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층, 첫 사랑
7층 비상계단에는 불편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예상치도 못한 선배의 등장에 심장이 툭 하고 떨어졌다. 태형이도 약간은 놀랐는지 할 말을 잃은 표정이다.
선배는 이 상황의 불청객이라는 걸 모르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선배가 다가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멀어지며 태형이의 손목을 잡아버렸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태형이는 그런 내 손을 고쳐 잡곤 다가오는 선배를 보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김탄소? 탄소야 괜찮아?”
“잠시만 나가주세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태형이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딱딱하게 굳은 말투에 선배는 그제야 고갤 돌려 태형이를 쳐다보았다. 위험했다.
이러다 선배를 한 대칠 것 같은 느낌에 태형이의 손을 꼭 쥐었다. 제발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태형이의 눈이 차가웠다. 태형이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태형이 옆에 서 있는 내가 무서울 정도로.
“둘이 무슨 일 있어요?”
“이 친구랑 둘이서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잠깐 나가주시죠”
당황한 선배의 얼굴이 날 향했다. 궁금한 게 많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내 표정을 보더니 내 어깰 잡고 내 귀에 태형이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말해줘”
나에게 그 말 한 마딜 남기고 비상계단을 나가는 선배의 뒷모습에 괜히 미안해졌다. 선배가 잘못한 거 없는 거 다 알지만 그래도 나 요즘 힘들어요. 선배 때문에.
그런 선배의 행동에 태형이는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정말 화난 듯 날 쳐다보는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손도 뜨겁고 내 손을 잡고 있는 힘도 너무 세다.
태형이는 한참 할 말을 잃은 듯 날 쳐다보더니 계단에 주저앉아 혼자 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었다. 차마 나에게 화를 내진 못하겠는데 내가 선배 때문에 울어서 화는 나고. 태형아 미안해.
그렇게 한참을 둘이서 멍하니 앉아있는데 태형이의 무거운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왜 나한테 거짓말해”
거짓말? 맞아 태형아. 나 너한테 거짓말했어. 미안해 근데 아무리 너라도 이런 내 마음 들키기 싫었어. 진짜 쪽팔리잖아. 몇 년 전 옛사랑 못 잊어서 쩔쩔 매는 거 그런 거 들키기 싫다고.
바보 같잖아. 그런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태형이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혼자 화를 삭이는 모습에 내가 다 속상했다. 나 때문에 안 그래도 바쁜 애가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역시 그 때 마음속으로 선배와 룸메이트에게 치이던 그 날 태형이한테 선배얘길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 때도 얼마나 노발대발 하던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때도 태형이 말리느라 혼났는데.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 태형이 옆에 앉아 태형이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태형아.. 미안해”
“......맨날 뭐가 미안해”
“이런 모습이나 보여주고.. 이제 안 울게 정말로!”
애써 밝은 웃음을 지으며 태형이에게 말했다. 눈물은 멈춘 지 오래지만 눈물 자국이 얼굴에 남아 웃기가 힘들었다. 태형이는 그런 날 애처롭게 보더니 날 일으켜 세웠다.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응”
회사 밖을 나와 음식점으로 향하는 데 어색하다. 태형이랑 이렇게 어색한 적은 친구가 된 후로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둘 다 말이 없다.
아무 말없이 묵묵히 앞만 보고 걷는 태형이의 모습이 어색하다. 그렇게 활발하고 귀여운 친군데 나 때문에 화가 나서 말도 안 하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해졌다.
결국 아무 말 없이 음식점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누군가 뒤에서 우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정국이다. 바쁘다더니 이제 출근하는 구나.
퉁퉁 부은 눈을 망각하고 정국이를 반겼다. 태형이도 겨우 웃으며 정국이게 말을 걸었다.
“정국아 너도 밥 먹으러 왔어?”
“응 먼저 먹고 왔는데 이상하게 배가 고프네”
“같이 먹고 들어가요”
“그래도 괜찮아요?”
“당연하지”
정국이의 등장으로 그나마 분위기가 좀 나아졌다. 안 그랬으면 태형이랑 엄청 어색하게 밥을 먹고 방송국으로 돌아갔겠지. 그건 나도 불편하니까.
국이는 이번 방송도 기대된다며 보는 사람도 기분 좋아지는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방송국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참 다행이다.
태형이도 거의 말은 안 했지만 화는 많이 풀린 듯 보였다. 적어도 방금 전보단.
