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deo GAME?
후욱, 하고 담배를 입에서 뿜어내자마자 악취가 흘러나왔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 이 새벽녘을 걸으며 슈가는 라이터를 딸깍 딸깍 눌러대기 바빴고 두 모금 정도 입가에서 마셨다.
콧끝을 스치는 바람의 칼날이 피부를 뚫고 지나간다. 그닥 좋은 기분은 들지않는다. 마지막 동네인 만큼 신중, 또 신중해야한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두꺼운 외투를 좀더 몸으로 밀착시켰다.
슈가는 담배를 뺏어갔고, 자신의 입가에 물었다. 이 사이로 살며시 문 흔적을 남긴채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능숙하게 입으로 빨고 뱉기를 보고있자니 어지간히 머리가 복잡한 게, 힘들다.
마른세수를 벅벅해내고 가로등에 기대고있던 몸을 일으키니 슈가도 자연스럽게 나를 따랐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몸을 꿰뚫고 망가지게하는 각성을 해내고나니 주변의 감각이 미쳐 날뛴다.
라카로의 냄새가 희미하게 나고 있었다. 슈가의 안목은 탁월했다. 애초부터 여기에 오기 싫어서 빙빙 돈 것인지는 몰라도 나름 강한 라카로의 향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태생부터 그랬던 것처럼.
슈가의 솔나무 냄새가 더욱 강해졌다. 각성의 모습을 확실하게 하고자 능력치를 최대로 이끈 탓이였다. 뒤따르는 그의 모습을 살짝 흘겨보고 무작정 걸었다.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눈동자를 깜빡였다. 세상이 번쩍 흔들리더니, 곧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영은 어두운 보랏빛을 내며 형체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속에 감춰진 추락정도를 나타낸 '모로'가 보이고 있었다.
모두들 비슷하거나 작았다. 큰 사람은 전혀 없었다. 이 곳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모로'는 불안한 파동을 내며 빛을 뿜다가 곧 사라졌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뱀파이어에게 이 능력을 작동하면 몸의 반 이상이 '모로'로 가득차있었다. 특히나 최근에 가장 소름끼치도록 많은 양을 차지하던 놈은 당연히 랩몬스터가 1위였다.
하지만 나는 내 모로가 어느정도 인지 잘 모른다. 거울로 비춰보아도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묵묵히 내 한계치만 알 뿐이였다. 그게 답답한 요소로 작용하다고 느낀적은 딱히 없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역에서 빠져나와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어깨를 세게 부딪혀도 강도만 알 뿐이지 직접적인 기분나쁠 세기를 넘길 뿐이였다. 방금 어떤 남자와 어깨를 부딪혔다.
작은 신음을 흘리며 멀어져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붙잡으려다가 슈가에게 저지를 당하는 모습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자처한 사제의 역할에 굳이 그만두라고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표지판을 보니 이 곳은 560번가였다. 왼쪽으로 가면 559번가로, 오른쪽으로 가면 561번가로 갈 수 있었다. 북쪽으로 가면 560-1가를, 남쪽으로 가면 560-0가를 가르켰다.
이윽고 내게 가까이 온 슈가에게 물었다. 슈가는 물고있던 담배를 손가락으로 지져끄며 입가를 벅벅 닦아냈다. 어디로 갈까? 도무지 눈을 감고 집중해도 납득갈 냄새도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될까? 최대의 난제이자 오늘의 시작이다. 슈가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머리를 탈탈 털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려니까 감각이 무뎌진거야?"
"100년만이니까."
"능력 발동해도 무리하지 않게 찾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니가 발동하던가."
그저 무심하게 건넨 말인데 또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절로 차오르는 웃음을 겨우 참고 그를 저지했다. 그래, 그냥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희미한 냄새와 느낌을 총 동원해서 밝혀야했다.
