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는 섹시하다 - 9
Young & Beautiful
"어릴 때 기억이 있어?"
한동안 불필요한 대화를 했다고 생각했다. 벌써 이 집에 눌러산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매일매일 하얀색 와이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는 그녀가 갑작스럽게 치마를 입었다.
물론 치마 또한 네오프랜 소재의 옷이였다. 부드러운 걸 좋아하나. 태형은 침을 꿀꺽 삼키고 눈 앞에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가를 주욱 늘여 웃었다.
아니요, 태형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기억이 있냐는 건 좋았던 기억이 있었냐고 묻는 것일테고. 따라서 태형은 그런 기억이 없으므로 진실을 말한 셈이였다. 좋았던 게 아예 없어요.
태형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무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던 기억이 없는거구나... 하지만 곧 그녀가 푸스스 웃으며 태형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기분나쁘게 차가운 느낌이다.
문득 태형은 그녀가 손을 잡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그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스킨십을 할 때 차가운 느낌을 한껏 받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냉철한 촉감이 소름돋는다.
어버버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르켰다. 태형의 표정은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왜 그런표정을 짓고있는거야?
오랜만에 바깥에 좀 나가자. 맞춤형 옷도 이제 막 나왔을테고, 먹을 것도 좀 사야되고 여러모로 바빠. 진한테도 가야되니까 조금 서두르는게 좋을껄.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였다. 일주일만에 바깥을 본다.
태형은 물빠진 헐렁한 청바지에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자신에게 좀 박시한 후드집업을 걸쳐입었다. 워낙 추운지방임에 따라 매일매일이 온도가 낮았다. 그럼에도 태형은 주구장창 후드집업만 입어댔다.
기모가 달린 것도 아닌데. 그녀는 혀를 짧게 찬 뒤에 남아있던 과자를 몽땅 우걱거리는 태형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먹으면서도 어딘가에 스트레스는 받는 모양이다. 어지간히 마른몸매는 여전했다.
슈가는 위원회의 부름을 받고 달려갔다. 왜 자꾸 닉네임에 집착을 보이는걸까. 그 무시할법한 닉네임을 따라 인생이 뒤바뀐다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 대신에 간 셈이니까. 사제라는 것은...
여왕의 사제라는 제목을 좋아하진 않는 아이란 말야. 그녀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다가 태형과 눈을 마주쳤다. 태형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과자봉지를 탈탈 털어낸 후 였다. 입가에 잔뜩 묻어났다.
흘리지 좀 말고 먹어- 그녀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과자부스러기를 떼어내니 멀뚱히 쳐다보던 태형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같은 면모를 보여 창피한 모양이였다.
뒤늦게 손등으로 벅벅 닦아내는 모습을 보며 풋 웃었다. 라카로는, 아니 인간은 계산하지 못한 면모를 잔뜩 보여준다. 그래서 더더욱 뱀파이어를 즐겁게하고 알 수 없는 기대감을 자꾸 걸게 만들었다.
그녀는 인간을 무척 싫어했지만 라카로라는 존재에선 관대할 뿐이였다. 슈가는 그 예외였는데. 슈가라는 단어든 뭐든 녀석과 관련된 것을 입 밖에 내뱉거나 생각만 해도 껄끄럽게만 느껴졌다.
입에 돌을 씹는 기분이다. 닉네임에 따라가는 뱀파이어 인생. 여왕의 사제, 가려진 왕자, 여왕, 불멸의 기사, 혼탁의 예언가, 어릿광대, 라카로, 그리고 ... 돌아온 탕자.
"당신은 어릴 때 기억이 있어?"
싸가지 없는 말투라고 치부해도 그럭저럭 참을만한 말투였다. 인간은 원체 그런 건방진 말투를 가졌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있던 여왕은 태형의 질문에 얼굴만 잔뜩 굳힐 뿐이였다. 어릴 때 기억이라니.