방송국 7층 휴게실에 모여 앉아 음료를 마시며 사전 대기하고 있는데 호석씨와 한 남성분이 우리가 있는 휴게실에 들어왔다. 다들 인사를 하는데 호석씨 옆의 남자분은 아.. 기억났다.
그 때 선배 옆에 있던 디제이님이다.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김남준이라고 젊은 문예 작가인데 시로 등단해서 방송도 하고 토크콘서트도 하고.
솔직하고 지적인 사람이라고 정평이 나있는 분이라 젊은 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네. 키도 크고 잘생겼네.
아마 꿀FM 옆옆 스튜디오에서 ‘문제적 라디오’를 진행하는 분으로 알고 있다. 석진선배와 함께. 나랑 큰 인연이 있는 사람은 아닌데 석진선배가 생각나 괜히 불편해졌다.
"우리 식구들 다 여기있었네"
“안녕하세요”
“혹시 김남준 작가님이세요?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정국이도 역시나 김남준 작가의 팬인지 싱글벙글이다. 귀엽네. 정엔지님도 활기찬 모습이다. 꿀FM 식구들 중 나랑 태형이 빼곤 오늘 다 컨디션 최고다. 태형이에게 괜히 또 미안해지네.
그렇게 나만 불편하고 어색한 만남이 끝나고 방송을 시작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지민씨는 미리 와 대본을 읽고 있었고 피디님은 큐시트를 정리하고 계셨다.
작가들과 엔지니어, 디제이가 한꺼번에 밀어 닥치자 피디님은 왜 이렇게 떼거리로 오냐며 장난을 쳤다. 태형이도 방송은 제대로 해야 하니까 겨우 겨우 웃으며 지민씨와 같이 대본을 읽고 있고
정국이랑 난 첫방때보단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탄소씨, 정국씨 오늘 대본 재밌더라 애썼어요"
"고맙습니다"
피디님의 칭찬에 금새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 방송하는 동안은 잊자. 다 잊고 열심히 하자. 제발.
오늘도 어김없이 밤 10시 스튜디오 ON AIR에 불이 들어오고 방송이 시작되었다.
디제이가 태형이와 지민씨로 바뀌고 난 후 방송이 예전보다 더 활기찬 느낌이다. 목소리도 크고 재밌는 친구들이라 그런지 평범한 사연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고
청취자가 부끄러워하면 긴장도 잘 풀어준다. 듣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느끼는 지 청취자 게시판엔 둘의 칭찬으로 가득하다. 다행이야. 피디님을 슬쩍 쳐다보니 여전히 뒷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청취자 토크 코너 주제는! 첫사랑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의 아련한 첫사랑 사연을 저희에게보내주시면 추첨을 통해 소정의 상품을 제공합니다!”
“전화 연결의 기회도 있으니 놓치지 마세요”
첫사랑? 아 맞다. 첫사랑이 주제였지. 이것 참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하필 선배를 그런 식으로 마주친 날 라디오 주제가 첫사랑이라니 우습다.
역시나 머릿속에는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고 만감이 교차했다. 선배는 지금 옆옆 스튜디오에서 새벽 라디오를 준비하고 있겠지. 선배를 떠올리고 있는 이런 내가 짜증나고 화가 났다.
괜히 라디오를 듣기 싫어졌다.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라디오를 피해 잠깐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그래 십분만 나가있자. 7층 복도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휴게실 너머 큰 창가가 있는데 그곳에 기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밖 도시의 야경은 멋졌다. 삭막하지만. 늦은 밤인데 불빛들이 환하게 거릴 밝히고 있고 차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렇게 멍하니 생각을 비우고 있는데 누군가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국인가 싶어 아차하고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고갤 돌려보니 날 부른 사람은 정국이가 아니었다.
우습게도 짜증나게도 선배가 서있었다. 늦은 오후에 나에게 속삭였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 선배 궁금한 게 많겠지. 최대한 담담한 척 선배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실패.
시선을 선배 목에 걸린 사원증으로 떨어트리는 날 선배는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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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사랑 |
〈!--StartFragment--> 김남준 민윤기 봄 현지 늉기 노래 들레 디즈니 짱구 브이 꾸울 윤아얌 하늘 꿀만두 예워아이니 단거 카누 알라 민트 초딩입맛 양념 애기무당 작가님1호팬 꿀귀 모즈 가온 태태야 명언
빠진 암호닉은 꼭 알려주세요 늘 감사합니다! 신청 받아요! 댓글 하나하나 잘 읽고 있어요 얼마나 이쁘게들 쓰시는지 제가 다 뿌듯하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