지하철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이제 거리에는 열 댓명의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슈가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은 어떻게든 막아볼테니 하라는 의미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그러자 슈가의 능력이 더욱 증폭되었다. 덩달아 능력치를 끌어올린 듯 했다. 코를 씰룩이고 이 도시의 탁한 냄새를 깊게 마시니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타임리프 처럼 빠르고 돌아가는 재연현장. 이제 적당하게 보다가 슈가가 건들면 이 능력을 멈출 수가 있었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돌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마냥. 뒤로 걷고 뒤로 빠르게 걷고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비디오의 뒤로가기로 보고있으니 재미있었다. 숨기지 못하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느려지는 시간의 흐름. 눈을 천천히 감으니 더욱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좀 더 집중을 요했다. 주먹이 절로 쥐어지는 탓에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간의 흐름은 3일전이였다. 3일전 밤 9시. 한 남자가 후드집업을 뒤집어쓴채 주변을 둘러보며 빠른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후드집업 속에 가려진 외모를 좀 더 보고자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는 키가 작지 않았다. 오히려 키가 큰 축에 속했고, 우리보다 어두운 피부톤을 갖고있었다. 작은 얼굴에 입술은 그에맞지않을 정도로 두꺼웠다. 이 능력에 '모로'감지 능력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돌리고 '모로'능력을 발동시킨다는 것은 꽤 힘든일이였다. 그렇기에 슈가가 더욱 필요했다. 팔을 뒤로 돌리니 기다렸다는 듯이 잡는 그의 손아귀가 꽤 힘이 쎘다.
전해져오는 힘의 크기에 턱끝까지 숨이 막혔으나 곧 집중을 더더욱 올렸다. 모로 능력 발동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꿈틀거리며 근육이 요동을 쳤다.
'날 찾지말라고 했잖아!'
그 남자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소리쳤다. 그러자 뒤따르던 한 여자가 움찔하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하지만, 너가 꼭 나를 다시 찾아줬으면 좋겠단 말야.'
'너무 이기적이야.'
'알아, 이기적인거. 그래도 난 너 없으면 못 살아.'
진지하게 말하는 여자에 비해 남자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이때였다. 모로 능력을 발동시켰다.
남자의 냄새는 뱀파이어 냄새가 희미하게 덧붙여져 있었다. 이 바닥에 무슨 뱀파이어 냄새타령이나 하고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어도, 이런 것 아니면 구분할 수가 없었기에 그랬다.
눈을 번뜩이며 모로 능력을 발동하고 있으니,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남자의 몸 속에 감춰진 '모로'는 짙은 노란색 빛을 내며 크게 증폭되고 있었다. 크기 또한 일반인들보다 큰 것은 당연했다.
찾았다. 희미하게 걸친 웃음을 깊게 베어가며 보고 있었다. 감고있던 눈을 뜨고 시간을 돌렸다. 남자의 얼굴을 알았으니 이제 찾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 생각이 들자 귀찮던 마음도 사라졌다.
뒤를 지키고 있던 슈가가 내 어깨를 감쌌다. 찾았어?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탐탁치 않아하는 슈가의 시선을 그대로 느껴가며 걸음을 옮겼다. 놈은 생각보다 가까이 살고있었다.
이름도 뭐도 다 모르지만 얼굴과 모로는 알고 있었다. 괜찮다, 이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먹을 절로 쥐며 웃음을 슬쩍 흘리니 뭐가 그리 좋냐며 입을 삐죽인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남자'는 사실 이 곳에 살면서 그렇게 불편한 점을 느끼지 않았다. 간간히 찾아오는 여자들을 귀찮아하며 새로운 여자를 찾을 뿐이였다. '남자'에게 여자는 사치이자 쇼핑리스트일 뿐이였다.
필요할 때 들이대면 넘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느끼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여자들은 추파를 던졌고 남자도 딱히 거부를 표하진 않았다.
그래도 허탈해.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비볐다. 회색으로 물들여버린 이 도시의 하늘은 칙칙하기 그지없다. 버려진 소파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주머니에 있던 사탕을 쭙쭙거리고 있으니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은 어젯밤 같이 지세웠던 여자가 공급해줬다. 대체 어디있는지 귀신같이 알아채서는 와서 친절하게 쥐어주고 간 이유 덕분에, 웃음만 절로 새어나왔다. 밤일을 잘한다는 것은 꽤 행복하다.