어릴 때 기억은 상처였다. 이렇게 성인이 되기도 전에 잃어버린 부모의 죽음과, 몇십년을 자도 바꿀 수 없는 지나간 일들. 그리고 눈으로 보지못한 부모의 장례는 시간이 지나도 불편하기만 하다.
라카로의 질문은 그저 평범했을 뿐이였다. 하지만 유독 유난떠는 반응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좀, 매우 늦게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기억 없다고. 대답대신에 건넨 제스쳐였다.
태형은 묵묵부답으로 대신 대답했다.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는 자신의 바지끝을 손으로 매만지다가 창문을 쳐다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햇빛이 창턱을 넘나들고 있었다. 빛이 집을 가득 채울것이다.
아... 빛에 닿으면 피부가 반짝반짝 빛날것이다. 못된 꼴을 보이기는 지독히도 싫어서 탁자위에 올려두었던 마스크를 꺼내들었다. 귀에 걸고, 텁텁해진 공기의 흐름을 호흡기로 느끼며 마스크를 씌웠다.
이렇게라도 자신을 숨겨야했다. 한동안 이 곳은 어두웠다. 구름이 가득 담긴 곳이였기에, 회색하늘이 일상이였다. 마스크 없이 싸돌아다녀도 모두들 그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밤에는 달빛을 받으며 달렸으니까. 아무도 우리를 뱀파이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눈에 담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고 설령 보았다고 쳐도 최면과 깊은 잠을 재우면 모든 것이 해결 되었다.
그녀는 태형에게 웃어보였다. 억지웃음이였다. 이제 가볼까? 오늘은 각성하지 않을꺼고, 같이 걷는게 좋겠네. 허여멀건 웃음을 빙긋빙긋 짓는 여왕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태형은 가슴이 쿡 찔려왔다.
후드집업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여왕의 뒤를 따랐다. 그저 건물 하나에 사는 것 뿐인데 그녀가 있다고해서 조금씩 달라보였다.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고, 앞을 상상하는 못된 버릇이 생겨버렸다.
터벅터벅 걸었다. 여왕은 태형보다 키가 작았다. 둥근 뒷통수가 차가운 바람에 살짝살짝 흩날렸다. 태형은 말없이 그 모습을 쳐다볼 뿐이였다. 일종의 시선강탈이라고 쳐두자.
맞춤형 옷을 잘 만든다고 1주일 전에 데려온 곳을 다시 찾아왔다.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듣기 힘든 언어로 무어라고 말했다. 태형은 귀를 막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곧 바로 누군가 투덜거리며 나왔다. 여왕- 이라는 단어를 읊조렸다. 손가락으로 태형을 가르키며 또 다시 듣기힘든 언어를 중얼거리니 점장인 듯 그 남자가 급하게 몸을 비틀어 무언가를 꺼냈다.
돈을 지불했다. 그리고 태형에게 건네며 말했다. 네꺼라고. 어버버한 얼굴로 받아든 종이가방 속을 슬쩍 열어보았다. 두 개의 옷이 곱게 접힌 채 자리하고 있었다. 이, 이걸 왜 나한테 주는거야?
점장에게 귀찮은 손짓을 보이며 꺼지라는 행동을 취했다. 옷을 파는 것에만 흥미가 있던건지 금방 자취를 감췄다. 그가 사라지자 그녀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야 네꺼니까 너한테 주는게 답이잖아.
물론 당연한 말이였다. 하지만 태형이 말하는 의도는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가 묻고싶었던 말은 왜 이런 걸 줘서 뭘 하냐는 것이였다.
"올 때 아무것도 안 가져왔으면서."
"...아."
"바본줄아나봐, 내가?"
"그건 아니고... 무튼 고마워요."
그래도 어느정도 예의가 있다고 느낀건, 고맙다고 말은 할줄 아는 거였다. 태형은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종이가방을 세게 움켜쥐었다. 날카롭고 싸가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또 아닌모양이다.
