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애는 죽었잖아요.. " 너무 차가워서 냉대 받는 아이가 있다. 백발의 은색 눈동자와 알맞게 내뿜는 공기조차도 너무 차가웠다. 언제나 내리깐 눈으로 바닥만을 응시했고, 말 수가 적었다. 태생이 그랬다. 몇만 분의 일의 확률로 아이는 차갑게 태어났다. " 닮았어.. 너무 닮았어. " 친남매도 아니면서 죽어버린 소년과 닮았다. 튀는 머리색과 눈 색을 제외하면 소년의 쌍둥이라고 해도 믿어 마땅치 않았다. 누가 봐도 고급 진 실크 옷을 걸친 여자가 아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지금 그게 중요하니? 살 길을 만들어 준다고 해도.. " 쯧. 혀를 차는 여자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얇은 천으로 된 겉옷을 꽉 부여잡고 있는 아이를. " 앞으로 너는 한성호다. 알겠니? 성호야. " " .. " " 대답. " " 네. 어머니.. " 1. 흰 눈이 내렸다. 성호라는 이름이 생긴지 벌써 9년 째였다. 원래 주인에게 들던 죄책감마저 희미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날도 차가운 눈이 내렸었다. 7살이던 자신에게 새 이름이 부여되고, 어디까지 자라는지 예측할 수 없던 긴 백발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던 날. 그리고 '한성호'가 되기 위해 꾸준히 새까만 색으로 염색을 해오는 데 있어 시발점이 되던 날. 마지막으로 기억도 나지 않는 누군가 지어준 본인의 이름을 완전히 버리게 된 날. 그날도 지금처럼 새하얀 눈이 내렸었다. 내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아는 사람을 가리자면 어머니와 그의 비서 정도. 머리를 자를 때도. 염색을 할 때도. 모든 건 내 스스로 했다. 비서의 도움이 조금 들어가 있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날부터 죽은 건 한성호가 아닌 나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나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 갔다. " 한성호. 아줌마가 너 데려오래. " 이제노도 모르겠지. 지금 자신과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한성호가 아니라 죽어버린 백발의 여자애라는걸. " 내려갈게.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이제노는 비서의 아들이었다. 비서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이제노였다. 의젓하고 말을 잘 들어서 어머니가 특히나 좋아했다. 그에 반해 이제노의 쌍둥이 동생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아온 입장으로 집이 넓어서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들어는 게 맞았다. 지금은 내가 따로 살아서 정확히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온 본가에서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여전히 자유로워 보였다. " 왔니? 앉거라. " "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 " 예의 없는 건 여전하구나. 앉으라고 몇 번 말해야 하지? " 쓸데없이 넓은 의자는 의자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였다. 쭈뼛대다가 어머니와 가까운 자리로 가 앉았다. 만족한 듯 차를 내려놓던 어머니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 이제 고등학교로 올라간다 들었다. " " 네.. " " 그래. 이제 방 빼야 할 때가 온 거 같구나. " " 그게 무슨.. 어머니. " " 약속했잖니. 딱 중학교까지만 지원해주겠다고. " "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 같아요. " " 집으로 들어와라.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렴. 사람 불러서 짐 빼기 전에. " " .... " " 대답해야지? " " .. 네. " 대체 어느 부모가 자식 나이도 모를까. 분명 나를 잊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다시 나를 부른 이유도 충실한 비서 덕이었을 테다. 본인의 아들들과 내 나이가 동갑이라는 건 모를 수가 없으니까. 언제까지 한성호로 살아야 하지. 언제까지? 아니, 언제까지란 말이 맞을까. 끝이 있다면 적어도 그때까지는 한성호로 살아야 한다. 그전에 내가 사라진다면 또 다른 닮은 사람을 데려오겠지. 왜냐하면 한성호는 살아있는 존재야 하니까. 쓸데없이 계단이 길었다. 힘들게 내려오면 또 다른 넓은 공간이 공허하게 반겨줬다. 자취를 한 이유가 이제서야 생각났다. 반들한 대리석 바닥이 미끄러웠다. 삐- 삐- 띠로리. 계단 앞에는 큰 철문이 있었다. 그곳이 이곳의 정문이었다. 도어록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틈 사이로 그리고 완전히. 마주친 눈은 익숙한 듯 어색한 얼굴이었다. " 아침부터 재수 없네. 들어오자마자 마주치는 꼴 하고는. " " 그럼 평생 들어오지 말지 그랬어. " 이동혁이었다. 이동혁은 이제노를 지독히도 싫어했다. 쌍둥이였지만 다른 이유는 그냥 서로 너무 달라서였다. 이제노도 지지 않고 반격했다. 나를 없는 취급하듯 계단 위로 올라가는 이동혁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취를 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하나 더 생각났다. " 성호? " 아, 방에 처박혀있어야 했다. 괜히 물 마시겠다고 내려온 게 실수였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는 왠지 서늘했다. 전부터 그는 압박감을 담은 말투로 나를 불렀다. 집안에서 가장 친절했지만 가장 바빴고. 마주치기 제일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무언가를 들킨 듯 등이 서늘해지게 했다. 어쩌면 어머니와 비서를 제외하고도. 한성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한 남자다. " 오랜만이다. " " 왜 요즘엔 안 왔어? " 어머니를 증오해서요.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작게 끄덕였다. 