,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 내가 약속 잡은 것도 아니고 자기 멋대로 잡은 건데 지가 사주겠지 뭐.
바삭바삭, 맛집이라 그런가 맛있기는 했다.
"진짜 좋아하나 보네"
처음 와본 곳이고 생각보다 더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음식에 집중해 눈까지 반짝이며 돈가스를 먹고 있자니 전정국의 말이 내 정신을 깨웠다.
아, 쪽팔려.
"큼... 왜, 오늘은 또 왜 보자고 했는데"
마저 집은 돈가스를 입에 넣고 젓가락을 테이블에 놓으며 물었다. 이제 대답 좀 해라.
"같이 밥 먹으려고"
또,또. 말 같잖은 소리네. 제대로 된 대답하는 걸 못 봤어요 내가.
"자꾸 장난 칠래?"
"장난 아닌데"
"그럼 뭐야"
"기억, 안 난다고 했잖아요"
".... 그게 뭐"
"내가 기억 못하는 게 뭔지,"
"...."
"날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알아야겠으니까."
난 널 아는 게 아닌데? 단지 너와 똑같이 생긴 애가 내 꿈에 몇 년 동안 나왔을 뿐이지 난 너를 몰라. 어디서 사는지,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뭐가 기억나고 뭐가 기억나지 않는지.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널 몰라"
"아니. 알잖아요"
"모른다니까?"
"알겠으니까 일단 마저 밥 먹어요. 지금 물어보려는 거 아니야"
모른다니까 내 말은 또 씹고... 내가 무슨 말을 하던 자기 맘대로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이 어린 양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저 밥을 먹으라며 남아 있는 돈가스를 입으로 구겨 넣었다. 아까보다 눈도 처진 게 자기 과거가 어땠는지 꽤나 궁금하구나 싶었다.
하지만 난 정말 널 모른다고. 내가 아는 너는 꿈에서 나와 함께 떠들고 뛰어다닌 것뿐인데. 나에 대해서 저 아이가 떠올릴 기억은 애초 없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서 모른다고 해줘봤자 자기 멋대로 생각할 거고 저 순진한 얼굴을 하고 날 믿고 있는 아이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왜 이렇게 안쓰러운 거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기억을 못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가다 보면 내 꿈에 대해서도 뭔가 알게 되지 않을까.
"근데 나 아직도 나이 못 들었는데"
집요한 새끼. 존댓말을 하는 거 보니 내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알고 있나 본데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궁금한가 보다.
"스물두살"
"뭐야. 고작 한 살? 그래놓고 애기니 어쩌니, 양심 없네"
"야! 한살이라도 많은 건 많은 거야! 이게 어디 누나한테! 그러고 보니 너 왜 나한테 누나라고 안 해? 누나라고 해봐"
"싫어요"
기대도 안 했어... 싫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지.
"그럼 존댓말은 왜 하냐"
"여자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며"
"이런 거?"
"반존대"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잘 주워들었네. 계속해. 실은 마음에 들어 니 말투. 좀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누나라는 말도 좋아해"
"그건 싫어요"
뭐야... 말을 들었다 안 들었다 해... 내가 얘한테 누나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쟤보고 내가 오빠라고 하는 게 더 빠를 듯싶다.
"밥 먹고 어디 갈래요"
"또 어딜 가!"
"저녁까지 뭐 할 건데요. 오늘 나랑 술도 먹어야 되는데"
하? 참나... 자기 혼자 오늘 하루 일과를 다 짜왔구만... 상대방 동의도 없이... 지 맘대로야!! 지맘대로!
"내가 왜"
"술은 좀 이른가"
이틀, 아니 사흘 만에 처음으로 내 눈치를 본다. 눈썹을 씰룩이며 정색하고 대드는 내 모습에 처음으로 전정국이 눈치를 보며 말을 주워 담았다. 딱히 의도하고 지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이르지 그럼! 무슨 술이야! 아니, 술만이 아니라 너랑 내가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되는 건 뭐야 대체!