여왕은 집 근처의 마트로 발걸음을 옮겼고 태형은 쫄래쫄래 그 뒤를 따랐다. 원래 얼굴만 마주보면 화가 들끓었는데 오늘은 예외라고 느꼈다. 나도 참 발전했네. 뱀파이어라고 믿지도 않았었는데.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비정상적으로 빨간 입술만 빼면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 보기도 힘든 잿빛눈동자도 감춰버리면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쳐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쓸데없이 사람의 주목을 받고다녀.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갑자기 뒤를 휙 돌아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손에 가득 짐을 들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빤히 쳐다보는 그녀가.
뭔 생각을 한건지 읽은걸까? 내가 한심하다고 느끼는건가? 인간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내가 라카로라서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난 너무 멍청한거냐고.
그녀는 다시 짧게 웃었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래? 그렇게 물으면서도 오른손에 든 쇼핑백에 담긴 물건들을 자잘하게 흔들었다. 가만히 쳐다보니 오늘 저녁은 스파게티인 모양이다.
토마토 소스와 뭉텅이로 산 면들. 태형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스파게티...가 좋을것 같네요. 그러자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태형의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이다.
가만보면 어린애같았다. 서슴없이 하는 행동에서 어른스러움과 아이가 공존하는 좀 이상한 여자. 그걸 알면서도 옆에 자신을 두는 이유가 몹시도 궁금해졌지만 당장은 무턱대고 묻진 않았다.
화가나서 폭주할때는 인간인 자신도 소름돋아 미칠지경이였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죽일듯이 행동하는 슈가도 슈가였지만 여왕이라는 제목을 다는 여자만큼 살면서 기가 이렇게 센 여자는 처음이였다.
혀를 내두르다가 어릴 때 입에 달고살았던 불량식품을 발견했다. 톡톡 튀는 가루들에 사탕을 푹 찍어넣어 몇 번 헤집은 후 입에 무는 사탕이였다. 입 속에서는 가루들이 탕탕 튀며 신 맛을 냈던.
그녀는 갑자기 멈춰선 채 사탕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태형의 시선을 거두었다. 태형은 과장되게 흠칫 놀라며 여왕을 내려다보았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뭔 일 있냐는 그녀의 질문이였다.
아니요. 고개를 슥슥 저으니 어깨만 으쓱인다. 그리고 태형이 응시했던 사탕을 힐끔 보았다. 요란한 그림들과 문구들이 새겨진 가루소재의 사탕찍어먹기인가? 이런것도 파는구나...
그녀의 장바구니를 보니 과자도 다섯 개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 사는 이유 중 몇 프로는 자신때문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만가만 쳐다만 보다가 손을 뻗어 그 사탕을 뜯어냈다.
사줄께, 한번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동의하듯이 묻는 질문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많이 먹었고 단종됐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만난 사탕의 귀환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단 거 좋아하는건가? 태형은 좌우로 길게 찢어진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여왕을 흘끗 응시했다.
* * *
"라카로 행적을 뒤쫓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어."
[차근차근히 해. 그 여자, 모로는 존나게 높아도 단순히 '라카로'니까.]
"어차피 버릴 꺼, 쓰잘데기 없는 정은 주지 말라는 거군."
랩몬스터가 길게 웃음을 늘어뜨렸다. 아마 제이홉의 말에 간파를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맞아, 어쩜 그렇게 나를 잘 아는거지? 랩몬스터의 말에 제이홉은 긴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지민의 농담섞인 그 변태라는 단어가 너랑 잘 어울린다, 랩몬스터. 칭찬인지 욕인건지 분간도 못 하게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또 그 멍청한 얼굴로 전화를 응시하고 있겠지. 제이홉은 쯧, 혀를 찼다.
지금껏 만난 라카로 중에서 모로능력은 매우 불안했다. 여자 치고 저런 모로를 갖는게 지금까지 살 수 있는 것도 미스테리할 정도니. 제이홉은 여자의 뒤를 따르며 소리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지민은 아마 미친듯이 사냥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 세 명 중 가장 어린 나이를 자랑하는 것일까, 자제능력도 제로고 피부터 먹고싶어하니 그 모습을 보고 과연 어린게 괜히 어린것도 아니라며.
