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하늘, 긴 생머리
키 큰 남자 두명이 우리가 서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날 알아보면 어떡하지.. 먼저 아는 척 해버릴까? 그러기엔 난 너무나도 소심한 찌질이였기에
태형이의 손목을 꼭 붙잡고 숨을 헙 하고 들이마셨다. 태형이도 이런 나를 눈치 챈건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쥐었다.
고마웠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민피디, 정엔지 이 시간에 어디가?”
“선배는 이제 녹음 마쳤어요?”
“응, 남준이랑 오랜만에 같이 술 마시려고”
“우리도 술 먹으러 가요. 첫방했거든. 회식 가려던 참이에요”
“아 맞다 꿀fm 맡았다고 했지 늦었지만 축하해”
“고마워요 남준씨”
선배? 그렇다 석진선배의 목에 걸려있는 사원증엔 피디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적혀있었다. 여기 피디구나.. 자주 마주칠 거 같은 예감이 나를 덮쳐왔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사실 석진선배가 대학 시절 첫 사랑이기 때문이다. 비록 슬픈 짝사랑으로 끝났지만. 생각만 해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들킬까 덜덜 떨었던 조심스러운 사랑이었다.
대학교 1학년 새내기의 일 년을 통째로 바쳤던 사랑이었다. 동아리 선배였던 그는 나보다 3살 많았지만 유학을 갔다 온 탓에 학교를 늦게 입학해 선배는 그 때 3학년이었다. 곧 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선배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누구라도 사랑할 만큼 멋진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겠지만. 선배의 번호를 처음 알게 된 날 아직도 생각난다. 침대에서 쿵쿵 뛰는 바람에 룸메이트한테 욕 얻어먹고.
그래도 좋다고 실실 웃던 그 때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결국 나는 여름 방학이 끝나고 난 후 입대를 앞둔 선배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선배와 약속을 잡았었다.
왠지 입대 후엔 선배를 다신 못 볼 거 같아서. 그렇게 한 여름 밤 선배를 만나기 위해 떨리는 심장을 잡고 선배에게 다가가기 까지 열 발자국도 안 남았을 때 보고 말았다.
나랑 제일 친했던 룸메이트와 선배가 키스하는 걸. 선배의 짧은 머리칼이 내 친구의 긴 머리와 함께 흩날리던 그 날 밤 나는 무너진 가슴을 안고 돌아가야 했고 그 후 선배를 다신 보지 못했다.
내가 피한 것도 있지만. 그 친구의 긴 머리와 선배의 짧은 머리가 날 한동안 괴롭혔고 결국 나는 나의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내 머릴 보면 그 날이 떠올라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이젠 다 잊었다 믿고 있던 그 때와는 다른 긴 머리의 내가 선배를 다시 만났다. 이렇게 좋은 날에. 선배는 그대로다 외모도 다정한 말투도 다 그대로다. 나는 아닌데.
선배가 알고 있던 긴 생머리의 김탄소는 오래전에 없어요. 근데 이상해요. 다시 그 때의 내가 살아나는 것 같아..
“..근데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제기랄. 나도 모르게 짧은 욕이 나왔다. 물론 소리로 내뱉은 건 아니지만. 선배가 날 기억하다니 그 사실에 심장이 정말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오늘은 아냐 오늘만큼은 모른 척하자.
"아닐껄요? 이번에 들어온 신입 작가인데“
피디님은 괜히 옆에 있는 날 쿡 찌르며 선배에게 말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피디님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정말 고마웠다.
태형이는 아까부터 말이 없다. 내가 힘들어 했던 거 유일하게 아는 애니까. 이럴 때보면 태형이는 눈치가 참 빠르다. 그래서 더 이쁜 친구.
“그런가.. 저기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잘 모르겠는데요”
“피디님 빨리 가요 배고파요”
“아 그럼 선배 다음에 한 번 봬요”
“그래 회식 잘해”
겨우 방송국에서 빠져나왔다. 태형이는 아까 전부터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있다. 태형이의 따뜻한 온기가 그제야 느껴졌다. 고마워서 잡고 있는 손이 따뜻해서 긴장이 풀려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피디님과 호석씨, 정국이랑 지민씨는 즐겁게 얘기 중이고. 마치 태형이랑 나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자꾸만 시야가 흐려지는 탓에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태형이는 그런 내가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다뤄주었다. 중간 중간 작게 속삭여주면서.
“반경 5m앞에 키 큰 나무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슈가포차 도착했습니다.”
내 귀에 속삭여주는 목소리가 좋고 귀가 간지럽고 바람은 살랑살랑 부는 밤이었다.
“오늘 다들 정말 잘 했어요 내가 다 고맙네요”
“피디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작가들 귀엽더라. 민피디, 아까 작가들 긴장하는 거 봤어?”
“정엔지 방송에 집중하셔야지”
“오늘 사연들도 다 웃기고 좋았어요”
“그러게요 마침 재밌는 이야기들만 나오고 첫방송인데 느낌이 좋아요”
“근데 우리 작가 아까부터 말이 없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모두가 피디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제히 날 쳐다보았다. 선배의 여파로 인해 멍하니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던 나는 정신이 반짝 들었다.
내 옆에 앉은 피디님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날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운 탓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아뇨! 저 완전 멀쩡해요! 저.. 그게 배고파서! 배고파서 그래요”
“맞아요 피디님 탄소가 배고프면 말을 안해요”
“잘 먹여야겠네 우리 작가”
“탄소씨 몸은 약해보이는데 많이 먹는 편인가봐?”
“탄소씨 밑반찬이라도 좀 먹어요”
“배 많이 고팠어?”
“다들 고마워요! 하하..”