"알았으니까 눈 좀 펴요.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네"
이제 겁 좀 나니. 다행이다. 앞으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 할 때 이 표정 좀 자주 써먹어야겠다.
"밥만 먹고 집에 보내줄게요"
제발... 그런 불쌍한 표정 좀 짓지 말란 말이야..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나. 아까부터 종종 짓는 저 표정에 자꾸 마음이 약해지고 난리다.
그래도 술은 일러. 약해지지 마라. 조... 조금만 더 있다가 마셔주자...!
**
"여기가 집이에요?"
집 주소를 알려주기 싫어서 혼자 간다고 뻐겼다가 결국 말빨에서 밀리고만 나는 전정국을 집까지 데려와 버렸다.
"어. 우리 집이다"
"혼자 사는 거 아니네"
"왜, 아쉽냐?"
"조금"
허얼!!! 쟤 말하는 거봐!!! 아쉽긴 니가 왜 아쉬워! 위험한 놈일세.. 위험해...
"빨리 가 너!!"
"내일 뭐 해요"
얼른 어깨를 밀며 가라고 하자 한 발짝도 안 밀리고 그 자리에 서서 내게 물었다.
"우리 내일 또 봐!?"
내일 뭐 하냐는 말에 깜짝 놀라서 밀던걸 멈추고 대답하니까 얼굴에 금세 서운한 표정이 드러났다. 자기감정 속이지도 못하네.
"뭘 또 그렇게까지 놀래요. 사람 마음 아프게"
"미안.."
그 모습에 또 마음이 약해져서 하지 않아도 되는 사과까지 하고.
"내일 학교 가지..."
"학교 어딘데"
"너는 학교 안가?"
"나 학교 안 다니는데"
"학교 안 다녀?"
"말했잖아요. 기억 안 난다고"
아...? 기억 안 난다고 했지. 학교 다니는 걸 잊어버렸다는 건가? 아예 기억이 없는 건가? 태어났을 때부터 쭈욱? 그럼 눈 뜨자마자 21살, 아니 4년 전부터 기억 안 난다고 했으니까 17살인가?
뭐가 기억이 안 난다는 거야... 헷갈리네.... 뭐라는 거지...
"기억... 안 나..서? 대학 안 간 거야?"
"안간 게 아니라 못 간 거지. 거봐, 궁금한 거 많으면서. 술 먹자니까"
대체 왜 글로 튀는 건데. 말려들지 말자!
"아냐 안 궁금해! 너 얼른 가 이제!"
마저 손에 힘을 주고 전정국을 밀었더니 내 말에 처음으로 비웃음도 아닌 헛웃음도 아닌 살짝 기분 좋은 웃음을 보였다. 예쁘네.
"내일 봐요. 전화할게"
뭘 내일 보고 뭘 전화를 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남들이 보면 흡사 연인 사이, 그 꼴이었다. 아니야... 이건 연인 사이가 아니라고.. 그냥, 음.. 뭘랄까. 불쌍한 사람과 봉사하는 사람? 좀 너무하긴 하지만 난 그냥 저 아일 도와주는 거 뿐이라고!
자길 밀고 있는 내 어깨를 잡더니 먼저 들어가라고 내 몸을 집 쪽으로 돌렸다. 꼴에 남자라고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봐준다는 건가.
너 가면 들어간다고 하려다가 괜히 또 입씨름만 할까 싶어서 몸이 돌려진 참에 그냥 집으로 들어갔다.
대체 왜 맨날 저 날 짤을 쓰는지 모르겠다만... 저 날이 이뻐서라고 하죠...ㅋㅋㅋㅋ
하도 맨날 맨날 와서 독자님들 지겨우실까봐 하루 걸러서 왔습니다!!! 하하하하
더 할말이 없네요!! 그저 감사하단 말밖에!!!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비루한 글ㅠㅠ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해용ㅠㅠㅠㅠ
저는 그럼! 또 가볼게요~~
암호닉!!! 무한 감사 드립니다ㅠㅠㅠ
민슈가님, 김남준님, 설날님, 런치란다님, 권지용님, 베베님, 알라님, 수슙님 다들 감사합니다! 제 사랑 다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