제이홉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여러모로 짜증나는 새끼들. 그래도 랩몬스터의 한정된 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자신을 구해준 것도 위상을 다시 이끌어 준것도 그였다.
손목을 찬찬히 꺾었다. 준비자세라고 쳐두자. 제이홉은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보고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여왕의 모습을 보았다. 여왕도 매일 바지를 입고다녔지만 갖고있는 긴 머리카락이-
여러모로 사람과 뱀파이어를 홀렸다. 뱀파이어. 물론 랩몬스터도 인간여자들과 뱀파이어들에게 치명적인 놈이였다. 여왕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숨이 막힐 정도라고 그들은 떠들어댔다.
랩몬스터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와 여왕의 진한 고독함이 잘 어우러지는데 두 사람의 같이 서있는 모습은 극히 보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여왕은 랩몬스터를 싫어했으니까.
뱀파이어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비밀리에 찬성했지만 그걸 재빠르게 알아챈 슈가가 배후세력을 물어뜯어 죽여놓았다. 물론 아무 허락도 없이 정략결혼을 할 뻔했으니 그들의 잘못이 컸지만.
그걸 알아챈 슈가도 대단한 새끼였다. 여왕의 미친 사제라고. 여왕과 관련된 일이면 뭐든지 눈빛을 번뜩였다. 제이홉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행동하는 슈가의 행동이 정말로 역겨웠다.
애초부터 여왕을 안 것도 아니면서 깝치는 꼬라지는.
제이홉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슈가의 그 능력은 돌아온 탕자, 전정국의 능력과 빼닮아 있었다. 여왕의 정신적 지주라고 쳐도 무방한 전정국의 피를 마신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지속적으로 여왕이 피를 공급했거나.
물어뜯어 죽일 정도로 슈가는 세지않았는데... 갑자기 든 생각에 제이홉은 걸음을 멈췄다. 전정국이랑 슈가랑 겹치는 기간도 없었던 걸로 아는데. 그럼 친히 여왕이 자신의 피를 나누어 먹였나?
설마, 하는 마음에 제이홉은 고개를 들어 멀어져가는 라카로 여자를 응시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걸음을 옮기는 여자의 목에는 랩몬스터가 꽂아넣은 송곳니 자국이 훤했다.
능력을 빼닮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고 극히 드문일인데. 물어뜯는 그 습성이 전정국이랑 똑같아서 순간 범인이 전정국인 줄 알았지만 배후세력을 물어뜯어 죽인 사람은 뒤늦게 알려진, 슈가였다.
그저 약해빠진 변덕종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란 사실에 제이홉은 살짝 충격을 먹었었다. 대체 여왕은 뭐하는 뱀파이어인건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곧 전정국이 돌아올 것 같은데..."
제이홉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번이 과연 마지막 대결답게 전정국, 슈가, 그리고 여왕도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였다. 랩몬스터, 지민, 그리고 자신 또한 고군분투해서 싸울 것일테니까.
마지막 라카로라고 쓰잘데기 없이 정을 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스쳤다. 물론 저 멀어져가는 여자가 아니라, 여왕의 행동을 걱정했다. 100년 전 그렇게 잃어버리고 나서 자취를 감췄던 그녀이다.
애증의 관계라고 말했던 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 애증의 관계인 건 인정한다. 괘씸하게만 느껴지는 슈가도, 라카로도, 전정국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헛된 상상이지만 여왕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는 상상도해보았다. 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며 붉은 입술을 혀로 찬찬히 쓸어내는 그녀의 자극적인 행동 모든것이 미칠 노릇이란 것을.
이윽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랩몬스터였다.
[물어볼 게 있어.]
제이홉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된 침을 삼켰다.
[여왕이 이번에 찾은 라카로는 뭐하는 놈이였어?]