갑자기 종이 땡- 땡 울렸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이 곳에 산지 어연 5년- 근처에 종도 무엇도 그 종교적인 것도 없는 삭막한 미친 도시일 뿐인데 갑작스러운 종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남자는 구겨진 옷을 조심스럽게 피며 뒤롤 돌아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안개만 자욱하게 끼고 있었을 뿐이였다.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소파에 누웠다.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왠 갑작스러운 종소리람. 미쳤다, 미쳤어. 투덜거리며 사탕을 으득으득 깨물었다. 단 내가 밀려들어왔다.
땡- 땡-
또 다시 들려오는 종소리에 귀를 후비적 거리던 남자는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긴장을 곤두세웠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주변을 살폈고, 힘을 풀어놓았던 몸에 잔뜩 가드를 올렸다.
이 바닥에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들 중 하나는 ''힘'이였다. 타고난 체력과 능숙한 스킬들로 인해서 바닥에 자신을 얕보던 인간들을 눌러제끼고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는 이유였다.
누웠던 몸을 일으키니 갑자기 안개가 더욱 자욱해졌다. 침을 꼴깍 삼키고, 눈동자를 굴렸다. 입술이 덜덜 떨려온다. 오랜만에 심각한 냉기가 어딘가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죽여버려야 내가 산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자가 남자의 뒤를 공격했다. 급습을 차마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맞아준 남자는 꼴사나우게도 바닥에 세게 쓸려가며 순간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대체 언제 나타난거지? 숨소리도 발소리도 하나도 안들렸는데 왜 내 뒤에 있는거야? 당황스러운 마음을 빠르게 접어내고는 엉거주춤하게 있던 자세에 각을 넣었다.
낯선자는 거친 호흡을 재촉하며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얼른 자세를 고친 남자는 눈을 번뜩이며 노려보기 시작했다. 덩치만 크고, 쓰잘데기 없는 놈임이 분명했다.
낯선자의 선공이 시작되었다. 주먹을 휘두르며 빈틈 하나라도 만들어보겠다는 심보가 당당히도 보였다. 공기를 가르며 무식하게 주먹을 뻗어내는 꼴이 참 역겹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적당히 피해주다가 급속도로 힘을 실어넣어 주먹으로 낯선자의 볼을 쳐버렸다. 퍽, 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퍼지면서 낯선자의 고통어린 신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들었다.
순식간에 판이 뒤집어지는 시초라고 생각했다. 얼얼하게 서있는 낯선자에게 망설임없이 다가간 남자는 다리를 힘껏 들어올려 허리에 발길질을 가했다. 낯선자는 으윽, 하며 비틀거렸다.
어쩌면 더 공격을 가할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볼을 부여잡으며 씩씩 거리는 낯선자 발 밑에 다 먹은 사탕 막대를 떨어뜨리고는 이로 오도독 씹어먹으며 주먹을 쥐었다.
발꿈치로 낯선자의 배를 공격했다. 컥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지는 꼴이 우습다. 털썩 하는 소리는 모두 낯선자의 몫이였다. 선빵은 내줘도 그 뒤는 절대 내줄 수가 없었다.
끙끙 거리는 낯선자의 모습 모두 눈에 담았다. 그리곤 자리를 옮겼다. 뒤로 걸어가는 척 하며 신고있던 군화로 목뼈를 밟음과 동시에 바닥으로 내려쳐버리자 낯선자의 얼굴이 바닥에 박혀버렸다.
푸욱 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피가 이마에서 나오고 있었다. 과다출혈로 사망시킬 수 있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남자는 피가 튀겨져버린 소매를 슥슥 닦아냈다. 아, 더러워.
"생각보다 존나 강하군."
땡- 땡-
또 의문의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낯선자의 목소리도 아니고, 자신의 목소리도 아니였다. 남자는 고개를 휙 들어올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멀찍이 떨어져있는 건물 옥상에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두 명의 사람 말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또렷했다. 남자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팔을 벅벅 긁었다.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은 까닭이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좀 더 자세히 보고있으니, 갑자기 한 사람이 사라져있었다. 남자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턱이 없던 터라 눈을 빠르게 깜빡였지만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긴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만이 자신을 여전히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강하게 두근, 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이를 절로 악물었다. 왜 ,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턱이 없었다.