그렇게 우물적 넘어가고 드디어 음식이 나오자 다들 환호를 지르며 술을 오픈했다. 간단하게 마신다고 했는 거 같은데 5병이나 시키다니.. 물론 6명이긴 하지만
“자, 다들 건배합시다. 뭘로 건배하지?”
“탄소씨 위장을 위하여!”
“정엔지님!!”
“농담이에요 지민씨는 뭐하고 싶어?”
“탄소씨 위장을 위하여!”
“그래 그걸로 합시다 김작가 뭐해요 빨리 잔 들고 건배해요”
“그게 뭐에요..”
“하나 둘 셋!”
“탄소씨 위장을 위하여!”
그렇게 날 실컷 놀려먹으며 첫 건배를 했다. 오늘따라 술이 쓰다 엄청시리 쓰다. 원래도 잘 못마시는 탓에 벌써 약간 어질어질하다. 태형이도 이젠 지민씨랑 같이 날 놀리느라 혈안이다.
하여튼 둘이 장난꾸러기 인건 알아 줘야해. 그 둘을 살짝 째려보며 음식을 먹고 있는데 정국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탄소야 오늘 멘트 좋았어 진심으로”
“고마워 너도 멘트 귀엽더라 청취자 코너 때 덕분에 좀 웃었어”
“많이 피곤해?”
“응? 아냐 괜찮아 원래 체력이 별로 안 좋거든”
내 말을 끝나자마자 정국은 입고 있던 가디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뭐지?
“이거 내가 먹는 비타민인데 좀 먹어봐 술 먹고 먹어도 괜찮은 거야”
“에이 이런 거 안 줘도 진짜 괜찮은데..”
“스텝이 쳐지면 디제이도 쳐지고 방송도 쳐집니다. 줄 때 드세요”
어디선가 많이 듣던 잔소리인데.. 옆에 앉아서 태형이와 지민씨를 보며 웃고 있는 피디님이 생각나 괜히 웃음이 났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근데 너 방금 존댓말 했지?”
“치사하게 비타민도 줬는데”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즐기다보니 어느 새 새벽 2시가 훌쩍 넘었다. 분명 방송국에서 나올 땐 12시 20분쯤 됐었는데.. 시간 참 빠르네 역시 좋은 사람들과 같이 있어서 그런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다. 술이 들어간 탓인지 선배 생각도 좀 덜 나는 것 같고. 근데 나빼고 다들 술이 센가? 아무도 안 취한 것 같다 나만 어질어질한건가
“이제 해산합시다 오늘 즐거웠어요”
“다들 이제 푹 쉬어야 방송하지 빨리 갑시다”
“고생하셨어요”
“다들 잘 들어가요!”
태형이와 지민씨가 스케줄 때문에 택시를 잡아서 먼저 가고 정국이랑 호석씨도 택시를 잡고 먼저 떠났다. 남은 건 나랑 피디님. 어차피 집이 같아서 자연스레 둘이서 걸어가는 중이다.
밤바람이 차갑지 않고 시원하다. 약간 술이 깨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한 참을 둘이서 말없이 걷다가 문득 할 말이 떠올랐는지 피디님이 정적을 깼다.
한참 말을 안한 탓인지 약간은 잠긴 목소리로. 괜히 설레네.
“....탄소씨 아까 진짜 배고파서 그랬어요?”
“네?”
“기운 없었잖아 아까 전에”
“정말 배고파서 그랬어요”
피디님 미안해요. 선배때문이라고 말 못해서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그치만 절대 말 못해요. 앞으로도 안할꺼고.
“그럼 다행이고”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아 나도 입을 다물었다. 어느 새 집 앞에 도착했다. 빨리 쉬어야지 오늘 너무 감정소모를 크게 했어. 몸도 피곤하고. 아파트 안에 다다르자 피디님은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계단으로 가자고 하면 나 때릴 꺼에요?”
귀여운 질문에 웃음이 나왔다. 때리기는 뭘. 내가 언제 피디님을 때렸다고.
“아뇨”
“이제 진짜 잘가요 오늘 고생했어요”
“피디님도 고생하셨어요 쉬세요”
“내일 5시에 미팅있는 거 알죠? 늦지마요”
“네 들어가세요!”
그렇게 집에 들어가 씻지도 않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피곤해.. 선배 생각이 갑자기 물밀듯이 날 덮쳐왔다. 결국 눈물을 흘려버렸다. 혼자 있으니 생각이 많이 났다.
나도 모르게 보고싶었던 걸까 선배를 못 잊었던 걸까.. 침대에 누워 청승맞게 울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두 통이 왔네 누구지?
[탄소야 잘 들어갔지? 오늘 많이 힘들었겠네 난 다 아니까. 뭐 어쨌든 난 무조건 니 편이니까 걱정말고. 잘 자! 내 꿈꿔]
태형이의 문자다. 늘 태형이의 문자를 읽으면 어디선가 태형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마워 태형아. 귀여운 친구의 문자 한 통,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왠지 피디님일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간지러웠다. 역시나.
[우리 작가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아프지 말고 피곤하면 언제든 말해줘요 도와줄게. 푹 쉬어요]
피디님 고마워요 늘 이렇게 챙겨주고 문자도 맨날 먼저 보내주고. 괜히 설레는 마음에 울다 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좀 덜 울었네. 고마워요 사랑스런 남자둘이.
그렇게 문자를 확인하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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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민윤기 봄 현지 늉기 노래 들레 디즈니 짱구 브이 꾸울 윤아얌 하늘 꿀만두 예워아이니 단거 카누 알라 민트 초딩입맛 양념 애기무당 꿀귀 모즈 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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