"......"
[소문으로 듣지하자니 100년 전 내가 죽였던 그 라카로랑 비슷한 루트를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
"뭐?"
[100년 전 내가 죽인 라카로, 구준회랑 비슷한 모습들이 겹치고있어.]
"...아니, 비슷한 모습들이 아니라 그 행적들을 따라가고 있는거 아냐?"
[다시 생각하니까 재수없네. 그 새끼 혼란시키느라 진땀을 다 뻈었는데...]
"야, 랩몬스터."
말을 하다가 마는 행동에 제이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체 말을 하자는건지 말자는건지. 허리에 손을 댄채 깊은 한숨을 내뱉으니 그제서야 호탕하게 웃는다.
"그 때 친히 죽인건 너였어."
[......]
"그 떄의 라카로는 지금 죽었지만, 구준회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왕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해했던 건 기억안나?"
[난 그게 더 마음에 안들어.]
"미친 새끼..."
[그러게.]
제이홉은 손이 벌벌 떨렸다.
"무튼, 구준회. 그 놈 행적을 따라가고있다고?"
다시 묻는 그의 질문에 랩몬스터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맞아, 어떻냐면-
[여왕이랑 같이 돌아다니던데.]
"......"
[여왕이 놈에게 옷을 사주고, 웃어주고.]
"허?"
[자잘한 스킨십도 서슴없이 하고. 근데 그 라카로새끼는 뭔가 어벙한 얼굴이였어.]
"......"
[여왕의 그런 행동에 당황스럽다는 느낌.]
랩몬스터는 정말 사람신경을 긁는 재주도 있었지만,
그 만큼 사람을 보는 안목도 뛰어났다. 여왕과 왕자만이 가진 다섯 개의 감각 중 눈의 감각이 떨어지는 편이라고해도.
일반 뱀파이어보다는 월등했다. 스쳐지나가는 표정도 대충은 훑을 수 있었으니.
제이홉은 갑자기 슈가가 담배를 피는 장면이 떠올랐다. 하얀 필터를 입가에 살짝 물고 연기를 폴폴 풍기며 몽롱해진 눈으로 고개를 젖힌채 하늘을 쳐다보던 그의 모습을.
머리카락이 부스스 했음에도 일체 신경쓰지않았다. 물론 여왕도 마음에 들지않게 담배를 피는 편이였지만 슈가보단 아니였다. 지속적인 흡연은 슈가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 분명하다.
100년 전 여왕이 선택했던 라카로의 이름은 구준회였다. 하얀얼굴에 길고 큰 무쌍의 눈. 도톰한 입술을 가진 채 어벙하면서도 모든 일에 열정적인 면모가 그녀의 모든 것을 빠르게 사로잡았다.
이태껏 데려온 라카로들은 하나같이 무기용이였지만 유독 100년 전의 라카로에게 공들인 티가 났다. 하지만 그걸 무마시켜버리게, 랩몬스터는 기회를 주구장창 노리다가 구준회를 물어뜯었다.
자신이 한 짓은 절대 아니라며 부정하고 있었지만 제이홉은 그걸 또 믿는 여왕이 불쌍하기만 했다. 그냥, 랩몬스터가 송곳니를 갈았다고 불어버리고 싶네. 입만 근질했으나 참고 또 참았다.
그래, 우린 다들 미쳤다.
여왕도 미쳤고 나도 미쳤고 랩몬스터도 미쳤고-
슈가도 돌아버린 새끼야. 전정국도 지극히 정상은 아닌 놈이다.
지민도 미쳤으니까. 진도 딱히 정상이라고 치부할 순 없었다.
제이홉은 랩몬스터와의 전화를 끊고나서 한참동안 액정을 쳐다보았다. 그와 전화한 기록이 둥둥 떴다. 별 의미없는 침묵이 반을 차지했지만 매번 불현듯 전화해 중얼거리는 랩몬스터의 목소리.