남자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방금 이겨버린 낯선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낯선자가 있던 바닥에는 핏자국도, 무엇도 없어서 순식간에 몸이 파들파들 떨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이번 라카로냐?"
방금까지 '존나 강함'이라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순간적으로 주먹을 쥐고 휘두르자 가볍게 제압하는 모습에 깜짝 놀래버렸다.
하긴, 자기가 라카로인지는 모르지만. 한숨을 푹 쉬며 주먹을 거칠게 내려놓는데도 그 위압감이 장난아니였다. 말문이 턱턱 막혀오는 분위기에 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맞아, 이번 라카로네. 여자목소리에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위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 인영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보랏빛 눈동자를 띄며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오히려 방금 자신을 제압하는 사람보다 더욱 기가 쏐다. 주눅이 들어버린 남자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손사레를 치며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발악을 쳤다.
한심하게 바라보던 여자는 곧 표정을 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인상을 서서히 찌푸리며 무언가 사색에 잠긴 얼굴이였다. 제압하던 사람은 어느새 여자에게 가까이 와 팔을 잡고 있었다.
"...맞아, 얘야."
여자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그 사람을 내쳤다. 그리고는 빠르게 남자의 팔을 잡고는 살면서 보지 못한 웃음을 씨익 짓는 것이였다. 남자는 강하게 휘몰아치는 모습에 눈을 크게 떠버렸다.
이름이 뭐야? 서툴게 다정한 목소리에 남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얀 피부가 이 도시와 지독히도 어울리는 여자였다. 보지못하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있는 것도, 이 곳의 브랜드가 아니였다.
대답하려는 자신의 목소리를 싹둑 잘라버리는 제압하던 사람이였다. 내 이름은 슈가다. 그 말에 남자는 푸흡 웃음을 터뜨리며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슈가, 슈가라니!
설탕이란 말인가! 남자는 웃음을 끅끅 터뜨리며 방금까지 자신이 느끼던 위압감도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여자는 얼굴을 굳히며 대체 이딴 반응을 왜 보이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슈가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만 갔다. 인간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위압감을 느끼고 고개를 숙이기 바빴는데 이 인간은 그게 안통한다는 건가? 이상한 기분에 입술을 지긋이 꺠물었다.
쳐 웃지마, 시발아. 결국 슈가의 거친 언행에 남자는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에 입을 다시 열었다. 난 그냥 여왕이라고 불러라.
구토가 날 정도의 닉네임을 남발해가는 기분은 썩 좋지않다. 하지만 자신은 본명보다 여왕이란 단어로 많이 불렸으니 오히려 그게 더 편할때가 종종 있었다.
이번에 남자는 웃지않았다. 눈꼬리를 굳히며 깜빡이고 있으니 숨겨져있던 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자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며 어깨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조심스럽게 쥐는 것이지만 심장을 옭아매는 기분이였다. 긴장되는 분위기에 엉거주춤하게 쥐고있던 주먹은 풀려있었다. 여자인데 이렇게 분위기가 살벌해서 어떡하냐는 질문만이 둥둥 떠다닌다.
여왕이라고 불러봐. 슈가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남자는 고개를 저으려고했지만 여자가 빤히 쳐다보는 탓에 절로 입이 열리는 기분이였다. 여자는 생각했다. 아, 능력 함부로 쓰지말껄.
"ㅇ, 여왕."
그러자 남자의 입이 절로 풀려버렸다. 그리고 이윽고 나오는 남자의 이름은, 아마 슈가가 능력을 써서일 것이다.
"이름이 뭐지?"
여자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지켜보던 슈가의 눈동자도 노란색으로 변해버렸다. 두 사람의 동시각성은 남자의 눈과 코, 입을 사로잡아버렸다. 즉, 자신들의 명령을 알아듣게 만들어버린 것이였다.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끝내 이기지 못했다. 절로 떨려오는 눈가, 꿇려버리는 무릎, 위협적인 분위기에 맞춰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길래 이런 무서운 인간들을 만났나 싶었다.
설마, 내가 때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배후세력이 있어서 그런것일까? 혼란스러운 마음에 두근거리는 심장속도가 빨라졌다. 눈으로 보이는 저들의 손아귀가 두렵게만 느껴져서 숨을 들이켰다.