다행히도 끈질기게 물어보진 않았다. 다만. " 그래. 너는 항상 입을 안 열더라. " 비서의 첫째는 눈치가 빨랐다. 2. 이번에도 쌍둥이들과 같은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원래 가려던 학교를 포기하고 차 타고 30분 거리인 설하고를 지원했다. 내 의지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항상 나를 쌍둥이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했다. 감시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걱정돼서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아마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둘 다 일수도 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쌍둥이들과 다른 반으로 배정되었다. 숨 막히는 공기에서 조금이나마 멀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무난하게 1학년 생활을 보내는 듯했다. " 민형아! 너 피아노 되게 잘 치더라. " 같은 반인 건 알고 있었지만 딱히 아는 척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애매한 시선이 오고 갔다. 이민형과 눈이 마주치면 이상한 감정이 파고 들어왔다. 근데 이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민형의 선율은 아름다웠다. 한 학기에 한 번씩 있는 학교 축제 때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이민형이었다. 공식 무대에서 친 게 아니라 애들끼리 장난치다가 이민형의 실력이 드러난 거였다. 모두가 멈추고 이민형을 바라봤다. 진지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던 이민형은 끝맺음을 맺고 무던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이후부터 이민형의 피아노 실력은 소문을 타고 가끔씩 쳐달라고 부탁하는 애들도 찾아올 정도였다. 고작 피아노 실력 하나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민형의 피아노 실력은 고작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 듣고 싶으면 들어. " " 고마워. "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서 마주쳤을 때는 직접 들려줬다. 학교가 끝나고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 음악실은 어두웠고 허전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만이 그의 머리칼을 비췄다. 들려오는 멜로디가 내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마지막으로 마주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론 방학이 시작되었고, 난 아직까지 그 멜로디를 잊지 못했다. 이민형이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었음에도 금방 그리워졌다. 근데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피아노란 악기가 어색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3. " 누나! " 후드를 눌러쓰고 편의점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뒤에서 누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호칭이 나와 어울리지 않았기에 무시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남자에 놀란 티를 숨기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했다. " 아! 헐.. 죄송해요. 친누나인줄 알았어요. " 당황한 표정을 최대한 숨기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내가 여자로 보이지는 않았겠지. " 어.. 근데 남자분이세요? " " .... " 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례한 질문해서 죄송하다고 하는 남자였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비해 키는 나의 두 배 정도로 커 보였다. 키를 보고 이해했다. 저 정도 키면 헷갈릴 수 있겠다. 그런데 남자는 쉽게 가지 않았다. 나이를 물어보더니 동안이라며 놀라고. 나중엔 이름까지 물어보며 쫓아다녔다. " 그럼 형이라고 불러도 되지? " 편의점에 도착해서는 말까지 놨다. 초면에 친화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며 계산대에 올린 남자는 라면을 품에 안은 채로 쭈뼛대는 나보고 말했다. " 형. 계산! " 밖으로 나와서 물을 부어 뜨거운 라면을 식혔다. 내가 사야 하는 건 줄 알고 지갑을 꺼냈는데 뭐 하는 거냐며 내 품에서 라면을 가져갔다. 그러더니 자기가 계산을 하고선 말했다. " 아, 내 이름을 안 말했네. " " 그냥 박지성이라고 불러. " 갈 곳 잃은 팔에 다시 라면을 안겨준 박지성은 친근하게 내 맞은편에 앉았다. " 형 개산중 다녔지. " " .. 어떻게 알았어? " " 그냥 ㅋㅋ 그렇게 생겼어. " " ? " " 나 이번에 개산남고 갈 건데. " " .... " " 형은 어느 고등학교 다녀? " 설하고.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박지성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이실직고해버렸다. 아아,라며 감탄사를 내뱉은 박지성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누나가 빨리 오라네. 나 먼저 갈게. 다음에 또 봐 형! " 속사포로 말을 내뱉은 박지성은 겉옷을 챙기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다음에 또 봐? 그리고 그 말의 의미는 얼마 안 가서 깨달았다. 그로부터 3개월 정도가 지난 입학식이자 개학식이었다. 2학년 줄에서도 1학년 줄에 서 있는 눈에 띄는 피지컬은 숨겨지지 않았다. " 성호 형. 안녕! " 너 개산 남고 간다며. 사랑이라고 믿어왔는데 믿음에 부응하지 못했다. 왜 우리는 서로가 사랑이라고 생각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