쉭쉭거리는 그 목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자신을 복종하는 주인으로써 무시하기 일쑤였다. 갑자기 그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벌써 그 라카로 여자는 거리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씨발.
* * *
그렇게 라카로와 하룻동안 이 도시를 쏘다녔다고 해도 무관했다. 밥을 먹고, 쇼핑을 했다. 옷을 사고, 마트를 가서 장을 보며, 길거리 공연을 멈춰서서 보기도 했고,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 쇼파에 몸을 털썩 기댔다. 슈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진과의 대화가 좀 길어지는 것 같다. 라카로는 자신이 들고있던 짐을 탁자위에 올려놓으며 피곤한 안색을 비췄다.
서로 아무말 없이 허공을 쳐다보고 있기를 30분. 라카로, 아니 김태형은 후드집업을 주섬주섬 벗고는 근처에 개어놓았던 이불을 빼들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던걸까.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라카로와 이야기를 단 둘이서 했을 때는 정말 미쳤었다. 제 정신이 아니였다. 헛소리를 찍찍해대며 세상을 가질 수 있다고 했던 내 입. 아니라고 해도 진짜인 걸 어떡하라고.
한숨을 푹 쉬었다. 있잖아- 자고있는 줄 알았던 김태형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카로...라는거 말인데."
"응."
뭔 말을 하려고 저렇게 머뭇거리는 걸까.
"어떻게 단련하는거야?"
"단련?"
"훈련이라고 해야하나... 무튼 그 해의 마지막에 대결같은 거 한다며."
듣기 좋은 풍미한 저음이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김태형이 갖고있는 장점 중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였기에 나는 눈가를 벅벅 긁다가 입술만 달싹였다.
만약 이 곳에 슈가가 있었더라면 거침없이 말해줬을 것이다. 훈련은 이렇게 이렇게 하고, 넌 저렇게 해서 결국은 요렇게 된다고. 대충 말해주는 셈이겠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 상세했을 것이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내가 이상했는지 그가 몸을 뒤척였다. 다리를 덜덜 떨고 있자니 대답안하기도 뭐해서 또 다시 타이밍을 놓친 대답을 건넸다. 훈련은 아마 다음주 부터 시작할 것 같고...
체력을 기르고, 뱀파이어를 대항하는 힘을 키워. 상대편 라카로와 싸워서 이겨야 해. 그리고 호시탐탐 너를 노리는 상대편에서 빠져나올 전략도 간간히 세우는 것도 중요해.
왜? ...그 놈들이 널 가만히 놔두진 않아. 그 말을 하자 자연스럽게 구준회가 떠올랐다.
구준회.
"말은 되게 간단해보인다."
"뭐든 말은 간단하잖아."
"...그럼 지면 어떻게 돼?"
아직 아무것도 눈을 뜨지 못한 인간은 순수하기만하다.
다만 그 순수함을 내가 직접 망친다는 게 라카로이기도 해서 불쾌해.
"죽어."
"...뭐?"
손톱을 까득, 까득 씹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뱀파이어는 추방당하고, 인간은 뱀파이어가 되든지 아니면 죽어."
"돌았네."
"이 쪽 사회가 원래 살기 아니면 죽기 이거니까."
그리고 그걸 못 이기고 죽은 라카로들이 많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 닉네임 정리
가려진 왕자 - 랩몬스터
여왕 - 여주인공
여왕의 사제 - 슈가
라카로 - 김태형
혼탁의 예언가 - 진
어릿광대 - 지민
불멸의 기사 - 제이홉
돌아온 탕자 - 정국
* 라카로는 대결에서 지면 뱀파이어가 되어 버려지거나, 죽는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
댓글은 작가가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 암호닉 (암호닉 받고있어요!)
태아가 / 전정국 오빠 / 태형됴아 / 초딩입맛 / 그레이 / 김남준 / 봄날의너 / 설탕맛
예지앞서헕 / 꽃밭 / 새벽 / 여왕 / 으갸갹 / 다이 / 태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