보라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하는 여자의 눈동자도, 검은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하는 저 슈가란 놈도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것을 입밖으로 내뱉으면 자신은 왜 꼭 죽을것만 같은 기분인지.
슈가는 남자의 속 마음을 이미 읽고있었다. 이 새끼, 지금 우리를 거부하고 있는거구나. 헛웃음을 짓자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 눈길에 여왕이 말했던 '모로'가 숨겨져 있었다.
"김태형."
"김, 태형?"
"560-4번가에서 V라는 예명을 쓰고있는 새끼야."
남자의 말, 그리고 여왕의 물음. 끝내 이어오는 슈가의 덧붙이는 말에 태형은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V라는 예명을 쓴다는 건 대체 어떻게 알고 이러는건지 점점 더 무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슈가는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었다. 아마 정체가 뭐길래 V라는 예명 쓰는건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싶은 눈친걸, 알고있었다. 하지만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슈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눈빛이 오묘하게 변했다. 너, 이 바닥에서 뭐하는 데? 초반부터 반말인게 흠이긴 하지만 역시나 거침없이 답변을 주구장창 늘어놓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 김태형이였다.
그냥 이 바닥 청소하고 있어...요. 질질끌던 말에 슈가가 눈을 번뜩였다. 반말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저 뻔뻔한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꾸욱 참아내는 그의 모습에 여자는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혹시나해서 각성의 상태를 좀 더 끌어보았다. '모로'능력을 잘 못 봤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다시 이끌어내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 아까 그 거리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너, 3일전에 560번가 거리에서 어떤 여자랑 밤에 말싸움하지 않았어?"
시간, 장소, 그리고 뭘 했는지도 알고있다.
태형은 깜짝 놀란 얼굴로 입술을 떨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거지? 아니, 그보다 이게 뭔 일이야.
"너희는 대체 누구예요?"
물어보는 것에 대답해주지 않을 분위기였다. 슈가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귀찮게 여자는 자꾸 대답을 하려고 했다. 막으려고 했지만 자꾸 빠져나가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를 뽐내며 여자가 태형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훅 들어오는 묘한 냄새에 태형의 눈동자가 풀렸다. 아마, 뱀파이어 특유 각성의 냄새가 뿜어져 나온 까닭일 것이다.
지금부터 잘 들어- 각성한 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꽤 쉬운일이다. 말하는대로 행동해 준다는 것 또한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지 아마 겪어본 사람만 알 쾌락의 쾌락일 것이다.
여자의 붉은 입술이 오밀조밀하게 움직였다. 태형은 풀린 눈동자를 침착하게 또렷히 잡아가며 여자의 최면을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슈가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
"...나의 라카로가, 되어라."
주문처럼 홀리는 그 목소리로 속삭였을 때, 태형의 심장도 같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 뱀파이어는 각성했을 때 체취가 달라진다. 인간을 빨아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인간이 홀려하는 냄새로 변하기 일쑤이다.
* 뱀파이어의 능력은 굉장히 다양하다. 예를 들어, 여주인공 같은 경우에는 랩몬스터와 동등한 힘을 갖고있다고 했는데.
다섯개의 감각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랩몬스터와 동일했다. 눈은 상대방의 교란시키고 최면을 걸게한다. 코는 남들보다 뛰어난 후각을 갖고있고,
피부나 감각은 그 공간속에 기억된 공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귀는 남들의 하는 이야기를 좀 더 확실하게 들을 수 있다.
입은 상대방이 홀려할 목소리톤으로 바꿀수도 있다. 하지만 여주인공은 상대적으로 귀의 능력이 떨어지는 편. 랩몬스터는 눈의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 닉네임 정리
가려진 왕자 - 랩몬스터
여왕 - 여자주인공
라카로 - 김태형
여왕의 사제 - 슈가
혼탁의 예언가 - 진
어릿광대 - 지민
불멸의 기사 - ?
돌아온 탕자 - ?
* 상대방의 타락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를 모로 라고한다.
* 인간에게 뱀파이어가 나타나면 사실 아무것도 들리지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들리지만, 인연으로 맺어진 수많은 라카로들에게는 종소리가 울린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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